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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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9월 3일 (토) 20:08 판 (백제왕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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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마한이 점점 약해지니 상하의 마음이 떠나간다. 그 세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인데 만일 타인이 취하면 순망치한의 격이라 후회해도 늦는다. 차라리 먼저 취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다.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 >마한을 합병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며.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에서 발췌 680년을 지속한 백제 왕조의 건국 국왕이자 초대 혹은 2대[* 부여 시조 동명왕 혹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태조로 보던 당시 기준, 혹은 온조 앞에 형 은조가 먼저 왕에 올랐지만 5개월 후 죽어버려 온조가 이어받았다는 《제왕운기》의 기록을 따를 경우다. 아래 출생 단락 참조.] 임금이자 건길지. 고대 삼국의 시조 중 유일하게 탄생 설화나 전설이 내려 오지 않으며 왕자로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고구려를 떠나[* 그러나, 친형제도 아닌 유리명왕 치세에서 얼마나 편히 살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괜히 온조와 비류가 내려온게 아니다. 동명성왕이 유리를 태자로 지명했을 때, 온조와 비류는 엄청난 정치적, 아니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유리왕은 부여계이기 때문에 고구려 소노부계인 온조/비류는 유리왕의 정적이고, 당연히 유리가 왕에 오르면 온조와 비류부터 숙청을 감행할 게 뻔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나라를 건설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고구려고주몽, 신라박혁거세, 금관가야수로왕, 반파국뇌질주일 등의 건국 이야기와는 달리 신비적인 요소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고대 국가 가운데 백제의 건국 설화는 고조선의 건국 설화와 더불어 난생설화가 아니고 고조선 역시 신화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백제 건국 설화가 그나마 가장 현실성있다고 할 수 있다.

아래 서술된 내용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기록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건국하자마자 중앙 집권을 이루고, 삼한 중 가장 강했던 마한까지 정복한 대단한 인물이겠으나 고고학이나 《삼국지》 등 외국 사료와 교차검증되지 않아 이 내용을 모두 사실로 보는 학자는 거의 없다. 다른 고대 국가들의 건국이 신화적으로 윤색되었듯[* 주몽이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신의 혈통이라거나, 부여를 탈출할 때 거북이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다는 기록은 신화지 말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거라고 믿는 현대인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건국 기록이 좀 과장됐다고 해서 고구려나 신라란 나라의 실존 자체가 허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초기기록 완전부정 or 초기기록 완전신뢰 같은 모 아니면 도 식의 태도는 양쪽 다 문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고대 일본의 천황 계보 및 초기사 역시 이주갑인상, 임나일본부 등의 방식으로 왜곡되었으며 심지어 서양사의 뿌리인 고대 로마마저도 로마 왕국 시절의 내용은 상당히 윤색되고 과장되었다고 추측된다.] 백제의 건국도 비록 신화 형태는 아니지만 다른 고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백제인의 과장이 더해졌다고 보면 된다.[* 원래 《삼국사기》 초기 기사는 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아 학자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도 마찬가지로 백제고이왕, 고구려태조대왕, 신라내물 마립간 때의 기사부터 다른 기록이나 고고학과 교차검증이 가능해 비로소 100% 인정받는 상황이다. 다만 고이왕 이전의 기록이 전부 거짓이라 쓸모없다라고 보는 시각은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사실이거나 사실이 오랜 세월 변형되었다고 보고 최대한 초기 기사도 활용해내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대체로 사실이라고 인정되는 것은 마한과의 외교 관계 기사 등 소수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백제왕 계보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1]]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출생

삼국사기》&《삼국유사

온조왕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전승을 한꺼번에 전하고 있다.] 첫번째는 졸본부여 왕의 차녀가 고주몽결혼하여 낳은 차남이다.

두번째는 북부여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졸본 사람인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낳은 둘째 아들이라는 것인데 이후 우태는 먼저 죽고, 소서노는 과부로 살다가 주몽과 재혼한다.

첫번째 전승의 경우 온조왕은 고구려 계통에 주몽의 3남으로 위로는 이복 형인 유리와 친형 비류가 있었다는 얘기이며 이에 따르면 백제 부여씨 왕가는 고구려 고씨 왕가(계루부)의 방계가 된다.

