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수
목차
개요
할아버지·아버지·본인 삼대가 상신(相臣)을 지낸다.
본관은 대구 서씨는 다산과 함께 18세기~19세기 중농주의 실학의 선구 역할을 한 서명응, 서유구, 서호수 등을 배출한 당대 명문가이며 자는 일지, 호는 송옹 또는 졸옹이다. 1714(숙종 40)∼1768(영조 44).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徐遠 생원(生員)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큰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구(徐久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작은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관직 생활
영조 9년인 약관인 20세(1730년)에 진사시에 장원한 후 174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정언과 지평을 거쳐 1744년인 영조 20년에 홍문록에 피선되고 주서·부교리·수찬·교리·응교·이조정랑 등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고 1750년 영조 26년 유신(儒臣)으로 호칭되는 옥당[* 홍문관의 별칭.]의 장관을 비롯 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대사헌·예문제학·형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지내고 영조 35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사도세자를 모함한 김상로와 홍계희 등을 탄핵하였고 세자시강원의 빈객으로 사도세자를 교도하여 그 보호에 힘썼다. 사도세자가 죽고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을 김귀주와 정후겸 등이 위협하자 세손보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정조에게 추앙을 받았다. 1765년인 영조 42년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176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서명균은 경종 때 소론 중에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였고 서지수 역시 소론 온건파로 탕평책에 힘썼다. 이는 그가 소론임에도 노론에게 상당한 호평을 받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노소론을 떠나 당시 이건창의 당의통략에서도 현상(賢相)으로 허여받았다고 한다.]
영조실록 111권, 영조 44년 8월 1일 병진 1번째기사 1768년 청 건륭(乾隆) 33년 판 중추부사 서지수의 졸기.
판중추부사 서지수(徐志修)가 졸(卒)하였다. 서지수의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고 소박해서 잇따라 태부(台府) 에 올랐으나, 충신 염결(忠愼廉潔)함을 스스로 지니는 것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전후로 여러 번 바른 말을 올렸고 이미 정승에 들어가자 중외의 서민이 모두 기뻐하였다. 정승의 자리에 오래 있지 아니하여 비록 시행한 바가 없었으나 여정(輿情)의 신망이 끝까지 쇠하지 아니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니 도성 백성이 시장을 파하고 서로 슬퍼하였다.
영조실록 111권, 영조 44년 8월 1일 병진 4번째기사 1768년 청 건륭(乾隆) 33년 서지수와 좌의정의 시호와 부의에 관한 일을 하교하다.
하교하기를,
"아! 서 판부사(判府事) 의 삼대(三代)를 내가 예전과 지금에 모두 보았고 모두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니,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물며 삼대가 옛날에도 섬겼고 나를 섬겼으니, 나라를 위하는 참된 충성을 대대로 전하였다고 이를 만한데, 절혜(節惠)의 법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본가(本家)에 신칙하여 곧 시장(諡狀)을 올리게 하고 바로 시호를 의논하여 석달 안에 거행함으로써 나의 권권(眷眷)한 뜻을 표시하게 하며, 고 좌의정[* 서명균을 의미한다.]의 시호는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특별히 한결같이 거행하게 하라.
아! 나를 섬긴 두 정승에 대해 늙은 나이에 모두 시호를 의논하게 되니, 또한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창연(愴然)함을 깨닫지 못하겠다. 이제 대신이 아뢴것을 듣건대 벼슬이 정승 자리에 이르렀으나 청렴하고 가난하다고 하니 숭상할 만하다. 본래의 치부(致賻) 외에 제물(祭物)을 더 주고 그 아들은 복(服)을 마치기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게 하라."
시호는 문청(文淸)이며 정조 때 청백리로 표창하였다.
여담
서지수는 3대가 정승을 지낸 기염을 토하였다.[* 3대 모두 소론에 속하였다.] 그의 증조부는 병조참의 서문상[* 형은 역시 소론으로 영의정까지 역임한 서문중이다.] 이고 조부는 숙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서종태이다. 아버지는 경종~영조때 좌의정을 역임한 서명균이며 서지수 본인 역시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동생인 서명빈은 이조판서와 판의금[* 숭반(崇班)의 중신(重臣)으로 의정 다음인 종1품이다.]에 올랐다. 외가는 노론이었는데 외조부 역시 숙종 때 우의정을 역임은 김구[* 노론이다.]였으며 김구의 아들이자 20년간 영의정을 역임해 김재로[* 외삼촌이다.]와 그 아들 김치인[* 서지수와는 이종사촌이 된다.]도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럼 이 집안도 부자손 3대가 정승집안이다. 김구(우의정), 김재로(영의정), 김치인(영의정)] 더욱이 김구의 동생이자 김유의 아들인 김상로, 김약로 등 가까운 인척도 모두 영의정을 역임했다.[* 이 정도면 안동 김씨 저리가라이다.] 그의 아들인 정조때 서유신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손자이자 서유신의 아들인 서영보도 순조때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서영보의 아들이자 서지수의 증손자인 서기수도 철종 때 대제학을 역임하여 삼대가 대제학[* 대제학을 문형이라 칭할만큼 문치가 국시인 조선에서 대제학은 정승과 맘먹는 가문의 영광이다.]을 역임하는 기염을 통한다. 그외 손자인 병조판서 서경보 등을 중심으로 서지수의 직계에서 정경이 쏟아져 나왔으며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와 그 아비 달성부원군 서종제도 근친이었다. 그외 서종옥이 영조 때 이조판서, 그 아들 서명선은 정조 때 영의정을 역임했다. 서명선의 아들들인 병조판서 서명응· 손자인 대제학 서유구· 증손자인 호조판서 서호수는 북학파의 비조로 이 부자손으로부터 임원경제지, 해동농서, 완영일록, 화영일록, 대악후보, 고사십이집 등이 쏟아져나와 농예발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