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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효시는 사탕수수 농장 취업 희망자 102명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삼은 미주 이민 100주년에 건립이 추진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이민선의 출발지인 인천시(월미도)에 2008년 개관했다. 미국 연방의회가 2005년 12월 제정한 '미주 한인의 날'(The Korean American Day)도 이민선 도착일을 기념한 것이다. |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효시는 사탕수수 농장 취업 희망자 102명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삼은 미주 이민 100주년에 건립이 추진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이민선의 출발지인 인천시(월미도)에 2008년 개관했다. 미국 연방의회가 2005년 12월 제정한 '미주 한인의 날'(The Korean American Day)도 이민선 도착일을 기념한 것이다. |
2022년 10월 23일 (일) 12:18 판
미국 시민권자 1호 서재필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효시는 사탕수수 농장 취업 희망자 102명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삼은 미주 이민 100주년에 건립이 추진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이민선의 출발지인 인천시(월미도)에 2008년 개관했다. 미국 연방의회가 2005년 12월 제정한 '미주 한인의 날'(The Korean American Day)도 이민선 도착일을 기념한 것이다. 2019년 뉴욕 맨해튼에 문을 연 한인이민사박물관은 미주 한인 이민사의 시작을 미국 시민권자가 처음 탄생한 1890년 6월 12일로 본다. 주인공은 서재필, 미국 이름으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서광효의 둘째아들로 전남 보성 외가에서 태어났다. 충남 논산의 친가에서 성장하다가 재종숙 서광하에게 입양됐다. 7살 때 서울로 올라와 외삼촌 김성근 집에서 한학을 배운 뒤 1882년 과거(별시문과 병과)에 최연소로 급제했다. 그 무렵 외삼촌 집에 드나들던 당숙 서광범을 비롯해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에 눈떴다.
임오군란으로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느낀 김옥균은 기골이 장대한 서재필에게 일본 도야마(戶山)육군학교에 유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1년간 수학한 뒤 1884년 7월 귀국해 고종에게 사관학교 설립을 주청했다. 그해 12월 급진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서재필은 일본에서 함께 공부한 조선인 생도와 조선에서 그가 조련한 사관들을 이끌고 행동대장으로 참여했다.
그 공으로 불과 20살의 나이에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청나라가 개입해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주역들은 역적이 됐다. 서재필은 김옥균 등과 일본으로 망명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생부와 아내는 자살하고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생모는 노비가 됐으며 형제들도 처형되거나 옥에 갇혔다.
조선이 일본에 쿠데타 주역들의 인도를 요구하자 서재필은 서광범·박영효와 함께 미국행 배를 타고 1885년 6월 1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잡일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밤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러던 중 교회 신자의 소개로 만난 독지가 존 홀렌백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의 해리힐맨고교에 다녔다.
그는 육군 군의총감부 도서관 번역 담당 사서로 근무하다가 1889년 컬럼비안대(조지워싱턴대) 부설 코크란대에 입학했다. 이듬해 컬럼비안대 의과대로 옮겨 1892년 졸업했다. 인턴을 거쳐 이듬해 의사 면허를 얻고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했다. 1894년 6월에는 미국 철도우편국 창설자인 조지 암스트롱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과 재혼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 영향력이 높아지고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사면·복권됐다.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해 중추원 고문을 맡았다. 1896년 4월 7일엔 고종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 서구 민권 사상 전파와 독립의식 고취에 나섰다. 독립문 건립과 만민공동회 개최 등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일본·러시아의 견제와 수구파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898년 5월 두 번째로 한국을 떠났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종군했다. 그해 말 종전 후 개인 병원을 다시 여는 한편 1905년 문방구 판매 사업에 뛰어들어 1914년 필립제이슨상사를 설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쓰기도 했으나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독립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 생업에만 매달렸다.
1919년 모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을 향한 열망이 다시 타올랐다. 이승만·정한경 등과 함께 4월 14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열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친한파 미국인을 규합해 한국친우회를 만들었으며,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해 일제의 만행과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와 1925년 호놀룰루 범태평양회의에도 참석했다.
1947년 7월 서재필은 83세의 나이에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최고고문 자격으로 다시 귀환했다. 그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파쟁에 휘말리기 싫다며 입후보를 거절했다. 정부 수립 후 1948년 9월 미 군용선을 타고 세 번째로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서재필은 1951년 1월 5일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의 몽고메리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유해는 필라델피아 공동묘지 납골당에 안치됐으나 1994년 4월 봉환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1990년 서울 독립문 옆에 동상이 세워졌고,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과 만년을 보낸 필라델피아에 각각 서재필기념관이 들어섰다. 2008년에는 워싱턴DC에는 한인 최초로 동상이 건립됐다.