두번째 전승은 부여 해씨 왕가와 친연 관계가 있을 뿐 고구려 고씨 왕가(계루부)와 친연관계가 없으며, 동명성왕 주몽은 어머니 소서노의 재혼으로 잠깐 온조의 새아버지였다가 곧 헤어진 사람이 된다.

《삼국유사》에서도 《고전기》(古典記)라는 사서를 인용하는데 여기서는 주몽의 셋째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전기》(古典記)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지금의 광주(廣州)이다.】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2]]

제왕운기

>백제 시조 온조는 어머니와 형 은조(殷祚)와 함께 남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워 은조가 왕위에 올랐으나 5개월 만에 죽었다.

여기서는 온조가 은조와 온조라는 두 인물로 나눠져 있고, 온조보다 먼저 왕위에 올랐으나 너무 일찍 죽어서 온조가 시조가 되었다고 나온다.

해동고승전

《해동고승전》에서는 한국의 고대 사서인 《기로기》(耆老記)를 인용한 대목에서 백제의 건국이 등장하는데 이 기록에는 비류와 온조가 힘을 합쳐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3]]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구태와의 관계

한편 외국 기록인 《위서》 <백제전>, 《북사》 <백제전>, 《주서》, 《수서》, 《책부원귀》 등에서는 구태라는 사람이 백제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위의 우태와 음이 통하는 듯해서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일본 기록인 《속일본기》에서도 모두 부여 계승 의식은 확실히 하고 있지만 고구려에서 나왔음을 표방하는 사료는 없다. 다만 《북사》나 《속일본기》에서는 백제 부여씨 왕가의 조상을 '동명(東明=도모)'이라 하고 있는데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로는 삼국시대 당대 기록에서는 <연남산 묘지명>의 내용처럼 고구려 시조 주몽(동명성왕)과 부여 시조 동명왕이 엄격하게 구분된 별개의 인물로 보이고, 주몽왕이 동명왕과 동일 인물이라고 인식하는 사료는 당대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첫번째 전승을 빨라도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정부가 아닌 타자에 의한 기록이 <백제본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강종훈,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사료 계통과 그 성격>에서는 이 전승이 통일신라 시기 김대문의 《한산기》계통의 자료가 아닌가 짐작하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와의 연관성만 나타나는 두번째 전승은 백제가 고구려와 내내 사이가 나빴던 점, 성왕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바꾸었듯 고구려 계승 의식보다는 부여 계승 의식을 내세웠던 기록들과 아귀가 맞는다.

물론 이들 전승 모두가 반드시 맞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운데 애초에 《삼국사기》를 쓴 고려시대 사람 김부식도 1,000년쯤 후대 사람이고, 남아있는 기록들 중 뭐가 진짜인지 짐작이 안 되니까 여러 설을 같은 책에 한꺼번에 실었던 것이다. 게다가 백제 최초의 역사 기록이라는 근초고왕 당시 고흥의 《서기》도 온조왕 이후 몇백 년 뒤다. 《서기》가 최초의 역사 기록이라면 그 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이었다거나 체계적이지 않은 기록만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런 식이면 충분히 전승이 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백제 건국

고구려 왕자였다는 전승을 따르자면 고구려에서 지내던 온조왕은 후에 부여를 떠나 고구려로 온 이복 형인 유리태자가 되자 친형 비류와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아악(負兒嶽)[* 부아악(負兒嶽)은 현재의 북한산 인수봉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재 북한산 인수봉은 전문 산악인도 올라가기 힘들어하는 고난도 코스에 해당해서 정말 인수봉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다만 현대 한국에 전해지는 지명 중에 負兒嶽이라는 이름이 있는 곳은 북한산 인수봉이 맞기는 하다. 지형은 조금씩 바뀌는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는지라 무려 2,000년 전에도 지형이 지금과 같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역사 시대와 현재 지형이 바뀐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예시가 원래 바다에 접해 있다가 내륙으로 들어간 감은사김해시 가야 유적들이 있다. 2010년대 들어서 지질학 연구가 진척되면서 북한산 인수봉 일대에 지진이 여러차례 있었다는 지질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때문에 온조왕이 인수봉을 올라가던 2,000년 전에는 지진이 별로 없어서 인수봉이 완만했다는 가설이 신빙성있게 제기되고 있다.]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던 중 한강 이남의 땅이 나라를 세우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하남 위례성에 터를 잡고 십제(十濟)를 건국했다.

