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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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3년(명종 8)∼1592년(선조 25) = 40세]. 조선 중기 명종의 세자빈(世子嬪).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세자빈 덕빈(德嬪) 윤씨(尹氏)인데, 시호가 공회빈(恭懷嬪)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영월 군수(寧越郡守)윤징(尹徵)이고 조부는 공조 판서(判書)윤사익(尹思翼)이다. 아버지는 공조 참판(參判)윤옥(尹玉)이고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상의원(尙衣院)직장(直長)윤봉종(尹奉宗)의 딸이다. 시아버지는 조선 13대 임금 명종(明宗)이고, 시어머니는 인순 왕후(仁順王后), 시할머니는 중조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직장윤백순(尹百順)과 내수사(內需司)별좌(別坐)윤백상(尹百祥)의 누이다. 택당(澤堂)이식(李植)의 이모이다.

세자빈의 기구한 일생

1553년(명종 8) 그녀는 남양부사윤옥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옥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신임을 받았고, 할아버지 윤사익(尹思翼)은 공조 판서(工曹判書)로서 소윤(少尹)의 강경파에 속하였다. 그러나 강경파 영수 영의정이기(李芑)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 배경이 없어져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고 윤옥도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좌천되었는데, 그 무렵에 덕빈 윤씨가 태어났다. 그녀는 유모에게 맡겨져서 양육되었다. 그 유모가 자기 남편과 헤어져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바람에 나중에 그녀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을 때 유모의 남편, 즉 ‘유부(乳父)’의 자리를 놓고 유모의 두 남편이 서로 싸웠다. 아버지 윤옥이 판결하기를, “전 남편이 다른 아내에게 장가든 지 이미 오래되었다.” 하고, 현재 유모와 같이 사는 남편을 ‘유부(乳父)’로 정하였다. 그녀는 1남 3녀 중에서 가운데로 태어나서 오빠의 사랑을 받고, 언니와 동생과 같이 자랐다. 특히 그녀보다 9세가 많은 서출 오빠 윤백상이 가장 잘 보살펴 주었다.

명종이 20세 때 관례(冠禮)를 치루고 친정(親政)하면서부터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이 전횡하는 것을 보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그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 이량(李樑)을 중용하였다. 이량은 명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윤원형의 세력과 대항할 만한 인물들을 포섭하였는데, 그녀의 고모부 대사간(大司諫)이중경(李重慶)이 이량과 손을 잡으면서, 그녀의 아버지 윤옥도 이량 일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1551년(명종 6) 순회세자(順懷世子)이부(李暊)는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沈氏) 사이에 외아들로서 태어나 1557년(명종 12) 나이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때마다 문정대비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귀양 간 사림파의 인재들을 석방하여, 모두가 세자의 앞날을 축복하고 세자에게 충성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세자는 타고날 때부터 몸이 아주 약하였다. 1561년(명종 16) 순회세자가 나이 10여 세가 되자, 할머니 문정대비는 빨리 후사(後嗣)를 보고 싶어 세자의 혼인을 서둘렀다. 대비의 동생 윤원형은 자기 사위의 고모부 참봉(參奉)황대임(黃大任)의 딸을 세자빈으로 점지하고, 은밀히 누님 문정대비에게 고해서 세자빈으로 결정하였다. 실제로는 황대임의 처형이자 중조의 서출 제 4왕자인 영양군(永陽君)이거(李岠)의 아내 안씨(安氏)가 윤원형의 첩 난정(蘭貞)에게 부탁하였기 때문에 성사된 것이다. 명종과 인순왕후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머니 문정대비의 분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씨가 몸이 약해서 1년이 넘도록 혼례를 치르지 못하자, 그해 5월 이량 일파가 윤원형을 공격하고, 세자빈 황씨를 파혼시켰다.

