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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藥脯)
 
[[약포]](藥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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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고기를 다져서 힘줄을 없애고, 진간장, 생강, 파 다진 것, 후추, 꿀로 양념하여 꽃처럼 얇게 펴서 말린다고 하였다. 오래 두고 벌레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를 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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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에서는 비올 때 독 안에 널어 말리거나, 더울 때 물가의 반석 위에 널어 말리라고 하였고, 연기를 쐬면 벌레가 안 난다고 한 것으로 이미 훈연법(燻煙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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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방법은 우둔살을 얇고 넓게 결대로 저며서 양념간장(진간장·설탕·후추·참기름)에 담가서 간이 배어들면 채반에 널어 햇볕에 말리되, 여러 번 뒤집고 반듯하게 말린다. 상에 놓을 때에는 참기름을 바르고 살짝 구운 다음 썰어서 잣가루를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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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백용으로는 다져서 반대기 지어 말려서 위에 잣가루를 얹는다. 다져서 대추모양으로 빚어 잣을 꽂아 말리면 대추포이고, 동글납작하게 빚어 잣을 박아 말린 것은 칠보포라고 한다. 안주나 반찬으로 좋은 음식이다.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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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고기를 다져서 힘줄을 없애고, 진간장, 생강, 파 다진 것, 후추, 꿀로 양념하여 꽃처럼 얇게 펴서 말린다고 하였다. 오래 두고 벌레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를 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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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에 대한 일화는 『한국야담사화전집』에 실려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조선 중기 학자로 이황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류성룡과 김성일 등과 동문수학했던 남편 [[서해(조선)|서해]]와, 6도의 관찰사와 판서를 두루 역임한 아들 [[서성(조선)|서성]]과 관련된 자료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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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장애위인 시리즈>는 역사 속 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그때 장애 인물들의 삶을 통해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비롯한 전반적 문제점들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를 돕고자 도서출판 솟대가 발간한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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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에 불의의 사고로 실명한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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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국야담사화전집』에 따르면 고성 이씨는 원래 일반 사람들과 다름없이 태어났으나, 5세 때 여종의 불찰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약에 쓰려고 달여 놓은 부자탕(附子湯)으로 얼굴을 씻다가 그만 그 물이 두 눈에 들어가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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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는 어려서 용모가 아름답고 재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실명하게 된 것이다. 이때 누구보다 고성 이씨의 장래를 걱정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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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의 아버지 이고는 딸이 장애를 얻게 된 것을 자신의 불찰 때문이라 생각하고 늘 딸을 불쌍히 여기며 장래를 걱정 하였다. 특히 딸의 혼인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재질이 뛰어나고 총명한 딸을 사랑해 줄 배필을 구해 주고자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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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옛날에도 장애가 있는 여성에게는 혼처를 구하는 데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고성 이씨가 서해를 남편으로 맞이할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고성 이씨 부인]]이 나이가 들어 혼인할 시기가 되자, 그의 아버지 이고는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딸이지만 하늘이 점지한 여중군자라 여기며, 어떻게 해서든지 시집을 보내 이생의 원한을 없게 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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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하늘이 점지하신 여중군자이나 불의의 화벌로 저 지경이 된 것은 그 애의 죄가 아니요 내가 내리는 화벌인즉 내 어찌 안여하랴. 이는 필시 하늘이 그 애의 명예와 복록을 더욱 빛나게 하시려는 뜻에서 저같이 아름다운 재모와 성행에 한 가지 험사를 가미하신 것이다. 어느 적덕한 가정에 들어가 가문을 창대히 만들고 좋은 자손을 내어 이름을 크게 하려고 이같이 고맙게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즉 저 아이의 혼처는 명문거족의 혁혁한 자손 중에 보내는 것보다는 시골구석의 한사 빈족이라도 반드시 훌륭한 덕행과 장래가 있을 위대한 좋은 청년을 물색하여 부부의 합력으로 그 문호를 크게 중흥시킬 사람에게 보내어 이 복을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정창권(2011),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글항아리, 38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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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고성 이씨 부인]]의 아버지 이고는 안동의 명절(名節)로 이름난 [[임청각]](臨淸閣) 이명의 다섯째 아들 이었다. 명문가의 사람이었던 그는 사윗감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명문거족의 자손보다는 시골의 가난한 선비라도 덕행과 장래가 촉망받는 청년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 이유는 딸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딸에게는 남다른 재덕과 미모, 총명함이 있기 때문에 좋은 짝을 맺어 주면 가문을 번성시키고 자손도 훌륭하게 키워 낼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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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제자인 [[서해(조선)|서해]]를 남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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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가까운 곳에 퇴계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고는 퇴계 문하에 인재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서 찾아가 퇴계 선생에게 간절히 낭재(郎材) 추천을 부탁했다. 그러자 퇴계 선생은 사정을 듣고 나서 당시 장래가 촉망되던 [[서해(조선)|서해]]를 추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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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하는 처지는 잘 이해하겠으나 사실을 밝힌다면 누가 일부러 병신 아내에게 구혼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악의를 가지고 남을 속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로되 불구자란 말은 처음부터 드러내지 말고 신랑감을 구하세. 내 문하에 서해라는 젊은이가 있는데, 그의 재학(才學) 과 심성덕행(心性德行) 을 내가 깊이 사랑하여 포은(圃隱) 이나 정암(靜庵) 두 선생에 비길 수 있고 장래에는 세상에 이름을 떨칠 유학자가 될 것이니 이 사람에게 먼저 구혼하게. 그러면 나도 전력을 다하여 추진할 것이네.” 정창권(2011), 같은 책,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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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옛날에도 장애가 있는 사람은 결혼에도 많은 제약이 따랐던 듯하다. 그래서 퇴계는 실명한 색시를 맞이할 사람은 없을 테니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말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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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자신의 제자 중에 가난하지만 큰 학자가 될 [[서해(조선)|서해]]를 추천해 준 것이다. 당시에 [[서해(조선)|서해]]는 예조참의를 지냈던 [[서고]](徐固, ?~1550) 의 아들로, 일찍 양친을 여읜 후, 명종 8년(1553년)에 서울에서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와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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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서해는, 일찍부터 성리학에 밝아 20세 때에 이미 그의 문장과 학식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결국, 이고는 딸이 맹인이라는 것을 속이고 매파에게 부탁해 혼사를 정하게 되었고, 그후 혼인은 순조롭게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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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혼인은 양가 부모들이 정하고 신랑은 결혼식날 신부집에 와서 예식을 치르는 것이었 다. 그러고 나서 첫날밤을 치러야 신랑과 신부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때 신랑 서해는 혼례가 치러지는 마당에서 신부의 얼굴을 언뜻 볼 수 있었는데, 치장한 신부의 얼굴은 곱고 아름다울 뿐이었다. 신부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는데, 신부는 보통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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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고서야 비로소 서해는 신부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자기를 속인 것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선비라는 점 때문이란 생각에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서해는 이만한 일에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또 말없이 앉아 있는 신부를 살펴보니 신부가 몹시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도리어 미안하여 부드럽게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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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겁내지 마시오.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 위인이나, 어찌 그 조그마한 과실로 부인을 괄시하겠소. 잠깐 보아도 부인의 단정하고 현숙한 재덕은 용모의 아름다움에 못하지 않으니, 우리 집과 내게는 오히려 과분한 복택이 되거늘 내가 어찌 부인을 소홀하게 대우하겠소. 다만 내집의 방조 되시는 사가정(四佳亭) 선생의 하세(下世) 후로 한미하고 영체하며 형세가 극히 빈궁하여 호화롭게 생장한 부인에게 괴로움이 많을 것이니 이것이 부끄럽소.” 앞의 책, 38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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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서해는 다정스럽게 부인을 위로하고는 불편함이 없도록 자기 집안일을 숨김없이 가르쳐 주었고, 친척들을 어떻게 대하고 처신할지를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이에 고성 이씨 또한 크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자상함에 평생지기를 만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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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은 나를 알아주는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조차 돌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나이다. 이제 군자께서는 첩이 큰 병신인 것과 부모들이 속이고 청혼한 죄과를 잊어버리시고 오히려 하해와 같으신 도량으로 첩을 버리지 않겠다 하오시니, 이 은덕은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시거늘 첩이 어찌 감히 죽음으로써 군자께 이 은혜를 갚기를 사양하오리까? 변변치 못한 인간이오나 측근에 있는 것을 허락하시니 첩은 참으로 황송 감격하여 사뢰올 바를 알지 못하겠나 이다.” 같은 책, 382~38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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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 서성 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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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두 사람은 군자와 숙녀의 백년가약으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여 비할 데 없이 화목하 였다. 고성 이씨의 부모도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비로소 크게 안심하였으며, 사위에게 딸이 소경인 것을 밝히지 않은 것을 사죄하고 딸의 신세를 축원해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첫날밤 신부가 앞을 볼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된 서해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총명한 신부가 신랑의 마음을 꿰뚫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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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이 전생에 죄가 있어 눈먼 몸이나 외람되게 낭군을 섬기고 싶어 혼인을 스스로 사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떠한 미움과 죄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이를 속이신 부모님은 오직 이 한몸을 불쌍히 여겨 옳지 않은 줄 아시면서도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낭군께서도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이를 헤아려 아실 것이옵니다. 모든 죄는 이 한 몸이 지겠사오니 첩의 부모를 탓하지 말아 주옵소서. 이 몸이 진작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하심을 저버리고 불효의 죄를 짓지 아니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을 당하고 보니 진작 죽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옵니다. 다행히 낭군께서 첩의 죄를 용서하시고 비 들고 뜰 쓰는 소임을 맡겨 주신다면 이는 첩의 부모와 첩 세 사람을 살리시는 큰 은혜가 되겠지만 감히 어찌 이를 바라겠습니까?” 안춘근(2002), 『역사를 빛낸 한국의 여성』, 범우사, 168~16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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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는 신부의 현숙한 태도와 조리 있는 말에 크게 감동하기도 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런데 신부가 갑자기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며 자결하려 하자, 문 밖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이씨의 부모가 급히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신랑에게 사죄하였는 데, 신랑이 도리어 이씨 부모를 위로하고는 첫날밤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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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든, 고성 이씨의 부모는 딸의 장래를 위해 맹인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결혼시켰 으며, 남편 서해도 고성 이씨의 재모와 언행을 알아보고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후로 서해는 고성 이씨를 측은히 여기고 아끼며 사랑하였다. 그래서 이고도 사위와 딸을 위하여 [[소호헌]](蘇湖軒)을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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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대구 서씨 종중 소유의 소호헌은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서해가 거처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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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을 지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고의 분가 주택으로 지은 것을 사위인 서해에게 물려준 집이라고 전해진다. 안채에서 명종 13년(1558)에 고성 이씨가 아들 서성을 낳은 곳이다. 이처럼 고성 이씨와 서해 부부는 처가살이를 하며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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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으로 이사한 후 [[약과]]와 [[약식]]을 만들어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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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화목하고 다정했던 신혼의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성(조선)|서성]]이 생후 1년 반이 못 된 명종 14년(1559) 서해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는 남편을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 앞 못 보는 과부의 처지에 어린 아들과 함께 생계를 꾸려 나갈 일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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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냥 슬픔에 잠겨 있지 않았다. [[고성 이씨 부인]]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남편의 사랑에 대한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고는, 명종 15년(1560)에 세 살 된 아들 [[서성(조선)|서성]]을 데리고 남편의 본가가 있는 서울 약현(藥峴)으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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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에는 [[서엄]]의 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를 통칭)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에는 서씨 집안에 [[서성(조선)|서성]]의 중부(仲父)인 춘헌공(春軒公) [[서엄]](1529~1573) 내외만 있었고, 아직 자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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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같은 해 백부(伯父)인 [[서대]](徐岱) 내외가 몇 달 사이로 별세했는데, 그들에게도 역시 자녀가 없었다. 서씨 가문엔 장수한 사람이 드물었던 것이다. 고성 이씨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친정에서 빌려 온 약간의 자금으로 남녀 하인과 함께 청주(淸酒)를 빚고, 유밀과(油密果)와 찰밥, 강정, 산자, 다식 등을 만들어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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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해 다른 집보다 질이 더 좋게 술과 과자를 만들고 찰밥에 밤과 잣, 호두 등을 넣어 맛있게 빚어 내놓았다. 그러자 평판이 좋아 서울 장안 사람들이 [[고성 이씨 부인]]이 만든 술과 과자 및 찰밥을 다투어 사갔고, 그곳의 [[약주]]과 [[약과]], [[약식]] 없이는 잔치가 되지 않을 만큼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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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성 이씨 부인]]의 집은 현재 서울 중림동 천주교회(약현성당)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집에서 만든 청주를 [[약주]](藥酒), 찹쌀로 만든 밥을 [[약밥]]([[약식]], 藥食), 유밀과(油密果)를 [[약과]](藥果)라 불렀는데, 이것은 약현이란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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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조선)|서성]]이 관례를 치르고 호를 약봉이라 한 것도 약봉이 살던 곳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한편, 이씨 부인은 가정경제를 꾸려가면서도 아들 교육에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바른 언행은 물론 글도 읽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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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서성(조선)|서성]]은 어린 시절 나이에 비하여 매우 총명하였는데 서울로 이사 와서 10여 년을 중부(仲父)인 서엄에게 학문을 배우다가, 성장한 뒤에는 귀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했다. 그때부터 [[서성(조선)|서성]]은 김장생, 심지원 등과 교우하게 되었고 그의 문장과 학식도 크게 발전하여 20세에는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당시 이름 높은 선비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서성은 선조 19년(1586)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판서가 되어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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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으로 느껴 사물의 이치를 아는 지혜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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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생전에 약현에 큰 집을 지었는데, 그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집을 지을 때의 일화도 몇 가지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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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서성(조선)|서성]]이 출세하기 전에 [[고성 이씨 부인]]은 약현에다 안동 소호리 친정집을 본떠 큰 제택을 먼저 꾸민 것이다. 서수용(2007), 『종가기행』, 한국일보사, 28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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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서성(조선)|서성]]의 중부인 [[서엄]]마저 죽고 난 이후 무렵인 듯하다. [[서엄]] 역시 자식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은 단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분수에 넘치는 큰 집을 짓는다며 비난할 정도였다. 당시 서씨 가문에는 장수한 사람이 많지 않아 가족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성 이씨는 오히려 이웃 사람들의 비웃음을 단번에 불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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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이 지금은 이렇지만, 훗날 창대해져 이 집도 협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서수용(2007),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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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부인은 집안이 번성할 것을 자신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왕궁에서 이씨 부인이 거처할 집을 약현에 신축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특별히 자손이 번창할 것을 고려하여 대청 30간을 세웠더니 이씨는 지팡이를 짚고 두루 순시하다가 마루에 이르러 아들을 불러 탄식하기를 “지금이라도 내가 죽으면 내 손자 손녀가 이 대청에 들어서서 제사 지내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2~3대를 내려가는 동안에 내 자손이 몇 백 몇 천이 될 수도 있으니 이것은 대청이 아니고 소청이 될 것이다. 마당에 보계를 매지 않고는 안 될 것을 누가 이렇게 설계하여 꾸몄느냐?”하였다. 정창권, 앞의 책, 387~38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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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맞는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집을 지을 당시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만큼 포부가 대단한 여장부였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은 또 있었다. 시각장애인이 그러하듯, [[고성 이씨 부인]]도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사물을 본듯이 아는 것이 많았다. [[고성 이씨 부인]]은 집을 짓게 되었을 때 직접 감독하였는데 앞을 볼 수 없으면서 관여하는 것이 많아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목수가 대청 기둥을 거꾸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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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성 이씨 부인]]은 손으로 만져 보고 나서 목수를 불러 마치 본 것처럼 그 잘못됨을 책망하였는데, 이 일로 목수들은 다시는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앞은 볼 수 없었지만, 손끝으로 느끼는 감각이나 사물의 이치를 아는 지혜는 누구보다 뛰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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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의 소망은 생전에 실현되었다. [[서성(조선)|서성]]이 선조 19년(1586) 과거에 급제하고 광주목사 (廣州牧使)를 지낸 송영(宋寧)의 딸과 혼인하고 나서는 자손이 번성하여 모두 벼슬을 하게 되자, 그 커다란 집은 좁기만 했다. 직계 자손 중에는 문과 급제자가 123명에 이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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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조선)|서성]]은 7남 4녀를 두었는데, 고성 이씨가 칠순 때를 기준으로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있었다. 