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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6일 (금) 06:45 판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위에(月)는 “달”, 삥(饼)은 “떡”을 뜻하는 말로 위에삥(月饼)은 글자 그대로 “달 모양을 닮은 떡”을 말한다. 즉, 둥그런 달 모양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기록에 의하면 위에삥(月饼)이라는 이름은 송나라(宋, 960~1279)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나라(唐, 618~907) 때는 중추절에 달을 감상하며 과일이나 완위에껑(玩月羹, 용안[桂圆], 연밥[莲子], 연근 가루[藕粉]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위에삥)을 먹는 것이 성행했지만 위에삥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북송(北宋, 960~1127)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추절에 보름달 모양의 음식이라는 위앤삥(圆饼)이 등장한다.
위앤삥의 속은 설탕이었는데 개봉(开封) 지역에서는 탕삥(糖饼), 절강성(浙江) 대주(台州), 온주(温州), 금화(金华) 등을 넣어 강남 지역에서는 마이삥(麦饼)이라 불렀다. 남송(南宋, 1127~1276) 시기에 이르러 탕삥(糖饼)은 속이 들어 있는 둥근 형태로 되었고, 둥그런 달 모양을 닮았다 하여 위에삥(月饼)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위에삥의 기원과 역사 고대 위에삥은 제사 음식으로 본래 중추절에 먹었는데, 점차 중추절뿐만 아니라 선물용으로 애용되었다. 중추절에 위에삥을 먹는 풍습은 당나라(唐, 618~907) 때부터인데, 『락중견문(洛中見聞)』에 당 희종(당나라 18대 황제 이현[李儇])이 어선방(御膳房, 황제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에 중추절 당일에 삥(餅)을 만들어서 진사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상으로 내리라고 명령하였다.
중추절에 달을 감상하며 과일이나 완위에껑(玩月羹, 용안[桂圆], 연밥[莲子], 연근가루[藕粉]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것)을 먹는 것이 성행했다고 한다. 북송(北宋, 960~1127) 때 이러한 삥(餅)은 꽁삥(宮餅)이라 불리며 궁정 내에서 퍼졌고 민간에까지 샤오삥(小餅)과 위에투안(月團)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위에삥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각종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조각된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떡)이다. 위에삥은 밀가루와 라드(돼지의 지방 조직을 정제하거나 녹여서 얻는 흰색의 고체 또는 반고체 지방),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각종 견과류(살구 씨, 호두, 땅콩, 참깨, 해바라기 씨) 등의 소를 넣은 후 문양이 조각된 나무틀에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보름달 모양의 삥(饼, 떡)이다.
위에삥은 고대부터 중추절에 제사 음식으로 먹던 것이 점차 중추절 음식일 뿐만 아니라 선물용 음식으로 변화하였다. 중추절의 둥근 달 모양처럼 위에삥도 둥글게 만들어 가족끼리 서로 나눠 먹는데, 이것은 온 가족의 모임, 화목을 상징한다.
위에삥의 어원 위에(月)는 “달”, 삥(饼)은 “떡”을 뜻하는 말로 위에삥(月饼)은 글자 그대로 “달 모양을 닮은 떡”을 말한다. 즉, 둥그런 달 모양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기록에 의하면 위에삥(月饼)이라는 이름은 송나라(宋, 960~1279)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나라(唐, 618~907) 때는 중추절에 달을 감상하며 과일이나 완위에껑(玩月羹, 용안[桂圆], 연밥[莲子], 연근 가루[藕粉]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위에삥)을 먹는 것이 성행했지만 위에삥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북송(北宋, 960~1127)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추절에 보름달 모양의 음식이라는 위앤삥(圆饼)이 등장한다.
