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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甲申政變) | [[갑신정변]](甲申政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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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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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서재필]](徐載弼) 등의 양반 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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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항 이후 이들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김윤식(金允植)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민씨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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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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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서재필]](徐載弼) 등의 양반 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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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항 이후 이들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김윤식(金允植)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민씨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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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충의계(忠義契)를 통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개혁운동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의 근대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특히 1880년 이래 조선정부의 해외시찰 정책, 즉 일본수신사와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파견, 청나라로 영선사 파견 등에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의 정세흐름과 새로운 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자각을 넓혀 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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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광범한 층의 청년을 모집하여 일본의 군사사관학교와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등에 유학하게 함으로써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사상 등을 배우게 하였다. 박영효는 1883년 8월 외무아문 아래 박문국을 설치하여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서 개화파는 나라 안팎의 정세에 관한 소식은 물론, 구미의 입헌군주제와 삼권분립의 우월성 등 그들이 지향하는 개혁의 내용을 선전하였다. 그런데 민씨정권이 부분적인 개화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나라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노력은 벽에 부딪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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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년 임오군란은 수구적인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민씨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침략을 획책하였고, 민씨정권은 청나라에 의지하여 정권유지를 꾀하였다. 그들에게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가 큰 위협적 존재였다. 이 때문에 민씨정권은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런 정세 아래 민씨정권에 참여하면서 평화적으로 일대 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봄 안남(安南) 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나라와 프랑스의 대립관계는, 개화파에게 다시 한번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는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 3000여 명 가운데 절반을 철수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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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 협회|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 협회|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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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가]], [[개화파]] 사상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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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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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고려)|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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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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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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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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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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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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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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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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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
+ | [[https://open.kakao.com/o/gBQB1q6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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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족 == | ||
+ |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
+ |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
+ |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 ||
+ |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조할아버지: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서후)|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구(徐久)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조선)|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해(조선)|서해]](徐嶰 학자)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조선)|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
+ |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우(조선)|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
+ |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감사) | ||
+ |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문중(조선)|서문중]](徐文重 영의정 정1품) | ||
+ |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수(조선)|서형수]](徐景需 전첨) | ||
+ |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형리]](徐亨履) | ||
+ |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 | ||
+ |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 | ||
+ |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백(조선)|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 | ||
+ | *********************** 고고조할아버지: [[서신수]](徐信修 증 좌찬성) | ||
+ | ************************ 고조할아버지: [[서유녕]](徐有寧 이조판서 정2품) | ||
+ | ************************* 증조할아버지: [[서용보]](徐龍輔 영의정 정1품) | ||
+ | ************************** 할아버지:[[서대순]](徐戴淳 한성부판윤 정2품) | ||
+ | *************************** 아버지:[[서상익]](徐相翊 이조참판 종2품) | ||
+ | **************************** 본인:[[서광범]](徐光範 법무대신) | ||
+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택리]](徐擇履) | ||
+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상리]](徐祥履) | ||
+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광리]](徐匡履) | ||
+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홍리]](徐弘履) | ||
+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탄리]](徐坦履) | ||
+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빈]](徐景霦 현감) | ||
+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주(서경주)|서경주]](徐景霌 달성위 선조부마) | ||
+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정리(서정리)|서정리]](徐貞履 부사) | ||
+ |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상]](徐文尙) 병조 참의) | ||
+ |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종태]] (徐宗泰 영의정 정1품) | ||
