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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남 : 서지(徐智), 서현의 사남, 후사 없음
 
사남 : 서지(徐智), 서현의 사남, 후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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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서국]](徐國)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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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목]](若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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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왕]](徐駒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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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군]](徐句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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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차우]](徐王次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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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徐偃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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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자우]](徐王𠂔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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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자선]](徐王子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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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지후]](徐王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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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계량]](徐王季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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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경]](徐王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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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의초]](徐王義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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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장우]](徐王章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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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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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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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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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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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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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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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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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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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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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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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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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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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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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open.kakao.com/o/gBQB1q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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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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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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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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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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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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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서언왕)|황룡]](黃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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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黃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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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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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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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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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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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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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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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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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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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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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창]](鹄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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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창(鹄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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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개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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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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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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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泰山(태산)=[[서산]](徐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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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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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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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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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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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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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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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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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병]](月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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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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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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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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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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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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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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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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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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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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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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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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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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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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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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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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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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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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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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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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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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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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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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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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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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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불과차]](徐不過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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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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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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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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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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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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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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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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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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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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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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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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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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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도경]](高麗圖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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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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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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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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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군산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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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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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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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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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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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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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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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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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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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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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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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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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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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렬전]](崇烈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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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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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조왕묘]](溫祚王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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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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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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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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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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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충제]](三忠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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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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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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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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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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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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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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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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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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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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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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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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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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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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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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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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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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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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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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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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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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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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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강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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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0일 (금) 21:07 기준 최신판

서계(徐階)(1503~1583)는 자(字)는 자승(子升), 호(號)는 소호(少湖) 또는 존재(存齋)이다. 명조(明朝) 남직례(南直隷) 송강부(松江府) 화정현(華亭縣)(현재 중국 상해시(上海市) 송강구(松江區))출신이다.명대 정치가이자 문학자이며 사상가이다. 관직은 내각수보(內閣首輔), 이부상서(吏部尙書), 건극전대학사(建極殿大學士)를 지냈다.


출생일 홍치(弘治)16년(1503)

출생지 절강등처승선포정사사(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 선평현(宣平縣)

사망일 만력(萬曆)11년(1583)

사망지 남직례(南直隷) 송강부(松江府) 화정현(華亭縣)

경력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황주동지(黃州同知) 절강안찰첨사(浙江按察僉事) 강서안찰부사독절민학정(江西按察副使督浙閩學政)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 예부상서입직무일전(禮部尙書入直無逸殿)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 동각대학사장예부사(東閣大學士掌禮部事) 무영전대학사겸이부상서(武英殿大學士兼吏部尙書)

저작 『世經堂集』27권 『少湖文集』7권 『徐氏族譜』5권 『明世宗實錄』 『承天大志』


서계는 어려서 공부를 잘했고, 소년시기에는 양명학(陽明學) 강우학파(江右學派) 문인인 섭표(聶豹)와 교류했다. 18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20세에는 전시(殿試)에서 탐화(探花) 즉 3등을 하여 양정화(楊廷和)의 칭찬을 받았다. 가정(嘉靖) 연간 초기, 장총(張璁)이 조정에서 집권하였을 때, 서계는 장총의 의견에 반대하였다가 폄직되어 북경성(北京城)에서 쫓겨났다. 이로 인해 당시 가정제(嘉靖帝)는 '서계는 소인이니 영원토록 기용하지 않는다(徐階小人, 永不錄用)'는 말을 써서 돌에 새겼다. 이후 서계는 지방에서 수십년간 독학(督學)직을 전전한 후, 하언(夏言)의 도움으로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후, 몇 년 간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하며 양계성(楊繼盛) 등의 언관직에 있던 대신들을 알게 되었고, 이후 명조 중앙 조정 최고 행정 기관인 육부(六部)를 전전했다. 이후 예부(禮部), 이부(吏部), 한림원(翰林院) 등 중요 기구에서 주요 관직을 맡았는데, 한림원 시절 훗날 대신이 되는 장거정(張居正)과 고공(高拱) 등을 학생으로 만났다.

이후 서계는 그 유명한 청사(靑詞)로 무일전(無逸殿)에 입직(入直)하였고, 위기일발의 경술지변(庚戌之變)을 냉정히 처리하였다. 이때 서계는 예부상서(禮部尙書) 직책으로 북경성 방어를 담당, 적군과의 대적을 질질 끄는 방식으로 북경성 함락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이부(吏部), 예부(禮部), 태의원(太醫院)의 적폐를 청산하고 행정 효율을 제고했다. 가정31년(1552) 입각(入閣) 후, 서계는 엄숭(嚴嵩)의 조정 농단으로 수 년 동안 은인자중하였고, 후에 엄숭의 수보(首輔, 명조의 재상에 해당)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엄숭의 정치를 모두 반대,[3] 이른바 “삼어(三語)” 정강으로 내각의 운용 실태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가정 말기, 서계는 가정제에게 승천부(承天府) 남순을 권유하는데 성공, 대량 토목 공사를 일으켰다. 가정제는 말년에 이르러 도교(道敎) 신선 사상에 심취하여 방사(方士)들이 황제에게 불로장생약으로 속여 올린 단약(丹藥)을 복용하였으나 도리어 가정제는 병이 깊어졌다. 가정제 임종 즈음에, 서계는 가정제에게 단약 복용 중단을 권하였고, 동시에 황제 곁의 방사들과 이들과 결탁한 태감(太監)들을 일체 처형하였다. 가정제 붕어 후, 서계는 『가정유조(嘉靖遺詔)』와 『융경등극조(隆慶登極詔)』를 작성하여 하달시키자, 조야의 대신들이 경하를 표시, 양정화가 작성한 『가정등극조(嘉靖登極詔)』와 함께 '정시정종제일정(正始正終第一政)'이라 지칭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사람 지대륜(支大綸)은 오히려 서계가 도교 성향이 짙은 청사(靑詞)를 써서 입직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임기 중에는 아첨을 일삼고 영함하면서 어떤 정치적 공적도 세운 것은 없었으며, 융경(隆慶) 연간에 가서야 개선된 바가 있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가정제 사후, 일찍이 융경제(隆慶帝)를 보좌한 공으로 서계는 이전 그대로 수보에 올랐다. 서계는 융경제와 외정(外廷) 간의 갈등을 여러 차례 조율하면서, 2년 동안 여러 차례 상주문을 작성하여 환관들의 권력 장악을 저지, 융경2년(1568)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서계는 17년동안 내각에 머물렀으며, 원보(元輔) 즉 수보 자리에만 7년을 있었다. 40여년 정치 생활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원신(元臣)”, 혹은 “명상(名相)”이라 칭했다. 서계는 지모가 풍부하고 아량과 재주 모두 뛰어나, 풍몽룡(馮夢龍) 등으로부터 존숭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서계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일주는 긍정적인 태도를 조인다. 담평(譚平)은 서계와 그의 학생(學生) 장거정(張居正)을 대비시키면서, 장거정에 비해 서계가 더욱 침착하면서도 권력에 대한 욕심은 더 적었다고 평가하였다.

