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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가집]](四佳集) == | == [[사가집]](四佳集)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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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임청각]](臨淸閣) == | ||
+ | [[임청각]]에서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예언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임청각]]에는 정승 두 명이 태어났습니다. 조선조 중엽의 [[서성(조선)|서성]] 선생(1558년-1631)과 조선조 말엽의 유후조 선생(1798-1876)이 그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청각의 외손으로 모친들이 친정에 와서 이들을 출산했던 것입니다. | ||
+ | [[서성(조선)|서성]] 선생의 어머니([[고성 이씨 부인]])는 이명 선생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시각장애인었다고 합니다. [[서성]] 선생의 부친은 [[서해(조선)|서해]]라는 분인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서 숙부가 후견인이 되어 조카의 혼사를 진행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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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호헌]](蘇湖軒) == | ||
+ | 안동 소호헌(安東 蘇湖軒)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조선)|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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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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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약주]](藥酒) == | ||
+ | 선조 때에 문신 [[서성(조선)|서성][(徐渻)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임원경제지』에서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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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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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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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약식]](藥食) == | ||
+ |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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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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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약과]](藥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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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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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약포]](藥脯) == | ||
+ |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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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
2024년 3월 9일 (토) 12:47 기준 최신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1486년(성종 17)에 완성된 인문지리서이다. 권1~2는 경도京都, 권3은 한성漢城, 권4~5는 개성開城, 권6~13은 경기도, 권14~20은 충청도, 권21~32는 경상도, 권33~40은 전라도, 권41~43은 황해도, 권44~47은 강원도, 권48~50은 함경도, 권51~55는 평안도의 인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머리에 그 도의 전도全圖를 싣고 이어 연혁沿革, 풍속風俗, 묘사廟社, 능침陵寢, 궁궐, 관부官府, 학교, 토산土産, 효자, 열녀, 성곽, 산천, 누정樓亭, 사사寺社, 역원驛院, 교량, 명현名賢의 사적, 시인의 산천이나 누정 등을 대상으로 주변의 풍광과 이를 보는 감흥을 읊은 시가詩歌인 제영題詠 등을 실었다. 이 중 풍속 편에서 다양한 형태의 민속놀이를 확인할 수 있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농경의식의 하나인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길쌈이라고도 한다. 대부분 정월대보름에 시행된다. 줄다리기 행사가 결정되면 양편은 각각 조직화되는데, 조직 상부는 대장(편장·줄패장)과 중장中將, 소장小將으로 구성되고, 애기장군이 추가되는 경우도 있다. 대장은 각 편의 총책임자로 행사의 진행을 지휘·감독할 뿐 아니라, 비용 충당에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마을의 유지가 선출되는 것이 관례이나 자원하는 경우도 많다.
줄다리기 장소에 도착하면 양편은 줄목을 끼우는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암줄의 목줄에 수줄의 목줄을 끼우고 목나무로 고정시키는 것은 남녀의 성기 삽입을 상징하는 행위로 보이며, 이때 음란한 말들이 오가며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진다. 일단 줄목이 끼워지고 신호에 따라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풍물패와 양편 주민의 응원이 어우러져 한바탕 굿이 벌어진다. 승패는 한 번 당겨서 기준점을 넘어간 것으로 가리는 것이 원칙이나 세 번 당겨서 두 번 이기는 쪽의 승리로 결정하기도 한다. 고서古書에는 이긴 편이 풍년이 든다는 기록이 일반적이다. 구전되는 바는 서편(여성 편), 즉 암줄을 당기는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신으로 말미암아 서편이 이기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동편이 일부러 져 주는 사례는 없다고 한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동편, 즉 남성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특수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삼척 오금잠제烏金簪祭: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마을의 수호신격인 오금잠신烏金簪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오제이다. 오금잠놀이 또는 오금잠굿라고도 한다. 이 행사는 음력 4월 초부터 5월 단오까지 한 달간 무당 집단이 주도하는 마을굿 형태로 진행된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오금잠제는 금비녀 모양의 신체를 신격화하여 단오날 굿당에 모셔다 놓고 올리는 마을굿이었다. 이는 동해안 일대에서 나타나는 단오굿의 고형이다. 오금잠제는 18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동해안 일대에 거행된 단오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마을굿이었다.