+ |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서명균]] (徐命均 좌의정 정1품) | ||
+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서지수]] (徐志修 영의정 정1품) | ||
+ | ************************ 작은고조할아버지:[[서유신]](徐有臣 대제학 정2품) | ||
+ | ************************* 작은증조할아버지:[[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 정2품) | ||
+ | ************************** 작은할아버지: [[서기순]](徐箕淳 대제학 정2품) | ||
+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서무수]](徐懋修 학자) | ||
+ | ************************ 작은고조할아버지:[[서유돈]](徐有敦 현감) | ||
+ | ************************* 작은증조할아버지:[[서당보]](徐堂輔 영의정 정1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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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 문하시중 종1품 이천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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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 | ||
+ |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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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재필기념공원]](徐載弼記念公園) == | ||
+ |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강건한 삶을 살았던 독립투사 송재 [[서재필]] 선생의 유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18세 나이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은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독립문을 만들었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다. 그가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는 기념공원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그의 정신이 살아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보성군의 북부 지역으로 천년고찰의 대원사와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 미술관 그리고 주암호반, 승주 고인돌공원과 연계되어 교육문화관광코스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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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수의 여행]] == | ||
+ | 한수의 여행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쓴 소설로, 1922년 출간되었다. 그러나 영화화에 실패하고 묻혀졌다가 1978년부터 종증손 변호사 서동성, 종손자 법학자 서희원 등의 주도로 재출간되었다. 책의 한글 번역은 종증손 서동성이 맡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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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 ||
+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 ||
+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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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섭대천]](利涉大川) == | ||
+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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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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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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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
+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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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같이 보기 == | ||
+ | * [[이천 서씨]] | ||
+ | * [[대구 서씨]] | ||
+ | * [[달성 서씨]] | ||
+ | * [[부여 서씨]] | ||
+ | * [[연산 서씨]] | ||
+ | * [[남양 서씨]] | ||
+ | * [[당성 서씨]] | ||
+ | * [[봉성 서씨]] | ||
+ | * [[절강 서씨]] | ||
+ | * [[중국 서씨]] | ||
+ | * [[일본 서씨]] |
2024년 8월 2일 (금) 16:19 기준 최신판
갑신정변(甲申政變)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서재필(徐載弼) 등의 양반 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이들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김윤식(金允植)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민씨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서재필(徐載弼) 등의 양반 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이들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김윤식(金允植)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민씨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충의계(忠義契)를 통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개혁운동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의 근대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특히 1880년 이래 조선정부의 해외시찰 정책, 즉 일본수신사와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파견, 청나라로 영선사 파견 등에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의 정세흐름과 새로운 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자각을 넓혀 나갔다.
또한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광범한 층의 청년을 모집하여 일본의 군사사관학교와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등에 유학하게 함으로써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사상 등을 배우게 하였다. 박영효는 1883년 8월 외무아문 아래 박문국을 설치하여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서 개화파는 나라 안팎의 정세에 관한 소식은 물론, 구미의 입헌군주제와 삼권분립의 우월성 등 그들이 지향하는 개혁의 내용을 선전하였다. 그런데 민씨정권이 부분적인 개화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나라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노력은 벽에 부딪혔다.
1882년 임오군란은 수구적인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민씨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침략을 획책하였고, 민씨정권은 청나라에 의지하여 정권유지를 꾀하였다. 그들에게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가 큰 위협적 존재였다. 이 때문에 민씨정권은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런 정세 아래 민씨정권에 참여하면서 평화적으로 일대 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봄 안남(安南) 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나라와 프랑스의 대립관계는, 개화파에게 다시 한번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는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 3000여 명 가운데 절반을 철수시켰다.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박영효(반남 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 이건 근거없는 풍문으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약 60년 전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박미(朴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D.C.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구(徐久)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해(徐嶰 학자)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형수(徐景需 전첨)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빈(徐景霦 현감)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주(徐景霌 달성위 선조부마)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정리(徐貞履 부사)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정리(徐正履 좌랑)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진리(徐晉履 직장)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엄(徐崦 학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해(徐嶰 학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 문하시중 종1품 이천백)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
서재필기념공원(徐載弼記念公園)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강건한 삶을 살았던 독립투사 송재 서재필 선생의 유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18세 나이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은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독립문을 만들었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다. 그가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는 기념공원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그의 정신이 살아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보성군의 북부 지역으로 천년고찰의 대원사와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 미술관 그리고 주암호반, 승주 고인돌공원과 연계되어 교육문화관광코스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수의 여행
한수의 여행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쓴 소설로, 1922년 출간되었다. 그러나 영화화에 실패하고 묻혀졌다가 1978년부터 종증손 변호사 서동성, 종손자 법학자 서희원 등의 주도로 재출간되었다. 책의 한글 번역은 종증손 서동성이 맡았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