위앤삥의 속은 설탕이었는데 개봉(开封) 지역에서는 탕삥(糖饼), 절강성(浙江) 대주(台州), 온주(温州), 금화(金华) 등을 넣어 강남 지역에서는 마이삥(麦饼)이라 불렀다. 남송(南宋, 1127~1276) 시기에 이르러 탕삥(糖饼)은 속이 들어 있는 둥근 형태로 되었고, 둥그런 달 모양을 닮았다 하여 위에삥(月饼)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위에삥의 기원과 역사 고대 위에삥은 제사 음식으로 본래 중추절에 먹었는데, 점차 중추절뿐만 아니라 선물용으로 애용되었다. 중추절에 위에삥을 먹는 풍습은 당나라(唐, 618~907) 때부터인데, 『락중견문(洛中見聞)』에 당 희종(당나라 18대 황제 이현[李儇])이 어선방(御膳房, 황제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에 중추절 당일에 삥(餅)을 만들어서 진사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상으로 내리라고 명령하였다.
중추절에 달을 감상하며 과일이나 완위에껑(玩月羹, 용안[桂圆], 연밥[莲子], 연근가루[藕粉]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것)을 먹는 것이 성행했다고 한다. 북송(北宋, 960~1127) 때 이러한 삥(餅)은 꽁삥(宮餅)이라 불리며 궁정 내에서 퍼졌고 민간에까지 샤오삥(小餅)과 위에투안(月團)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고대 위에삥은 제사 음식으로 중추절에 먹었는데, 점점 중추절뿐만 아니라 선물용으로도 애용된다. 북송(北宋, 960~1127)의 문학가 소동파(蘇東坡)는 “소병여작월, 중유소화이(小餅如嚼月, 中有酥和飴)”, “샤오삥은 달과 같고, 안에 우유와 엿(고소함과 달콤함)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한 ‘샤오삥’은 바로 위에삥이다. 하지만 위에삥이라는 단어는 남송(南宋, 1127~1276) 시대 오자목(吳自牧)의 『몽량록(梦梁录)』에는 마름으로 만든 떡(菱花饼)과 같은 것인데, 후에 그 모양이 점차 동그랗게 변해 “가족이 다 모여 행복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고 나온다.
또한 명나라(明, 1368~1644) 전여성(田汝成) 『서호유람기(西湖游览记)』에 “팔월십오위지중추, 민간이월병상궤, 취단원지의(八月十五谓之中秋, 民间以月饼相馈, 取团圆之意)”, 즉 “8월 15일을 중추라고 하는데, 민간에서는 서로 위에삥을 선물로 나눠주는 것으로 ‘가족이 다 모이다’라는 뜻을 취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삥이 그 당시 민간에서도 유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청나라(清, 1636~1912) 때 위에삥을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기술한 서적을 보면, 양광보(杨光辅)는 “병포장도육함, 설고첨체자당상(饼饱装桃肉馅, 雪糕甜砌蔗糖霜)”(위에삥에 호두 소가 들어 있고, 눈처럼 흰 떡은 달고, 자당[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은 서리 같다)라고 적고 있다.
반원 반청운동에 사용된 위에삥 샤오삥(위에삥)에 관해 전해오는 설에 따르면 원나라(元, 1271~1368) 때 한족들은 원나라 사람들의 통치하에서 고통이 심했다고 한다. 이에 주원장(朱元璋)이 무장봉기하여 반원(反元)운동을 펼치려 했지만 원나라 군사의 통제가 삼엄하여 의병들 간에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
유백온(刘伯温)은 중추절에 이웃 간에 샤오삥을 전하는 풍습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샤오삥 안에 ‘8월 15일 달로(鞑虏/鞑子, 한족이 만주족이나 몽고인을 폄하하여 가리키는 말)를 죽이자’라는 쪽지를 써 넣어 반원운동에 뜻있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봉기의 신호로 삼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청나라 때 한족들이 남의 이목을 피하며 반청운동을 시도하기 위해서 위에삥을 사용했다고 한다. 즉 위에삥 속에 쪽지를 써 넣은 후, 종이 가방 안에 위에삥을 넣어 상대방에게 전해주며 반청복명(反青复明)운동의 준비를 알렸다는 것이다.
위에삥의 지역적 분포 위에삥은 종치우삥(中秋饼)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전 지역, 월남, 유구열도(流球列島, 일본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중추절 음식이다. 월남에서는 삥종치우(餅中秋, bánh trung thu, 바잉 쭝 투)라고 한다.