서계는 임기 중에 장거정 등 후대에 대신이 될 학생들을 길렀다. 임기 중에는 조정 내 내각의 위상을 개혁하려 하였고, 이는 명대 후기 내각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그는 신진관원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방식대로 환관들을 교도하여 유근(劉瑾)과 같은 악덕 환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막고, 이로써 환관들의 조정 내 위상과 역할을 바꾸고자 하였다. 또한 항왜명장(抗倭名將) 장경(張經)이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호종헌(胡宗憲)이 옥중에서 죽은 일 모두 서계가 하였으며, 심지어 고공과 장거정의 불화 역시 서계와 무관하지 않았다.사직 후, 가중 자제들의 악행에 연루되어, 서계는 여러차례 투옥될 뻔하였고, 친구에게 구원 서신을 작성하였으며, 고공 등은 이전의 사건으로 서계를 힐난하기도 하였다. 만력11년(1583) 서계는 화정(華亭) 본가에서 사망하였다. 태사(太師)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내려졌다.

홍치(弘治) 14년(1501), 서보(徐黼)가 절강(浙江) 선평현(宣平縣) 현승(縣丞)에 부임했다. 3년후인 홍치16년 9월 30일, 서보의 셋째 부인 고씨(顧氏)가 선평현에서 서계를 낳았다. 돌이 되었을 즈음 여종의 실수로 서계는 우물에 추락하였고 구출된 후. 3일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간신히 깨어났다. 정덕2년(1507), 5세가 된 서계는 부친이 선평지현 임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괄창령(括蒼嶺)을 지날 때 다시 사고가 발생, 서계가 벼랑 아래로 떨어졌고 생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생모 고부인은 오래동안 통곡하였다 한다.[14] 다행히도 서계의 옷자락이 나무에 걸려 추락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얼마 후, 서계는 한 고찰에서 공부하였다. 이 절은 본래 귀신이 많다고 소문났지만 서계가 공부할 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 서보는 서계가 매우 특수하다고 생각하였고, 스승을 찾아 서계에게 소학(小學)을 전수하게 하였으며, 줄곧 사서(四書)를 배워, 단시간 내에 사서 전문을 암송할 수 있었다. 정덕6년(1511) 서보가 영도현(寧都縣) 현승이 되면서 서계는 아버지를 따라 강서성(江西省)으로 이사하였다. 하루는 서보가 다른 성에서 영도로 돌아오나 서계는 아버지를 마중 나갔는데, 이때 서보는 웃으면서 '아비가 멀리서 돌아오고 아들이 멀리 나와 맞이하니 부자의 은혜는 천성이다(父遠回子遠迎, 父子之恩天性也)'라고 하자, 서계는 '임금이 위에 계시고 신하가 아래에 있으니 군신의 의리는 인륜입니다(君居上臣居下, 君臣之義人倫哉)'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서보는 서계에게 속문(屬文)을 가르쳤다. 화정현으로 돌아온 후, 서계는 현성 서쪽 호수 북측의 소호(少湖)에서 공부하였다. 이에 스스로 '소호(少湖)'라고 호를 지었다.[20] 후에 서계는 『우관루기(雨觀樓記)』를 지어 비오는 가운데 호수를 볼 때의 자연과 공명하는 정감을 토로하였다. 칠언율시(七言律詩) '제서호서경(題西湖小景)'은 초가를 짓고 평생을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서호 주변 풍경을 서술하였다.

정덕12년(1517), 15세가 된 서계는 부현학(府縣學)에 들어가 생원(生員)이 되었다. 이때 광서안찰첨사(廣西按察僉事) 반규(潘奎)를 좌사(座師)로 삼았지만, 어린 서계는 지나치게 반규와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2년 후, 서계는 우수한 성적으로 응천부(應天府) 향시(鄉試)에 응하였지만 떨어졌다.1년 후, 섭표가 화정현 지현으로 부임하면서, 학생들과 학문을 논할 때 서계의 재능을 알아보고 '국기(國器)'라고 생각하였고, 서계에게 양명학(陽明學)의 심학(心學) 개념을 전수해 주면서, 섭표는 서계의 새로운 좌사가 되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서계는 가정원년(1522) 임오과(壬午科) 향시에 합격하였다. 주고관(主考官) 동이(董圯)가 서계의 재능을 알아보고, 시험지에 1등이라고 기입하렸다가 마지막에 7등이 되었다. 동이가 사망한 후, 서계는 동이의 묘지명을 지어주었는데, 서계는 자신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동이 덕분이라고 적고 있다.

가정2년(1523), 서계는 경사(京師)에 가서 계미과(癸未科) 회시(會試)를 보았다. 당시 형부상서(刑部尙書) 임준(林俊)은 서계의 책론(策論)을 본 후 서계가 장원(狀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대학사(大學士)들은 모두 서계가 3등인 탐화(探花)여야 한다는데 동의하였다. 따라서 전시(殿試) 후에 서계는 탐화로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에 제수되었다.양신(楊愼)으로 인해 자리에 없었던 양정화(楊廷和)가 서계를 만나 후 차보(次輔) 비굉(費宏)에게 서계의 잠재력이 1,2등보다 뒤지지 않은데 어째서 서계가 장원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한다.

서계가 급제한 후 섭표는 직접 찾아가 서보(徐黼)에게 축하를 표하였고 서계에게 시 한 수를 지어줬다.

