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계시고
목차
번계시고(樊溪詩稿)
번계시고 /樊溪詩稿 저자명 :서유구 저 ;
[출판사] 풍석문화재단, 풍석총서 :한시[漢詩] 조선 시대 문학[朝鮮時代文學]
책소개
풍석 서유구의 생애는 관직에 나아가기 전인 수학기, 27세 과거에 급제하여 초계문신에 발탁된 이래로 홍문관 부제학까지 16년간의 관료생활을 마감했던 1차 벼슬기,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임원경제지 저술의 기반을 쌓았던 방폐기, 벼슬에서 물러난 지 17년 만에 강원도 회양 부사로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된 2차 벼슬기, 완전히 벼슬에서 물러나 번계에서 여생을 보냈던 노년기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이 책은 풍석 서유구가 벼슬에서 물러나 번계에서 여생을 보내며 농학자로서 여러 가지 농법을 시험하고, 임원경제지 집필에 몰두했으며, 후학들과 어울려 시회를 열고 함께 시를 짓던 노년의 기록을 시로 남긴 책이다. 농학자로서의 풍모 서유구는 경화사족으로서 매우 풍족한 성장 과장을 보냈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였다. 그러한 고민에 대한 결과물은 그의 역대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임원경제지》와 《종저보》 등에 잘 구현되어 있지만 시집인 《번계시고》에도 그 고민이 잘 나타나있다. 이 책의 「무술년(1838) 여름 한발이 극심하였고…… 」와 「번계 산장에서 광동廣東의 함도?稻를 담장 남쪽 논에 심고……」에서는 볍씨를 시험한 기록을 시로 적었고,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평생 고구마와 볍씨에 대해 연구한 서유구는 ‘고구마’와 ‘함도’를 소재로 하여 연작시를 남기기도 했다. 또 12월까지 절기별로 농사에 대한 기록을 시로 적은 「전가월령가」, 그 외에도 「종수가」, 「전가후월령가」 등의 시는 서유구의 농학자적 면모를 유감없이 살펴볼 수 있다. 번계에서의 삶과 번계시회 서유구는 번계에서 여생을 보내며 후학들과 어울려 시회를 열곤 하였다. 이 시회에는 홍경모, 유본학, 홍현주와 같은 역사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여러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특히 《번계시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육교 이조묵은 서유구의 가장 친한 벗이었다. 이 시회는 통해 후학들과 생각을 나누고 소통하는 창구가 되었을 것이다. 서유구는 벼슬을 하는 동안 번계에 자신과 가솔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해왔다. 무술편에는 서유구가 임원에 거처를 마련한 기쁨을 읊은 시가 특히 많은데 자이열재, 거연정, 자연경실, 광여루, 오여루 등이 시어로 많이 등장한다. 기해편과 경자편에서는 임원의 일상, 농사와 관련된 일, 여타 사건과 감회 등을 읊은 시가 많다. 또 해마다 가을이면 주변의 승경을 유람한 기록을 시로 남겼다. 무술편에서는 수락산, 기해편에서는 북한산, 경자편에서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장면을 시로 읊었다. 이 책은 일평생 끊임없이 연구한 농학자로서의 서유구의 삶과 인간 서유구가 사랑했던 자연경을 이해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목차