오금잠제는 1993년에 오금잠놀이로 재현되었는데, 오금잠제 모시기(제례)─오금잠신굿(축원)─놀이굿(제수나눠먹기)─뒤풀이(화합) 과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민속 행사는 동해안 마을굿의 원형이며, 단오 문화권에서의 풍년 기원제이며, 고대로부터 전승된 왕신격이면서 서낭신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오금잠신은 ‘백두옹白頭翁’이라는 갈야산葛野山 산신으로 변신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위협적인 신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제의를 유지시키려는 무당들의 악령의식에서 생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오금잠을 남성 상징으로 추단하였고, 오금잠신이 물을 다스리는 신력을 지녔다고도 하여 풍년 기원의 무제임이 주장된 바 있다. 삼척 부사가 금하여도 향리들이 주도하여 오금잠제가 계속 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오금잠제를 통해 지역 내에서 나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실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읍치성황사에서 오금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 전통은 최근까지 계승되어 1980년대 초까지 삼척의 읍치성황사(현재 성북동 성황당)에서 단오에 굿을 하였다. 이와 함께 무당들이 살을 풀어 주고, 복을 기원해 주며, 이에 주민들이 각종 물건을 봉헌한 전통은 내륙의 단오굿이나 해안지역의 별신굿 현장에서 무녀가 주민 개개인들의 1년 운세를 짚어 보고, 소지를 올려 주며, 액살을 풀어야겠다고 공수를 내려 주면 굿 말미에 액막음(용왕제龍王祭)을 지낸다는 점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오금잠제 전통은 집안 단위로 행해지는 산메기로 잔존하여 명맥이 유지되었으며, 마을 단위로는 내륙에서 미로 단오굿이나 근덕 선흥마을 단오굿과 같은 형태로 주변 마을을 아우르는 마을굿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해안 마을인 삼척 근덕면 초곡리와 궁촌리 등에서 단오에 즈음하여 2~10년을 주기로 마을 단위의 별신굿으로 계승되고 있다.
봉의산 축성놀이: 봉의산 축성놀이는 지금부터 700 ~800여 년 전 글안족과 몽고군이 침략할 무렵에 이 고장을 지키려고 산성을 쌓을 때 행하던 놀이를 재현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봉의산성의 둘레는 2,463척, 높이는 열 척이라고 한다.
봉의산 축성놀이는 전체 네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과장은 행진 시작(입성)으로 두 편으로 갈라 영기令旗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한다. 농악대가 앞서 행진하면서 흥을 돋운다. 일꾼 차림에 짚신을 신고 머리에 수건을 맨 일행 50명 정도(각 25명)가 삽, 괭이, 망치, 도끼, 낫, 지게, 목도 등의 장비를 메고 <춘천아리랑타령>을 부르면서 입성한다. 제2과장은 작업 진행(축성)으로 농악을 울려 축성 작업 시작을 알리고 작업의 흥을 돋운다. 1조·2조 등으로 조를 나누고 돌 파내기, 목도질 하기, 돌 쌓기 등으로 구분해서 작업을 진행한다. 작업 중에 휴식을 취하면서 참 돌리기(담배 피우기), 춤 자랑 등 여흥을 곁들인다. 제3과장은 작업 완료(봉화)로 성 쌓기를 먼저 끝낸 편에서 환호를 하면서 봉화를 올린다. 진 편에서는 이긴 편이 봉화를 올리고 있는 동안 성 쌓기 마무리 작업을 한다. 성을 모두 쌓게 되면 이긴 편의 대장이 성 위에 올라가서 성을 완전히 쌓았음을 선언한다. 제4과장은 한마당놀이(산신제)로 미리 장만하여 차려놓은 제물로 산신제를 올린다. 성을 튼튼하게 쌓는데 부상자도 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리고 이 고장에 항상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한다.