寄少湖太史 空翼以夸千里捷 咻齊須諒數年迂 文宗左傳今成癖 德蓄前言始成儒 少壯莫叫嗟老大 格天勳業及時圖

서계의 급제 소식을 들은 후, 서계의 숙부는 만약 서계가 낙장한다 해도 여전히 편안하게 잘 수 있는지를 질문받았다. 이때 숙부는 조카가 이미 급제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답했다 한다. 그리고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편히 잠들었다고 한다. 후에 서계 부모고 증봉(贈封)되어 서계는 재삼 요청하여 특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허락을 황제로부터 받았고, 서계는 귀향하여 결혼하였다. 모친 고부인(顧夫人)은 특별히 서계에게, 자신이 처음에 비녀를 팔아 밥을 사서 서계의 스승과 벗들을 대접한 일을 잊지 말며, 진사 급제하여 사치하게 되어 근검절약과 겸손의 태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다. 가정3년(1524) 섭표가 복건순안어사(福建巡按御史)로 갈 당시, 고향 화정의 학생들이 작성한 『사기(祀記)』에서 서계는 자신은 당시 섭표의 문생(門生)이었으며 섭표가 준 영향이 매우 깊다고 말하였다.당시 서계는 몸이 왜소하였지만 피부는 희고 맑았으며 풍채를 주목받았다. 또한 책읽기를 좋아하고 마음에는 큰 뜻이 있었으며 왕수인(王守仁)의 문인을 따라 사방으로 유학(遊學)한 적도 있기에,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얼마 후, 서계는 대례의(大禮議) 사건으로 폄적된 양신(楊愼), 안반(安磐), 왕원정(王元正)을 만났다. 서계는 세 사람을 위해 여비를 마련하면서 속으로는 공헌을 한번 해보자고 하였지만 부모가 살아계셨기에 상당히 망설여졌다. 계속 북상하던 서계는 청원(淸源)을 지날 때쯤 꿈에서 부친이 계속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갔으나, 팽성(彭城, 오늘날 서주徐州)에 이르러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길에서 크게 울며 화정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이후로 3년동안 서계는 3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가정6년(1527) 복직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서계는 환관(宦官)들을 가르치는 내서당(內書堂)에서 환관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전에는 관원들이 내서당에 와서 가르치면 대부분의 경우 환관들을 경시하였고 가능한 오래동안 길게 끌거나 수업이 늦어지거나 조퇴하기 일수였다. 질문이 있어도 대답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문장을 읽혀도 읽지 못하거나 몇 구만 지적하는 수준이어서, 문장을 이해하는지 여부는 상관없었다. 그러나 서계는 아침 일찍 인시(寅時, 새벽 3시~5시)에 내서당에 와서 가르치고, 오후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떠났다. 또한 서계는 매 환관 학생 한 명마다 엄하게 관리하였고, 전문을 암송하지 못하면 자신의 강의 책상 앞에 서서 읽게 하였으며, 재차 못 암송하면 문밖에 무릎을 꿇고서 계속 읽게 하였고, 그래도 암송 못하면 정원 중앙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속 읽게 하여, 전부 암송해 읽어야 비로소 그치게 되었다. 이외에도 서계는 가르칠 당시에도 글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환관들에게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제도나 정치를 어기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당시 가정제가 새롭게 등극하면서 환관의 권세는 정덕(正德) 연간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기에 많은 환관들이 불만을 가졌다. 이에 대해 서계는 '정덕 이래 환관들은 서로 교만해져서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황상께서 즉위하신 후론 다소 이를 억제하시자 소대 환관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공들은 경과 사를 강설할 때마다 태조와 태종의 제도로는 감국(監局)의 환관들이 4품에 불과하였고 정사에 간섭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선덕 연간 이후에 총애를 입어 망포(蟒袍)를 입고 옥대(玉帶)를 차서 간접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이것이 정덕 연간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일을 배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또한 유근(劉瑾)이나 장웅(張雄) 등은 점점 교만해 질수록 화를 입는 모습은 더욱 비참하였다. 결국 자신에게 무익할 뿐 어찌 부러워할 것이 있겠는가? 황상께서 공들을 대우하시는 것은 정덕 연간에 비하면 가벼운 듯하지만, 태조(太祖)와 태종(太宗) 시기에 비하면 더욱 두터워졌다. 또한 이것은 바로 공들을 보전하기 위한 까닭이니, 반대로 원한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환관들이 매우 감동했다 한다. 3년의 가르침 이후, 환관들은 모두 서계가 잘 가르친다고 칭찬하였다. 심지어 서계가 폄적되어 북경성을 나갈 당시, 다시는 서계의 수업을 듣지 못하여 슬픔에 젖은 10여 명의 환관들이 좌문(左門)에서 기둥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내서당 수업 외에도 서계는 한림원편수였기에, 훗날 친구이자 왕씨심학(王氏心學)의 문인인 나홍선(羅洪先)과 교제하였다. 서계와 나홍선은 후에 대례의(大禮議) 중 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폄적당하였다.

예의지쟁(禮議之爭)

가정9년(1530) 10월 15일, 가정제는 칙을 내려 장총(張璁)(혹은 장부경張孚敬)을 총재(總裁)로 하여 교사(郊祀)를 준비하는 『사의성전(祀儀成典)』을 편찬하도록 했다. 서계도 찬수관(纂修官)으로 징발되었다. 장총은 이때 공자(孔子)의 문선왕(文宣王) 작위를 폐지하고 지성선사(至聖先師)로 할 것을 건의하였고, 동시에 공자의 신상도 목제 신위로 바꾸는 등 제사 규격을 낮출 것도 건의했다. 이에 가정제는 예부(禮部)에서 한림원과 회동하여 논의하도록 하였다. 10월 28일, 서계는 상주문 '논공자사전(論孔子祀典)'을 올렸다. 상주문에서 서계는 공자는 버릴 필요가 없는 칭호 3개와 버릴 수 없는 칭호 5개를 제시하였고, 봉호(封號)와 문묘(文廟)는 모두 조제(祖制)에 따라 원상복구할 것을 요청하였다. 11월 1일, 조회에서 장총은 서계를 질책하고 서계가 자신을 배반했다고 비난하였다. 서계는 장총에게 의부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배반한다는 말이 가능하냐고 반박하였다.서계의 이 행동은 천하 선비들의 칭찬을 얻었다. 이때 어사(御史) 여관(黎貫) 등은 서계를 따랐으며, 조제를 회복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분노한 장총은 어사 왕굉(汪鋐) 등에게 서계를 탄핵하도록 하여, 서계가 주도자라는 사유로 중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가정제도 서계를 녕신(佞臣, 간신)으로 몰아붙이고 궁궐 기둥에다 '서계는 소인이니 영원토록 기용하지 않는다(徐階小人, 永不敍用)'라고 새겼다.그리고 문연(聞淵)과 당룡(唐龍) 등의 도움 하에, 제명된 서계는 연평부추관(延平府推官)이 되어 중앙 이외 지방을 떠돌았다.서계는 모친 고부인과 헤어질 때, 고부인은 서계를 꾸짖지 읺았고 서계에게는 아들이 직언하다 폄적된 것은 자신에게 영광이라고 말하며 서계를 위로했다. 서소(徐旒)도 서계에게 서신을 보내어 좋은 일이니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하였다.