‘번계시고’를 엮어내며
무술편 자연경실에서 거문고 소리를 듣다 19 | 운자를 짚어 ‘의衣’ 자를 얻다 20 | 거연정 21 | 자이열재에서 ‘운雲’ 자를 짚다 22 | 광여루 23 | 오여루 24 | 치익穉翼과 함께 ‘경庚’ 자를 짚다 25 | 해거海居·경당 絅堂이 와서 묵으며 운을 집다 (1) 26 | 해거·경당이 와서 묵으며 운을 집다 (2) 27 | 해거·경당이 와서 묵으며 운을 집다 (3) 28 | 해거·경당이 와서 묵으며 운을 집다 (4) 29 | 해 거·경당이 와서 묵으며 운을 집다 (5) 30 | 필곡에서 사침士침의 「교거」 시에 화답하여 (1) 31 | 필곡에서 사침의 「교거」 시에 화답하여 (2) 32 | 앞의 시에서 거듭 차운하여 치익에게 보내다 (1) 33 | 앞의 시에서 거듭 차운하여 치익에게 보내다 (2) 34 | 필곡에 있으면서, 사침·치익의 시에서 ‘어魚’ 자를 골라서 35 | 번계로 나가서 앞의 운을 다시 쓰다 36 | 번계잡영 (1) 37 | 번계잡영 (2) 38 | 번계잡영 (3) 39 | 시를 지어 치익에게 보이고 화답을 구하다 40 | 시운을 따서 사침·치익에게 보이다 41 | 지팡이 짚고서 42 | 산을 좋아하여 43 | 육교·치익과 함께 옥류천에서 노닐다 44 | 금류동 45 | 흥국사 46 | 조암동 47 | 홍정자를 지나며 48 | 번계로 돌아와서-이튿날이 중양절이다 49 | 육교가 집으로 돌아가서, 운을 집어 화답을 구하기에 (1) 50 | 육교가 집으로 돌아가서 운을 짚어 화답을 구하기에 (2) 51 | 우연히 읊조리다 52 | 육교의 절구를 차운하여 53 | 중양절 후에 회포를 읊음 55 | 가을 경치 56 | 가을날 산방에서 육교에게 부치다 57 | 『중주집』의 시운을 따서 58 | 연 3일 밤비가 내리다가 59 | 육교의 시에 응답하여 60 | 교외에 살며 61 | 수락산에서 돌아와 다시 유람했던 일을 추억하며 62 | 육교가 약속 날짜가 지나도 오지 않기에, 『중주집』의 운을 따서 재촉하며 66 | 자연경실 창문 아래 국화 화분이 반쯤 피었는데, 일이 있어 성안으로 들어가며 67 | 돌아와 활짝 핀 국화 화분을 보고, 기쁜 마음에 앞의 운을 다시 써서 68 | 다섯 종의 국화를 기르며 69 | 나무 심기 노래 79 | 경재가 와서 묵으며, 등불 아래에서 『중주집』의 운을 따서 86 | 흥을 달래다 87 | 우연히 읊다 (1) 88 | 우연히 읊다 (2) 89 | 소동파의 시 「눈을 읊다」의 운을 따라 90 | 『엄주집』에서 운을 따서 (1) 91 | 『엄주집』에서 운을 따서 (2) 92 | 목재 시의 운을 따서 93 | 10월 16일, 육교가 부쳐 온 시에 화답하여 94 | 육교가 찾아왔기에 육유 시의 운을 따서 96 | 다시 원元나라 시선집에서 운을 골라 97 | 다시 정송원 시의 운을 따서 98 | 또 후산 시의 운을 따서 99 | 육교가 도성으로 들어가서 보낸 칠언근체시에 경재·귤정과 함께 화 답하다 100 | 시월 그믐날, 뜨락의 매화가 일찍 피었길래 소동파 시의 운을 따서 101| 손자를 훈계하며 (1) 103 | 손자를 훈계하며 (2) 104 | 손자를 훈계하며 (3) 105 | 손자를 훈계하며 (4) 106 | 번계십영 107 | 겨울비 115 | 선물받은 곶감을 경재·귤정와 함께 먹고, 이어 ‘삼 三’ 자 운을 써서 짓다 118 | 경재가 낭산에게 곶감과 함께…… 119 | 낭산에게 화답하여, 앞의 운을 다시 쓰다 120 | 동지 후에 운을 따서 121 | 귤정이 상제에 응시하러…… 122 | 귤정이 눈을 무릅쓰고 밤에 돌아가려 하기에, 운을 짚어 함께 읊다 123 | 납일 하루 전에 124 | 운을 짚어 귤정에게 보이다 125 | 운을 짚어 밤눈을 읊음 126 | 자이열재에서 경치를 읊다 127 | 육교가 손수 도장을 새겨 