당시 이량 일파에 가담한 예조 참의이중경이 처남 윤옥의 딸을 세자빈으로 추천하였는데, 윤옥이 좌부승지로 있을 때 문정대비의 신임을 많이 받았으므로 대비의 허락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순왕후가 외삼촌 이량의 말을 듣고, 윤옥의 집에 매파를 보내어 그 둘째딸이 세자의 짝으로 적당한지를 자세히 알아보았다. 인순왕후가 그녀를 적극 추천하여, 명종이 문정대비에게 윤옥의 딸을 세자빈으로 천거하자, 대비가 반색하면서 그 자리에서 찬성하여, 그녀가 황씨 대신에 세자빈으로 확정되었다. 그해 7월 아버지 윤옥은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어, 조정의 요직으로 되돌아왔다. 좌승지 윤옥은 다음의 왕위를 계승할 왕세자의 혼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려고 무리하게 준비하다가, 중외(中外)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1561년(명종 16) 8월 정친례(定親禮)를 행하고, 그해 9월 납징례(納徵禮)를 치르고, 그해 10월 21일 명종이 세자빈 책봉례(冊封禮)를 거행하고,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1562년(명종 17) 명종은 그녀를 덕빈(德嬪)으로 책봉하였는데, 그때 덕빈은 나이가 겨우 10세였다. 순회세자는 명종의 하나뿐인 혈육이었는데, 항상 몸이 약하여 병중에 있었다. 1563년(명종 18) 9월 27일 왕세자가 후사도 잇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나이가 겨우 13세였다. 그때 덕빈 윤씨는 겨우 11세에 불과하였는데, 이때부터 청상과부가 되어 왕세자가 살던 동궁(東宮)을 지키면서 혼자 살았다. 그 이듬해 1565년(명종 20) 시할머니 문정왕후가 돌아갔고, 또 그 이듬해 1567(명종 22) 시아버지 명종이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가 갑자기 죽자, 슬픔에 잠겨서 오랫동안 왕세자를 세우려고 하지 아니하다가, 정국이 점차 혼란스러워지자, 마지못해서 중종의 서출 제 7왕자 덕흥군(德興君)의 셋째아들 이연(李㫟)을 세자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선조이다. 1567년 6월 선조가 나이 16세로 즉위하자, 명종의 왕후 인순대비(仁順大妃)가 4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덕빈 윤씨는 순회세자의 어머니 인순대비를 정성껏 모시고 동궁(東宮)에서 살았다. 선조는 인순대비와 덕빈 윤씨에게 아들로서 효성을 다하여 선왕(先王)의 왕비와 세자빈으로 섬겼다. 1575년(선조 8) 인순왕후가 4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는데, 유명(遺命)으로 덕빈 윤씨에게 궁중에서 나가지 말고 동궁을 지키도록 부탁하였다. 선조가 처음에 세자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덕빈 윤씨가 그대로 동궁에 거처할 수 있었다.선조가 정성을 다해 덕빈 윤씨를 대우하였는데, 덕빈 윤씨는 견문(見聞)이 많고 품행이 뛰어나서 여러 비빈(妃嬪)들이 모두 그녀를 따르고 궁중의 법도를 배웠다. 덕빈 윤씨의 성품은 지극히 곧고 깨끗하였다. 순회세자의 상사를 당한 뒤로부터 종신토록 언제나 상중에 있는 것처럼 근신하였으며, 친척들의 궁중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회세자의 영혼을 기원하는 뜻에서 불공(佛供)을 자주 드렸는데, 선조가 가엾게 여겨서 금지하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3월 3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직전에 덕빈 윤씨는 병에 걸려서 40세의 나이로 창경궁(昌慶宮)통명전(通明殿)에서 돌아갔는데, 그때 광해군(光海君)이 세자가 되었으므로 동궁을 비워주고 통명전으로 옮겨서 거처하였기 때문이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참고.)