고성 이씨의 큰 손자 [[서경우]]가 우의정에 올랐고, 끝손자 [[서경주]]가 선조의 장녀 정신옹주에게 장가들어 달성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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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다스림과 자손의 가르침에도 법도와 정도를 좇았기에 [[고성 이씨 부인]]은 이웃과 친척들에게 공경과 칭찬을 받게 되었다. [[고성 이씨 부인]]은 77세의 수를 살면서 부귀와 복을 누렸다. 비록 어려서 시각을 잃고 젊어서는 과부가 되었지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였으며,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낸 어머니이자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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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애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에 대한 능력을 다시금 주목하게 한다. 가문을 크게 일으키고 사업적 수완까지 보였던 [[고성 이씨 부인]]은 신사임당 이상으로 주목해야 할 인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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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조선)|서성]](徐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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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대구 서씨]](達城). 이이(李珥)ㆍ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서, 1586년(선조 19) 문과(文科)에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郎)이 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함북(咸北)에 이르러 정욱 등이 두 왕자와 함께 적의 포로가 될 때 홀로 탈출했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병조 정랑(兵曹正郎)ㆍ직강(直講)이 되고, 명장(明將) 유정(劉挺)을 접대했다. 그 후 암행어사로서 삼남(三南)을 순찰, 돌아와 제용감정(濟用監正)에 특진되고 경상도ㆍ강원도ㆍ함경도ㆍ평안도ㆍ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 후에 호조ㆍ형조ㆍ공조의 판서와 판중추 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11년간 유배(流配)되었다가 1623년 인조 반정으로 형조와 병조의 판서가 되었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과 1627년의 정묘호란에 각각 인조를 호종(扈從)했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ㆍ이호민(李好閔)ㆍ이귀(李貴) 등과 남지 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 역학(易學)을 토론했으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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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의 현손이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서팽소]](徐彭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고(조선)|서고]](徐固)이고, 아버지는 [[서해(조선)|서해]](徐嶰)이다. 어머니는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고(李股)의 딸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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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서경수(조선)|서경수]](徐景需)(전첨) [[서경빈]](徐景霦) (현감)[[서경주(서경주)|서경주]](徐景霌): (달성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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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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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고려)|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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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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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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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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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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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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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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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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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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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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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https://band.us/@seo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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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open.kakao.com/o/gBQB1q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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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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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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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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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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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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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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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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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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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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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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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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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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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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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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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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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고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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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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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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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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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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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증조할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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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할아버지: [[서윤(조선)|서윤]](徐尹 참봉(參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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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할아버지: [[서괄]](徐适 훈도(訓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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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할아버지: [[서세]](徐洗찰방(察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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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할아버지: [[서부(조선)|서부]](徐浮 목사(牧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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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증조할아버지: [[서인원(조선)|서인원]](徐仁元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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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증조할아버지: [[서용원(조선)|서용원]](徐勇元 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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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증조할아버지: [[서숙원]](徐叔元 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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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조할아버지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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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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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조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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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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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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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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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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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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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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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조조할아버지: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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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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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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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조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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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할아버지:[[서후(서후)|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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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할아버지:[[서구]](徐久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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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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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서고(조선)|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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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버지:[[서대]](徐岱 장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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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버지:[[서엄]](徐崦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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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서해(조선)|서해]](徐嶰 학자)
 +
**************** 어머니: [[고성 이씨 부인]](固城 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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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서성(조선)|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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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서경우(조선)|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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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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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손자:[[서문중(조선)|서문중]](徐文重 영의정 정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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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서경수(조선)|서경수]](徐景需 전첨.증 이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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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 [[서형리]](徐亨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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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손자: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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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손자: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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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손녀: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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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손자: [[서명백(조선)|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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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 [[서덕수(조선)|서덕수]](徐德修 증 이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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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 [[서유호]](徐有浩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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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일보]](徐日輔 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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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순(조선)|서진순]](徐震淳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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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기]](徐相夔 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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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광효]](徐光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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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재필]](徐載弼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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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항순]](徐恒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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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목(조선)|서상목]](徐相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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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재필]] 양부): [[서광하]](徐光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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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 [[서인수]](徐仁修 도호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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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 [[서유경]](徐有慶 좌찬성 종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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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능보]](徐能輔 이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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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 [[서신수]](徐信修 증 좌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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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 [[서유녕]](徐有寧 이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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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귀보]](徐龜輔 예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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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양자.[[서응보]]의 자):[[서호순]](徐灝淳 증 이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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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정]](徐相鼎 병조판서 정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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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용보]](徐龍輔 영의정 정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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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양자. [[서응보]]의 자): [[서대순]](徐戴淳 예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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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응보]](徐應輔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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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순]](徐憙淳 부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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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손자: [[서명휴]](徐命休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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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 [[서노수]](徐魯修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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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 [[서유풍]](徐有豊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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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영보(조선2)|서영보]](徐永輔 사헌부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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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순(조선1)|서경순]](徐慶淳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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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우]](徐相雨 예조판서 정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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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 [[서유승]](徐有升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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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경보(조선)|서경보]](徐京輔 첨지중추부사 종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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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순]](徐英淳 한성부판윤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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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손자:[[서종신]](徐宗愼)(선공감감역 繕工監監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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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손자: [[서명삼]](徐命三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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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양자.[[서명오]]의 자): [[서호수(조선1)|서호수]](徐好修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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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 [[서유계]](徐有階 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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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장보]](徐長輔 대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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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양자.