홍천 팔봉산 당굿: 팔봉산 당굿 놀이는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9일에 마을 주민들이 홍천 팔봉산의 제2봉 정상에 있는 당집에 모여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당굿을 말한다. 당집을 삼부인당이라고도 하는데, 김씨, 이씨, 홍씨 세 부인을 기리는 당집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400년 전인 1590년부터 마을의 평화를 위해 기원을 해 왔다고 한다. 팔봉산 당굿은 크게 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마당은 칠성신군과 후토신군에게 제사를 드리며, 둘째 마당은 세 부인에게 기원을 드린다. 셋째 마당은 무당들의 만신굿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김해 석전놀이: 1520년(중종 5)에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김해의 석전사들이 전라도까지 원정하여 왜구 토벌에 결정적인 활약을 하였음이 『동국여지승람』에 명시되어 전한다. 이렇듯 무기가 근대화 되지 못했던 시대에 전투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돌팔매질이 하나의 놀이로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조선시대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김해 지방에서는 매년 음력 사월초파일 무렵부터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성의 남쪽 지역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좌·우부로 나누어 편을 가르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기상을 돋우고 돌을 던져 상대편을 공격하는데 마치 돌비가 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사상자가 생겨도 승부가 가려질 때까지 싸웠다고 하며 음력 오월 단오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말뛰기놀이: 말뛰기놀이는 제주도에서 주로 이루어진 민속놀이로 『동국여지승람』 및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영등굿’, ‘말뛰기놀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월 초하루에 제주도의 귀덕·김녕·애월 지방에서는 열두 개의 나무 장대를 세우고 신을 맞아서 제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긴 나무 장대 끝에 색채 비단으로 꾸며 말뛰기놀이를 한다. 이날밤에는 등불을 매달아 켜므로 이 제의를 ‘영등굿’이라고 하며, 2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보름에 마친다. 곧 2월 초하루부터 15일 사이에 장간長竿을 세우고 신을 즐겁게 하였으며, 이때 말머리 같은 가면을 써서 말을 꾸미고 비단 안장을 채워 영등신을 모신 후, 놀이터로 와 흥겨운 한마당을 벌인다. 이렇게 하면 연등을 제사한 것이 되어 바다에 나가도 재난을 당하는 일이 없고, 각 가정에서도 초복제화招福除禍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징 및 의의
『동국여지승람』은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및 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더불어 조선 성종 때 이루어진 편찬 사업의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각 지역별로 연혁은 물론 지리·교육·인물·풍속 등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특히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형성·전승시키며 향유했던 민속놀이의 유래를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옛 민속놀이에 대한 기록이 여느 분야의 기록에 비해 미미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충주 줄다리기·삼척 오금잠제·봉의산 축성놀이·홍천 팔봉산 당굿·김해 석전놀이·말뛰기놀이 등의 연행 양상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은 놀이의 전승 맥락을 이해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관련 기록 정보를 통해 민속놀이의 재구·보존·계승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 ~ 1488(성종 19)
목차
- 1 달성군 사가정 (達城君 四佳亭) 가계도
- 2 개요
- 3 가족
- 4 내용
- 5 서거정이 인재배출 물꼬 튼 지 100년 후…대구 유학 르네상스 시대 열려
- 6 구암서원(龜巖書院)
- 7 사가정역(四佳亭驛)
- 8 사가정길(四佳亭)
- 9 사가정공원(四佳亭公園)
- 10 서거정선생묘지석(徐居正先生墓誌石)
- 11 서거정(徐居正) 선생 탄신 6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
- 12 경국대전(經國大典)
- 13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 14 동국통감(東國通鑑)
- 15 오행총괄(五行摠括)
- 16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17 동문선(東文選)
- 18 역대연표(歷代年表)
- 19 동인시화(東人詩話)
- 20 필원잡기(筆苑雜記)
- 21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 22 사가집(四佳集)
- 23 임청각(臨淸閣)
- 24 소호헌(蘇湖軒)
- 25 약주(藥酒)
- 26 약식(藥食)