공회빈의 재궁(梓宮) 발굴

1592년(선조 25) 3월 덕빈 윤씨가 돌아가자마자 선조가 시호를 ‘공회’라고 올리고, 장차 순회세자가 묻힌 순회묘(順懷墓)에 부장(附葬)하려고 서오릉(西五陵)의 부장할 지역에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하였다. 그해 4월 갑자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군이 서울로 북상하자, 미처 공회빈(恭懷嬪)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선조가 급히 한밤중에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선조가 유도 대장(留都大將)이양원(李陽元)에게 임시로 공회빈의 재궁(梓宮)을 파묻게 하였다. 이에 빈소(殯所)를 모시고 있던 관리 몇 사람이 후원(後苑)에 임시로 매장하려 하였으나, 재궁이 너무 무거워서 옮길 수 없었다. 창황하고 바쁜 중에 유도 대장이양원은 임시로 재궁을 묻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왜구가 서울을 침공할 때 궁전에 불이 나서 대궐이 타는 바람에 궁중을 지키던 관리들도 모두 흩어져 도망하였고, 공회빈의 재궁은 빈전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서울의 난민(亂民)들이 궁중을 지키던 관리와 군인들이 도망하자, 텅 빈 궁궐로 난입해서 약탈하였는데, 덕빈의 빈궁에도 난민들이 들어와서 빈전과 재궁을 파괴하고 잡물(雜物)들을 다투어 꺼내가면서 덕빈의 시신을 그대로 내팽개쳤다.

이때 사평(司評)이충(李忠)이 신립申砬)의 충주 싸움에 참전하였다가 패배하여 후퇴하면서 텅 빈 서울로 들어왔다. 그가 창경궁을 지나다가 우연히 덕빈의 빈궁(殯宮)을 들여다보았더니, 서울의 난민들이 난입해서 빈궁의 잡물들을 다투어 가져가고, 덕빈의 수의마저 벗겨가서 시신이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므로, 너무나 참혹해서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덕빈의 시체를 거두어서 바깥으로 옮겨다가 함춘원(含春苑)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덕빈의 오빠 윤백상이 이 말을 듣고 사평이충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죽고 없어서 만날 수 없었고, 함춘원을 여기저기 파서 뒤졌으나, 덕빈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선조실록』 참고.)

1593년(선조 26) 10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덕빈의 상구(喪柩)가 있는 곳을 윤백상을 불러다가 물어보니, 윤백상의 말이 ‘전일 이충이 말한 함춘원에 시신을 묻어 놓았다는 것은 곧 중간에서 사실을 모르고 전파한 말이다. 내가 덕빈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상구가 있는 곳을 항시 염두에 두고 탐문해 보았으나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도성에 들어온 뒤에 덕빈의 노비를 찾아다니며 물어보아도 역시 아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니, 선조가 몹시 실망하여 “알았다.”고 대답하였다.(『선조실록』 참고.)

1595년(선조 28) 5월 겸 사복(兼司僕)현응민(玄應旻)이란 자가 나타나서 자기가 공회빈(恭懷嬪)을 매장한 군사라고 자칭하였으므로, 예조에서 그가 매장하였다고 주장하는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 뒤쪽에 가서 우묵하게 들어간 구덩이를 조사하였으나, 잡초에 뒤덮여서 형적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예조에서 공회빈이 묻힌 곳을 발굴해 볼 것인지 의정부 대신들에게 상의하였는데, 영의정유성룡(柳成龍) 등이 말하기를, “발굴해서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파서 확인할 때 옛날 모셨던 궁인(宮人)과 가까운 친척들을 함께 참석시키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해 6월 덕빈의 시신을 발굴하는 날 예조에서 덕빈의 오빠인 전 직장윤백순을 여주(驪州)에서 부르고, 덕빈의 서출 오빠인 사옹원(司饔院)봉사(奉事)윤백상을 사기소(沙器所)에서 불러서, 덕빈을 모시던 궁녀들과 함께 현장에 입회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응민이 임시 매장처라는 곳을 발굴하여 썩은 뼈 2개를 발견하였는데, 의관(醫官)에게 그 뼈를 살펴보게 하니, 사람의 뼈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때 예조로부터 자세한 보고를 받은 선조는 탄식하기를, “이제 이와 같다고 하니, 더욱 참혹스럽다.” 하였다.(『선조실록』 참고.)