중국 본토의 전통 위에삥은 생산지, 판매량, 특색에 따라 크게 광동식, 북경식, 소주식, 광동 차오샨식(潮汕,광동의 3대 한족 군락지 중 하나) 등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그 밖에도 차오샨식과 홍콩식을 광동식에 포함하여 광동식, 소주식, 북경식, 띠엔식(滇式, 운남, 귀주 일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홍콩식과 광동식은 비슷하지만 차오샨식은 재료, 만드는 법, 모양, 맛 등이 광동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요즘은 특징보다는 지역에 따라 북경식, 광동식, 차오샨식, 소주식, 대만(台湾)식, 띠엔식, 홍콩식, 안휘(安徽)식 등으로 구분한다.
위에삥의 종류 중국식 위에삥은 광동식, 북경식, 소주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외에도 지역에 따른 재료를 특징으로 하여 운남(云南)의 소시지 위에삥, 강서(江西)의 양파고추 위에삥, 호남(湖南)의 바삭한 위에삥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요즘은 위에삥의 종류가 보다 다양하게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식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위에삥도 있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위에삥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각종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조각된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떡)이다. 위에삥은 밀가루와 라드(돼지의 지방 조직을 정제하거나 녹여서 얻는 흰색의 고체 또는 반고체 지방),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각종 견과류(살구 씨, 호두, 땅콩, 참깨, 해바라기 씨) 등의 소를 넣은 후 문양이 조각된 나무틀에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보름달 모양의 삥(饼, 떡)이다.
위에삥은 고대부터 중추절에 제사 음식으로 먹던 것이 점차 중추절 음식일 뿐만 아니라 선물용 음식으로 변화하였다. 중추절의 둥근 달 모양처럼 위에삥도 둥글게 만들어 가족끼리 서로 나눠 먹는데, 이것은 온 가족의 모임, 화목을 상징한다.
이미지 갤러리 가기 위에삥의 속 각종 견과류(살구씨, 호두, 땅콩, 참깨, 해바라기 씨) 등의 소를 넣은 후 조각된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다.
위에삥의 어원 위에(月)는 “달”, 삥(饼)은 “떡”을 뜻하는 말로 위에삥(月饼)은 글자 그대로 “달 모양을 닮은 떡”을 말한다. 즉, 둥그런 달 모양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기록에 의하면 위에삥(月饼)이라는 이름은 송나라(宋, 960~1279)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나라(唐, 618~907) 때는 중추절에 달을 감상하며 과일이나 완위에껑(玩月羹, 용안[桂圆], 연밥[莲子], 연근 가루[藕粉]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위에삥)을 먹는 것이 성행했지만 위에삥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북송(北宋, 960~1127)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추절에 보름달 모양의 음식이라는 위앤삥(圆饼)이 등장한다.
위앤삥의 속은 설탕이었는데 개봉(开封) 지역에서는 탕삥(糖饼), 절강성(浙江) 대주(台州), 온주(温州), 금화(金华) 등을 넣어 강남 지역에서는 마이삥(麦饼)이라 불렀다. 남송(南宋, 1127~1276) 시기에 이르러 탕삥(糖饼)은 속이 들어 있는 둥근 형태로 되었고, 둥그런 달 모양을 닮았다 하여 위에삥(月饼)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위에삥의 기원과 역사 고대 위에삥은 제사 음식으로 본래 중추절에 먹었는데, 점차 중추절뿐만 아니라 선물용으로 애용되었다. 중추절에 위에삥을 먹는 풍습은 당나라(唐, 618~907) 때부터인데, 『락중견문(洛中見聞)』에 당 희종(당나라 18대 황제 이현[李儇])이 어선방(御膳房, 황제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에 중추절 당일에 삥(餅)을 만들어서 진사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상으로 내리라고 명령하였다.