[[서홍보]]의 자): [[서형순]](徐衡淳 이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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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홍보]](徐鴻輔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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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손자: [[서명구]](徐命九 동지의금부사 종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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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손자: [[서명오]](徐命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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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 [[서택리]](徐擇履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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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 [[서상리]](徐祥履 병조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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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 [[서광리]](徐匡履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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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 [[서홍리]](徐弘履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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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손자: [[서문준]](徐文濬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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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손자: [[서종적]](徐宗積 한성부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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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손자:[[서명장]](徐命璋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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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서일수]](徐逸修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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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서유대]](徐有大 한성판윤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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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서영보(조선1)|서영보]](徐英輔 훈련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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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 [[서봉순]](徐鳳淳 가선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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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오]](徐相五 병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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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훈]](徐丙勳 병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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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손자:[[서명형]](徐命珩 도승지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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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서각수]](徐覺修 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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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서유원]](徐有元 대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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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서효수]](徐孝修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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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서유린(조선)|서유린]](徐有隣 이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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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양자.[[서유방]]의 자): [[서준보]](徐俊輔 이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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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순(조선1)|서기순]](徐耆淳 이조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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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조]](徐相祖 판돈녕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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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병찬]](徐丙贊 봉상시부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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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 [[서격수]](徐格修 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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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 [[서유영]](徐有英 금계필담 저자)
 +
******************** 고손자: [[서종엽]](徐宗燁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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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손자: [[서명인]](徐命仁 도호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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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손자: [[서미수]](徐美修 대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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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손자: [[서유여]](徐有畬 공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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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고고고손자: [[서승보]](徐承輔 형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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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고고손자: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이조판서 정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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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손자: [[서종급]](徐宗伋 이조판서 정2품)
 +
************** 작은증조아버지: [[서팽려]](徐彭呂) 풍저창봉사(豊儲倉奉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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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대제학 좌찬성 종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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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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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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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집(藥峯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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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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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宣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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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仁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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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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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암서원]](龜巖書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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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산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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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후기 [[서침]]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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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년(숙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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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서거정]](徐居正)을 추가배향하였으며, 1741년에 [[서성(조선)|서성]](徐渻), 1757년에 [[서해(조선)|서해]](徐嶰)를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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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崇賢祠)와 강당을 중수하고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숭현사, 3칸의 신문(神門), 5칸의 강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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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인 숭현사의 중앙에는 [[서침]]과 [[서거정]]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서해(조선)|서해]], 왼쪽에는 [[서성(조선)|서성]]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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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구암서원은 숭현사는 조선시대 애민정신과 사회지도층의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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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구시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서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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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 서남쪽 숭현사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구계 [[서침]] 선생을 봉향 하면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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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717년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하고 1718년 3월에 사가 휘거정 선생, 1741년 2월 약봉 휘성 선생, 1757년 8월 함재 휘해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1778년 본도유림이 서원 청액소를 올리고 1779년 유림과 본손 합의에 의해 서원수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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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 됐다고 1924년 유림에서 복설했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이 증수됐다. 숭현사를 1974년 보수하고 1975년 2월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됐다가 대구직할시 승격 후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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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대구시 북구 산격1동 연암공원 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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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부민이 구계선생을 숭현사에 봉향하게 된 이유는 애민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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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선생은 조선 초 [[달성 서씨]] 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에 살았으며 임금이 달성이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다. 땅을 내주는 대신 지금의 영선시장과 서문시장 자리에 대한 세금을 서씨 일문에 받게 했다. 또한 남산고역과 동산일대 땅을 주고 두터운 상과 세록을 주겠다는 뜻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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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구계선생이 이를 백성들에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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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선생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신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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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보다는 대구부민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청한 뒤 대구지방의 환곡이자를 한섬에 다섯되씩 감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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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선생의 애국애족의 마음을 칭찬한 뒤 대구 도호부에서 이를 실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뒤 대구부민은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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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침]]의 은혜에 백성들은 감동했고 1665년 구암서원의 최초 건물인 숭현사를 세워 선생을 모셨다. 후대에도 선생을 기리는 일이 이어졌으며 1971년 달성 성내 중심부에‘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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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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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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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대종회가 문중 서원 격인 옛 구암서원 소유권을 무상으로 대구 중구에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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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대구 중구청에 따르면 달성서씨대종회는 동산동·약령시 일원 도시재생뉴딜사업 추진을 위해 옛 구암서원(약 2500㎡)을 중구청에 기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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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 서침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옛 구암서원은 북구로 이전하기 전 자리했던 터로 현재는 한옥 숙박 등 전통문화체험관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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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구암서원. [[달성 서씨]] 문중이 서원을 중구에 기부채납함으로써 이 공간은 도시재생뉴딜사업의 주요 거점공간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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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는 국가공모에 선정돼 이 일대를 대상으로 뉴딜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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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이 본격화되면 옛 구암서원은 고택 문화 전시와 숙박 체험이 가능하고 공연이 상설화되는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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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는 이 일대에 한옥이 밀집해 있는 점과 연계해 새로운 관광코스 개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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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근대문화골목과도 맞닿아 있어 많은 관광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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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중구청은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한 생활 인프라 개선, 골목경제 활성화 등도 추진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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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규하 중구청장은 "달성서씨대종회가 옛 구암서원을 중구 구민과 대구시민을 위해 내어주심으로써 큰 선물이 될 같다. 의미있는 결정을 해주신 데 대해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뉴딜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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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채납 업무 협약식은 권영진 대구시장, 류규하 중구청장, 서영택 달성서씨대종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19년 12월 7일 오전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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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청각]](臨淸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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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에서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예언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임청각]]에는 정승 두 명이 태어났습니다. 조선조 중엽의 [[서성(조선)|서성]] 선생(1558년-1631)과 조선조 말엽의 유후조 선생(1798-1876)이 그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청각의 외손으로 모친들이 친정에 와서 이들을 출산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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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조선)|서성]] 선생의 어머니([[고성 이씨 부인]])는 이명 선생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시각장애인었다고 합니다. [[서성]] 선생의 부친은 [[서해(조선)|서해]]라는 분인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서 숙부가 후견인이 되어 조카의 혼사를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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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호헌]](蘇湖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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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소호헌(安東 蘇湖軒)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조선)|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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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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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주]](藥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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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때에 문신 [[서성(조선)|서성][(徐渻)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임원경제지』에서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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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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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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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식]](藥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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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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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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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과]](藥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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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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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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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포]](藥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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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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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조선)|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조선)|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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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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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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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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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섭대천]](利涉大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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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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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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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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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음식디미방』에서는 비올 때 독 안에 널어 말리거나, 더울 때 물가의 반석 위에 널어 말리라고 하였고, 연기를 쐬면 벌레가 안 난다고 한 것으로 이미 훈연법(燻煙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 같이 보기 ==
 +
* [[이천 서씨]]
 +
* [[대구 서씨]]
 +
* [[달성 서씨]]
 +
* [[부여 서씨]]
 +
* [[연산 서씨]]
 +
* [[남양 서씨]]
 +
* [[당성 서씨]]
 +
* [[봉성 서씨]]
 +
* [[절강 서씨]]
 +
* [[중국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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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서씨]]
  
