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지보(奎章지寶)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규장지보 |
한글표제 | 규장지보 |
한자표제 | 奎章지寶 |
상위어 | 규장(奎章), 규장각(奎章閣), 내사(內賜), 내사본(內賜本), 반사(頒賜), 반사본(頒賜本), 반사인(頒賜印), 어보(御寶) |
관련어 | 동문지보(同文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 선황단보(宣貺端輔), 흠문지보(欽文之寶), 흠문지새(欽文之璽)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정조~순종 |
집필자 | 성인근 |
용도 | 서적반사 |
재질 | 동도금(銅鍍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규장지보(奎章지寶) |
조선 후기 규장각 설치 이후 내사본(內賜本) 서적이나 반사본(頒賜本) 어필에 사용한 어보.
개설
규장지보(奎章之寶)는 규장각에서 반사할 때 사용한 어보(御寶)이다. 규장각이나 규장지보의 ‘규장(奎章)’은 본래 어제(御製)나 어필(御筆)을 의미한다. 이 어보는 방(方) 12.7㎝와 9.5㎝의 두 종류가 있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소장된 내사본의 권수(卷首)에 찍혀 있는 어보는 대부분 9.5㎝이다.
반사본에 사용하는 어보는 일반적으로 책의 본문 제1면 오른쪽 위의 변란 안 구석에 안보(安寶)하는데 간혹 예외가 있다. 1526년(중종 21) 5월에 반사된 『역대군신도상(歷代君臣圖像)』의 경우 도상을 피하기 위해 내사기 위에 안보한 사례가 있고, 안보해야 할 위치에 어휘(御諱)나 국왕과 관련한 ‘어제’·‘왕왈(王曰)’, 또는 공자를 뜻하는 ‘부자(夫子)’ 등이 있으면 이를 피하는 관례가 있었다.
이러한 사례로 1866년(고종 3) 간행된 장서각 소장 『황명조령(皇明詔令)』이 있다. 이 책은 명(明)태조에서 세종까지 12대의 조령집이다. 총 10책으로 구성되었고, 1책의 1면에는 반사본임을 확인할 수 있는 흠문지보(欽文之寶)와 봉모당(奉謨堂)에 소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 봉모당인(奉謨堂印)이 찍혀 있다. 어보는 변란의 안쪽 구석이 바른 위치이지만 황제를 나타내는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있어 ‘제(帝)’자의 아래에 안보하였다.
연원 및 변천
서적의 반사는 세종대부터 줄곧 승정원에서 담당하였다. 반사본에 사용하는 어보는 세종대에 만든 선사지기(宣賜之記)가 가장 이른 사례에 해당하며, 18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변화가 생겼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고 규장각이 설치되면서 그 기능이 옮겨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의 각신(閣臣)이 맡게 됨에 따라 어보도 선사지기 위주에서 규장지보 중심으로 바뀌었다. 서적의 반사에는 이 두 어보 외에도 동문지보(同文之寶)·선황단보(宣貺端輔)·흠문지보 등 다양한 어보가 사용되었다.
18~19세기 반사본에는 주로 규장지보를 사용하였다. 1779년(정조 3) 1월부터 1883년(고종 20) 2월까지의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에는 서적 반사를 위해 규장지보를 내어 줄 것을 요청한 계(啓)가 150여 건에 이른다. 한편 동문지보에 대한 기록은 2건에 그치고, 선사지기나 흠문지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서적을 반사할 때 흠문지보를 사용한 기록이 소수 보인다.
규장지보가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는 1778년(정조 2)으로 추정된다. 당시 반사된 『속명의록(續明義錄)』의 반사 담당자는 규장각대교였으므로 사용한 인장도 규장지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는 규장지보가 찍힌 내사본으로, 1782년(정조 6) 11월에 반사된 「유입정종친문무백관윤음(諭入庭宗親文武百官綸音)」이 소장되어 있는데, 반사자는 규장각 직각김○○이고 규장지보가 찍혀 있다.
또 하나의 사례로 충재(冲齋)권벌(權橃)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근사록(近思錄)』이 있다. 이 책의 표지 안쪽 면에는 1746년(영조 22) 남태온(南泰溫)이 영조의 뜻을 받들어 쓴 내사기가 있고, 권수에 1794년(정조 18) 서영보(徐榮輔)가 쓴 「어제충정공권벌수진근사록서(御製忠定公權橃袖珍近思錄序)」가 있다. 규장지보는 서영보가 쓴 서문의 둘째 행에서부터 안보하였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반사된 대부분의 서적에 이 어보가 찍혀 있다.
고종대에는 동문지보와 흠문지보, 대한제국에서는 흠문지새(欽文之璽)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기존의 어보가 모두 직뉴(直鈕)나 귀뉴(龜鈕)에 보문(寶文)이 ‘기(記)’나 ‘보(寶)’로 되어 있는 데 반해 흠문지새만 용뉴(龍鈕)로 ‘새(璽)’ 자를 사용해 황제국의 위상을 반영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강순애, 「규장각의 도서반사에 관한 연구」, 『계간 서지학보』창간호, 1990.
- 백린, 「내사기와 선사지기에 대하여」, 『국회도서관보』8, 1969.
- 안병희, 「내사본의 한 연구」, 『장서각』8, 2002.
- 윤병태, 「내사기와 선사지기」, 『숭의여자전문학교 도서관학연구지』8, 1983.
- 이재준, 「장서각 소장 내사본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 中村榮孝, 「朝鮮官板の內賜記と國王印にいいて」, 『韓國學報』25, 196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