중추절에 달을 감상하며 과일이나 완위에껑(玩月羹, 용안[桂圆], 연밥[莲子], 연근가루[藕粉]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것)을 먹는 것이 성행했다고 한다. 북송(北宋, 960~1127) 때 이러한 삥(餅)은 꽁삥(宮餅)이라 불리며 궁정 내에서 퍼졌고 민간에까지 샤오삥(小餅)과 위에투안(月團)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고대 위에삥은 제사 음식으로 중추절에 먹었는데, 점점 중추절뿐만 아니라 선물용으로도 애용된다. 북송(北宋, 960~1127)의 문학가 소동파(蘇東坡)는 “소병여작월, 중유소화이(小餅如嚼月, 中有酥和飴)”, “샤오삥은 달과 같고, 안에 우유와 엿(고소함과 달콤함)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한 ‘샤오삥’은 바로 위에삥이다. 하지만 위에삥이라는 단어는 남송(南宋, 1127~1276) 시대 오자목(吳自牧)의 『몽량록(梦梁录)』에는 마름으로 만든 떡(菱花饼)과 같은 것인데, 후에 그 모양이 점차 동그랗게 변해 “가족이 다 모여 행복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고 나온다.
또한 명나라(明, 1368~1644) 전여성(田汝成) 『서호유람기(西湖游览记)』에 “팔월십오위지중추, 민간이월병상궤, 취단원지의(八月十五谓之中秋, 民间以月饼相馈, 取团圆之意)”, 즉 “8월 15일을 중추라고 하는데, 민간에서는 서로 위에삥을 선물로 나눠주는 것으로 ‘가족이 다 모이다’라는 뜻을 취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삥이 그 당시 민간에서도 유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청나라(清, 1636~1912) 때 위에삥을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기술한 서적을 보면, 양광보(杨光辅)는 “병포장도육함, 설고첨체자당상(饼饱装桃肉馅, 雪糕甜砌蔗糖霜)”(위에삥에 호두 소가 들어 있고, 눈처럼 흰 떡은 달고, 자당[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은 서리 같다)라고 적고 있다.
반원 반청운동에 사용된 위에삥 샤오삥(위에삥)에 관해 전해오는 설에 따르면 원나라(元, 1271~1368) 때 한족들은 원나라 사람들의 통치하에서 고통이 심했다고 한다. 이에 주원장(朱元璋)이 무장봉기하여 반원(反元)운동을 펼치려 했지만 원나라 군사의 통제가 삼엄하여 의병들 간에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
유백온(刘伯温)은 중추절에 이웃 간에 샤오삥을 전하는 풍습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샤오삥 안에 ‘8월 15일 달로(鞑虏/鞑子, 한족이 만주족이나 몽고인을 폄하하여 가리키는 말)를 죽이자’라는 쪽지를 써 넣어 반원운동에 뜻있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봉기의 신호로 삼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청나라 때 한족들이 남의 이목을 피하며 반청운동을 시도하기 위해서 위에삥을 사용했다고 한다. 즉 위에삥 속에 쪽지를 써 넣은 후, 종이 가방 안에 위에삥을 넣어 상대방에게 전해주며 반청복명(反青复明)운동의 준비를 알렸다는 것이다.
위에삥의 지역적 분포 위에삥은 종치우삥(中秋饼)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전 지역, 월남, 유구열도(流球列島, 일본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중추절 음식이다. 월남에서는 삥종치우(餅中秋, bánh trung thu, 바잉 쭝 투)라고 한다.
중국 본토의 전통 위에삥은 생산지, 판매량, 특색에 따라 크게 광동식, 북경식, 소주식, 광동 차오샨식(潮汕,광동의 3대 한족 군락지 중 하나) 등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그 밖에도 차오샨식과 홍콩식을 광동식에 포함하여 광동식, 소주식, 북경식, 띠엔식(滇式, 운남, 귀주 일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홍콩식과 광동식은 비슷하지만 차오샨식은 재료, 만드는 법, 모양, 맛 등이 광동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요즘은 특징보다는 지역에 따라 북경식, 광동식, 차오샨식, 소주식, 대만(台湾)식, 띠엔식, 홍콩식, 안휘(安徽)식 등으로 구분한다.
위에삥의 종류 중국식 위에삥은 광동식, 북경식, 소주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외에도 지역에 따른 재료를 특징으로 하여 운남(云南)의 소시지 위에삥, 강서(江西)의 양파고추 위에삥, 호남(湖南)의 바삭한 위에삥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요즘은 위에삥의 종류가 보다 다양하게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식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위에삥도 있다.