가정10년(1531) 4월, 서계는 연평부(延平府)에 도착하여 '저군작(抵郡作)'이라는 시 한 수를 썼다. 시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공헌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연평부추관 임기 중 서계는 정경운(鄭慶雲)과 황작(黃焯)을 만났다. 이들은 서계의 환난지교(患難之交)로서 서계는 이 두 사람과 웃으면서 지냈다고 회상하였다고 한다. 묘지명에서 '정공은 강개하고 절도가 있고 황공은 여유롭고 절도가 있다(鄭公慷慨有節, 黃公攸然有度)'고 하는 등, 양자는 성격이 다르지만 좋은 친구였다. 몇 년 후 서계는 두 사람이 말한 것과 생각한 것을 채용하려 했으나, 두 사람은 각각 가정17년(1538)과 가정26년(1547) 사망하였기에, 매우 안타까워했다. 연평부추관 재임 당시, 서계는 송사를 공정히 처리하였고 부고(府庫)를 조사하였으며 음사(淫祠)를 철폐하고 양호한 교육기관을 설립하였으며, 현지 교수(敎授) 등석(鄧析)에게 소학의 기초를 가르치게 했다. 후에 우계(尤溪)에서 비적들이 출현하였다. 당시 분순도(分巡道)는 비적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서계는 삼로(三老)의 자리를 현상으로 내걸고 소탕하기로 하였고, 얼마 후 두목을 포함하여 120명을 체포하였다. 이 일로 서계는 현지 백성의 일치된 지지를 받았다.또한 현지 풍속에 대한 감화로 서계는 연평으로 가족을 이주시키려 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 3년 후인 가정13년(1534) 3월, 서계는 연평에서의 3년동안의 정적(政績)이 두드러지면서 호광(湖廣) 황주부동지(黃州府同知)에 부임하였다.황주로 가는 날 연평 백성들은 길 양쪽에 줄을 지어 송별하였고, 연평부학(延平府學) 학생들은 건녕현(建寧縣)까지 따라가 서계를 송별하였가. 서계는 이들에게 문정선생(文靖先生) 공천윤(孔天胤)과 문질(文質) 선생을 배우고, 얻는 것이 작다 하여 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지방 독학 생활

서계는 황주부(黃州府)로 가는 도중 엄릉(嚴陵)을 지날 즈음, 절강안찰첨사독리학정(浙江按察僉事督理學政)으로 승진했다. 서계는 고향 화정으로 돌아가 7일 간 머물던 중 두 번째 정부인 장씨(張氏)를 맞이했다. 후에 모친 고부인의 명을 받들고 절강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서계는 가흥(嘉興)의 추시(秋試)를 주관하였다. 이때 호주(湖州)에서 온 한 수험생이 낙방하자 서계에게 원인을 물었고, 서계는 "글이 난삽한데 어떻게 합격할 수 있는가?"라고 답하였다. 고시생이 원망 섞인 말투로 말하였다. "과거란 참 어렵습니다. 저번엔 주고관(主考官, 즉 감독관)이 남삽한 문장을 좋아하길래 난삽한 글을 쓰면 되었는데, 이번 주고관께서는 평이한 문장을 좋아하실 줄 몰랐으니, 어떻게 할 수 있을런지요?" 서계는 꾸짖으며 말하였다. "만약 그대의 문장이 난삽하면 제학(提學)이 평이한 걸 좋아하더라도 그대는 평이한 말투로 바꿔서는 안된다. 만약 그대의 문장이 평이하면 제학이 난삽한 걸 좋아하더라도 그대는 난삽한 말투로 바꿔서는 안된다. 지금 그대는 주견이 없다. 타인의 기호를 맞춰주고자 누차 자신의 습관을 고쳤으니, 그렇다면 그대는 태평성대에는 군자가 되고 난세에는 소인이 되려는가?" 이에 고시생은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또 한 명의 생원(生員)은 답안에 “顔苦孔之卓(안회가 스승 공자의 탁월함에 미치지 못하여 괴로워하다)”이라는 것을 적었다. 서계는 이 구절이 매우 기괴하다 생각하여 학생을 4등으로 주고 시험지에 “杜撰(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평가하였다. 끝이 난 후, 생원이 와서 강평을 들으며 이 구절은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서계는 그자리에서 생원에게 사과하고 말하였다. "본 학도(學道)가 운좋게 젊어서 진사가 되었기에 학문을 제대로 배운적이 없었는데, 오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생원의 답안을 1등으로 고쳤다. 사람들은 서계의 아량을 칭찬하였다.절강에서 3년간 독학 생활을 하면서, 서계는 2차례 이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송대참삼봉후공입촉서(送大參三峰侯公入蜀序)'에서 서계는 절강 태주(台州)로 집을 옮겨 “여러 현사들과 서로 왕래하며 교제하고자 한다(與諸賢相追逐)”고 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가정15년(1536) 10월, 서계는 강서안찰부사제독학정(江西按察副使提督學政)으로 옮겼다.강서에서 서계는 문체를 바로잡고 선비의 습관을 단정히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한편, 왕수인(王守仁)의 심학(心學) 이념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왕수인의 사당인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를 세웠다. 이는 서계에게 호평을 가져다 주어, 많은 사인들이 가서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였다. 후에 서계의 가르침에서 나온 강서성 학생들은 대다수 조정 안팎에 관직에 진출하여 대성(臺省, 언관 등 감찰기관)에서 활약하며, 도처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서계는 본인은 엄숭(嚴嵩)이라는 이름을 매우 흠모하여 '기제엄학사영산당(寄題嚴學士鈐山堂)'이라는 시를 한 수 지어 엄숭의 절개를 찬양하기도 하였다. 한편, 하언(夏言)은 강서에 사는 친척이 행진(幸進, 요행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원하였으나, 서계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하언은 서계를 좋아하지 않았다.당시 세간에서 '사철어사(四鐵御史)'로 불리던 풍은(馮恩)은 적수(謫戍, 폄적되어 변방으로 유배되어 군호에 편입되어 변방 수어 임무를 맡는 처벌)로 광동(廣東) 뇌주(雷州)로 가는 길에, 강서 남창(南昌)을 지나게 되었다. 서계는 소식을 듣자마자 학생들을 이끌고 가서 풍은을 맞이했다.심지어 서계는 '증풍시어남강수뇌주(贈馮侍御南江戍雷州)'라는 글을 써주기도 했다.시는 풍은이 가정11년(1532) 장총과 방헌부(方獻夫) 등에게 반대한 후 하옥되어도 굴복하지 않는 충신과 정절을 칭찬하는 것이다.

