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회고록 - 1894년 5월,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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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3년 3월 1일 (수) 11:31 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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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회고록 - 1894년 5월, 워싱턴

1894년. 워싱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직장과 학교를 병행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 그 날 이완용을 만났던 밤의 불쾌한 악몽이나, 홍종우를 만났던 기이한 경험은 빠르게 잊혀져갔다. 나는 조선인 서재필로서의 악몽을 지우고, 미국 의대생 필립 제이손으로서 바쁘게 살아갔다. 사 년 간의 학교 생활을 마치고 1892년에 컬럼비안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가필드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의사 수련생으로서 환자를 만나는 두렵고도 기대되는 그 첫 번째 순간, 나는 미래의 의사 생활이 순조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수의 뒤를 따라 회진을 들어간 병실에서 노부인이 하나가 경기에 들린 듯 놀라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설마 저 노란 원숭이를 내 병실에 들이려는 것은 아니지요? ” 당황스러웠지만 오기를 부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노부인은 거의 반쯤 넋을 놓은 상태로 약병을 집어던지며 발광했다. 결국 나는 밖으로 나갔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노부인을 붙들고 간신히 진정시켰다. 첫날 신고식을 호되게 치른 후에도 비슷한 일이 가끔 생겼다. 대개는 노인들, 특히 노부인들이 그러는 일이 잦았다. 평소 유색인종인 내게 가장 친절한 것이 노부인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그들의 친절은 차별받는 불쌍한 사람에 대한 동정이었겠지만, 그들의 생활권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극도로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다. 황인종이라며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보기도 하고 웃는 얼굴로 대꾸해보기도 했는데, 그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신경하고 냉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컬럼비안 대학에서 오년간 의학을 전공하고 의사 면허를 받았으니 그에 따른 존경을 보여달라고 말하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불만과 의심이 섞인 표정으로 진료를 받아들였다. 일 년 가량의 수련의 생활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직장인 미군 의무부대에서의 보직을 도서관 업무에서 연구소 업무로 변경했다. 연구소장인 리드 박사는 나를 정식 의사로 인정하고 전염병 예방 연구 과제에 투입시켰다. 병리학은 당시로서 첨단 연구분야였다. 전염병의 원인을 세균으로 인식함에 따라 어떤 방법으로 전염병을 줄일지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당시 미군은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은 상황이었으므로, 병리학 연구는 의무부대에서도 가장 독립적이면서도 중요한 연구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업무와는 별도로 학문적 연구도 계속 장려되었다. 나는 리드의 권유로 주말에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병리학과 세균학을 청강했다. 관련된 비용은 의무부대에서 제공되었다. 약 육칠 개월 가량 연구소에서 일을 했다. 연구소 업무는 적성에도 잘 맞았고 재미도 있었다. 첨단의 연구를 수행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얼마간 연구를 지속하면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급여나 승진의 기회였다. 학위를 위해 적지 않은 등록금을 지불했으나 공무원은 의사라고 특별히 보상이 추가되는 것이 없었다. 평균적으로 의사가 버는 돈과 비교하면, 보상이 너무 적었다. 게다가 공무원은 승진 기회도 드물고,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보이지 않는 인종 차별도 있었다. 첫 번째 진급 관문에서 쓴 맛을 보고서야 나는 앞으로도 승진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오년이나 십년 정도 더 공무원 생활을 할 경우 얼마의 돈을 벌지 셈을 해봤다. 까마득했다. 이 곳의 물가를 감안했을 때, 내 손으로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에 터무니 없이 모자란 액수였다. 대학교 입학하던 날 법학 대신 의학을 택하면서, 사회적인 지위와 영향력을 얻지 못한다면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택한 의학인데 공무원으로서 벌게될 돈은 정말 서민으로 살아가기에도 근근할 정도였다. 나는 여러 가지로 고민하던 끝에 마침내 오년 간 재직했던 미군 군의참모부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개인 병원을 개업하기로 했다. 주변의 만류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 모험은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돈 버는 재주가 그렇게까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나는 모아두었던 돈에다 약간의 빌린 돈을 합쳐서 간소한 사무실 하나를 임대했다. 거기에다 병상 하나와 사무용 책상 하나를 가져다 두고, 개인 병원을 개업했다. 주로 감기나 배탈 등의 간단한 내과 치료나 종기, 베인 상처 등의 가벼운 외과 치료를 주로 했다. 의사가 황인종임을 확인하는 순간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호기심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병원은 간신히 문을 닫지 않을 만큼 운영되었다. 벌이는 군의참모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보다 줄었다. 벌이를 늘이기 위해 공무원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것인데. 당황스러웠지만 사업 형편이 생각처럼 금방 펴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긍정적인 기대를 가지기로 했다.