>...마침내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10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

하지만 위 기록에서 보이듯 친형 비류는 온조왕과 생각이 달랐다. 바닷가인 미추홀을 선택해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바다의 짠물 덕에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포기한 비류[* 일부 학자들은 이를 "온조로 대표되는 농업 세력과 비류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이 갈등을 일으켰고 끝내 해양 세력이 농업 세력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사실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다는 등의 내용은 농사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농업 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곳에 정착했으니 망할 수밖에'였을 뿐. 실제로 이보다 더 안습한 지역에 정착하여 크게 성공한 경우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들 수 있다.]는 백성들을 데리고 온조왕의 십제로 들어가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형의 백성들을 받아들이고 세력을 키운 온조왕은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 십제가 미추홀의 비류 세력을 병합한 것은 온조왕 당대의 일로 보기도 하고 더 후대인 초고왕 대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위례성에 대해서도 기록의 모순이 있다. 원년의 건국 기록에서는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뒤이어 14년의 기록에는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그래서 일각에서는 온조왕이 처음에는 한강 북쪽인 하북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14년에 한강 남쪽으로 옮겼다고 주장한다. 하북 위례성의 후보지로는 요즘 와선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 일대가 유력한 상황이다. 하남 위례성으로의 천도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삼국사기》 문헌상 연대로 고이왕 대가 되는데, 실제로는 온조왕~고이왕까지 임금들 재위 기간이 상당 부분 부풀려진 것으로 보는 게 아귀가 맞다.

치정

온조왕의 치정은 크게 낙랑말갈, 마한에 대한 외정과 백제 내부의 정비라는 내정으로 나뉜다.

외정

* 낙랑: 초기에 온조왕은 북쪽 옛 고조선 땅에 자리잡고 있던 낙랑군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내 사이가 틀어져서 죽어라 싸우게 된다. 낙랑한테 마한 일대 강력한 국가들은 존재 자체가 낙랑에 대한 정치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낙랑은 직접적인 공격 외에도 후술할 말갈을 사주해서 백제를 공격하게 유도하기도 했다. 온조왕 집권 당시에는 전한이 멸망하고, 신나라가 들어서는 시기였으나 설령 그렇다한들 그런 변방 소국 하나 공격하고 말고를 황제가 직접 결정하는 건 크나큰 에러. 낙랑 태수의 독자적 판단이거나 낙랑 태수의 상급자인 자사나 주목 정도에서 끝날 일이다. 그나마 이런 추정도 기년이 맞다는 전제에서나 합당하며, 고고학적 성과에 맞게 기년을 내려서 추정한다면 실제로는 대방군이었을 개연성도 크다. 
* 말갈: <백제본기> 초반부의 말갈은 우리가 아는 여진족,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부족이 아니라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지역의 맥 세력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 영서 예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위말갈 문서 참조. 아무튼 이들은 건국 초부터 백제와 밀고 밀리며 피 튀기게 싸웠다. 한때는 낙랑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도 했다. 백제 초기 역사에서 신라와 더불어 백제와 가장 많이 박터지게 싸웠다고 기록된 세력이기도 하다.[* 단 신라의 경우 현재는 신라라기 보다는 진한계 국가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초기 신라의 영토는 백제와 국경을 맞닿을만큼 거대하지도 않았다.]
* 마한: 온조왕은 처음엔 마한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사신도 보내고 선물도 보내는 등.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마한에 저자세를 보이기도 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왕 24년 가을 7월에 왕이 웅천(백제와 마한의 경계)에 목책을 쌓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도 없었을 때 내가 동북쪽의 땅 100리를 주어서 살게 해줬는데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을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항의하자,[* 이 기록을 토대로 해서, 북쪽에서 내려온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자리잡은 것도 빈 땅에 정착한 게 아니라 마한 왕의 협조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치 위만고조선에 왔을 때 방패로 삼기 위해 받아주었던 것과 비슷하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백제가 마한의 여러 구성국 중 하나로 나오는 기록과도 합치한다.] 온조왕은 부끄러워하며 쌓았던 목책을 허물었다고 한다. 그 전에 낙랑 태수가 백제의 목책을 트집잡았을 땐 굽히지 않았던 것과 대조된다. 하지만 26년에[* 처음 마한 왕의 질책에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헐었다고 한 기록으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이다.] 마한을 병합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겨울 10월에 사냥 가는 척하면서 마한을 기습해 꿀꺽해버렸다. 마한의 원산과 금현 두 성이 끝까지 온조왕한테 개겼지만 결국엔 1년 뒤 함락되고[* 참고로 두 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나오는데 무령왕 때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성왕때 고구려가 금현성을 함락시켰다고 나온다] 두 성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후에도 마한의 옛 장수였던 주근이 우곡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현재의 정설은 서기 3세기 중후반에 백제목지국을 타도하고 마한의 주도권을 탈취하고, 4세기 13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마한의 영역이었던 부분들을 공격하여 경기, 충청, 전북 서북부 일대를 직접 지배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나머지 전라도 일대는 간접 지배 아래 편재하는 데 그쳤으며, 웅진 천도 이후 만경강 유역까지 백제 세력이 확대, 25대 무령왕 대인 6세기 초엽에 가서야 전남의 마한 잔여 세력이 소멸하여 옛 마한 휘하에 있던 세력권들이 백제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대에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을 꺾어 버리고 마한 일대를 다 병합한 것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후대인 8대 고이왕이나 13대 근초고왕 대에 일어난 사건을 시조를 띄워주기 위해 온조왕 대에 갖다 붙여놓은 기사로 추정된다. 마치 《일본서기》에서 삼한을 정벌했다는 시대상 말도 안되는 기술의 백제 버전인 것.