만드는 방법은 우둔살을 얇고 넓게 결대로 저며서 양념간장(진간장·설탕·후추·참기름)에 담가서 간이 배어들면 채반에 널어 햇볕에 말리되, 여러 번 뒤집고 반듯하게 말린다. 상에 놓을 때에는 참기름을 바르고 살짝 구운 다음 썰어서 잣가루를 묻힌다.
 
  
폐백용으로는 다져서 반대기 지어 말려서 위에 잣가루를 얹는다. 다져서 대추모양으로 빚어 잣을 꽂아 말리면 대추포이고, 동글납작하게 빚어 잣을 박아 말린 것은 칠보포라고 한다. 안주나 반찬으로 좋은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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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구 서씨]]

2024년 2월 9일 (금) 10:15 기준 최신판

약포(藥脯)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고기를 다져서 힘줄을 없애고, 진간장, 생강, 파 다진 것, 후추, 꿀로 양념하여 꽃처럼 얇게 펴서 말린다고 하였다. 오래 두고 벌레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를 쐰다고 하였다.

『음식디미방』에서는 비올 때 독 안에 널어 말리거나, 더울 때 물가의 반석 위에 널어 말리라고 하였고, 연기를 쐬면 벌레가 안 난다고 한 것으로 이미 훈연법(燻煙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드는 방법은 우둔살을 얇고 넓게 결대로 저며서 양념간장(진간장·설탕·후추·참기름)에 담가서 간이 배어들면 채반에 널어 햇볕에 말리되, 여러 번 뒤집고 반듯하게 말린다. 상에 놓을 때에는 참기름을 바르고 살짝 구운 다음 썰어서 잣가루를 묻힌다.

폐백용으로는 다져서 반대기 지어 말려서 위에 잣가루를 얹는다. 다져서 대추모양으로 빚어 잣을 꽂아 말리면 대추포이고, 동글납작하게 빚어 잣을 박아 말린 것은 칠보포라고 한다. 안주나 반찬으로 좋은 음식이다.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고성 이씨 부인에 대한 일화는 『한국야담사화전집』에 실려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조선 중기 학자로 이황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류성룡과 김성일 등과 동문수학했던 남편 서해와, 6도의 관찰사와 판서를 두루 역임한 아들 서성과 관련된 자료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옛날 옛적 장애위인 시리즈>는 역사 속 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그때 장애 인물들의 삶을 통해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비롯한 전반적 문제점들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를 돕고자 도서출판 솟대가 발간한 시리즈이다.