뮤리엘 암스트롱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는 원래 쾌락에 큰 흥미가 없었다. 십 년 가까운 미국의 독신생활 중에서 술과 여자는 거의 가까이 하지 않았다. 딱히 금욕생활을 했다기보다는 별로 그런 것이 끌리지 않았다. 원래 조선에서 살던 때에도 그다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었거니와, 미국 생활에서는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여자를 만났다. 뮤리엘과 처음 만난 것은 교회에서였다. 주말에 교회에서 오가며 얼굴은 여러 번 마주쳤는데,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서양 미인인데 눈매 어딘가에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그 정도였을 뿐,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느 날 심부름꾼이 찾아와 환자가 있으니 왕진을 부탁했다. 왕진가방을 들고 어느 호텔로 찾아갔더니 뮤리엘과 그녀의 어머니, 두 사람이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약간의 치료를 마치자 젊은 뮤리엘은 금방 증세가 호전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보름 이상을 계속 앓았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 때문에 계속 왕진을 다녔고 그러면서 뮤리엘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조선의 여자와 미국의 여자는 달랐다. 조선은 내외가 있다. 혼인을 하기 전에도, 혼인을 하고난 후에도, 여자와 남자는 내외를 했다. 부인은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어모셨고, 집안에 어려움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꼼꼼하게도 집안을 꾸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표정이 없었다. 슬픔도 기쁨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속으로만 삭히고, 겉표정은 항상 무뚝뚝했다. 조선의 여자들은 살림하는 목석 같았다. 미국의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집안에서 살림을 돌보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조선과 미국이 다를 바 없었으나, 미국 여자들은 훨씬 더 사람 같았다. 표정이 있었고 감정 표현이 있었다. 뮤리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녀는 아주 여성적이고 나긋나긋했으며, 역사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여성적 감수성을 가졌으며, 아주 귀여운 유머감각을 가졌다. 모두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었다. “열병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세균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죠? ” “그렇지요. 외부의 세균과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몸에 열이 나는 것입니다.” “논쟁을 벌이면 볼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은 원리군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이런 농담을 할 때면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완치된 이후에는 교회에서 만나거나 가끔 그녀가 병원을 찾아오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서른 살, 뮤리엘은 스물세 살이었다. 스스로를 서재필이라고 부르던 시절에 나는 이미 두 번 결혼했었다. 첫 번째 부인인 경주 이씨는 몸이 약해서 혼인 다음 해에 죽었고, 재혼했던 광산 김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갑신년에 온 집안이 몰락할 때 죽었다. 이제 결혼한다면 세 번째가 된다. 조선의 결혼과 미국의 결혼은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든 미국이든 결혼이란 그 사회의 안정된 구성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아직도 미국인으로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있다. 혼자 사는 것보다는 이 나라의 여성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편이 낫다. 하지만 아무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유색인종으로서 배경이 전혀 없는 내 핸디캡을 채워줄 수 있는, 더불어 가치관과 취미가 맞는 여성이어야 한다. 뮤리엘 암스트롱이라면 모든 것을 만족시킨다. 그녀는 다정다감한 여성적 성격에 지성과 미모를 모두 갖췄고, 작고한 그녀의 부친은 철도우편국을 설립하고 초대 국장을 역임했던 사회 지도층이었다. 적어도 워싱턴의 사회지도층들은 철도우편국의 미스터 암스트롱이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뮤리엘은 내게 결핍한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다. 나는 뮤리엘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주변의 반대, 특히 뮤리엘의 어머니의 반대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뮤리엘의 어머니는 최근 재혼했고, 유색인종 사윗감을 내켜 반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반대할 입장도 아니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결혼 생활 준비를 하려니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특히나 주택 자금이었다. 나는 명색이 의사지만 돈은 거의 없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는 정부에서 직원에게 제공하는 독신자 숙소를 이용했는데, 개인병원을 창업하면서부터는 숙소가 없었다. 처음에는 사무실 안에서 지냈고, 이후에는 저렴한 호텔에서 장기투숙하고 있었다. 한 여자를 데리고 살면서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급하게 제대로 된 집을 구하려니 돈이 부족했다. 보증금으로 두세달치 임대료를 납부하고, 또 월세로 적어도 이삼십 달러를 내야 했다. 게다가 그런 집들은 교통이 불편했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청강 생활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 박채호를 만나서 이런 고민을 이야기 했더니, 박채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조선 공사관 건물을 사용하시면 어떻습니까? ”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자 박채호도 함께 웃으며 말했다. “모양새가 우습기는 하지만, 요즘 조선 공사관에는 사람이 없어 귀신이 나올 지경입니다. 박정양 대감, 이완용 대감 모두 조선으로 돌아간 것은 알고 계시죠? 작년에는 시카고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조금 시끌벅쩍했지만 그것도 다 끝났습니다. 남아있는 사람은 대리 공사 이성수 대감 한 사람이라서, 제 아들놈이 날마다 공사관 빈 방 청소나 하는 형편입니다.” 