- 27 약과(藥果)
- 28 약포(藥脯)
- 29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30 이섭대천(利涉大川)
- 31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32 같이 보기
달성군 사가정 (達城君 四佳亭) 가계도
- 증조부 :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개요
조선 전기의 훈구파 문신. 15세기 관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시인 겸 문장가로 꼽힌다. 호는 사가정(四佳亭).[*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내용
본디 수양대군의 오른팔 중 하나[* 김시습도 서거정은 배신자이니 뭐니 비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서거정은 과거급제 이전 나이 20대초부터 수양대군과 친하게 지내고 수양대군과 같이 24살 젊은 나이로 명나라로 다녀오는 비서직을 맡았을 정도로 처음부터 수양대군 밑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명나라로 가던 길에 서거정은 갑자기 깨어나 울었는데 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사옵니다라고 간청하여 조선으로 돌아와 진짜로 죽은 어머니 장례에 참가했다는 야사도 있다.]로,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당시 사명(辭命: 왕명을 전달하는 외교문서)의 대부분을 전담한 인물이다. 세조 때에는 공조참의ㆍ예조참의ㆍ이조참의ㆍ형조참판ㆍ예조참판ㆍ형조판서ㆍ성균관지사ㆍ예문관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연이어 제수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오행총괄(五行摠括),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사가집(四佳集), 역대연표(歷代年表),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 동인시문(東人詩文), 향약집성방언해(鄕藥集成方言解), 마의서(馬醫書), 유합(類合) 등이 있다. 법전ㆍ역사ㆍ지리ㆍ문학 등의 분야에 걸쳐서 활약했다고 할 수 있다.
1488년(성종 19) 향년 69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았다.
서거정의 역사 의식은 당대 정치권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데 먼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으며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하였음을 내세웠다.
『동문선(東文選)』에서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담았음을 표방했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한국의 독자성과 위대함을 알리는 쪽에 치중하였으나 훗날 성종의 왕명에 따라 사림파 인사의 참여 하에 내용들이 개찬되었다.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말년에는 대거 등용된 사림들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투합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성종대에 등용된 사림들이 작성한 실록에는 대단히 부정적인 소인배로 묘사되었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 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그를 작게 여겼다.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
15세기 훈구파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16세기 사림파의 시대가 열리는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구라고 할 수 있다.
서거정이 인재배출 물꼬 튼 지 100년 후…대구 유학 르네상스 시대 열려
대구를 대표하는 인재 서거정을 배향하고 있는 대구 북구 산격동 구암서원. 서거정은 달성을 세거지로 한 대구 서씨로, 외가인 경기도 임진현에서 태어났지만 항상 자신의 뿌리가 있는 대구를 ‘내 고향’이라 부르며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대구시 수성구 파동에 있는 옥산전씨 집안 재실 무동재(왼쪽).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한 전경창을 모시고 있다. 오른쪽 비석은 전경창의 뜻을 기리는 유허비다.
대구는 ‘인재의 요람’이다. 특히 조선시대 들어 역사의 중심에 선 걸출한 인물들이 대구에서 배출됐다.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서거정(徐居正)을 비롯해 1458년 문과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한 도하(都夏), ‘문무를 겸비한 호걸’ 양희지(楊熙止)가 대표적인 조선 전기의 인재들이다. 16세기 조선 중기에는 연경서원이 건립되면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당시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한 전경창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대구 성리학의 스승’으로 불릴 만큼 명성이 높았다. 특히 전경창은 채응린, 정사철과 함께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기도 했다. 연경서원 건립과 비슷한 시기에 한강 정구가 대구에 정착하면서 학문 연구의 열기는 더욱 활기를 띠었고, 대구는 인재의 고장으로 발돋움했다.