백제의 초기 왕대는 워낙 신비에 쌓여 있어서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개중에는 '온조'라는 이름 자체가 '백제'라는 한자의 고대 한국어 버전일 뿐이며 온조는 가상 인물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온'이 100이고, '조'가 '제'와 통한다는 것. 다만 음운만으로 추정하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다른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또한 '온'은 한자 百으로 번역했으면서 '조'는 번역이 아닌 濟로 음역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후대의 비류왕이 백제의 실질적 시조이며, 온조 설화는 후발 주자인 비류왕 집단이 온조 집단을 계승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학계에서도 시조인 온조왕의 원형이 된 인물 혹은 세력이 있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백제 초기에 말갈과 싸운 건 개연성이 높다. 막 고대 국가로 발돋움해서 한강 유역을 제패하기 시작한 백제국이 뻗어나갈 곳은 북쪽과 동쪽 밖에 없다. 남쪽은 마한의 맹주국이자 백제국의 상전인 목지국이 노려보고 있기에 적어도 당장은 무리였기 때문. 한편 동쪽에 웅거하고 있었던 주민이야말로 주로 말갈로 통칭되던 부여-옥저계 소국 내지는 소국도 이루지 못한 예맥 말갈 계열 유목민들이었으며, 이들은 유목 민족 특성상 백제가 설령 가만히 있어도 쳐들어와서 약탈해대는 게 취미인 이들이었기에 굴복시킬 대상 1순위였다. 한편 당대 한강 유역의 지배권은 한사군인 낙랑군이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다소 잘못 알려진 상황. 낙랑군은 문헌상 백제 건국 시기인 기원전 1세기에도 경기도는커녕 황해도마저 토착민을 제어하는 걸 상당히 버거워 하였다. 따라서 한강 유역 백제국이 정말로 문헌 연대상 기원전 1세기에 세워졌다면 임진강조차도 제대로 영향력을 투사하지 못하던 그 당시 낙랑군이 자체로 그렇게까지 백제국과 갈등할 상황은 아니다. 문헌상 기록대로 순식간에 목지국까지 슥삭슥삭해버리고 임진강 일대까지 넘보고 있었다면 낙랑군에 초비상이 걸렸을 개연성은 나름 맞지만, 이는 고고학과 전혀 들어맞지 않으므로 그랬을 가능성 또한 매우 적다.