조선 공사관이 모두 철수했다는 사실은 예전에 박채호에게 들었다. 박채호는 갑자기 공사관 직원들이 철수한 이유는 잘 몰랐다. 알지만 모르는 척 할 수도 있는데, 나로서도 조선공사관의 근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공사관에 유숙한다는 생각을 하자 우스웠다. 나는 역적인데, 역적이 공사관에 투숙한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우스꽝스럽다. 내 생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채호는 넉살좋게 웃으며 아들인 박용규를 불렀다. 박용규는 그의 아버지처럼 작고 통통한 체격에, 웃을 때면 눈이 없어질 듯 작아지는 사람 좋은 인상이었다. 박채호는 그가 원래는 자신의 일을 돕다가, 작년 시카고 박람회 때 통역이며 이런저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서 공사관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공사관 집사노릇까지 하고 있다며 웃었다. 박채호가 공사관의 빈 방 하나를 내달라고 하자 박용규가 하하 웃으며 조금 방정맞게 수다를 떨었다. “마음대로 쓰시지요. 어차피 놀고 있는 방입니다. 일층은 접견실이고, 삼층은 대리공사께서 쓰고 있으니, 이층은 비어있습니다. 이층에 방이 넷인데, 그 중 방 두 개는 제이손 박사께서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거금 이만오천 달러를 주고 산 건물인데 쓰든 안 쓰든 나가는 돈은 똑같으니까요. 음식도 나눠 먹을수록 더 맛있듯이, 집도 나눠 쓰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 모로 박용규의 말은 솔깃했다. 조선 공사관은 값비싼 주택이라서 월세를 주고 구할 수 있는 집보다 훨씬 시설이 좋았고, 교통도 편했다. 게다가 무료라니. 지금처럼 어려운 형편에, 가리고 어쩔 처지가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문제는 조선 때문에 그토록 심적 고통을 겪었으면서 조선 공사관에 얹혀살 수 있냐는 것이다. 나는 조선인 서재필이 아니고, 미국인 필립 제이손 아닌가. 하지만 정말로 내 영혼 밑바닥에 쌓인 조선에 대한 기억까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선 공사관에서 조선에 둘러쌓여 살면, 다시 날이면 날마다 민비와 청군과 백성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지는 않을까. 순전히 내 마음먹기 나름이지만 뮤리엘이 곁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문제는 조선 공사관의 입장이다. 나는 아무튼 아직도 조선의 대역죄인이었다. 그 사이 조선의 소식을 못 듣기는 했지만, 내가 사면되었을 리가 없다. 몇 년 전, 대리공사였던 이완용을 만났을 때 그는 피차간 만나봐야 좋을 것이 없는 사이니 못 만난 것으로 하자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공사인 이성수는 조선의 역적인 나를 한 지붕 아래에 유숙시킬 수 있을까? 첫번째는 몰라도 두번째 문제는 내가 판단할 수는 없다. 조선 공사에게 답을 얻어야 한다. 나는 박용규를 통해 먼저 언질을 띄운 후 공사를 찾아갔다. 혼자 남아있는 대리공사 신분인 이성수는 내가 찾아온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워싱턴에 서재필 선생이 계시다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지 석 달이 되었는데 처음 인사를 드리니 이것은 제 불찰입니다.” 나는 인사치례를 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사관에서 거주해도 좋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저는 조선의 중죄인 신분인데 대리공사께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 바꿔 말해서 조선의 역적인 내가 공사관에 머물러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이성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상께서 저에게 아주 어려운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고, 군인을 파견받고, 기술자를 초빙하라는 어명입니다. 저는 영어도 짧고 이 나라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 모든 임무를 저 혼자 부여받은 입장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박용규 군과 그의 아버지가 많이 도움을 주지만, 나랏일을 함께 논의할 경륜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요.” 아마도 이성수 개인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니고, 최초 미국 공사관을 만들 때 공사에게 주어진 임무일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튼 일할 사람이 예닐곱 명이나 되었으나 지금은 대리공사 한 사람이 간신히 공사관을 지키고 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임금이 실무의 어려움을 고려하며 어명을 내릴 리도 없다. 결국 이성수는 내게 공사관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선과의 인연을 확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조선공사관만큼 좋은 조건의 신혼집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는 조선 백성이 아니고 미국 시민입니다. 게다가 저는 개인 사업자로서 병원을 운영하느라 시간이 없어, 낮 시간에 공사관의 직원처럼 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번역이 필요하거나 미국의 행정 관행을 알려드리는 정도의 도움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이성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떡였다. “물론입니다. 서재필 선생께서는 공식적으로는 공사관의 직원이 아니고, 그러니 어딘가에 공사관 직원으로 나설 일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답답할 때 하소연이나 조금 들어주시고 막막할 때 방향이나 좀 이끌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왕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제 미국인이니 서재필 대신 제이손 박사로 호칭해주십시오.” 이성수와 대화를 마치고 몇일 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미국 사회니 계약서는 쓰기로 했다. 닥터 필립 제이손은 조선 공사관 2층의 방 두 개를 향후 삼 년간 사용하며, 그 댓가로 일주일에 여덟 시간 씩 업무를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말할 수도 없이 내게 유리한 계약이지만, 이성수의 입장에서도 어차피 비어있는 공사관을 빌려주면서 아쉬울 때 조력을 받을 수 있으니 만족하고 있었다. 공사관 건물은 월세 삼십 달러를 내고 빌리는 집보다 훨씬 좋았다. 그 집은 썩 좋았다. 저택이라 부를만한 석조 건물이었고, 방에는 성능 좋은 벽난로도 있어서 겨울을 보낼 걱정도 없었다. 공간 여기저기에는 조선에서 가져온 장식물이 있어, 뮤리엘은 무료로 아시아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며 즐거워했다. 가장 어려웠던 집을 구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제 결혼 준비는 급진전 되었다.