인재 배출의 물꼬를 튼 조선 최고 문장가 서거정
대구를 상징하는 인재를 꼽으라면 서거정(徐居正, 1420~88)을 빼놓을 수 없다. 서거정은 달성을 세거지로 한 대구 서씨로,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여섯 살에는 이미 시를 짓기 시작해 장안에 회자되기도 했다.
조선전기 최고 문장가 서거정
4번의 대과 등재된 ‘천재 중의 천재’
세종∼성종 45년간 조정서 중책 맡아
도하 등 과거급제 지역인재 적극 후원
대구에 대한 각별한 정, 詩로도 남겨
지방 교육의 시대 연 전경창 이황의 제자이자 대구 성리학 스승 인재양성 산실 연경서원 건립 주도
후학 양성에 힘쓴 한강 정구 전경창과 뜻 함께해 연경서원서 강학 손처눌 등 제자들과 ‘한강학파’ 이뤄 대구가 인재 요람으로 발돋움하게 돼
과거시험 이력도 화려하다. 서거정은 약관 19세 되던 1438년(세종 2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5세 되던 1444년(세종 26) 문과 식년시(式年試)에서 을과(乙科) 3위를 차지해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1457년(세조 3) 문과 중시(重試, 일종의 승진시험), 1466년(세조 12) 문과 발영시(拔英試, 중신·문무백관에게 임시로 실시한 과거), 1466년 문과 등준시(登俊試, 현직 관리들의 문풍 진작을 위해 실시한 과거)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네 번의 대과에 등재된 ‘천재 중의 천재’였다. 특히 그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45년 동안 조정에 머물며 중책을 맡았다. 오랜 기간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당대 문단을 주도했고, 국가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 주요 서적의 서문을 작성한 ‘서문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무엇보다 서거정은 외가인 경기도 임진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항상 자신의 뿌리가 있는 대구를 ‘내 고향’이라 부르며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지역 출신 관료들의 서울 집회소인 대구 경재소(京在所)의 책임자인 당상(堂上)을 맡아 상경하는 지역 인사들과 자주 교류하기도 했다. 이때 대구 소식을 접하며 지역 현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그런 서거정에게도 큰 걱정이 하나 있었다. 그는 ‘고향 대구’ 출신의 과거 합격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 늘 안타깝고 아쉬웠다. 실제 1444년(세종 26) 서거정이 문과에 합격한 후 10여년 동안 급제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고향 출신 인재를 중용하고 싶었던 서거정에게 이 문제는 늘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1458년(세조 4) 대구 출신 도하(都夏)가 문과 알성시(謁聖試)에서 장원급제하면서 맺혔던 한을 다소 풀 수 있었다. 서거정은 그해 금의환향하는 도하에게 ‘장원 도하가 환향하는 것을 보내는 시의 서’를 지어 고향 후배를 아끼는 애틋한 정을 드러냈다.
“‘내 고향’ 대구는 경상도의 큰 고을이다. 산천의 서린 기운으로 보아 마땅히 영재가 많이 배출될 만한데도 어찌 된 일로 수십년 동안 문헌이 조락하고 풍속이 투박해 문인재사(文人才士)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단 말인가? … 금년(1458년) 7월 도군은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또 장원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지금 행차에 도군은 찬란히 빛나는 비단옷을 입고 옥으로 된 관을 쓰고 먼저 조상의 묘소를 배알하여, 조정의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효리(孝理)를 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뜻을 선양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축하 자리를 마련해 친척 부로(父老)들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면 고을 사람들이 모두 와서 보고 감동해 문교를 좇아 ‘기필코 도군처럼 되고야 말겠다’라고 다짐할 것이니, 아! 이 사람은 ‘내 고향’의 구양첨(歐陽詹)이 아닌가?”