다양한 위에삥 지역에 따른 재료를 특징으로 하여 운남(云南)의 소시지 위에삥, 강서(江西)의 양파고추 위에삥, 호남(湖南)의 바삭한 위에삥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원산지에 따른 구분 북경식(京式), 광동식(广式), 소주식(苏式), 띠엔식(滇式), 차오샨식(潮式), 홍콩식(港式), 대만식(台式)
맛에 따른 구분 달콤한 위에삥, 짭쪼름한 위에삥, 달콤하고 짭쪼름한 위에삥, 얼얼하고 매콤한 위에삥
속에 따른 구분 달걀노른자 위에삥, 연밥 위에삥, 5종 씨앗 위에삥(살구씨, 복숭아씨, 땅콩, 깨, 해바라기씨, 돼지고기를 속으로 넣은 겉모습은 광동식, 소주식과 비슷하며, 소시지를 속으로 추가하여 만들기도 한다), 팥 위에삥, 말린 돼지고기 위에삥, 설탕 위에삥, 깨 위에삥, 소시지 위에삥, 과일 위에삥, 아이스크림 위에삥
위에삥 먹는 방법 위에삥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다양한 재료 특유의 맛을 살린다. 다양한 재료를 속으로 넣어 특유의 맛을 내기 때문에 위에삥 그 자체로 먹기도 하지만,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을 메우기 위해 요즘은 포도주나 차와 함께 먹거나 과일, 쏸메이탕(酸梅汤: 오매탕) 등과 함께 먹기도 한다.
서달(徐達)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
서달(徐達)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다. 1332년에 태어났고, 안휘 봉양 사람이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주원장과 같은 고향사람이며 어릴 때부터의 친구이다. 주원장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서달(徐達)은 그를 처음부터 따랐고, 회서이십사장의 으뜸이며, 명나라군대 최초의 대원수이다.
서달(徐達)은 개국전에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원나라를 멸망시키는 마지막 전투를 그가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이끄는 북벌군이 원나라의 대도를 점령했다. 건국후에는 주원장에 의해 우승상(右丞相)에 임명된다.그러나 2년도 되지 않아 내려온다. 이유는 직무조정이다. 서달이 승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과 호유용(胡惟庸)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호유용은 확실히 서달을 끌어내리려고 계획한 바 있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
이것은 주원장의 서달(徐達)에 대한 태도변화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천하를 얻는 단계때, 주원장은 서달(徐達)을 포함한 형제들에게 큰형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다: 의리를 중시했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주원장은 빈한한 출신이다. 농민중에서도 하층농민이다. 그는 지식이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래서 난세에 두각을 나타내기 위하여는 IQ와 EQ를 사용해야 했다. 이 두가지 점에서 그는 발군이었다. 주원장의 뛰어난 IQ는 그의 오성(悟性)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슬쩍 찔러주면 바로 알아차린다. 그의 뛰어난 EQ는 그의 인간적 매력으로 나타난다.
여러해가 지난 후, 황제가 된 주원장은 강호에서의 옛 일을 회고한다. 그리고 자신은 인의(仁義)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군웅이 할거하던 시기인데, 주원장은 거사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했을 때 원군은 이미 선배들에 의하여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적수는 대부분 같은 류였다. 반란군의 우두머리. 그중 두 명의 적수가 가장 강했다. 하나는 장사성(張士誠)이고, 다른 하나는 진우량(陳友諒)이다. 장사성은 돈이 많고, 진우량은 병사가 많았다. 주원장은 아무 것도 업삳. 다만 '가진 것은 신의'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형제들과 '동심공제(同心共濟)'했다.