북경으로의 귀환

가정18년(1539) 5월, 황태자(皇太子)가 입학하면서, 풍은이 하언에게 한 추천을 거쳐,하언과 서계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못하였음에도 하언은 서계를 북경으로 불러들여 사경국세마겸한림시강(司經局洗馬兼翰林侍講)으로 승진시키고 4품 복색을 허용하는데 동의하였다.서계가 북경으로 돌아가기 전, 고부인은 서계에게 황제가 장부경의 일 이후 서계를 기용하는 만큼, 성심성의로 일을 해야 하며, 자신을 그리워하여 공무를 그르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섭표와 이별할 당시 섭표는 서계에게 시를 써주었는데, 이를 통해 섭표는 선행이 지식이나 기술보다 더 중요하다고 충고하였다.서계는 북경에 가서 추수익(鄒守益), 당순지(唐順之), 나홍선(羅洪先) 등 선배들과 심학을 논하였다. 얼마 후, 가정19년(1540) 봄, 고부인은 북경에 유학하러 가는 서계의 동생 서척(徐陟)을 배웅하였으나, 여유가 생기면 서척이 급제한 후 형 서계와 함께 돌아와 자신의 70세 생일을 축하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 당시 서계는 동료 22명과 함께 고 예부상서(禮部尙書) 설선(薛瑄), 좌서자(左庶子) 동승서(童承敍) 등의 문묘(文廟) 배향 문제를 건의한 이유로 문제에 처하였다. 가정제는 조제(祖制)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고, 상주문에서 불경한 언어를 사용한 어사 여광순(呂光洵) 등에게 봉록 2개월치 삭감을 지시했다. 반년 후, 고부인은 돌연 사망하였으며, 이에 서계는 가정20년(1541) '오월오일회태공인(五月五日懷太恭人)'이라는 시를 썼다.시에서 서계는 모친에 대한 그리움을 읊었다.모친 사망으로 재차 정치 중심으로 들어간 서계는 상을 치르고자 귀향하였고, 모든 관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가정21년 12월(서력 1543년 초), 상기가 끝난 서계는 조정에 돌아가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에 승진임명되었다.재임 중 서계는 국자감의 발력(撥歷)을 정리했다. 원래 국자감에는 감생(監生)을 각 부(部)에 파견하여 일하게 하였으며 이부문선사(吏部文選司)가 열었으나, 서계가 부임한 후에는 각 감생의 구체적인 업무 일자는 매월 방문(榜文)으로 공개, 이전에 존재한 '투발(偷撥)' 등의 폐단을 두절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서계는 뒷문으로 들어오는 권귀들을 거절하였다. 이에 감생들은 서계를 존중하였다. 이후 서계는 감생에게 지급되는 선은(膳銀, 일종의 학비)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전 좨주들은 선은을 분배하는 문제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았으며, 선은을 지급하고 관리하는 전권을 가진 전부(典薄)들은 대부분 선은을 횡령하면서 핑계를 대고 감생들에게 변명하였다. 이에 서계는 인원수를 기록하게 하고 매일 당관(堂官) 1명을 선발하여 전부들 곁에서 감독하게 하여, 감생들에게 선은을 전부 지급하게 하였다. 이후 매월 파견하는 당관에게 전부(典薄)를 따라 찬미(饌米)를 내어주게 하고, 횡령하는 것을 방지하게 하였다. 후에 직언으로 이름 난 많은 언관(言官)들도 서계가 좨주였을 당시의 문생(門生)들이었다. 양계성(楊繼盛)의 경우, 서계로부터 '일명천재(一名奇才)'로 지칭되었으나 지도가 결여되었다.

육부를 전전하다

가정23년(1544) 11월, 서계는 정적이 두드러져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으로 승진하였다. 1개월이 채 안 되어 다시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으로 전직하였다.당시 서계는 곧바로 담벼락에다가 자신은 21세에 급제하였고 43세에 천관(天官), 즉 이부상서를 보좌하게 된 것은 국가의 은혜 덕분이라고 적었다. 임기 중 서계는 조용히 보신하지 않았으며 관리의 청렴을 독려하였다. 또한 기존의 이부의 풍토를 바꾸어 자신을 낮추었으며, 부하관원에게 변방 수비나 지방관들의 행정을 물었다. 이로 인해 많은 관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당시 이부상서 웅협(熊浹)의 신임을 얻었다. 가정24년(1545) 3월, 서계와 웅협 및 도찰원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 주용(周用) 등이 하급 관원의 고찰(考察, 인사고과)을 실시하였다. 선례에 따라 이들은 먼저 자진사퇴를 요청하였고, 이후 가정제는 지를 내려 성심성의껏 고찰을 시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후에 웅협이 직언으로 간언하는 바람에 파직되면서, 가정24년 12월, 서계는 이부우시랑애서 이부좌시랑으로 승진하였고, 형부(刑部)에 있던 한방기(韓邦奇)가 서계의 보좌가 되었다. 후임 이부상서 당룡(唐龍), 비채(費寀), 주용(周用)은 이전처럼 서계를 중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연로하고 많이 아팠던 탓에 서계는 이들을 대신하여 여러 차례 이부 업무를 장관하였다. 이때 많은 이들로부터의 뇌물 증여 시도가 있었음에도 서계는 모두 거절하였다. 또한 후에 서계가 추천한 송경(宋景)이나 장악(張岳) 등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워 중임을 맡을 만한 대신이었다.