뮤리엘 암스트롱의 모습. 사실 이 시대에, 주류 인종의 여성이 옐로우몽키(...) 남성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참 놀랍습니다. 당시는 아직도 흑인은 태생적으로 열등하다든지, 대놓고 '중국인 배척법' 같은 것이 발효되던 시대에, 과연 뮤리엘이 서재필을 택하도록 만들었을는지. 

서재필이 결혼 전 조선공사관에서 살았다는 부분은,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만 조금 진위는 의심스럽습니다. 앞뒤 상황이 너무 이상하지요. 조선에 최대한 거리를 두고, 가급적 조선에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던 서재필의 태도와도 맞지 않고, 조선 공사관에서 역적인 서재필을 받아준 것도 이상합니다. 

서재필이 조선공사관에서 방을 얻어 살았다는 것은 박용규라는 조선공사관 근무자가 후일 자신이 많이 도와줬다고 증언한 것을 근거로 삼을텐데, 조금 의심스러운 면이 있으나,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하지요.  


이 조선공사관에서 방을 얻어 생활한 것을 아주 빈곤했던 삶으로 묘사하는 서재필 위인전기들이 많습니다만, 만약 저기서 살았다면 그 생활이 대단히 궁상맞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박정양 등이 처음 건너왔을 때 2.5만 달러에 구매를 한 대저택인데, 최근 문화재청이 350만달러에 인수했다더군요. 우리돈 약 40억원의 저택입니다.  

개항기 갑신정변 과 관련된 관리. 독립운동가.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개설

본관은 대구(大丘).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제이슨(Jaishon, P.). 전라남도 보성 출신. 서광효(徐光孝)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에게 입양되었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감사)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문중(徐文重 영의정 정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수(徐景需 전첨.증 이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형리(徐亨履)
        • 고고고고고고고할아버지: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
            • 고모고고고할머니: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덕수(徐德修 증 이조참판)

가족 계보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생애 및 활동사항

일곱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번째로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 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 군사 훈련을 교육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여, 국왕으로부터의 승낙을 받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어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에 의해 성립된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도착한 지 4개월 뒤인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 서재필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 자살하고, 동생 서재창(徐載昌)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1886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했는데, 1889년 6월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자가 될 정도로 성적이 특출하였다.