이후 서거정은 도하를 적극 후원했다. 그가 사간원 우사간으로 재직할 당시 도하를 우정언으로 추천해 같은 부서에 근무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도하의 장원급제 후 대구 출신 인재들은 나름대로 두각을 나타냈다. 10여년 동안 대구 출신 소과 합격자들이 수없이 배출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출사의 길인 대과(문과) 합격자는 여전히 나오지 않은 것이다. 문과의 시험관을 도맡았던 서거정은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1474년(성종 5) 대구 사람 양희지(楊熙止)가 문과 식년시에 급제하면서 16년 만에 도하의 뒤를 이었다. 양희지는 ‘문무를 겸비한 호걸’로 이름을 떨치며 승문원 정자, 주부를 거쳐 홍문관 수찬에 오른 대구의 인재였다. 서거정은 그런 양희지를 ‘도하의 뒤를 이은 인재’로 꼽으며 ‘내 고향(대구)이 노나라와 같은 학문의 고장으로 바뀔 일대 기회’라며 칭송했다.
서거정은 또 명문장으로 대구에 대한 각별한 정을 표하기도 했다. 지금도 명문으로 남아있는 ‘대구십영(大丘十詠)’이 그것이다. 대구십영은 대구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10곳을 소개한 칠언절구 시를 일컫는다. 서거정은 1488년(성종 19) 69세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대구 북구 산격동 구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2. 인재의 산실 연경서원과 한강 정구의 제자들
15세기 ][서거정]]이 대구의 문풍 진작과 인재 배출의 물꼬를 튼 후, 16세기 들어서 대구는 ‘학문의 고장’으로 거듭났다. 이는 대구가 ‘인재의 요람’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1565년(명종 20)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硏經書院)이 건립되면서 본격적인 ‘지방 교육의 시대’를 열었다. 연경서원은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의 아들 매암 이숙량(梅巖 李叔樑)과 대구 선비 계동 전경창(溪東 全慶昌)이 주도해 세워졌고, 이후 지역 인재 양성의 산파 역할을 했다.
연경서원 설립 후 이곳에서 학문을 닦고 연마한 대표적 유학자는 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전경창을 비롯해 송담 채응린(松潭 蔡應麟), 임하 정사철(林下 鄭師哲) 등이었다. 이들은 대구가 배출한 대표적 인재들로, 이 지역 성리학의 선구자로 이름이 높았다.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를 연 ‘1세대 인재’들이기도 했다.
특히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한 전경창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대구 성리학의 스승’으로 불릴 만큼 명성이 높았다. 1532년(중종 27) 대구 수성 파잠(巴岑, 지금의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난 그는 24세 되던 1555년(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했다. 30세 이전에 퇴계 문하에서 공부했고, 한때 가야산에 들어가 학문에 힘을 쏟기도 했다. 34세 되던 1565년에 연경서원 건립에 힘을 보탰고, 서원 설립 이후인 35세 때부터는 대구의 유림들과 교유하며 본격적인 강학에 나서며 후학을 양성했다. 42세 되던 1573년(선조 6)에는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丙科) 3위를 차지해 벼슬길에 올랐다. 관직은 검열·정언에 이르렀다. 대구시 수성구 파동에 있는 옥산전씨 집안 재실인 무동재에 모셔져 있다.
채응린 역시 학문이 뛰어나 27세 되던 1555년(명종 10)에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을사사화 이후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정사철은 선조 때 선사재(대구시 달성군 다사읍)에 서당을 열고 지역의 유림을 모아 강학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공산에서 창의해 대구지역 의병인 공산의진군의 의병대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연경서원 건립과 비슷한 시기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금호강 하류 사수(泗水, 지금의 대구 북구 사수동)에 터를 잡고 살며 강학을 하면서 대구의 문풍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대구에 정착한 한강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과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한 전경창 등과 교유하며 대구지역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연경서원에서 강학하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해 대구가 인재의 요람으로 거듭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한강의 대표적인 제자가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 투암 채몽연(投巖 蔡夢硯), 괴헌 곽재겸(槐軒 廓再謙), 양직당 도성유(養直堂 都聖兪), 서재 도여유(鋤齋 都汝兪), 동고 서사선(東皐 徐思選), 사월당 류시번(沙月堂 柳時蕃) , 도곡 박종우(陶谷 朴宗祐), 낙애 정광천(洛涯 鄭光天) 등이었다. 이들은 ‘한강학파’로 불리며 대구의 대표적 인재로 성장했다. 이 중 서사원, 곽재겸, 손처눌 등은 한강의 초기 제자들로, 스승을 만나기 전에는 한강의 벗인 전경창 아래에서 학문을 닦고 연구한 이들이기도 하다.
