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중진(康仲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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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9년(세조5)~1520년(중종15) = 62세]. 조선 중기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도(子鞱), 호는 죽은(竹隱)이다. 본관은 신천(信川)인데, 아버지는 창신교위(彰信校尉)강척(康愓)이다. 어머니는 문강공(文康公)김숙자(金叔滋)의 딸이고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의 누이다. 어릴 때부터 외삼촌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고, 사림파(士林派)에 속하였다.

연산군~중종 시대의 활동

1495년(연산군1) 나이 3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 형조좌랑에 전보되었다가 경상도(慶尙道) 의흥현(義興縣), 충청도(忠淸道) 영동현(永同縣) 두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때 청요직을 거치지 않고 한직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할 수 있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506년(중종1)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을 거쳐, 예빈시(禮賓寺)첨정(僉正)으로서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507년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에 임명되고, 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군기시(軍器寺), 내자시(內資寺), 봉상시(奉常寺)부정(副正)을 거쳐서, 제용감(濟用監), 군자감(軍資監), 선공감(繕工監)정(正)을 지냈다. 또 외직으로 나가서 밀양부사(密陽府使),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돌아와서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을 거쳐서, 승문원(承文院)판교(判校)를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서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

삼포왜란의 수습

1510년(중종5) 제용감 정으로 있을 때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3포(浦)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의 원군을 얻어, 4~5천명의 왜적이 제포(薺浦)와 부산포(富山浦)를 점령하였다. 대마도 경차관(對馬島敬差官)의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상우도절도사(慶尙右道節道使)유담년(柳聃年)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그해 4월에 제포(薺浦)의 웅천성(熊川城)에서 왜적과 접전을 벌였고, 7월에 특히 안골포(安骨浦)에서 왜적을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절도사유담년이 그를 군공일등(軍功一等)으로 조정에 보고하니 사간원에서 “강중진은 본래 무재(武才)가 없는데, 이렇게 된 것은 유담년의 죄입니다.” 하였다. 그가 무예를 모르는 자이므로 군공일등이 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 논란에서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 사림파와 훈구파가 대립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품과 일화

강중진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소박하고 진실하며 곧았는데, 친구를 성실하게 대하였고, 노비를 은혜로써 다루었다. 24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집에 축적해 놓은 재산이 거의 없었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대마도 경차관, 도원수종사관, 축성감동관(築城監董官)이 되었을 때 그가 세운 계획이 주도면밀하였으며, 부지런히 감독하고 경솔히 일을 추진하지 않았으므로, 큰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간혹 남의 잘못을 적발해 내는 것도 귀신과 같았으나,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지도 않았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상주 개령(開寧) 남산관리(南山官里)에 있는데, 조신(曺神)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점필재집(佔畢齋集)』
  • 『충재집(沖齋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남계집(藍溪集)』
  • 『뇌연집(雷淵集)』
  • 『송당집(松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