그런데 서재필이 학교에 입학할 때, 미국 국적을 가지고 제이슨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었고, 가족들 모두가 희생되어 본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생활을 위해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졸업 후, 1889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Lafayette)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워싱턴시로 가서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아의과대학야간부(Columbia Medical College: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3년 6월 2등으로 졸업한 뒤,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다음해 6월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Amstrong, G. B.)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무렵 학생들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행위가 심하자, 이에 분개하여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편, 1894년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대개혁이 단행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리고 1895년 5월 박정양내각(朴定陽內閣)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갑자기 귀국할 수 없었다.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던 박영효가 고종 폐위 음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미국에 들려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사업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1896년 1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국민의 계몽이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 신문 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로부터 4,400원의 재정 지원을 받고,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으로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 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성공하자 뒤를 이어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소임을 다 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국민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속에 1897년 11월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이 건립되었다.

또한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리는 한편,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자, 이를 꺼려한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합의해 다시 미국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3·1운동 봉기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 의료사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전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해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전세계에 규탄하였다.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해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간행하여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자 우리나라의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일본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며,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가재(家財)가 완전히 파산되어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나가는 한편, 여러 병원의 고용 의사로 종사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장관 하지(Hodge, G. 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이 선포되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박영효(반남 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 이건 근거없는 풍문으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약 60년 전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박미(朴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D.C.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서울독립문(─獨立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門). 석조문. 사적.

독립신문

1896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지이다.

독립협회

1896년(조선 고종 33) 서울에서 조직된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

서재필기념공원(徐載弼記念公園)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강건한 삶을 살았던 독립투사 송재 서재필 선생의 유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18세 나이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은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독립문을 만들었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다. 그가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는 기념공원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그의 정신이 살아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보성군의 북부 지역으로 천년고찰의 대원사와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 미술관 그리고 주암호반, 승주 고인돌공원과 연계되어 교육문화관광코스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서재필의학상

의사이며 언론인으로서 일생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몸 바치신 민족의 선각자 서재필(徐載弼)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에서는 애국애족의 정신을 바탕으로 의학의 교육, 진료, 연구 또는 봉사를 통하여 국내외에 큰 업적을 남기고 이 나라 의학계에 서재필(徐載弼) 정신을 빛내준 의료인에게 매년 서재필의학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서재필언론문화상

서재필언론문화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 서재필(徐載弼)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11년 4월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의해 제정,수여되는 상입니다.  한국신문협회·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후원하며 신문의 날(4월7일)을 전후하여 정해진 신문주간에 맞추어 시상되고 있습니다.

서재필기념회(서재필기념재단)

위치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8가길 56 동숭빌딩 301호

서재필기념회는 민족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송재 서재필 관련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그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재단법인이다. 서재필의학상 수여, 서재필언론문화상 수여, 올해의 민족언론인 선정, 헌창사업, 독립신문 연구지원, 서재필에 관한 학술연구 지원 및 출판, 서재필 관련 자료수집 및 연구지원, 기타 서재필의 사상과 겨레사랑을 기리는 민족선양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서재필박사 본가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다. 2007년 12월 18일 논산시의 향토문화유산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서재필 진료가운(徐載弼診療-)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독립 기념관에 소장된 서재필이 미국에서 진료할 때 입은 진료가운.

필라델피아한인회(필라델피아韓人會)

1970년 10월 3일 필라델피아지역에 창립된 한인봉사단체. 필라델피아는 서재필(徐載弼)박사가 살면서 활동했던 도시이다. 필라델피아한인회는 이민 1세대를 중심으로 미주이민사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기리는 문화행사와 후속세대를 위한 장학사업 그리고 청소년 리더십 배양을 위한 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한글 타자기