역사기록을 뒤져 보더라도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주원장은 가난뱅이로 처음에는 그도 큰형을 모셨다. 천하가 난세에 빠지자, 그는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인 곽자흥(郭子興)에게 의탁한다. 처음에는 친병이었다가 용맹하게 싸우면서 재능을 드러내자 큰형 곽자흥은 그에게 양녀를 주어 사위로 삼는다. 형제에서 장인사위로 관계가 바뀐 것이다.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비록 중용받았지만, 주원장은 곽자흥의 생각이 편협하고, 안목이 좁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혼자서 사업을 일으킬 것을 생각한다. 1353년, 25살의 주원장은 장인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창업한다. 24명의 형제들을 이끌고 별도 부대를 만들었고, 결국은 자신의 천하를 얻어낸다.
이 24명의 형제는 당초 주원장이 천하를 얻기 위하여 가진 모든 밑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으뜸은 바로 서달이다. 나머지 인물로는 탕화(湯和), 비취(費聚), 육중형(陸仲亨)등이 있다. 주원장은 먼저 이들 형제들과 동감공고(同甘共苦)하며, 좋은 큰형으로서의 자질을 보인다. 그는 통이 크고, 형제들에게 부족한 게 있으면 바로 주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과 쉽게 어울린다. 형제들과 하나가 되어 피차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들 형제들은 그와 무슨 명분을 따지지도 않았고, 그저 그를 우두머리로 여겼을 뿐이다. 의견이 서로 다를 때는 이치를 따지며 다투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형제들 중 으뜸이자,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고, 그보다 4살이 어린 서달(徐達)에 대하여, 주원장은 공경했고, 형제로 대한다. 시미정 그의 생활이나 감정문제까지도 관심을 쓴다. 서달(徐達)은 자신에 엄격하여, 여색을 탐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이 비교적 늦었다. 주원장은 친히 나서서 미녀 사취아(謝翠娥)를 골라 그와 결혼하게 해준다. 이뿐 아니다. 나중에 서달의 장녀를 자신의 4남 주체(朱棣)와 결혼시켜서, 형제에서 사돈으로까지 발전한다. 이처럼 서로를 아끼는데 어찌 간담상조(肝膽相照), 출생입사(出生入死)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제들 앞에서, 주원장은 은의를 베푸는 외에 수시로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형제들에게 어떻게 큰형을 대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주원장의 '원래 큰형'이자 '나중에 장인'이 된 곽자흥이 호주에 갇혀 있을 때, 여러 장수들과의 불화로 부장이 곽자흥을 납치하고, 많은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주원장은 앞장서서 구해주러 나선다. 형제들은 그에게 위험한 일에 손대면 괜히 죽을 수도 있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곽공은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그가 지금 어려운데, 내가 만일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파벌다툼을 무마시키고 곽자흥을 구해낸다. 형제들 앞에서 주군을 구해냈다는 좋은 명성을 쌓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천하를 차지하는 단계에서 서달(徐達)은 대우를 받았다. 주원장의 여러 형제들 중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 대명왕조가 건립된 후에는 24명의 형제들 중에서 3명의 공(公)에 봉해지고, 21명이 후(侯)에 봉해지는데, 그중 서달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위국공(魏國公), 우중서우승상(中書右丞相), 참군국사(參軍國事),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된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서달(徐達)은 원래 큰형 주원장과 함께 복을 누려야 했다. 누가 알았으랴.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고, 액운이 금방 닥친다.
홍무제가 된 후의 주원장은 얼마 후 개국황제의 안면바꾸기 철칙을 따르게 된다. 토사구팽(兎死狗烹). 계획적이고 대규모로 개국공신들을 도살하기 시작한다. 예전에 이들 24명의 형제들은 그를 황제의 보좌로 올려놓았다. 그를 하늘의 성인으로 받들고, 신단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성인은 올라가자 내려오지 않는다. 그는 이미 신이 되었다. 그럼 형제들은 무엇인가. 이런 말이 있다. 한 사람이 득도하면 닭과 개들까지도 하늘에 오른다(一人得到鷄犬昇天). 이때 득도한 큰형은 정말 형제들을 개나 닭으로 본다. 이들 형제들도 확실히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큰형의 가장 간단하고 거친 방법으로 하늘에 올라간다: 도살당한다.