5세에 불의의 사고로 실명한 이씨

우선 『한국야담사화전집』에 따르면 고성 이씨는 원래 일반 사람들과 다름없이 태어났으나, 5세 때 여종의 불찰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약에 쓰려고 달여 놓은 부자탕(附子湯)으로 얼굴을 씻다가 그만 그 물이 두 눈에 들어가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는 어려서 용모가 아름답고 재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실명하게 된 것이다. 이때 누구보다 고성 이씨의 장래를 걱정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의 아버지 이고는 딸이 장애를 얻게 된 것을 자신의 불찰 때문이라 생각하고 늘 딸을 불쌍히 여기며 장래를 걱정 하였다. 특히 딸의 혼인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재질이 뛰어나고 총명한 딸을 사랑해 줄 배필을 구해 주고자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옛날에도 장애가 있는 여성에게는 혼처를 구하는 데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고성 이씨가 서해를 남편으로 맞이할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고성 이씨 부인이 나이가 들어 혼인할 시기가 되자, 그의 아버지 이고는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딸이지만 하늘이 점지한 여중군자라 여기며, 어떻게 해서든지 시집을 보내 이생의 원한을 없게 하고자 하였다.

“내 딸은 하늘이 점지하신 여중군자이나 불의의 화벌로 저 지경이 된 것은 그 애의 죄가 아니요 내가 내리는 화벌인즉 내 어찌 안여하랴. 이는 필시 하늘이 그 애의 명예와 복록을 더욱 빛나게 하시려는 뜻에서 저같이 아름다운 재모와 성행에 한 가지 험사를 가미하신 것이다. 어느 적덕한 가정에 들어가 가문을 창대히 만들고 좋은 자손을 내어 이름을 크게 하려고 이같이 고맙게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즉 저 아이의 혼처는 명문거족의 혁혁한 자손 중에 보내는 것보다는 시골구석의 한사 빈족이라도 반드시 훌륭한 덕행과 장래가 있을 위대한 좋은 청년을 물색하여 부부의 합력으로 그 문호를 크게 중흥시킬 사람에게 보내어 이 복을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정창권(2011),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글항아리, 381면.

본래 고성 이씨 부인의 아버지 이고는 안동의 명절(名節)로 이름난 임청각(臨淸閣) 이명의 다섯째 아들 이었다. 명문가의 사람이었던 그는 사윗감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명문거족의 자손보다는 시골의 가난한 선비라도 덕행과 장래가 촉망받는 청년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 이유는 딸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딸에게는 남다른 재덕과 미모, 총명함이 있기 때문에 좋은 짝을 맺어 주면 가문을 번성시키고 자손도 훌륭하게 키워 낼 것이라 생각했다.

퇴계의 제자인 서해를 남편으로

그 무렵 가까운 곳에 퇴계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고는 퇴계 문하에 인재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서 찾아가 퇴계 선생에게 간절히 낭재(郎材) 추천을 부탁했다. 그러자 퇴계 선생은 사정을 듣고 나서 당시 장래가 촉망되던 서해를 추천해 주었다.

“부탁하는 처지는 잘 이해하겠으나 사실을 밝힌다면 누가 일부러 병신 아내에게 구혼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악의를 가지고 남을 속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로되 불구자란 말은 처음부터 드러내지 말고 신랑감을 구하세. 내 문하에 서해라는 젊은이가 있는데, 그의 재학(才學) 과 심성덕행(心性德行) 을 내가 깊이 사랑하여 포은(圃隱) 이나 정암(靜庵) 두 선생에 비길 수 있고 장래에는 세상에 이름을 떨칠 유학자가 될 것이니 이 사람에게 먼저 구혼하게. 그러면 나도 전력을 다하여 추진할 것이네.” 정창권(2011), 같은 책, 같은 곳.

예문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옛날에도 장애가 있는 사람은 결혼에도 많은 제약이 따랐던 듯하다. 그래서 퇴계는 실명한 색시를 맞이할 사람은 없을 테니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말것을 당부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제자 중에 가난하지만 큰 학자가 될 서해를 추천해 준 것이다. 당시에 서해는 예조참의를 지냈던 서고(徐固, ?~1550) 의 아들로, 일찍 양친을 여읜 후, 명종 8년(1553년)에 서울에서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와서 살고 있었다.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서해는, 일찍부터 성리학에 밝아 20세 때에 이미 그의 문장과 학식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결국, 이고는 딸이 맹인이라는 것을 속이고 매파에게 부탁해 혼사를 정하게 되었고, 그후 혼인은 순조롭게 성립되었다.

그 당시 혼인은 양가 부모들이 정하고 신랑은 결혼식날 신부집에 와서 예식을 치르는 것이었 다. 그러고 나서 첫날밤을 치러야 신랑과 신부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때 신랑 서해는 혼례가 치러지는 마당에서 신부의 얼굴을 언뜻 볼 수 있었는데, 치장한 신부의 얼굴은 곱고 아름다울 뿐이었다. 신부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는데, 신부는 보통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밤이 되고서야 비로소 서해는 신부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자기를 속인 것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선비라는 점 때문이란 생각에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서해는 이만한 일에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또 말없이 앉아 있는 신부를 살펴보니 신부가 몹시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도리어 미안하여 부드럽게 위로하였다.

“부인은 겁내지 마시오.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 위인이나, 어찌 그 조그마한 과실로 부인을 괄시하겠소. 잠깐 보아도 부인의 단정하고 현숙한 재덕은 용모의 아름다움에 못하지 않으니, 우리 집과 내게는 오히려 과분한 복택이 되거늘 내가 어찌 부인을 소홀하게 대우하겠소. 다만 내집의 방조 되시는 사가정(四佳亭) 선생의 하세(下世) 후로 한미하고 영체하며 형세가 극히 빈궁하여 호화롭게 생장한 부인에게 괴로움이 많을 것이니 이것이 부끄럽소.” 앞의 책, 382면.

남편 서해는 다정스럽게 부인을 위로하고는 불편함이 없도록 자기 집안일을 숨김없이 가르쳐 주었고, 친척들을 어떻게 대하고 처신할지를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이에 고성 이씨 또한 크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자상함에 평생지기를 만난 듯했다.

“선비들은 나를 알아주는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조차 돌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나이다. 이제 군자께서는 첩이 큰 병신인 것과 부모들이 속이고 청혼한 죄과를 잊어버리시고 오히려 하해와 같으신 도량으로 첩을 버리지 않겠다 하오시니, 이 은덕은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시거늘 첩이 어찌 감히 죽음으로써 군자께 이 은혜를 갚기를 사양하오리까? 변변치 못한 인간이오나 측근에 있는 것을 허락하시니 첩은 참으로 황송 감격하여 사뢰올 바를 알지 못하겠나 이다.” 같은 책, 382~383면.

약봉 서성 종가

이렇게 두 사람은 군자와 숙녀의 백년가약으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여 비할 데 없이 화목하 였다. 고성 이씨의 부모도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비로소 크게 안심하였으며, 사위에게 딸이 소경인 것을 밝히지 않은 것을 사죄하고 딸의 신세를 축원해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첫날밤 신부가 앞을 볼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된 서해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총명한 신부가 신랑의 마음을 꿰뚫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첩이 전생에 죄가 있어 눈먼 몸이나 외람되게 낭군을 섬기고 싶어 혼인을 스스로 사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떠한 미움과 죄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이를 속이신 부모님은 오직 이 한몸을 불쌍히 여겨 옳지 않은 줄 아시면서도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낭군께서도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이를 헤아려 아실 것이옵니다. 모든 죄는 이 한 몸이 지겠사오니 첩의 부모를 탓하지 말아 주옵소서. 이 몸이 진작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하심을 저버리고 불효의 죄를 짓지 아니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을 당하고 보니 진작 죽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옵니다. 다행히 낭군께서 첩의 죄를 용서하시고 비 들고 뜰 쓰는 소임을 맡겨 주신다면 이는 첩의 부모와 첩 세 사람을 살리시는 큰 은혜가 되겠지만 감히 어찌 이를 바라겠습니까?” 안춘근(2002), 『역사를 빛낸 한국의 여성』, 범우사, 168~169면.