보냈기에, 운을 짚어 사례하다 128 | 경재·귤정과 함께 운을 짚어 129 | 청조가 난호에서 와서, 경재·귤정과 함께 촛불을 밝히고 연구를 짓다 130 | 밤에 앉아서 운을 밟다 134 | 이웃 사람이 사냥에서 돌아왔기에, 운을 따서 읊다 135 | 육교가 보낸 절구 3수에 화답하여 136 | 앞의 운을 거듭 써서, 다시 육교에게 보내다 138 | 밤에 앉아 연구 聯句를 짓다 140 | 시냇물 따라 141 | 납일 후에 내린 새벽 눈 142 | 경재가 경산 慶山 원에게 보낸 시를 차운하여 143 | 무술년(1838) 그믐날…… 144
기해편 기해년 정월 초하루 149 | 인일 154 | 운평이 찾아왔다 돌아가서…… 155 | 정월 보름밤, 경재와 함께 앞 들판에서 달맞이하며 (1) 157 | 정월 보름밤, 경재와 함께 앞 들판에서 달맞이하며 (2) 158 | 최겸산의 금강산 시축에 쓰다 159 | 동쪽 누각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162 | 가랑비에 운을 집어 163 | 봄비가 밤을 새워 내림에, 경재·귤정과 함께 읊다 164 | 비가 사흘 동안 그치지 않 기에, 다시 ‘ 경’ 자 운을 써서 165 | 춘사 166 | 화조 날에 읊다 167 | 우연히 ‘래來’ 자 운으로 시를 지어, 귤정에게 보이다 168 | 다시 ‘ 래來’ 자 운을 따서 169 | 육교의 ‘ 한식’ 시에 차운하여 170 | 거연정에서 차를 시음하다 171 | 육교가 보내준 시에 차운하고, 이어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다 (1) 172 | 육교가 보내준 시에 차운하고, 이어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다 (2) 173 | 흐린 봄날 174 | 도성에 들어갔다 사흘 만에 돌아와 동산을 보니 꽃이 만발하였기에 175 | 꽃이 피자마자, 연일 비바람이 불어와서 176 | 여주 사또가 왔다가 돌아가서…… 177 | 3월 16일, 육교가 찾아왔기에 『중주집』의 운을 따서 짓다 178 | 또 『중주집』의 운을 따서 179 | 원유산 시의 운을 따서 180 | 거연정에서 떡을 구우며 181 | 육교가 도성으로 들어간다기에, 다시 원유산의 운을 따서 짓다 182 | 3월 16일, 꽃이 처음으로 활짝 피고…… 183 | 다시 장구 20운을 읊조리다 186 | 육교가 보내준 시에 차운하여 189 | 세 가지 근심 190 | 북적동에서 복사꽃을 감상하며 193 | 사월 초파일 195 | 밤비 그친 아침에, ‘ 단 端’ 자 운을 짚어서 196 | 해거께서 멀리 왕림하여 시를 남기고 갔기에…… (1) 197 | 해거께서 멀리 왕림하여 시를 남기고 갔기에…… (2) 198 | 해거께서 멀리 왕림하여 시를 남기고 갔기에…… (3) 199 | 도성으로 들어갔다 사흘 만에 돌아오니, 철쭉이 활짝 피었기에 200 | 시를 지어 귤정에게 보이다 201 | 육교의 시를 차운하여 202 | 육교와 조계로 구경 가자고…… 203 | 우연히 양성재 시의 운을 따서 204 | 육교가 앞의 운을 써서 다시 율시 두 수를 보내왔기에…… 205 | 경재 시에 차운하여 207 | 단오 후 2일에 경재 瓊齋 와 육교가 찾아와서, 경재 經齋·귤정과 함께 운을 짚다 208 | 육교가 보낸 시에 차운하여 209 | 다시 육교의 시 3수에 차운하여 210 | 경재의 시집에 부쳐 213 | 육교가 「직구음」을 부쳐 보냈기에…… 214 | 육교의 「장미」 시를 차운하여 218 | 육교의 「장마」 시에 차운하여 219 | 육교가 보낸 시에 차운하여 220 | 거연정에서 경재 시에 차운하다 221 | 육교가 편지를 보내 나의 시를 칭찬하였는데…… 222 | 육교가 옹방강의 시에 차운한 시를 다시 밟아서 223 | 육교의 「구맹음」에 화답하여 224 | 다시 육교의 절구 3수를 차운하여 228 | 경재의 ‘어魚’ 자 운을 빌려서 230 | 경재의 「장마」 시를 차운하여 231 | 육교가 감사하게도 야합 한 분盆에…… 232 | 5월 계묘일에 비가 시작하여…… 233 | 서쪽 언덕에서 불어난 강물을 바라보며 239 | 또 비가 내리기에, 『중주집』의 운을 따서 240 | 육교의 「아계동」 시를 차 운하여 241 | 다시 ‘홍 紅’ 자 운을 빌려서 242 | 날이 갠 것을 기뻐하며, 육교의 시를 차운하여 243 | 6월 초순에야 비로소 갠 달을 보고 기쁜 마음에 ‘휘暉’ 자 운을 짚다 244 | 우연히 ‘문 門’ 자 운을 따서 245 | 운평이 찾아왔기에, 『원시선』의 운을 따서 246 | 육교가 보낸 시 3수에 화답하여 248 | 육교가 우연히 절에 갔다가 우란회를 보고 지은 시에 차운하여 250 | 기해년 가을, 나는 재차 사직서를 올렸고…… 251 | 백간의 퇴임 축하 시에 차운하여 258 | 도애의 퇴임 축하 시에 차운하여 259 | 문암의 퇴임 축하 시에 차운하여 260 | 경재·육교·귤정과 함께 신흥사를 찾아서 262 | 칠성암에 묵으며 (1) 263 | 칠성암에 묵으며 (2) 264 | 손가장으로 발길을 돌리며 265 | 청수루 266 | 손가장에서 막 돌아오자마자…… 267 | 또 시우산의 시에서 운을 따서 268 | 귤정의 「동지 후 10일」 시에 차운하여 269 | 육교가 중국 시를 차운하여 보냈기에, 허술하게 지어 화답하다 270 | 기해년 제야에 경재·귤정과 함께 읊다 271 | 귤정의 「제석除夕」 시에 차운하여 275 | 육교의 「수세守歲」 시에 차운하여 276
경자편 경자년 설날 아침, 기쁜 눈 내리고 281 | 육교가 눈을 읊은 시에 차운하여 282 | 정월 보름에서 이틀 후…… 283 | 잠 못 이루고 284 | 번계산장에 산 지 겨우 1년이 지났는데…… 285 | 도성으로 들어가 육교의 근작시를 찾아서…… 290 | 육교가 앞의 운을 다시 써서 4편의 율시를 또 보냈기에…… 294 | 무술년(1838) 여름 한발이 극심하였고…… 297 | 산촌으로 돌아온 지 3일째에…… 301 | 편지는 오지 않고 밤에 반가운 비 내리기에…… 302 | 경재의 「우연히 읊다」에 차운하여 303 | 곡우 뒤에 두견화가 봄을 맞아 처음 피고 304 | 병을 조리하려고 다시 번계를 나가며 태손에게 보이다 306 | 우연히 읊다 307 | 무제 308 | 봄을 아쉬워하며 309 | 봄을 전별하며 310 | 연등 314 | 경재의 생일날에 315 | 육교를 곡하며 317 | 감회가 있어 321 | 그냥 읊다 322 | 4월 14일, 해거가 편지를 보내기를…… 323 | 전가십이월령가 325 | 전가월령후가 (1) 346 | 전가월령후가 (2) 351 | 운석, 경당과 함께 해거의 남록 별장을 방문하여…… 355 | 족제 심전과 운고, 족질 포원이 함께 왔기에…… 357 | 족제 심전과 운고, 족질 포원과 금릉이 함께 와서…… 358 | 다음 날 또 모여서 ‘어漁’·‘양 洋’ 운을 집었는데, 심전은 오지 않았다 360 | 다음 날 또 모여서 ‘화花’·‘약藥’·‘성成’·‘열列’을 운자로 하였는데…… 361 | 다시 3일 후에 또 모였는데, 길고吉皐가 우연히 왔기에 ‘귀歸’·‘우愚’로 운을 집어 363 | ‘하荷’·‘정淨’·‘납納’·‘양凉’·‘시時’로 운을 나누어 ‘정淨’ 자를 얻다 364 | 다시 2일 후에 또 모여서 ‘귀歸’와 ‘우愚’로 운을 집다 366 | 다시 ‘어漁’·‘양洋’으로 운을 집어 367 | 병에 꽂힌 연꽃 368 | 귤정과 함께 범석호 시의 운을 따서 370 | ‘엽葉’·‘수水’·‘심心’으로 운을 따서 372 | 다시 앞의 운을 써서 373 | 진간재 시의 운을 따서 374 | 다시 앞의 운을 써서 