사료를 보면, 황위에 오른 주원장은 전우들에게 사나운 면목을 드러낸다. 핑계거리를 찾아서, 이들 생사를 같이 넘나들던 전우들을 친다. 그는 더 이상 정이 있고 의리가 있던 좋은 큰 형이 아니다. 옛정을 전혀 생각지 않는 백안랑(白眼狼)이었다.
주원장의 첫번째 전우인 서달(徐達)도 큰형이 변화와 무서움을 확실히 깨닫는다. 그리하여 행동에 극히 조심했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칭제후의 주원장은 자주 서달(徐達)을 불렀다. 연회를 베풀어 먹고 마셨다. 겉으로는 매번 '포의형제'로 칭했지만, 실제로는 천자의 티를 드러낸다.
서달(徐達)은 어떠했는가? 그는 항상 겸허하고 조심했다. 군신의 존비질서를 넘지 않으려 애썼다.
조정의 예의제도에 따르면, 개국공신 서달(徐達)은 관직이 승상에 이르므로, 외출시 상당한 규모의 호위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보통의 가마와 말을 타고 드나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검소한 생활을 한다. 전혀 사치, 낭비하지 않았다. 가무를 즐기거나 연회를 베풀어 자신의 고귀함을 자랑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주원장은 서달(徐達)을 시험해본 적도 있다. 자신이 살았던 집을 서달에게 넘겨준다. 서달은 극구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달(徐達)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말한 집은 주원장이 오왕을 칭할 때의 오왕부(吳王府)였기 때문이다. 그 집에 들어가서 산다면, 칭황불신(稱王不臣)의 생각을 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래서 극구 받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시험은 계속되었다. 명사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주원장이 서달(徐達)과 술을 마시는데, 주량이 센 서달을 일부러 취하게 만든다. 그리고 황상의 이불을 덮어준다. 서달(徐達)은 깨어나서 대경실색한다. "놀라서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바닥에 엎드려 죽을 죄를 졌다고 소리친다" 확실히 주원장은 고의로 서달(徐達)의 충성을 시험해 본 것이다. 서달(徐達)의 행동을 보고 주원장은 당연히 기뻐했다. 처벌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상을 내린다. 서달(徐達)은 대장군이다. 위풍당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원장의 앞에서 그는 이미 '조심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를 보면 그는 주원장의 곁에서는 아주 조심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야사를 보면, 심지어 "승기루(勝棋樓)"의 고사까지 전해진다. 서달(徐達)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서달은 바둑의 고수인데, 한번은 주원장이 서달(徐達)을 불러 바둑을 둔다. 그리고 서달(徐達)에게 절대로 양보하지 말고 제대로 두라고 명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바둑을 두기 시작했는데, 이번 판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끝내기를 할 때 돌연 서달은 돌을 놓지 못한다. 주원장이 놀라서 묻는다: "장군은 왜 더 놓지 않는가?" 서달이 바닥에 닾드려 말한다: "황상께서는 판을 상세히 봐주십시오." 주원장은 그제서야 발견한다. 바둑판의 검은 돌이 이미 '만세(萬歲)'라는 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주원장은 크게 기뻐하며 이 누각과 막수호 화원을 서달(徐達)에게 하사한다. 이것이 바로 '승기루'의 내력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대명은 개국한 후 주원장이 여러 공신들을 강력하게 경게한다. 당연히 여기에는 공신들 자신의 원인도 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대신들은 훈구대신이 된 후에도 공을 내세워 오만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원인은 주원장의 변태적인 권력욕이다. 권력을 손에 쥐자, 남이 빼앗아갈 것을 겁낸다. 주원장의 후계자인 태자 주표는 성격이 나약하여, '당우지풍(唐虞之風)", "불기살륙(不嗜殺戮)"했다. 이는 더더욱 주원장의 우려를 강화시킨다. 주표가 장래 이들 숙부, 백부들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대명강산은 주인이 바뀔 수도 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황위에 앉은 후 암중으로 살심을 품어 문호를 정리하기로 한다. 그렇게 하여 주씨의 명왕조정권을 반석처럼 굳게 하려 한 것이다.