서해는 신부의 현숙한 태도와 조리 있는 말에 크게 감동하기도 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런데 신부가 갑자기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며 자결하려 하자, 문 밖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이씨의 부모가 급히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신랑에게 사죄하였는 데, 신랑이 도리어 이씨 부모를 위로하고는 첫날밤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고성 이씨의 부모는 딸의 장래를 위해 맹인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결혼시켰 으며, 남편 서해도 고성 이씨의 재모와 언행을 알아보고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후로 서해는 고성 이씨를 측은히 여기고 아끼며 사랑하였다. 그래서 이고도 사위와 딸을 위하여 소호헌(蘇湖軒)을 물려주었다.

현재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대구 서씨 종중 소유의 소호헌은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서해가 거처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건물을 지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고의 분가 주택으로 지은 것을 사위인 서해에게 물려준 집이라고 전해진다. 안채에서 명종 13년(1558)에 고성 이씨가 아들 서성을 낳은 곳이다. 이처럼 고성 이씨와 서해 부부는 처가살이를 하며 살고 있었다.

약현으로 이사한 후 약과약식을 만들어 판매

그러나 화목하고 다정했던 신혼의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성이 생후 1년 반이 못 된 명종 14년(1559) 서해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는 남편을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 앞 못 보는 과부의 처지에 어린 아들과 함께 생계를 꾸려 나갈 일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슬픔에 잠겨 있지 않았다. 고성 이씨 부인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남편의 사랑에 대한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고는, 명종 15년(1560)에 세 살 된 아들 서성을 데리고 남편의 본가가 있는 서울 약현(藥峴)으로 이사했다.

약현에는 서엄의 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를 통칭)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에는 서씨 집안에 서성의 중부(仲父)인 춘헌공(春軒公) 서엄(1529~1573) 내외만 있었고, 아직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백부(伯父)인 서대(徐岱) 내외가 몇 달 사이로 별세했는데, 그들에게도 역시 자녀가 없었다. 서씨 가문엔 장수한 사람이 드물었던 것이다. 고성 이씨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친정에서 빌려 온 약간의 자금으로 남녀 하인과 함께 청주(淸酒)를 빚고, 유밀과(油密果)와 찰밥, 강정, 산자, 다식 등을 만들어 팔았다.

정성을 다해 다른 집보다 질이 더 좋게 술과 과자를 만들고 찰밥에 밤과 잣, 호두 등을 넣어 맛있게 빚어 내놓았다. 그러자 평판이 좋아 서울 장안 사람들이 고성 이씨 부인이 만든 술과 과자 및 찰밥을 다투어 사갔고, 그곳의 약주약과, 약식 없이는 잔치가 되지 않을 만큼 유명해졌다.

당시 고성 이씨 부인의 집은 현재 서울 중림동 천주교회(약현성당)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집에서 만든 청주를 약주(藥酒), 찹쌀로 만든 밥을 약밥(약식, 藥食), 유밀과(油密果)를 약과(藥果)라 불렀는데, 이것은 약현이란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서성이 관례를 치르고 호를 약봉이라 한 것도 약봉이 살던 곳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한편, 이씨 부인은 가정경제를 꾸려가면서도 아들 교육에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바른 언행은 물론 글도 읽히게 하였다.

서성은 어린 시절 나이에 비하여 매우 총명하였는데 서울로 이사 와서 10여 년을 중부(仲父)인 서엄에게 학문을 배우다가, 성장한 뒤에는 귀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했다. 그때부터 서성은 김장생, 심지원 등과 교우하게 되었고 그의 문장과 학식도 크게 발전하여 20세에는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당시 이름 높은 선비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서성은 선조 19년(1586)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판서가 되어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손끝으로 느껴 사물의 이치를 아는 지혜로움

고성 이씨 부인은 생전에 약현에 큰 집을 지었는데, 그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집을 지을 때의 일화도 몇 가지가 전해진다. 우선 서성이 출세하기 전에 고성 이씨 부인은 약현에다 안동 소호리 친정집을 본떠 큰 제택을 먼저 꾸민 것이다. 서수용(2007), 『종가기행』, 한국일보사, 283면.

아마도 서성의 중부인 서엄마저 죽고 난 이후 무렵인 듯하다. 서엄 역시 자식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은 단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분수에 넘치는 큰 집을 짓는다며 비난할 정도였다. 당시 서씨 가문에는 장수한 사람이 많지 않아 가족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성 이씨는 오히려 이웃 사람들의 비웃음을 단번에 불식시켰다.

“우리 집안이 지금은 이렇지만, 훗날 창대해져 이 집도 협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서수용(2007), 같은 책. 이씨 부인은 집안이 번성할 것을 자신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왕궁에서 이씨 부인이 거처할 집을 약현에 신축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특별히 자손이 번창할 것을 고려하여 대청 30간을 세웠더니 이씨는 지팡이를 짚고 두루 순시하다가 마루에 이르러 아들을 불러 탄식하기를 “지금이라도 내가 죽으면 내 손자 손녀가 이 대청에 들어서서 제사 지내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2~3대를 내려가는 동안에 내 자손이 몇 백 몇 천이 될 수도 있으니 이것은 대청이 아니고 소청이 될 것이다. 마당에 보계를 매지 않고는 안 될 것을 누가 이렇게 설계하여 꾸몄느냐?”하였다. 정창권, 앞의 책, 387~389면.

어느 쪽이 맞는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집을 지을 당시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만큼 포부가 대단한 여장부였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은 또 있었다. 시각장애인이 그러하듯, 고성 이씨 부인도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사물을 본듯이 아는 것이 많았다. 고성 이씨 부인은 집을 짓게 되었을 때 직접 감독하였는데 앞을 볼 수 없으면서 관여하는 것이 많아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목수가 대청 기둥을 거꾸로 세웠다.

그런데 고성 이씨 부인은 손으로 만져 보고 나서 목수를 불러 마치 본 것처럼 그 잘못됨을 책망하였는데, 이 일로 목수들은 다시는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앞은 볼 수 없었지만, 손끝으로 느끼는 감각이나 사물의 이치를 아는 지혜는 누구보다 뛰어났던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의 소망은 생전에 실현되었다. 서성이 선조 19년(1586) 과거에 급제하고 광주목사 (廣州牧使)를 지낸 송영(宋寧)의 딸과 혼인하고 나서는 자손이 번성하여 모두 벼슬을 하게 되자, 그 커다란 집은 좁기만 했다. 직계 자손 중에는 문과 급제자가 123명에 이를 정도였다.

서성은 7남 4녀를 두었는데, 고성 이씨가 칠순 때를 기준으로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있었다. 고성 이씨의 큰 손자 서경우가 우의정에 올랐고, 끝손자 서경주가 선조의 장녀 정신옹주에게 장가들어 달성위가 되었다.


집안 다스림과 자손의 가르침에도 법도와 정도를 좇았기에 고성 이씨 부인은 이웃과 친척들에게 공경과 칭찬을 받게 되었다. 고성 이씨 부인은 77세의 수를 살면서 부귀와 복을 누렸다. 비록 어려서 시각을 잃고 젊어서는 과부가 되었지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였으며,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낸 어머니이자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장애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에 대한 능력을 다시금 주목하게 한다. 가문을 크게 일으키고 사업적 수완까지 보였던 고성 이씨 부인은 신사임당 이상으로 주목해야 할 인물일 것이다.