1994년 유해 봉환을 전후해 역사학계에서는 서재필을 두고 격론이 일었다. 당시에도 공적을 인정하는 시각이 여전했으나 지나친 예우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1890년 이후로는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했다는 것이 부정적 평가의 요지다. 고국에 돌아와서도 한국어를 쓰지 않고 영어만 썼다거나 고종에게 절하지 않고 부모 산소도 찾지 않았다는 등의 비판도 제기됐다. 최근에는 서재필이 일제의 밀정 역할을 했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서재필의 서훈 등급을 비롯한 역사적 평가를 두고 얼마든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이를 끝까지 고수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더구나 그는 역적으로 몰려 가족이 몰살당한 처지 아닌가.
서재필은 개화파 선각자이자 독립유공자면서도 미국 공무원 1호를 비롯해 시민권, 의사 면허, 병원 개업, 미국인과의 결혼 등 한인 최초의 기록을 숱하게 세운 '아메리칸드림'의 선구자이자 재미동포의 비조(鼻祖)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재외동포정책 기조는 재외동포재단법 제1조가 명시한 대로 "재외동포들이 민족적 유대감을 유지하면서 거주국에서 그 사회의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서재필이 미국 사회의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것을 도와주는 게 모국의 역할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조금은 누그러질 수 있지 않을까.
개항기 갑신정변 과 관련된 관리. 독립운동가.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 1 개설
- 2 가족
- 3 생애 및 활동사항
- 4 서울독립문(─獨立門)
- 5 독립신문
- 6 독립협회
- 7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 8 서재필기념공원(徐載弼記念公園)
- 9 서재필의학상
- 10 서재필언론문화상
- 11 서재필기념회(서재필기념재단)
- 12 서재필박사 본가지
- 13 서재필 진료가운(徐載弼診療-)
- 14 필라델피아한인회(필라델피아韓人會)
- 15 한글 타자기
- 16 한국 사이클 역사(한국 자전거 역사)
- 17 천봉산(天鳳山)
- 18 대한노인회 논산시지회(大韓老人會論山市支會)
- 19 워싱턴의 서재필 동상
- 20 서재필 청소년 리더십 프로그램
- 21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22 이섭대천(利涉大川)
- 23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개설
본관은 대구(大丘).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제이슨(Jaishon, P.). 전라남도 보성 출신. 서광효(徐光孝)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에게 입양되었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생애 및 활동사항
일곱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번째로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 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 군사 훈련을 교육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여, 국왕으로부터의 승낙을 받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어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에 의해 성립된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도착한 지 4개월 뒤인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 서재필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 자살하고, 동생 서재창(徐載昌)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1886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했는데, 1889년 6월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자가 될 정도로 성적이 특출하였다.
그런데 서재필이 학교에 입학할 때, 미국 국적을 가지고 제이슨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었고, 가족들 모두가 희생되어 본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생활을 위해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졸업 후, 1889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Lafayette)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워싱턴시로 가서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아의과대학야간부(Columbia Medical College: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3년 6월 2등으로 졸업한 뒤,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다음해 6월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Amstrong, G. B.)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무렵 학생들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행위가 심하자, 이에 분개하여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편, 1894년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대개혁이 단행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리고 1895년 5월 박정양내각(朴定陽內閣)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갑자기 귀국할 수 없었다.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던 박영효가 고종 폐위 음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미국에 들려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사업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1896년 1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국민의 계몽이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 신문 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로부터 4,400원의 재정 지원을 받고,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으로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 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성공하자 뒤를 이어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소임을 다 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국민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속에 1897년 11월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이 건립되었다.
또한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리는 한편,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자, 이를 꺼려한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합의해 다시 미국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3·1운동 봉기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 의료사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전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해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전세계에 규탄하였다.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해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간행하여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자 우리나라의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일본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며,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가재(家財)가 완전히 파산되어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나가는 한편, 여러 병원의 고용 의사로 종사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장관 하지(Hodge, G. 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이 선포되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박영효(반남 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 이건 근거없는 풍문으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약 60년 전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박미(朴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D.C.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서울독립문(─獨立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門). 석조문. 사적.
독립신문
1896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지이다.
독립협회
1896년(조선 고종 33) 서울에서 조직된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
서재필기념공원(徐載弼記念公園)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강건한 삶을 살았던 독립투사 송재 서재필 선생의 유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18세 나이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은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독립문을 만들었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다. 그가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는 기념공원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그의 정신이 살아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보성군의 북부 지역으로 천년고찰의 대원사와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 미술관 그리고 주암호반, 승주 고인돌공원과 연계되어 교육문화관광코스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서재필의학상
의사이며 언론인으로서 일생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몸 바치신 민족의 선각자 서재필(徐載弼)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에서는 애국애족의 정신을 바탕으로 의학의 교육, 진료, 연구 또는 봉사를 통하여 국내외에 큰 업적을 남기고 이 나라 의학계에 서재필(徐載弼) 정신을 빛내준 의료인에게 매년 서재필의학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서재필언론문화상
서재필언론문화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 서재필(徐載弼)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11년 4월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의해 제정,수여되는 상입니다. 한국신문협회·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후원하며 신문의 날(4월7일)을 전후하여 정해진 신문주간에 맞추어 시상되고 있습니다.