나중에, 많은 형제들이 주원장에게 제거당한다. 그러나 오직 서달(徐達)만은 주원장이 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옛정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서달(徐達)의 잘못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서달(徐達)은 너무나 잘 행동했고, 그에게서는 거의 핑계거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주원장의 서달(徐達)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명을 받아서 나가면 성공하여 개선했다. 그리고도 자랑하지 않고 겸손했다. 여색도 좋아하지 않고, 재물도 취하지 않았다. 가운데 바르게 하여 하자가 없다. 해와 달처럼 밝다. 이런 사람은 대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 말은 서달에 대한 총체적 평가라 할 수 있고, 아주 높은 평가이다. 서달(徐達)은 백전백승이며 자만하지 않고, 호색하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광명정대하고 정천입지의 사내대장부라는 것이다. 이런 완벽한 사람은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이런 장점들 외에, 홍무제 주원장에 있어서, 그가 서달(徐達)에게서 시험하고 싶었던 것은 단 한가지이다: 당파를 만들어 사욕을 도모하지않는지. 이것은 황권에 대한 최대위협이다.
서달(徐達)이 주원장의 앞에서 공손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한 사람에게 찍히게 된다.
그는 바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인물인 호유용이다.
호유용과 서달(徐達)의 투쟁이 시작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서달(徐達)은 조정에서 지위가 높았고, 호유용은 그의 명망을 이용하여 이익을 도모하려 한다. 그래서 서달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는데, 서달(徐達)은 다른 사람들과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 않았다. 게다가 호유용의 품행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아, 무시한다.
당당한 황제의 총신인데, 서달(徐達)과 가까워지려 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래서 호유용은 분노하게 된다. 오히려 살의를 품는다. 서달의 가족 복수(福壽)를 매수하여 서달(徐達)의 집안생활을 알아내고, 독을 넣어 죽이려고 한다.
다행히 이 복수는 양심이 남아 있어서, 이리저리 생각해본 다음에 주인에게 차마 손을 쓰지 못하고, 서달에게 솔직히 자백한다. 서달은 매우 화가나서 주원장에게 호유용의 행위를 알린다. 이 자는 입과 속이 다르다.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는데, 뒤에서는 독수를 쓰고 있다.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다. 주원장은 그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호유용은 처벌받지 않고 지나간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서달(徐達)과 같은 초중량급의 개국공신을 주원장의 묵인이 없었다면 터럭하나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이 개국공신은 비록 호유용에게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주원장의 암산(暗算)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민간의 "사증아(賜蒸鵝)" 이야기이다. 서달(徐達)에게 독창이 생겨서 음식을 가려야 하는데, 주원장은 굳이 삶은 거위고기를 서달에게 내린다. 서달은 눈물을 흘리면서 씹어먹었고, 결과적으로 독창이 발작하여 죽고 만다. 이 민간전설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만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결국 호유용이 서달(徐達)에게 감히 도전했다는 것은 누가 그에게 그런 담량을 주었겠는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달(徐達)은 홍무18년 즉 1385년에 죽었다. 이때 주원장은 이미 호유용을 포함한 승상을 모조리 제거했을 때이다. 마지막으로 이 공적이 탁월한 서우상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주원장은 아주 비통해 했다. 명사에 따르면, "황제는 조정을 철(輟)하고, 장례때 비통해 마지 않았다. 중산왕(中山王)에 추봉하고, 시호를 무녕(武寧)이라 한다. 삼세의 왕작을 내리고, 중산의 북쪽에 매장하게 하며 신도비문을 황상이 짓는다. 태묘에 배향하고, 공신묘에 초상을 두는데 위치는 첫째로 하였다."
사후에 서달(徐達)은 최고의 영예를 얻는다. 왕에 봉해진다. 당연히 이때는 어떻게 상을 내려도 주원장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주원장의 아픈 마음과 비교하면 공신 서달(徐達)의 죽음이 황제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수확은 철저히 안심해도 되겠다는 것이다. 민간에서 서달(徐達)의 죽음을 주원장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한편으로 서달(徐達)이 민간에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국의 백성들이 숭상하는 대표인물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폭군의 마음을 추측한 것이다. 주원장의 이런 마음을: "야심이 없다고? 명망이 너무 높으니, 나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
목차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