서성(徐渻)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대구 서씨(達城). 이이(李珥)ㆍ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서, 1586년(선조 19) 문과(文科)에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郎)이 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함북(咸北)에 이르러 정욱 등이 두 왕자와 함께 적의 포로가 될 때 홀로 탈출했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병조 정랑(兵曹正郎)ㆍ직강(直講)이 되고, 명장(明將) 유정(劉挺)을 접대했다. 그 후 암행어사로서 삼남(三南)을 순찰, 돌아와 제용감정(濟用監正)에 특진되고 경상도ㆍ강원도ㆍ함경도ㆍ평안도ㆍ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 후에 호조ㆍ형조ㆍ공조의 판서와 판중추 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11년간 유배(流配)되었다가 1623년 인조 반정으로 형조와 병조의 판서가 되었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과 1627년의 정묘호란에 각각 인조를 호종(扈從)했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ㆍ이호민(李好閔)ㆍ이귀(李貴) 등과 남지 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 역학(易學)을 토론했으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追贈). 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의 현손이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서팽소(徐彭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이고, 아버지는 서해(徐嶰)이다. 어머니는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고(李股)의 딸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아들: 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서경수(徐景需)(전첨) 서경빈(徐景霦) (현감)서경주(徐景霌): (달성위)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1]] [[2]]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큰고고고고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큰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큰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큰증조할아버지: 서지원(徐智元 학자)
                              • 큰할아버지: 서윤(徐尹 참봉(參奉))
                              • 큰할아버지: 서괄(徐适 훈도(訓導))
                              • 큰할아버지: 서세(徐洗찰방(察訪))
                              • 큰할아버지: 서부(徐浮 목사(牧使))
                            • 큰증조할아버지: 서인원(徐仁元 목사)
                            • 큰증조할아버지: 서용원(徐勇元 생원)
                            • 큰증조할아버지: 서숙원(徐叔元 생원)
                          • 큰고조할아버지 : 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큰고조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생원)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생원)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徐遠 생원(生員)
                    • 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조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조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증조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큰할아버지: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큰할아버지:서구(徐久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 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할아버지: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큰아버지:서대(徐岱 장사랑)
                                • 큰아버지:서엄(徐崦 학자)
                                • 아버지:서해(徐嶰 학자)
                                • 어머니: 고성 이씨 부인(固城 李氏)
                                  • 본인: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아들: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손자: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감사)
                                        • 증손자:서문중(徐文重 영의정 정1품)
                                    • 아들:서경수(徐景需 전첨.증 이조판서 정2품)
                                      • 손자 : 서형리(徐亨履)
                                        • 증손자: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
                                          • 고손자: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
                                            • 고고손녀: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 고고손자: 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
                                              • 고고고손자: 서덕수(徐德修 증 이조참판)
                                                • 고고고고손자: 서유호(徐有浩 군수)
                                                  • 고고고고고손자: 서일보(徐日輔 도정)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순(徐震淳 진사)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기(徐相夔 생원)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광효(徐光孝)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재필(徐載弼 독립운동가)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항순(徐恒淳)
                                              • 고고고손자: 서인수(徐仁修 도호부사)
                                                • 고고고고손자: 서유경(徐有慶 좌찬성 종1품)
                                                  • 고고고고고손자: 서능보(徐能輔 이조판서 정2품)
                                              • 고고고손자: 서신수(徐信修 증 좌찬성)
                                                • 고고고고손자: 서유녕(徐有寧 이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손자: 서귀보(徐龜輔 예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고손자(양자.서응보의 자):서호순(徐灝淳 증 이조판서)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정(徐相鼎 병조판서 정1품)
                                                  • 고고고고고손자: 서용보(徐龍輔 영의정 정1품)
                                                    • 고고고고고고손자(양자. 서응보의 자): 서대순(徐戴淳 예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손자: 서응보(徐應輔 군수)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순(徐憙淳 부제학)
                                            • 고고손자: 서명휴(徐命休 지평)
                                              • 고고고손자: 서노수(徐魯修 목사)
                                                • 고고고고손자: 서유풍(徐有豊 현감)
                                                  • 고고고고고손자: 서영보(徐永輔 사헌부 지평)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순(徐慶淳 현감)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우(徐相雨 예조판서 정1품)
                                                • 고고고고손자: 서유승(徐有升 진사)
                                                  • 고고고고고손자: 서경보(徐京輔 첨지중추부사 종1품)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순(徐英淳 한성부판윤 정2품)
                                          • 고손자:서종신(徐宗愼)(선공감감역 繕工監監役)
                                            • 고고손자: 서명삼(徐命三 진사)
                                              • 고고고손자(양자.서명오의 자): 서호수(徐好修 현감)
                                                • 고고고고손자: 서유계(徐有階 첨추)
                                                  • 고고고고고손자: 서장보(徐長輔 대사간)
                                                    • 고고고고고고손자(양자.서홍보의 자): 서형순(徐衡淳 이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손자: 서홍보(徐鴻輔 현감)
                                            • 고고손자: 서명구(徐命九 동지의금부사 종2품)
                                            • 고고손자: 서명오(徐命五 목사)
                                      • 손자 : 서택리(徐擇履 진사)
                                      • 손자 : 서상리(徐祥履 병조참의)
                                      • 손자 : 서광리(徐匡履 진사)
                                      • 손자 : 서홍리(徐弘履 진사)
                                        • 증손자: 서문준(徐文濬 진사)
                                          • 고손자: 서종적(徐宗積 한성부부윤)
                                            • 고고손자:서명장(徐命璋 진사)
                                              • 고고고손자:서일수(徐逸修 진사)
                                                • 고고고고손자:서유대(徐有大 한성판윤 정2품)
                                                  • 고고고고고손자:서영보(徐英輔 훈련대장)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봉순(徐鳳淳 가선대부)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오(徐相五 병조참판)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훈(徐丙勳 병조참판)
                                            • 고고손자:서명형(徐命珩 도승지 정2품)
                                              • 고고고손자:서각수(徐覺修 부사)
                                                • 고고고고손자:서유원(徐有元 대사간)
                                              • 고고고손자:서효수(徐孝修 교리)
                                                • 고고고고손자:서유린(徐有隣 이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손자(양자.서유방의 자): 서준보(徐俊輔 이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순(徐耆淳 이조참의)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조(徐相祖 판돈녕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병찬(徐丙贊 봉상시부제조)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복순(徐復淳 생원)
                                                • 고고고고손자:서유방(徐有防 이조판서 정2품)
                                      • 손자 : 서탄리(徐坦履)
                                    • 아들:서경빈(徐景霦 현감)
                                    • 아들:서경주(徐景霌 달성위 선조부마)
                                      • 손자 : 서정리(徐貞履 부사)
                                        • 증손자 : 서문상(徐文尙) 병조 참의)
                                          • 고손자:서종태 (徐宗泰 영의정 정1품)
                                            • 고고손자:서명균 (徐命均 좌의정 정1품)
                                              • 고고고손자:서지수 (徐志修 영의정 정1품)
                                                • 고고고고손자: 서유로(徐有老 진사)
                                                  • 고고고고고손자(양자.서유신의 자): 서경보(徐畊輔 이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손자:서유신(徐有臣 대제학 정2품)
                                                  • 고고고고고손자:서영보(徐榮輔 대제학 정2품)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순(徐箕淳 대제학 정2품)
                                                • 고고고고손자: 서유후(徐有後 참봉 통훈대부)
                                                  • 고고고고고손자: 서공보(徐恭輔 생원)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양자.서춘보의 자): 서염순(徐念淳 이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손자: 서춘보(徐春輔 총융사 종1품)
                                                  • 고고고고고손자: 서기보(徐基輔 진사)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헌순(徐憲淳 형조판서 정2품)
                                              • 고고고손자:서무수(徐懋修 학자)
                                                • 고고고고손자:서유돈(徐有敦 현감)
                                                  • 고고고고고손자: 서긍보(徐兢輔 현감)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순(徐正淳 예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손자:서당보(徐堂輔 영의정 정1품)
                                                    • 고고고고고고손자(양자.서현보의 자):서공순(徐公淳 궁내부특진관)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집(徐相集 공무아문참의)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병의(徐丙義 최초 축구심판)
                                                  • 고고고고고손자: 서현보(徐玄輔 생원)
                                            • 고고손자: 서명순(徐命純 진사)
                                              • 고고손자: 서회수(徐晦修 공조판서 정2품)
                                            • 고고손자:서명빈(徐命彬 이조판서 정2품)
                                        • 증손자(서원리 양자): 서문중(徐文重 영의정)
                                        • 증손자: 서문하(徐文夏)
                                        • 증손자: 서문징(徐文徵 진사)
                                        • 증손자: 서문유(徐文裕 부사)
                                          • 고손자: 서종옥(徐宗玉 이조판서 정2품)
                                          • 고손자: 서종벽(徐宗璧 목사)
                                            • 고고손자: 서명민(徐命敏 호조정랑)
                                              • 고고고손자: 서기수(徐淇修 이조참의)
                                                • 고고고고손자: 서유훈(徐有薰 이조판서 정2품)
                                          • 고손자: 서종수(徐宗秀 진사)
                                            • 고고손자:서명신(徐命臣 제학 형조판서 정2품)
                                    • 손자 : 서정리(徐正履 좌랑)
                                    • 손자 : 서진리(徐晉履 직장)
                                      • 증손자: 서문택(徐文澤 주부)
                                        • 고손자: 서종집(徐宗集 목사)
                                          • 고고손자: 서명관(徐命寬 음관)
                                            • 고고고손자: 서광수(徐廣修 군수)
                                              • 고고고고손자: 서유증(徐有曾 군수)
                                                • 고고고고고손자: 서선보(徐善輔 군수)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순(徐璟淳 이조판서 정2품)
                                        • 고손자: 서종섭(徐宗燮 이조참의)
                                          • 고고손자:서명원(徐命元 사헌부집의)
                                            • 고고고손자: 서매수(徐邁修 영의정 정1품)
                                          • 고고손자: 서명천(徐命天 대사간)
                                            • 고고고손자: 서격수(徐格修 동중)
                                              • 고고고고손자: 서유영(徐有英 금계필담 저자)
                                        • 고손자: 서종엽(徐宗燁 진사)
                                          • 고고손자: 서명인(徐命仁 도호부사)
                                            • 고고고손자: 서미수(徐美修 대사간)
                                              • 고고고고손자: 서유여(徐有畬 공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손자: 서승보(徐承輔 형조판서 정2품) 
                                            • 고고고손자: 서직수(徐直修 관찰사)
                                              • 고고고고손자: 서유문(徐有聞 이조참판 종2품)
                                                • 고고고고고손자: 서좌보(徐左輔 병조판서 정2품)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순(徐元淳 예조판서 정2품)
                                          • 고고손자: 서명전(徐命全 진사)
                                            • 고고고손자: 서정수(徐鼎修 이조판서 정2품)
                                        • 고손자: 서종급(徐宗伋 이조판서 정2품)
                            • 작은증조아버지: 서팽려(徐彭呂) 풍저창봉사(豊儲倉奉事)
                          • 작은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대제학 좌찬성 종1품)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저서 약봉집(藥峯集)