백제국이 초반부터 낙랑국과 대립했던 건 등장 자체로 낙랑군이 쫄아서가 아니라, 백제국이 그때까지 있었던, 목지국을 포함한 다른 마한 거수국들과는 달리 주변 거수국들을 대놓고 때려잡으면서 역량만 되면 직접 지배 지역으로 전환하며 단일한 국가 체제로 우뚝 선데다, 임진강 유역까지 제패를 완료해서 낙랑군과 대방군 바로 밑바닥까지 쳐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마한 거수국들이야 개별적으로 협상하거나 지들끼리 다투게 하거나, 아니면 목지국을 통해 제어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한강 유역에서 갑자기 혼자서 1:1로도 낙랑군과 싸워볼만한 고대 국가가 나타났으니, 고구려의 존재만으로도 골치가 아픈 낙랑군 입장에선 이런 백제국이 악몽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낙랑은 자기네들의 역량이나 예맥 세력을 사주하기도 해서 백제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힌다. 수백년 뒤에 분서왕처럼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 암살당한 사태까지 있었으니... 313년 고구려 미천왕한사군을 공격하여 없애버리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하여 육로로 중국과 교류하고 싸우던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을 피해 바다를 직접 건너 중국을 오가는 외교를 하게 된다.

내정

재위 10년 장남 다루를 태자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13년 행정구역을 개편했고 재위 14년에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38년째 되던 해에는 바로 전년도까지 자연 재해가 잇달아 발생해서 농사를 말아먹은 백성들이 많았기에 나라를 돌며 백성들을 직접 돌보고, 농사와 잠업을 권장했으며 부역에 동원하는 걸 자제시켰다고 한다. 또한 41년에는 위례성을 보수했다. 재위기간 내내 많은 성과 목책을 쌓아 주변세력의 침입에 대비했다.

가계도

외할아버지 : 졸본부여왕 / 연타발 할아버지 : 해모수 / 해부루왕의 서자(庶子) 할머니 : 유화부인 아버지 : 동명성왕 / 우태 어머니 : 소서노 형제: 비류 아들 : 다루왕

삼국사기 기록

[include(틀: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본기] 一年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一年夏五月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다 二年春一月 말갈에 대한 방어 대책 마련을 지시하다 二年春三月 을음을 우보에 임명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우레가 일어나고 복숭아, 오얏꽃이 피다 四年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다 四年秋八月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 맺다 五年冬十月 사냥하여 사슴을 잡다 六年秋七月 일식이 나타나다 八年春二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八年秋七月 백제와 낙랑의 우호 관계가 단절되다 十年秋九月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내다 十年冬十月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입하다 十一年夏四月 말갈이 낙랑의 부탁을 받고 병산책을 공격하다 十一年秋七月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다 十三年春二月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오다 十三年 왕의 모후가 죽다 十三年夏五月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를 계획하다 十三年秋七月 하남 위례성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다 十三年秋八月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 옮긴 사실을 알리다 十三年秋九月 성과 대궐을 쌓다 十四年春一月 도읍을 옮기다 十四年春二月 백성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다 十四年秋七月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十五年春一月 궁궐을 새로 쌓다 十七年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다 十七年夏四月 사당을 세우고 국모를 제사지내다 十八年冬十月 말갈을 격파하고 추장을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다 十八年冬十一月 낙랑을 공격하기 위해 구곡까지 행차하다 二十年春二月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二十二年秋八月 석두와 고목 2성을 쌓다 二十二年秋九月 말갈을 격파하다 二十四年秋七月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이 항의하다 二十五年春二月 한성의 민가에서 를 낳다 二十六年秋七月 마한 병합을 계획하다 二十六年冬十月 마한을 기습하여 합병하다 二十七年夏四月 마한을 멸망시키다 二十七年秋七月 대두 산성을 쌓다 二十八年春二月 다루를 태자에 임명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二十八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一年春一月 민가를 남부와 북부로 편성하다 三十一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三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一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三年 큰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려 도둑이 생기다 三十三年秋八月 동부와 서부를 설치하다 三十四年冬十月 마한 잔당의 반란을 진압하다 三十六年秋七月 탕정성을 축조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三十六年秋八月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다 三十七年春三月 달걀만한 우박이 내리다 三十七年夏四月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이 많이 나타나다 三十八年春二月 지방을 순방하다 三十八年春三月 농업잠업을 권장하고 백성의 부역을 줄이다 三十八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四十年秋九月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다 四十年冬十一月 말갈이 부현성을 습격하다 四十一年春一月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다 四十一年春二月 위례성을 수리하다 四十三年秋八月 아산벌에서 사냥하다 四十三年秋九月 기러기가 왕궁에 모여 들다 四十三年冬十月 남옥저 구파해 일행이 귀순하다 四十五年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마르다 四十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서 백성의 가옥이 손상되다 四十六年春二月 온조왕이 죽다

무려 65줄. 백제의 모든 왕들 중 기록이 제일 많다. 백제 초기 왕들 중에서도 건국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상당히 많은 편이라 후세에 덧붙여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후대 왕들의 기록이 상당히 빈약한데 비해, 가장 오래된 건국 왕의 기록이 상당히 많고 아주 세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감이 있지 않아 없다.

