민선(閔善)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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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민선 |
한글표제 | 민선 |
한자표제 | 閔善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상지(尙之) |
호 | 우천(牛川)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39년(중종34) |
사망 | 1608년(광해군즉위) 10월 18일 |
본관 | 여흥(驪興)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민예달(閔禮達) |
조부 | 민구(閔球) |
부 | 민세량(閔世良) |
모_외조 |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인원(沈引源)의 딸 |
처_장인 | 경주이씨(慶州李氏): 이몽량(李夢亮)의 딸, 이항복(李恒福)의 누이 →(자녀)1녀 |
자녀 | (1녀)박동량(朴東亮)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민선(閔善) |
총론
[1539년(중종34)∼1608년(광해군즉위) = 70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상지(尙之), 호는 우천(牛川)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민세량(閔世良)이고,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사과(司果)심인원(沈引源)의 딸이다. 율곡(栗谷)이이(李珥)와 평생 친구이고,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의 매부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1)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유생(儒生)으로서 학업을 닦았는데, 이때 율곡이이와 교유하면서 학문적 도움을 받았다. 1582년(선조1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4세였다. 늦게 관직에 진출하였는데, 반대파가 나이가 많다고 공격하여,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처음에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 주서(注書)로 승진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공조 · 형조 · 호조 · 예조의 낭관(郎官)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22)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날 때 대관(臺官)으로 있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연루된 최영경(崔永慶)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북인(北人)정인홍(鄭仁弘)은 동문수학한 최영경의 죽음이 억울하다며 사실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쓰고, 또 이 사건을 국문(鞫問)한 정철(鄭澈) 등의 서인(西人)을 동인(東人)들이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최영경은 신원(伸寃)되었고, 좌의정정철은 쫓겨났다. 이때 민선(閔善)의 처남 이항복은 좌승지로 있으면서 정철을 찾아가 사건의 수습을 논의하다가, 동인의 공격을 받았다. 민선도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서 수안군수(遂安郡守)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이항복은 이조 판서이원익(李元翼)의 추천으로 도승지로 영전하였고, 민선도 1591년(선조24)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이어 외직으로 나가서 숙천부사(肅川府使) · 서흥부사(瑞興府使)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장수를 접대하고,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미를 힘써 조달하였다.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고, 1594년(선조27)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사옹원(司饔院)정(正)으로 있다가, 병을 핑계로 먼저 도성을 빠져나갔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01년(선조34)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좌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1605년(선조38)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그때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고, 나이가 많아서 지방의 수령관에도 합당치 못하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자 벼슬을 단념하고, 외부 출입을 끊은 채 7년 동안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병상에 누운 지 넉 달 만인 1608년(광해군즉위) 10월 18일에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70세였다.
성품과 일화
민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관대하였고,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으므로 겉을 꾸미지 않았다. 성실하고 소박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관직에 임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는 합리적 방도를 취하였고, 위세로써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지 않았다.
민선은 열다섯 살에 도승지이몽량(李夢亮)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 이씨는 이항복의 동복 누나였다. 그는 이몽량에게 수학하였는데, 40세가 넘어서 과거에 합격할 때까지 처갓집 가까이 살면서 처갓집 일을 돌보았고, 부인 이씨도 친정 일을 도왔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이항복에게 민선 부부는 부모와 다름이 없었고, 아들이 없는 그들도 이항복을 친자식처럼 길렀다. 민선이 사망하였을 때, 오래도록 해로한 것은 여자로서 영화라며 이항복이 누이를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항복은 민선보다 17세나 어렸지만, 먼저 과거에 급제하여 민선보다는 벼슬이 앞섰고 선조의 신임도 받았기 때문에, 민선의 벼슬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묘소와 비문
그의 처남 영의정이항복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의정부 우참찬이몽량의 딸이고, 백사이항복의 셋째 누나이다. 외동딸은 금계군(錦溪君)박동량(朴東亮)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금양위(錦陽尉)박미(朴瀰)는 선조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재사초(寄齋史草)』
- 『백사집(白沙集)』
- 『상촌집(象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소재집(穌齋集)』
- 『약포유고(藥圃遺稿)』
- 『은봉전서(隱峯全書)』
- 『낙전당집(樂全堂集)』
- 『노서유고(魯西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