한강의 제자 중 모당 손처눌은 대구가 인재의 요람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1553년(명종 8) 대구부 수성리(지금의 대구시 수성구)에서 태어나 한평생 한강 정구를 스승으로 모신 그는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전란 중에 부모상을 당해 상례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0년, 48세 되던 해에 황청동(지금의 수성구 황금동) 부모 묘소 아래 거처를 마련했다. 이때 마련한 거처를 ‘영모당(永慕堂)’이라 했다. 이곳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부모에게 못한 효를 실천했다. 동시에 영모당을 중심으로 강학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영모당에서는 무려 202명의 제자를 배출해 대구가 인재의 요람으로 자리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모당이라는 호도 영모당에서 비롯됐다.
지금의 황금동은 임진왜란 이후 손처눌이 정착하며 개척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당시 ‘들녘(수성들)의 곡식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고 해서 황청동(黃靑洞)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저승을 뜻하는 황천(黃泉)으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가 많아 1977년 동명을 황금동으로 개칭했다. 손처눌은 1634년(인조 12) 세상을 떠났고, 1694년(숙종 20) 수성구 황금동에 있는 청호서원에 배향됐다.
구암서원(龜巖書院)
소재지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산79-1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후기 서침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1675년(숙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서거정(徐居正)을 추가배향하였으며, 1741년에 서성(徐渻), 1757년에 서해(徐嶰)를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崇賢祠)와 강당을 중수하고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숭현사, 3칸의 신문(神門), 5칸의 강당 등이 있다.
사우인 숭현사의 중앙에는 서침과 서거정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서해, 왼쪽에는 서성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대구 구암서원은 숭현사는 조선시대 애민정신과 사회지도층의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서원이다.
또한 대구시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서원이기도 하다.
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 서남쪽 숭현사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구계 서침 선생을 봉향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717년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하고 1718년 3월에 사가 휘거정 선생, 1741년 2월 약봉 휘성 선생, 1757년 8월 함재 휘해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1778년 본도유림이 서원 청액소를 올리고 1779년 유림과 본손 합의에 의해 서원수계를 받았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 됐다고 1924년 유림에서 복설했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이 증수됐다. 숭현사를 1974년 보수하고 1975년 2월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됐다가 대구직할시 승격 후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됐다.
1995년 대구시 북구 산격1동 연암공원 내로 옮겼다.
대구부민이 구계선생을 숭현사에 봉향하게 된 이유는 애민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구계선생은 조선 초 달성 서씨 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에 살았으며 임금이 달성이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다. 땅을 내주는 대신 지금의 영선시장과 서문시장 자리에 대한 세금을 서씨 일문에 받게 했다. 또한 남산고역과 동산일대 땅을 주고 두터운 상과 세록을 주겠다는 뜻을 보였다.
중요한 것은 구계선생이 이를 백성들에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구계선생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신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가문보다는 대구부민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청한 뒤 대구지방의 환곡이자를 한섬에 다섯되씩 감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국왕이 선생의 애국애족의 마음을 칭찬한 뒤 대구 도호부에서 이를 실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뒤 대구부민은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침의 은혜에 백성들은 감동했고 1665년 구암서원의 최초 건물인 숭현사를 세워 선생을 모셨다. 후대에도 선생을 기리는 일이 이어졌으며 1971년 달성 성내 중심부에‘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졌다.
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달성서씨대종회가 문중 서원 격인 옛 구암서원 소유권을 무상으로 대구 중구에 넘긴다.
6일 대구 중구청에 따르면 달성서씨대종회는 동산동·약령시 일원 도시재생뉴딜사업 추진을 위해 옛 구암서원(약 2500㎡)을 중구청에 기부하기로 했다.