비정상적으로 큰 강역과 이해가 어려운 정복 속도를 이유로, 온조왕의 기록이 고이왕, 책계왕, 근초고왕, 무령왕, 성왕[* 남부, 북부, 탕정성, 고사부리성 등 성왕이 설치한 지방행정단위와 매우 유사하다. 더불어 성왕의 아들 위덕왕의 이름은 창(昌)인데, 거타(居陀)가 거창(居昌)으로 한화되고 고타(古陀)가 고창(古昌)으로 한화된 것을 근거로 그의 이름을 타(陀)로도 볼 수 있고 이는 다루왕의 다(多)와 상통한다.] 등의 기록과 섞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근초고왕 참조. 대체로 백제 기록이 고구려, 신라보다 부실한 편인데 유독 온조왕만큼은 비슷한 시대의 고구려, 신라의 초기 군주들과 비교해 봐도 아주 세세하고 사소한 내용이 많다.

덤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고구려 왕은 보장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신라문무왕이다. 보장왕과 문무왕은 책이 각각 2권씩이나 되는 유이한 왕들이며 《삼국사기》엔 문무왕, 보장왕 순으로 기록이 많은 TOP 1, 2위.

기타

* 백제의 건국자로 구태라는 인물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데 이 사람과 온조왕의 관계에 대해 많은 궁금증이 남아 있다. 일설에는 "비류가 구태나 구태 아들 아니냐"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 ‘온’은 고유어로 숫자 ‘백(100)’을 뜻하므로, 온조라는 이름 자체가 백제를 의미하고 따라서 백제의 시조로 상상된 가공의 인물 아니겠느냐는 말도 있다. 백제를 포함한 삼국의 초기 왕계에 대한 불신론, 비류 혹은 구태 시조설, 백제 왕가 교체설, 왕가 계보 조작설, 마한 복속이 이 때냐 고이왕이냐 근초고왕이냐 등 초기 백제 역사에 관한 설왕설래에서 써먹기 좋은 떡밥.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온조왕 대의 풍부한 기사들은 후대 기사의 삽입이 된다.
* 조선시대에는 인조정조에 의해 남한산성에 온조왕을 모신 숭렬전(팔전 중 하나)이 건립되었다.
* 도시로서 강남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서울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게 온조왕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강남 신도시 개발 사업이 바로 온조왕의 하남 위례성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도 온조왕의 백제 건국에 대해 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현재의 서울 강남은 수도권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이기 때문에 개로왕 이후 거의 잊혀진 위례성과의 연속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땅이 좋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강북은 명동 일대를 제외하면 강남3구보다 땅값이 낮다. 백제의 강남 개발 역시 과거 역사상 중심지가 현재의 중심지가 된 사례이기도 하고 수도로서 서울의 정통성에 조선 왕조 말고도 또 하나의 큰 가점을 주는 요소이다. 그래서 서울특별시 향토 역사에서 한성백제 시대를 매우 강조하고 서울특별시 홈페이지에서도 백제의 500년, 조선의 500년 도합 1,000년 수도였다는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1994년만 해도 서울의 수도 지정 기념 행사에서 600년 역사만 강조했을 정도로 조선 수도로서의 역사성만을 강조했었는데 이후 풍납토성을 비롯한 한성백제기 유물유적의 활발한 발굴 성과로 위례성이 현재의 강남 지방으로 거의 확정되면서 현재는 백제 수도로서의 역사 또한 향토사에서 강조되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 2006년 MBC 드라마 <주몽>에서는 아역 배우 김석[* 2005년 SBS 드라마 <서동요>에서는 무왕의 아역으로 나온 적도 있으니 어린 나이에 2번이나 백제 왕을 해본 셈.]이 연기했다.
*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출연 배우는 홍석조이다.
* 온조왕의 백제 건국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인 <미스터 온조>와 <온조>도 있는데 이 두 뮤지컬은 서로 완전히 다른 뮤지컬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