서재필기념회(서재필기념재단)
위치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8가길 56 동숭빌딩 301호
서재필기념회는 민족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송재 서재필 관련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그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재단법인이다. 서재필의학상 수여, 서재필언론문화상 수여, 올해의 민족언론인 선정, 헌창사업, 독립신문 연구지원, 서재필에 관한 학술연구 지원 및 출판, 서재필 관련 자료수집 및 연구지원, 기타 서재필의 사상과 겨레사랑을 기리는 민족선양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서재필박사 본가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다. 2007년 12월 18일 논산시의 향토문화유산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서재필 진료가운(徐載弼診療-)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독립 기념관에 소장된 서재필이 미국에서 진료할 때 입은 진료가운.
필라델피아한인회(필라델피아韓人會)
1970년 10월 3일 필라델피아지역에 창립된 한인봉사단체. 필라델피아는 서재필(徐載弼)박사가 살면서 활동했던 도시이다. 필라델피아한인회는 이민 1세대를 중심으로 미주이민사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기리는 문화행사와 후속세대를 위한 장학사업 그리고 청소년 리더십 배양을 위한 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한글 타자기
1908년 미국 뉴욕 시러큐스 지역에서 1903년에 Wilbert Smith 형제가 LC Smith & Brothers Typewriter Co.설립하여 Smith Premier No 10 - 10B, 84key 모델로 만든 언문타자기로 현재 ONONDA 역사 협회 타자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언문타자기의 자판 배열 방식이 주시경 선생님의 저서중 <국문초학>에 나오는 첫째공파 모음에 나오는 배열과 동일하며 <국문초학>도 언문타자기와 같은 1908년도에 저서되었다,따라서 보통 이원익이 개발한 타자기로 알려져 있는 이원익 타자기는 여러 자료들을 살펴볼 때, 서제필박사의 영향과 <독립신문> 보정을 맏아보며 한글체계를 주도하고 연구하던 주시경 선생님에 의해 언문타자기의 활자와 자판 배열방식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인다, 또한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국민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발간된 <독립신문> 의 계승 차원에서 서재필 박사와 같은 크리스천으로 하와이에서 계몽운동을 이어가던 이원익이란 분에 의해 언문타자기로 소개가 되었을 소지가 높다, 따라서 언문타자기는 최초의 한글타자기로 보고됨이 마땅한 최초의 타자기이다.
한국 사이클 역사(한국 자전거 역사)
우리나라에서 자전거가 언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는 상태이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한 개화 시대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서양의 선교사나 개화파 인사들이 처음 들여왔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이와는 별도로 1896년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공사 현장에 갈 때 처음으로 탔다는 설도 있고, 같은 해 고희성이 자전거를 탄 것이 처음이라 하기도 한다. 그 후 1898년 윤치호 선생이 하와이로부터 통타이어를 사용한 자전거를 도입해 왔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자전거가 생산되어 점차적으로 늘어난 자전거는 1960-1970년 사이에는 실용적인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는 경기 및 레저용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천봉산(天鳳山)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에 있는 산. 높이 608m이다. 보성군 북부 산지를 대표하며 산세가 깊고 대원사 계곡을 비롯하여 계곡이 많다. 여수·순천사건 이후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특히 대원사 계곡은 전남도당이 무장부대를 최초로 편성했던 곳으로 대원사가 불에 타는 피해를 보았다. 대원사 계곡 입구에 보성군립 백민미술관이 있고, 주변에 서재필박사 서재필기념공원과 고인돌공원·삼림욕장 등이 있다.
대한노인회 논산시지회(大韓老人會論山市支會)
충청남도 논산시 반월동에 있는 대한노인회 소속 지회.
대한노인회 논산시지회는 논산 지역 노인들의 권리 보장과 복지 증진을 위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회원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워싱턴의 서재필 동상
워싱턴 한국인 동상 1호로 서재필 동상이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제막됐다. 양복 차림에 왼손에 재킷을 든 모습이 고향 전남 보성에 있는 동상과 같다. 미국 한인사회는 '재미한인의 아버지'라 할 서재필 동상이 한인 젊은이들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워싱턴시도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했다. 1885년 6월 스물한 살 조선 청년 서재필이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내린 지 120여년 만이다.
서재필 청소년 리더십 프로그램
한인 청소년들에게 서재필의 개척정신 알리고 리더십 교육 필라델피아 인근 9개 학군에서 선발된 고등학생 참여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