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구암서원(龜巖書院)

소재지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산79-1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후기 서침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1675년(숙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서거정(徐居正)을 추가배향하였으며, 1741년에 서성(徐渻), 1757년에 서해(徐嶰)를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崇賢祠)와 강당을 중수하고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숭현사, 3칸의 신문(神門), 5칸의 강당 등이 있다.

사우인 숭현사의 중앙에는 서침서거정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서해, 왼쪽에는 서성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대구 구암서원은 숭현사는 조선시대 애민정신과 사회지도층의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서원이다.

또한 대구시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서원이기도 하다.

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 서남쪽 숭현사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구계 서침 선생을 봉향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717년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하고 1718년 3월에 사가 휘거정 선생, 1741년 2월 약봉 휘성 선생, 1757년 8월 함재 휘해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1778년 본도유림이 서원 청액소를 올리고 1779년 유림과 본손 합의에 의해 서원수계를 받았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 됐다고 1924년 유림에서 복설했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이 증수됐다. 숭현사를 1974년 보수하고 1975년 2월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됐다가 대구직할시 승격 후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됐다.

1995년 대구시 북구 산격1동 연암공원 내로 옮겼다.

대구부민이 구계선생을 숭현사에 봉향하게 된 이유는 애민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구계선생은 조선 초 달성 서씨 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에 살았으며 임금이 달성이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다. 땅을 내주는 대신 지금의 영선시장과 서문시장 자리에 대한 세금을 서씨 일문에 받게 했다. 또한 남산고역과 동산일대 땅을 주고 두터운 상과 세록을 주겠다는 뜻을 보였다.

중요한 것은 구계선생이 이를 백성들에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구계선생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신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가문보다는 대구부민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청한 뒤 대구지방의 환곡이자를 한섬에 다섯되씩 감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국왕이 선생의 애국애족의 마음을 칭찬한 뒤 대구 도호부에서 이를 실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뒤 대구부민은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침의 은혜에 백성들은 감동했고 1665년 구암서원의 최초 건물인 숭현사를 세워 선생을 모셨다. 후대에도 선생을 기리는 일이 이어졌으며 1971년 달성 성내 중심부에‘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졌다.

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달성서씨대종회가 문중 서원 격인 옛 구암서원 소유권을 무상으로 대구 중구에 넘긴다.

6일 대구 중구청에 따르면 달성서씨대종회는 동산동·약령시 일원 도시재생뉴딜사업 추진을 위해 옛 구암서원(약 2500㎡)을 중구청에 기부하기로 했다.

구계 서침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옛 구암서원은 북구로 이전하기 전 자리했던 터로 현재는 한옥 숙박 등 전통문화체험관으로 쓰이고 있다.


옛 구암서원. 달성 서씨 문중이 서원을 중구에 기부채납함으로써 이 공간은 도시재생뉴딜사업의 주요 거점공간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구는 국가공모에 선정돼 이 일대를 대상으로 뉴딜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사업이 본격화되면 옛 구암서원은 고택 문화 전시와 숙박 체험이 가능하고 공연이 상설화되는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중구는 이 일대에 한옥이 밀집해 있는 점과 연계해 새로운 관광코스 개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근대문화골목과도 맞닿아 있어 많은 관광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중구청은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한 생활 인프라 개선, 골목경제 활성화 등도 추진할 방침이다.

류규하 중구청장은 "달성서씨대종회가 옛 구암서원을 중구 구민과 대구시민을 위해 내어주심으로써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의미있는 결정을 해주신 데 대해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뉴딜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기부채납 업무 협약식은 권영진 대구시장, 류규하 중구청장, 서영택 달성서씨대종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19년 12월 7일 오전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렸다.


임청각(臨淸閣)

임청각에서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예언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임청각에는 정승 두 명이 태어났습니다. 조선조 중엽의 서성 선생(1558년-1631)과 조선조 말엽의 유후조 선생(1798-1876)이 그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청각의 외손으로 모친들이 친정에 와서 이들을 출산했던 것입니다. 서성 선생의 어머니(고성 이씨 부인)는 이명 선생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시각장애인었다고 합니다. 서성 선생의 부친은 서해라는 분인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서 숙부가 후견인이 되어 조카의 혼사를 진행했습니다.

소호헌(蘇湖軒)

안동 소호헌(安東 蘇湖軒)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약주(藥酒)

선조 때에 문신 [[서성(조선)|서성][(徐渻)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임원경제지』에서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식(藥食)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과(藥果)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포(藥脯)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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