구계 서침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옛 구암서원은 북구로 이전하기 전 자리했던 터로 현재는 한옥 숙박 등 전통문화체험관으로 쓰이고 있다.
옛 구암서원. 달성 서씨 문중이 서원을 중구에 기부채납함으로써 이 공간은 도시재생뉴딜사업의 주요 거점공간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구는 국가공모에 선정돼 이 일대를 대상으로 뉴딜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사업이 본격화되면 옛 구암서원은 고택 문화 전시와 숙박 체험이 가능하고 공연이 상설화되는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중구는 이 일대에 한옥이 밀집해 있는 점과 연계해 새로운 관광코스 개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근대문화골목과도 맞닿아 있어 많은 관광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중구청은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한 생활 인프라 개선, 골목경제 활성화 등도 추진할 방침이다.
류규하 중구청장은 "달성서씨대종회가 옛 구암서원을 중구 구민과 대구시민을 위해 내어주심으로써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의미있는 결정을 해주신 데 대해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뉴딜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기부채납 업무 협약식은 권영진 대구시장, 류규하 중구청장, 서영택 달성서씨대종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19년 12월 7일 오전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렸다.
사가정역(四佳亭驛)
서울 지하철 7호선 722번. 서울특별시 중랑구 사가정로 지하 393 (면목동 495번지) 소재.조선 초기 문신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사가정길(四佳亭)
사가정길은 아차산 한강 건너에 고원강촌(몽촌토성)에 거주하던 조선 초기 문신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사가정길은 동대문구 답십리동 498-1번지(신답사거리)에서 장안교를 거쳐 중랑구 면목동 1083-1번지(용마산길)에 이르는 폭 20m, 길이 4,200m의 2~4차선 도로이다.
사가정공원(四佳亭公園)
2005년 4월 13일 개장한 사가정공원은 면목동 면목약수터지구 입구에 약 3만 3천 2백여 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공원의 명칭은 용마산 부근에서 거주했던 조선 전기의 문인인 서거정 선생의 정취를 느낄수 있도록 그의 호를 따서 지어졌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시 4편을 골라 시비를 만들어 설치함으로써 공원이용객들이 산책과 함께 명시를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 외 피크닉장, 어린이 놀이시설, 체력단련시설, 건강지압로, 사가정(전통 정자), 다목적광장 등 다양한 휴게시설과 운동시설, 조경시설이 갖춰져 있다.
서거정선생묘지석(徐居正先生墓誌石)
서거정선생묘지석(徐居正先生墓誌石)은 조선 전기의 대학자인 서거정(1420~1488) 선생의 묘지석으로 1975년 도시계획으로 서울시 강동구 방이동에 있던 무덤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수습됐다.
서거정(徐居正) 선생 탄신 6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
조선 세종 때 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서거정(徐居正) 선생 탄신 6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언택트 비대면 방식으로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 생중계 방식으로 진행됐다. 행사는 윤재민 한국고전문학회 회장의 개회사로 시작됐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오행총괄(五行摠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역대연표(歷代年表)
동인시화(東人詩話)
필원잡기(筆苑雜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사가집(四佳集)
임청각(臨淸閣)
임청각에서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예언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임청각에는 정승 두 명이 태어났습니다. 조선조 중엽의 서성 선생(1558년-1631)과 조선조 말엽의 유후조 선생(1798-1876)이 그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청각의 외손으로 모친들이 친정에 와서 이들을 출산했던 것입니다. 서성 선생의 어머니(고성 이씨 부인)는 이명 선생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시각장애인었다고 합니다. 서성 선생의 부친은 서해라는 분인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서 숙부가 후견인이 되어 조카의 혼사를 진행했습니다.
소호헌(蘇湖軒)
안동 소호헌(安東 蘇湖軒)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약주(藥酒)
선조 때에 문신 [[서성(조선)|서성][(徐渻)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임원경제지』에서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식(藥食)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과(藥果)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포(藥脯)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