1908년 미국 뉴욕 시러큐스 지역에서 1903년에 Wilbert Smith 형제가 LC Smith & Brothers Typewriter Co.설립하여 Smith Premier No 10 - 10B, 84key 모델로 만든 언문타자기로 현재 ONONDA 역사 협회 타자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언문타자기의 자판 배열 방식이 주시경 선생님의 저서중 <국문초학>에 나오는 첫째공파 모음에 나오는 배열과 동일하며 <국문초학>도 언문타자기와 같은 1908년도에 저서되었다,따라서 보통 이원익이 개발한 타자기로 알려져 있는 이원익 타자기는 여러 자료들을 살펴볼 때, 서제필박사의 영향과 <독립신문> 보정을 맏아보며 한글체계를 주도하고 연구하던 주시경 선생님에 의해 언문타자기의 활자와 자판 배열방식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인다, 또한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국민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발간된 <독립신문> 의 계승 차원에서 서재필 박사와 같은 크리스천으로 하와이에서 계몽운동을 이어가던 이원익이란 분에 의해 언문타자기로 소개가 되었을 소지가 높다, 따라서 언문타자기는 최초의 한글타자기로 보고됨이 마땅한 최초의 타자기이다.

한국 사이클 역사(한국 자전거 역사)

우리나라에서 자전거가 언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는 상태이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한 개화 시대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서양의 선교사나 개화파 인사들이 처음 들여왔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이와는 별도로 1896년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공사 현장에 갈 때 처음으로 탔다는 설도 있고, 같은 해 고희성이 자전거를 탄 것이 처음이라 하기도 한다. 그 후 1898년 윤치호 선생이 하와이로부터 통타이어를 사용한 자전거를 도입해 왔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자전거가 생산되어 점차적으로 늘어난 자전거는 1960-1970년 사이에는 실용적인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는 경기 및 레저용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천봉산(天鳳山)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에 있는 산. 높이 608m이다. 보성군 북부 산지를 대표하며 산세가 깊고 대원사 계곡을 비롯하여 계곡이 많다. 여수·순천사건 이후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특히 대원사 계곡은 전남도당이 무장부대를 최초로 편성했던 곳으로 대원사가 불에 타는 피해를 보았다. 대원사 계곡 입구에 보성군립 백민미술관이 있고, 주변에 서재필박사 서재필기념공원과 고인돌공원·삼림욕장 등이 있다.

대한노인회 논산시지회(大韓老人會論山市支會)

충청남도 논산시 반월동에 있는 대한노인회 소속 지회.

대한노인회 논산시지회는 논산 지역 노인들의 권리 보장과 복지 증진을 위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회원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미국 시민권자 1호 서재필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효시는 사탕수수 농장 취업 희망자 102명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삼은 미주 이민 100주년에 건립이 추진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이민선의 출발지인 인천시(월미도)에 2008년 개관했다. 미국 연방의회가 2005년 12월 제정한 '미주 한인의 날'(The Korean American Day)도 이민선 도착일을 기념한 것이다. 2019년 뉴욕 맨해튼에 문을 연 한인이민사박물관은 미주 한인 이민사의 시작을 미국 시민권자가 처음 탄생한 1890년 6월 12일로 본다. 주인공은 서재필, 미국 이름으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서재필 회고록 - 1894년 5월, 워싱턴

1894년. 워싱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직장과 학교를 병행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 그 날 이완용을 만났던 밤의 불쾌한 악몽이나, 홍종우를 만났던 기이한 경험은 빠르게 잊혀져갔다. 나는 조선인 서재필로서의 악몽을 지우고, 미국 의대생 필립 제이손으로서 바쁘게 살아갔다. 사 년 간의 학교 생활을 마치고 1892년에 컬럼비안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가필드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의사 수련생으로서 환자를 만나는 두렵고도 기대되는 그 첫 번째 순간, 나는 미래의 의사 생활이 순조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수의 뒤를 따라 회진을 들어간 병실에서 노부인이 하나가 경기에 들린 듯 놀라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워싱턴의 서재필 동상

워싱턴 한국인 동상 1호로 서재필 동상이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제막됐다. 양복 차림에 왼손에 재킷을 든 모습이 고향 전남 보성에 있는 동상과 같다. 미국 한인사회는 '재미한인의 아버지'라 할 서재필 동상이 한인 젊은이들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워싱턴시도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했다. 1885년 6월 스물한 살 조선 청년 서재필이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내린 지 120여년 만이다.

서재필 청소년 리더십 프로그램

한인 청소년들에게 서재필의 개척정신 알리고 리더십 교육 필라델피아 인근 9개 학군에서 선발된 고등학생 참여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