가정25년(1546) 7월, 이부 선발에서의 문제로 인하여 이부상서 당룡은 연로하고 쇠약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고, 부하 서계 역시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는 상태에서 봉록이 2급 강등되는 처벌을 받았다. 8월, 서계는 예제(禮制)에 따라 '제사직(帝社稷)'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에 제주를 보좌하였다.후에 서계는 대선(大選, 관리 선발)의 구체적인 방법을 확정하는 책임을 맡았다. 서계는 우선 이전에 사용하던 품계(品階) 및 자력(資歷)을 이용하는 복잡한 절차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중하 삼등급으로 나눠, 상중하를 각자 인사 문서에 적어 두는 방식으로 함으로써 공력을 아끼게 뒤었다. 이로 인해 서계는 칭찬을 받았다. 가정26년(1547) 주용이 사망하면서 문연(聞淵)이 이부상서가 되었고, 6월, 서계와 함께 제사직 제사를 지냈다. 후에 문연이 선배 신분을 이용하여 독단적으로 행동하면서 서계는 불쾌해 하였고, 상주를 올려 전직을 요청하였다.이에 서계는 이부에서 벗어나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를 겸임하였고, 장거정(張居正) 등이 있던 서길사(庶吉士)들을 가르쳤다. 8월, 서계는 3품으로 임기 3년을 다 채운 것으로 인해, 아들 서번(徐璠)이 국자생(國子生)이 되었다.

가정27년(1548) 2월, 서계는 한림원(翰林院)을 장관하였다.8월, 서계, 구양덕(歐陽德), 문연 등은 역대 제왕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가정28년(1549) 정월, 엄숭(嚴嵩)이 대신협보(大臣協輔)를 산선할 것을 요청하였다. 2월, 이부는 문연, 장치(張治), 한방기(韓邦奇), 구양덕, 이본(李本), 서계를 정추(廷推, 명대 고급 관원 인사 제도 중 하나로, 조정 대신이 추천하고 황제가 선발하는 제도)하였고, 가정제는 장치(張治)와 이본(李本)의 이름을 합치면 '치본(治本, 정치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장치와 이본을 선발하여 입각(入閣, 내각에 들어감)시켰다. 서계는 며칠 뒤 손승은(孫承恩)을 대신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당시 서계와 동료들은 엄숭소사대학사상(嚴嵩少師大學士像)에 들어갈 찬사를 썼는데, 서계는 엄숭의 덕행이 비길 바가 없다고 칭찬하였다.

예부 관장

3월, 장경태자(莊敬太子) 주재학(朱載壑)이 관례(冠禮)를 올리면서, 서계는 예부상서로서 칙계(敕戒)를 선독하였다.그러나 태자는 이틀 만에 사망하였다. 서계는 태자 시호를 '장경'으로 한다는 책(冊)을 받들고 예부에게 천하에 반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예부를 데리고 장례 의례 관련 초고를 작성하는 책임을 담당하였다. 서계는 두예(杜預)가 찬술한 『통전(通典)』을 가지고 가정제에게 설명하여, 태자는 사망하였지만 책봉한 지 오래 되었으며 감국(監國) 경험도 있기에 백관의 복상(服喪)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엄숭은 가정제가 내린 '백관의 복제는 없다(百官服制可無)'는 성지를 이유로 백관들에게 청의(青衣)를 입고 각대(角帶)를 두르게 하였다. 서계는 강렬히 반대하였다. 서계는 소의(素衣)를 입고 곡상(哭喪)하는 것은 이전에 사례를 기재한 적이 없으며, 가정제의 지시도 없었는데 누가 감히 마음대로 이러한 일을 저질렀는가라고 생각하였다. 서계는 차라리 예법을 지켜 처벌되는 것이 낫지 처벌을 피하고자 예법을 파괴하지는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곡림(哭臨) 시에 한 환관이 가정제에게 보고하였고, 가정제는 전원 최복(衰服, 상복)으로 갈아입을 것을 지시하였다.

곧이어 서계는 『대명회전(大明會典)』 편찬 사업의 부총재(副總裁)에 임명되었다. 가정8년(1529) 당시 한림원 편수였던 서계는 양일청(楊一淸)을 총재(總裁)로 한 『대명회전』 편찬 사업의 찬수관(纂修官)으로 임명된 적이 있었다. 이때 서계는 양일청이 가정8년부터 가정23년(1544)까지 작성한 초고와 여러 사(司)들의 새로운 사례들을 가지고 네 차례 수정하였고, 가정29년(1550) 5월에 120권의 회전을 완성하였다. 서계는 완성된 것을 가지고 직접 가정제에게 갔다.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가정중수대명회전(嘉靖重修大明會典)』은 결국 간행되지 못하였다. 만력(萬曆)15년(1587) 대학사 신시행(申時行)을 총재로 한 『만력중수회전(萬曆重修會典)』 228권을 간행하였다.왕세정(王世貞)은 서계가 중수한 대명회전에 대하여 '뜻과 체례를 창술하였고 강령을 권하였으니, 정연한 일대의 정서이다'라고 고평가하였다.

무일전 입직

가정28년(1549) 6월, 서계는 청사(靑詞)를 잘 써서 가정제로부터 총애를 받았다.가정제는 서계를 무일전(無逸殿)으로 불러 대학사 장치와 이본과 함께 서계에게도 비어복(飛魚服)을 하사했다.서계는 무일전에 입직한 후에 내전(內殿) 근무 태의(太醫) 선발 제도를 정돈하였다. 서계는 어의(御醫) 오몽룡(吳夢龍)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봉급만 타먹으면서 마음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며, 궁궐 내 의사 대부분이 은례(恩例)로 들어오고 예부의 3년 고선(考選)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주하였다. 또한 서계는 예부와 태의원(太醫院)의 선발 및 고찰 과정에 변동을 가하여 모든 의사는 3등급으로 나누고 최상등 인재만을 내전에 남기고 나머지는 보내어 공봉(供奉)하게 하고, 태의원으로 하여금 당관(堂官)을 파견하여 직에서 도망가지 않도록 감독하고, 병으로 계속 이어나가지 못할 경우 보고하도록 하였다. 가정제는 동의하였소, 상주문에서 언급한 오몽룡 등은 모두 혁직(革職)되었다. 서계는 보다 심도있게 조사하여 시험을 본 적 없는 의사 후시태(侯時泰) 등 24명도 파직 처벌하였다. 8월 하순, 습천왕(隰川王) 주준백(朱俊柏)이 130여명의 명봉혼록(名封婚祿)을 받은 적 없는 종실자녀들을 은닉하여, 서계가 상주문으로 참핵하여 산서순무(山西巡撫)와 산서순안어사(山西巡按御史)가 철저히 조사할 것을 보고하였다. 9월 하순, 서계는 문연의 사직으로 비어버린 예부상서직을 이어받도록 회추(會推)되었으나, 가정제는 서계가 소심하고 신중하며 자신과 매우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외천(外遷)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하방모(夏邦謨)를 임명하였다.