375 | 또 앞의 운을 다시 써서 376 | ‘엽葉’·‘수水’·‘심心’ 자로 운을 집어 377 | 중추절에 범석호 시의 운을 따서 378 | 거연정에서 달구경 하며, ‘매梅’·‘완宛’·‘릉陵’으로 운을 따서 379 | 추석 이틀 뒤에 380 | 다시 앞의 운을 써서 381 | 추석 이틀 뒤에 382 | 나는 8월 9일부터 한강을 거슬러 석림까지 가는 여행을 계획하였는데…… 383 | 날 저물자 비바람이 세차져서 배가 나아가지 못하고 384 | 밤에 광나루에 정박하여 386 | 아침에 미호를 지나며 389 | 평구역을 지나며 391 | 두미천을 지나며 393 | 저녁에 두현을 바라보며 395 | 밤에 검단산 아래 정박하여 396 | 석림에 머물며 399 | 배를 돌려 402 | 낮에 광나루에 정박하여, 연천 상공의 유거를 방문하여 403 | 압구정을 지나며 404 | 번계 산장에서 광동廣東의 함도(함稻)를 담장 남쪽 논에 심고…… 405 | 관사가 앞의 운을 다시 써서 또 율시 2수를 부쳤기에 화답하여 408 | 필곡에서 병들어 있다가…… 411 | 시월 스무 이튿날에 두 번째로 번계를 나가며 413 | 우연히 읊어, 귤정에게 부치다 414 | 운고와 포원이 밤에 찾아왔기에, ‘어漁’·‘양 洋’ 운을 따서 415 | 다시 ‘어漁’·‘양 洋’으로 운을 따서 416 | 관암·항해·해거·낭산과 함께 ‘상賞’·‘감龕’·‘매梅’로 운을 나누어 417 | 경재·운고·금릉과 함께 섣달 그믐밤을 지새우며 420 색인 421
저자 및 역자 소개
서유구(풍석(楓石)) 저/조창록, 조창록 역 : 서유구(풍석(楓石)) 저 서유구는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이며 본관은 대구이다. 대제학 보만재 서명응의 손자이며, 이조판서 서호수의 아들이다. 영조1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된 후 좌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사헌부대사헌, 예문관대제학,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늦은 나이에 전라도관찰사, 수원부 유수를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경화세족 가문에서 태어나 다양한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학을 이어 특히 농학(農學)에 큰 업적을 남겼다. 가문의 개방적인 학문 기풍과 방대한 장서의 열람, 뛰어난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다방면에 식견과 경험을 쌓았다. 젊은 시절 정조의 치세 때에는 규장각에서 많은 편찬 사업에 참여했고, 방폐기간 동안의 여러 경험을 기반으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성장했다. 서유구가 지은 16개의 주제를 지(志)로 하여, 113권으로 구성된《임원경제지》는 농업, 목축, 어업, 양잠, 상업 등의 생산 전반과 의학, 음식, 주거, 선비가 알아야 할 일상 실용지식 등의 생활 전반을 담은 방대한 양의 생활 백과전서이다. 그 밖의 저술로는 정조의 명으로 조선에서 출판한 도서의 목판을 조사한《누판고》와,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할 때는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 고구마 재배법을 기록한 《종저보》를 간행하였다. 이 밖에도 개인 문집으로 《풍석고협집》, 《금화지비집》, 《번계시고》, 《금화경독기》와 전라도관찰사와 수원유수시절의 업무일지인 《완영일록》과 《화영일록》이 전한다.