『선조실록』의 간주(間注)를 보면. “임진년 4월에 덕빈의 재궁이 빈소에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차하면서, 창황하여 그대로 버려두고 떠났다. 그 뒤에 덕빈의 족친들이 겨우 전(殿)의 뜰에다 매장하였는데, 왜적들이 파내어 불태워버렸다. 그러므로 당시 국사를 돌보던 대신과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이 기일을 앞당겨 잘 조처하지 못한 죄를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환도(還都)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간혹 이 사실을 말하는 사람마다 오열(嗚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였다. 당시 덕빈을 모시던 궁인들이 추모하고 비통해 하면서, “덕빈이 살았을 적에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우연히 화장(火葬)을 당하였으니, 그것도 생전에 덕빈의 뜻에 부합된다.” 하였다.

순회묘(順懷廟)와 순창원(順昌園)

1601년(선조 34) 4월 선조가 예조에 전교하기를, “공회빈의 일은 차마 말할 수조차 없다. 사변(事變) 때문에 국가가 황급하여 지금까지도 신주(神主)를 모시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참통(慘痛)한 중에서도 참통한 일이다. 순회세자도 신주가 없으니, 이 양위(兩位)의 신주를 세워서 전례대로 유사(有司)가 치제하고 조처하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하다. 내가 우연히 공회빈을 생각하니, 말보다 눈물이 앞선다.” 하였으므로, 예조에서 덕빈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신주를 만들어 순회묘(順懷廟)에 양위(兩位)의 신주를 세웠다.

순회묘는 서울의 도성 안에 북쪽에 있는데, 예전 영경전(永慶殿)의 자리였다. 1601년(선조 34) 순회묘에 신주를 세우고,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를 향사하였다. 순회세자의 기신은 9월 26일이고 공회빈 윤씨의 기신은 3월 3일이다. 순회묘에는 수위관(守衛官) 2명을 두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 참고.)

1678년(숙종 4) 예관(禮官)이 아뢰기를, “명종과 인순 왕후는 벌써 조천(祧遷)되고, 능소(陵所)에 한식(寒食)에만 제사지내는데, 순회세자와 공회빈은 아직도 사시제(四時祭)와 기제(忌祭)를 거행하니, 예제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숙종이 드디어 명하여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신주를 묘소에 묻게 하고, 한식 제사만 지내게 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2 참고.)

공회빈 윤씨는 그 시신을 찾지 못하여 순회세자의 순회묘(順懷墓)에 합장하지 못하였다. 순회묘는 덕종(德宗)의 무덤인 서오릉(西五陵) 안에 경릉(敬陵)의 왼쪽 언덕에 있는데,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기신에 제향한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4 참고.) 순회묘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에 있다. 1870년(고종 7) 12월 순회묘를 순창원(順昌園)으로 바꾸고, 수봉관(守奉官) 1명과 직장 1명을 두었는데, 이도권(李道權)을 순창원 수봉관으로, 홍병균(洪秉均)을 순창원 직장으로 임명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편 참고.) 순창원은 경릉·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서오릉 안에 있는데, 지금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고종편)
  • 『일성록(日省錄),선원록(璿源錄)』
  • 『문조만록(聞詔漫錄)』
  • 『택당집(澤堂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율곡전서(栗谷全書)』
  • 『약포집(藥圃集)』
  • 『미암집(眉巖集)』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식암집(息庵集)』
  • 『하곡집(霞谷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
  • 『사서집(沙西集)』
  • 『시암집(時庵集)』
  • 『유항시집(柳巷詩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