10월, 금릉(金陵)의 향시(鄕試)에서 서계 아들 서번이 대리응시를 요청한 사실이 적발되어, 남경육부(南京六部) 관원 만문채(萬文彩), 양순(楊順), 장감(張鑒)은 이를 이유로 서계를 탄핵하면서 서계의 면직을 요구하였다. 서계는 상주하여 스스로 파직을 요청하였지만 가정제는 서계가 북경에 와 있기 때문에 아들이 남경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것을 몰랐다는 이유로 서계를 그대로 두었다.다음해 4월, 예부는 오래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니 황제가 교제(郊祭)를 지낼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서계는 서교(西郊)에 파견되어 청의와 각대를 두르고 예를 행하였다.그러나 이때 서계는 섭표의 신원을 요청하였다. 서계는 하언(夏言)으로 인해 파직된 섭표가 '재주가 크니 기용할 만하다(才大可用)'고 문서를 작성하였고, 섭표는 다시 조정에 들어가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함으로 순천순무(順天巡撫)에 임명되었고, 이후 경술지변(庚戌之變) 발발 당시 섭표는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이었으며, 경술지변에서 공적이 두드러져 서계에게 많은 도움을 안겨 주었다. 경술지변 후에도 서계는 섭표를 추천하는 상주를 작성, 섭표를 통해 일하지 않는 내외 신하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술의 변

가정29년(1550) 8월 초4일, 만수절(萬壽節)을 맞이하여 가정제가 신하들에게 포상하여, 엄숭은 상주국(上柱國)이 되었고 서계는 태자소보(太子少保)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서계는 북경성의 군대가 오랫동안 조련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아는 적들이 경영(京營) 부대를 격파시킬 수 있으므로 위망 있는 장령들을 석방하여 근왕(勤王) 부대를 신속 집결시켜서 반격할 것을 건의하였다. 8월 17일, '엄답(俺答)'으로 불렸던 알탄칸(Altan Khan)은 북경 인근 통주(通州)를 침공하여 노략한 상태에서, 서계는 잇달아 '어로조의(御虜條宜)'와 '청환대내병소견대신계의변사(請還大內並召見大臣計議邊事)', '답변사유(答邊事諭)'라는 상주문을 작성하였다. 가정제는 상주문들을 채택하였다.더욱이 3일 후인 8월 20일, 서계는 다시 '청순시구문(請巡視九門)' 상주문을 올려 대신들을 파견하여 순성(巡城)에 나서도록 하였디만 방어 무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고 군사들은 매우 산만하기 때문에 예부상서로서 직접 순성에 나서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가정제는 지를 내려, 서계가 구문수장(九門守將)에게 적군이 북경성에 임박하짐 않았지만 성벽 방어에 주의해야 하며, 시간에 따라 성문을 개폐하고 업무에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알탄칸은 북경성 아래까지 임박하여 명으로의 조공(朝貢)을 요구하였다. 이에 가정제는 엄숭, 서계, 이본이 서원(西苑)에서 대책을 상의하라고 조를 내렸다.엄숭은 가정제를 안정시키고자 알탄칸은 식량을 탈취하러 온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였지만, 서계는 알탄칸이 살인방화를 일삼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후 가정제는 다시 공서(貢書)에 관한 일을 물었고, 엄숭은 예부의 일이라고 책임을 회피하였다. 서계는 정세가 위급하나 성내 수비병은 반격 능력이 없으니 당장은 적을 격노하게 하지 말고 시간을 끌면서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한편, 공서에 한문으로 글자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시간 끌기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정제는 서계의 계책을 채택하였다. 엄숭도 대세를 따라 가정제에게 조정에 임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였다.

두번째 날, 서계는 여러 신하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상의하게 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고, 국자사업(國子司業) 조정길(趙貞吉)은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심속(沈束)과 주상문(周尙文) 안건이라고 직접 말하였다. 논의를 감시한 환관은 가정제에게 보고하였고 가정제는 만족해 하였으며, 조정길과 금의위(錦衣衛)가 함께 가서 군사들을 격려할 것을 지시하였다.며칠 후, 서계는 예부 명의로 신하들과 정식 상주하여, 시간 끌기 계책을 관철할 것을 건의하였고, 가정제는 지를 내려 변방 군대가 빨리 와서 원조할 것을 지시하였다. 서계는 후에 친구와의 서신에서, 당시 당국자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세운 대책은 없었기에 자신의 행위에 숨겨진 배후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계책을 진헌할 때에는 당국자들에 대하여 비꼬는 부분이 있었는데, 간접적으로 엄숭과 이전의 언론이 대립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엄숭은 서계를 미워하였다. 또한 이전에 하언이 지방으로 떠돌던 서계를 뽑아 올린 것과 가정제가 서계를 중시한 것으로 인하여, 엄숭은 서계를 압박하기로 결정하였다.경술의 변 당시 서계가 보여준 행동들은 많은 역사가들로부터 칭찬받았다. 즉 북경성 수비책략은 대부분 서계로부터 힘입었으며,많은 부분에서 서계의 책략을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경술의 변 종료 후, 서계는 경군(京軍)의 전투력 증강과 동시에 군비 지출 감축을 기도하였다. 서계는 불필요한 경조반군(京操班軍) 철회를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줄일 수 있었다.