풍석 서유구 선생(1764~1845)은 영조와 정조 시절에서 순조, 헌종 대에 이르기까지 농업개혁을 통한 생산력 증대와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해 민생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다산 정약용 선생과 함께 조선 후기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임원경제지’는 농업, 목축, 어업, 양잠, 상업 등 생산 전반을 한 축으로 하고 의학, 음식, 주거, 선비가 알아야 할 일상실용지식 등 생활 전반을 또 한 축으로 하는 16개 분야, 11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원경제지가 완역돼 완간되면 서구 중심의 근대화 과정에서 잊혀져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버렸던 조선의 전통적인 실용지식의 보고로써 전통을 현대에 맞게 재창조한 한류 콘텐츠의 새로운 원천이 될 것이라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신정수 이사장은 "풍석문화재단은 임원경제지를 포함한 풍석 선생의 저술 원문과 번역문 일체를 온라인을 통해 일반 대중은 물론 학자들에게 서비스하기 위한 기반을 갖췄다"며 "앞으로 풍석의 저술에 담긴 전통문화콘텐츠를 현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진흥시키는 온라인 기념관 사업을 시작했으며 학회지 발간과 학술대회도 개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풍석문화재단 전라북도 지사장인 서창훈 회장은 “풍석 선생은 젊은 시절 전북 순창군수를 지내고 노년에는 전라관찰사를 역임해 전라북도 지역과 인연이 깊다”며 “올해부터 전라북도와 전주시에서 ‘전라감영 복원 재창조 사업’을 진행 중인데 풍석 선생의 ‘완영일록’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풍석문화재단은 오는 2018년 까지 임원경제지를 총62권으로 출판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지난 2003년부터 시작된 임원경제지의 완역과 완간을 앞당기기 위해 번역을 해온 ‘임원경제연구소’와 완역을 지원해온 ‘한국고전번역원’, 출판을 담당할 ‘(주) 씨앗을 뿌리는 사람’ 등과 유기적인 협력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고 전했다.
풍석문화재단은 또 ‘풍석문화재단 음식연구소’를 설립해 조선의 전통음식을 복원하고 이를 현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우석대학교와 산학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풍석문화재단 음식연구소 곽미경 소장은 "임원경제지에 실린 1,500여 종의 전통음식 레시피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음식연구소를 세웠는데, 이를 계기로 진정한 한식 세계화와 한식산업의 혁신에 기여하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徐遠 생원(生員)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구(徐久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 큰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팽려(徐彭呂) 풍저창봉사(豊儲倉奉事)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서팽주(徐彭周)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서팽선(徐彭 )
- 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편찬
『임원경제지』는 농업을 중심으로 복식, 천문, 건축, 음악, 미술, 식생활 등 다양한 학문이 수록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이 책은 대구 서씨 가문의 농업에 관한 관심과 서유구가 규장각에서 근무할 때 볼 수 있었던 수많은 책, 그리고 그의 다양한 지방관 역임 경험이 어우러져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18~19세기 활발한 인적교류와 각종 서적들의 대량 출판으로 인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광범위한 유통은 『임원경제지』가 저술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었다. 『임원경제지』는 113권 53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서적이다. 서유구는 이 책을 단기간에 집중적인 저술 활동을 통해 편찬한 것이 아니라, 1806년부터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편찬하였다.
풍석문화재단(楓石文化財團)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선생(1764~1845)은 영조와 정조 시절에서 순조, 헌종 대에 이르기까지 농업개혁을 통한 생산력 증대와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해 민생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다산 정약용 선생과 함께 조선 후기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자이열재(自怡悅齋)
풍석문화재단은 2019년 11월 26일 전주 한옥마을 향교길에 풍석 서유구(1764~1845)를 기리는 기념관 ‘자이열재(自怡悅齋)’를 문열었다.
번계시고(樊溪詩稿)
저자명 :서유구. 출판사:풍석문화재단, 풍석총서 :한시[漢詩] : 조선 시대 문학[朝鮮時代文學]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이섭대천종합예술제(利涉大川綜合藝術祭)
새아침의 여명이 밝아오듯이 “빛으로” 찬란하게 예술인들은 자신만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또는 자신만의 색채로 우리 이천의 예술을 꽃피우고자 합니다. 우리 이천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문화와 예술이듯이 이천의 혼불로 르네상스를 이천예총 각협회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천예총은 8개협회(국악협회/무용협회/문인협회/미술협회/사진작가협회/음악협회/연극협회/연예예술인협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천예총이 창의적 생각과 열린마음으로 예술인들의 끼와 혼을 발산시키고 시민들에게 감동과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바로 이섭대천종합예술제입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