사상

정덕(正德) 15년(1520), 심학(心學) 계승자 섭표(聶豹)는 서계의 고향 화정현(華亭縣) 지현(知縣)에 부임하였다. 서계는 학식이 뛰어났기에 섭표는 서계에게 왕수인(王守仁)의 심학을 전수하였다. 좌사(座師) 섭표의 영향 하에 심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 및 "인애(仁愛)" 등 사상에 대하여, 서계는 이를 조정에 대한 자신의 이상에 대입시켰으며, 인민애물(仁民愛物)은 천리자연(天理自然)이며 만물은 '인애(仁愛)' 두 글자로 결부된다고 보았다.서계는 고인(古人)들의 문학(問學)의 목적은 덕성(德性) 추구였지만, 후인들의 학문은 학(學)과 덕(德)을 분리시켰기에 그 본의를 잃었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정치는 부덕해지게 되고, 도덕(道德), 훈업(勳業), 문장(文章)이 각각 세 길로 나뉘었다는 것이다.서계 인식 속에 위정자들은 인애라는 양지(良知)를 우선 자기 몸에 시행하고 다음엔 천하에 베풀며, 이렇게 해야 지행합일과 정학불이(政學不二)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후에 서계는 손승은(孫承恩)이 사직할 때에 서(序)를 지어 조정 대신 중에 교묘하고 화려한 말로 황제에게 아부하여 총애를 얻게 되는 자들은 훗날 득세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계책이 성공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니, 사실은 후환으로부터 도망가지 못하게 되며 국가 대사도 일로 인해 망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서계는 여러 관점을 재출하였을 뿐 아니라 후에 다시 경사로 돌아가 관직에 올랐을 때 나홍선(羅洪先) 등 왕씨심학(王氏心學) 전승자들과 함께 유학하며 토의하였다. 또한 영제궁(靈濟宮)에서 강학하기도 하였으며 훗날 매번 수 천 명의 학도들이 영제궁에서 강학을 들을 때마다 수많은 조정 관원들의 위정 이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권력 장악 이후, “위복은 주상께 돌려드리고 정무는 여러 부서에 돌려주며 인사와 상벌은 공론에세 돌려주자(以威福還主上, 以政務還諸司, 以用舍刑賞還公論)”는 것이 서계의 행정 대강이었다. 중국의 명대사학자 남병문(南炳文)은 자신의 연구를 통하여, 이 세 구에서 서계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곳은 내각(內閣)이 본직으로 돌아가고 육부(六部)가 지녀야 할 기능을 발휘하게 하여 내각의 하위조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서계는 이전의 하언(夏言)이나 엄숭(嚴嵩) 등은 전제 정치를 펼쳐 이후로는 이러한 일을 이어서 할 수 없었고, 내각의 권력을 육부에 나눠줘야 하였다고 생각, 내각과 부원(部院)의 관계를 재정비하려 하였다. 강덕성(姜德成)은 서계가 이전의 이른바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부(楊溥)의 이른바 '삼양(三楊)'의 내각 운영 방식을 추구하여 내각과 부원이 협력하면 전반 정치를 종합정리하는 내각의 직능을 발휘하고, 가정제가 조정에 끼치는 통제력을 간접적으로 견제하려는 것이었다가 본다.[ 담천성(譚天星)은 가정 연간은 내각과 부원의 관계의 전환점이었으며, 서계 역시 가정31년(1552) 내각에 들어가 '정책 결정 기관(決策層)'의 일원이 되었으며, 후에 '집행 기관(執行層)'인 예부(禮部)의 대소 사무를 겸직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각은 명분을 내세워 부원 사무를 개입하게 하였으며, 내각 구성원의 신분으로 사무를 처리하였으나 육부상서(六部尙書) 신분은 아니었다. 서계는 수보직에 오른 이후, 이런 배경 하에서 "以政務還諸司"라는 사상이 발생하였다.

서계는 퇴위 후, 정치에는 더는 관심 갖지 않았다. 해서(海瑞)의 퇴전(退田) 일 안건이 폭발하기 전, 장전산(張全山)은 이전에 이미 서계를 예방하였는데, 장전산은 서계에게 '인(忍)' 자를 서계에게 주면서 해서의 정치에 대하여 인내할 것을 당부하였다. 서계는 도리어 장전산에게 '망(忘)' 자를 주어서 당시의 심리를 드러내었다.

가족

고조부 : 서덕성(徐德成), 송강부 화정현 소증(小蒸, 현재 상해시 청포구(靑浦區)) 출신[190] 홍무(洪武)18년(1385) 출생, 일생 농민이었으나 고향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고 살생을 금하고 채식을 하였기에 고향에선 “서불자(徐佛子)”라고 칭함, 후에 왕씨(王氏)와 결혼하여 외아들 서현(徐賢)을 낳음[191]성화(成化)12년(1476), 서덕성과 왕씨는 각각 음2월과 4월에 사망함 증조부 : 서현(徐賢), 서덕성 아들. 영락(永樂) 연간 사람, 세 차례 대학사(大學士) 등에 추증됨, 처 심씨(沈氏)도 1품 고명부인(誥命夫人)에 추봉됨

장남 : 서인(徐仁), 후사 없음[193]

차남 : 서의(徐義), 처 제씨(諸氏)

삼남 : 서례(徐禮), 명락산거사(明樂善居士), 서계의 조부, 자 정의(廷儀), 다섯 차례 대학사 등에 추증되었음, 처 황씨(黃氏)는 처음 숙인(淑人)이었다가 후에 1품 고명부인에 추봉됨

장남 : 서보(徐黼), 서계의 부친, 호 사복(思復), 관은 영도현승(寧都縣丞)에 이름, “철돈(鐵墩)”이라 칭해짐

장남 : 서륭(徐隆) : 서계의 큰형

차남 : 서계(徐階)

장남 : 서번(徐璠), 서계의 장남, 자 노경(魯卿), 심부인(沈夫人) 소생, 관은 태상소경(太常少卿)에 이름

차남 : 서곤(徐琨), 서계의 차남, 자 양경(揚卿), 장부인(張夫人) 소생, 관은 상보사소경(尙寶司少卿)에 이름

삼남 : 서영(徐瑛), 서계의 삼남, 자 한경(翰卿), 장부인 소생, 육병(陸炳)의 딸과 결혼

장녀 : 서씨(徐氏), 서계의 딸, 광록소경(光祿少卿) 고종례(顧從禮)의 차남 고구석(顧九錫)과 결혼함

삼남 : 서진(徐陳), 서보의 삼남, 서계의 동생

사남 : 서척(徐陟), 서보의 사남, 서계의 둘째 동생

차남 : 서불(徐黻), 서례의 차남, 서계의 숙부

삼남 : 서면(徐冕), 서례의 삼남, 서계의 둘째 숙부

사남 : 서소(徐旒), 서례의 사남, 서계의 셋째 숙부, 응천부(應天府) 정덕경오향시(正德庚午鄕試)에 합격

사남 : 서지(徐智), 서현의 사남, 후사 없음


역대 서국(徐國) 국왕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황룡(黃龍)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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