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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997000> '''{{{#fff 위치}}}''' ||<-2><bgcolor=white,#2d2f34>[[쑹화강]] 일대 송눈평원 ||
 
||<bgcolor=#997000> '''{{{#fff 수도}}}''' ||<-2><bgcolor=white,#2d2f34>북부여: 예성(濊城)[* 북부여 초기 수도. 현 [[중국]]의 [[지린 성]] 지린시로 추정.]→ [[부여성]](扶餘城)[* 현 [[중국]]의 [[지린 성]] 눙안현로 추정.] [br] 동부여: 여성(餘城)[* 출처는 [[광개토대왕릉비]]문. 현 [[중국]]의 [[지린 성]] 둔화시로 추정.] ||
 
||<bgcolor=#997000> '''{{{#fff 정치 체제}}}''' ||<-2><bgcolor=white,#2d2f34>[[군주제]] ||
 
||<bgcolor=#997000> '''{{{#fff 국가 원수}}}''' ||<-2><bgcolor=white,#2d2f34>왕(王) ||
 
||<bgcolor=#997000> '''{{{#fff 주요 군주}}}''' ||<-2><bgcolor=white,#2d2f34>[[동명왕]][br][[해모수]][br][[해부루]][br][[금와왕]][br][[대소왕]] ||
 
||<bgcolor=#997000> '''{{{#fff 언어}}}''' ||<-2><bgcolor=white,#2d2f34>부여어[* [[고구려어]]와 같은 어족으로 추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부여계제어&ridx=0&tot=1|참조]] ||
 
||<bgcolor=#997000> '''{{{#fff 종교}}}''' ||<-2><bgcolor=white,#2d2f34>무속신앙 ||
 
||<bgcolor=#997000> '''{{{#fff 국성}}}''' ||<-2><bgcolor=white,#2d2f34>해(解) ||
 
||<bgcolor=#997000> '''{{{#fff 종족 구성}}}''' ||<-2><bgcolor=white,#2d2f34>[[예맥]], [[읍루]] 등 ||
 
||<bgcolor=#997000> '''{{{#fff 성립 이전}}}''' ||<-2><bgcolor=white,#2d2f34>[[성읍국가]][* 탁리(고리)국 설화가 알려져 있다.] ||
 
||<bgcolor=#997000> '''{{{#fff 멸망 이후}}}''' ||<-2><bgcolor=white,#2d2f34>[[고구려]], [[두막루]]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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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부여'''(扶餘)는 중국 [[둥베이|동북 지방]]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왕조 국가이다.
 
'''부여'''(扶餘)는 중국 [[둥베이|동북 지방]]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왕조 국가이다.
  
 
부여의 존속기간은 [[고조선]] 후기와 [[삼국시대]] 중반에 걸친다. 대한민국 역사 교육에서는 [[단군]]과 [[고조선]]에서 모든 한국사가 시작되는 일원적 개념처렴 설명하고 있어 착각하기 쉬우나, 부여는 평양성에 도읍지를 둔 후기 [[고조선]]과 동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공존한 고대 우리 민족의 국가였으며 고구려, 백제 등 우리나라 주요 국가들이 부여를 계승하면서 한민족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백제|남부여]] 등 다양한 부여 국가가 존재하며 [[고조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치는 않으나 삼국유사의 내용[* 삼국유사 왕력(王歷)편 “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을 보면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의 아버지[* 보통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로 알려져 있으나 단군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를 단군으로 표현하는 등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의 존속기간은 [[고조선]] 후기와 [[삼국시대]] 중반에 걸친다. 대한민국 역사 교육에서는 [[단군]]과 [[고조선]]에서 모든 한국사가 시작되는 일원적 개념처렴 설명하고 있어 착각하기 쉬우나, 부여는 평양성에 도읍지를 둔 후기 [[고조선]]과 동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공존한 고대 우리 민족의 국가였으며 고구려, 백제 등 우리나라 주요 국가들이 부여를 계승하면서 한민족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백제|남부여]] 등 다양한 부여 국가가 존재하며 [[고조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치는 않으나 삼국유사의 내용[* 삼국유사 왕력(王歷)편 “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을 보면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의 아버지[* 보통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로 알려져 있으나 단군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를 단군으로 표현하는 등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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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부여]]의 어원인 [[녹산]]을 떠올리게 하는 사슴상이다. [[부여]]가 사슴이란 견해는 여러 갈래로 존재한다. <자치통감>은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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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서국]](徐國)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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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목]](若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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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왕]](徐駒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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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군]](徐句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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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차우]](徐王次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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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徐偃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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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자우]](徐王𠂔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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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자선]](徐王子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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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지후]](徐王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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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계량]](徐王季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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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경]](徐王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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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의초]](徐王義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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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장우]](徐王章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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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왕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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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東明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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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왕]](解慕漱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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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왕]](解夫婁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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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解金蛙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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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왕]](解帶素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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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사왕]](解曷思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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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왕]](解始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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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태왕]](解夫台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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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解尉仇台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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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위거왕]](解簡位居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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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여왕]](解麻余王)
 +
************[[의려왕]](解依慮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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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라왕]](解依羅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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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왕]](玄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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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扶餘蔚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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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왕]](孱王)
  
 
== 국호 ==
 
== 국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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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 시기와 전신 ===
 
=== 건국 시기와 전신 ===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 [[서주]] ~ [[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 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과 북방의 백금보 문화[* 반농반목적 문화로 현재의 길림성 북부 쑹위엔 시 일대였다. 과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동명왕 신화의 '탁리국'과 연관시킨 적도 있다.] 등의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으며,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 같은 청동기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 및 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 및 동검, 가는 무늬 거울 등이 발견된다. 이와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 및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 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세기 ~ 3세기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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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 서주 ~ [[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 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과 북방의 백금보 문화[* 반농반목적 문화로 현재의 길림성 북부 쑹위엔 시 일대였다. 과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동명왕 신화의 '탁리국'과 연관시킨 적도 있다.] 등의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으며,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 같은 청동기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 및 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 및 동검, 가는 무늬 거울 등이 발견된다. 이와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 및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 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세기 ~ 3세기로 보고 있다.
  
 
건국 시기는 보통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 [[사기]] 화식열전 등에도 부여가 언급된다. 물론 이것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거나, 기원전 3세기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록과 유물 등의 존재는 부여 이전에도 원시적 공동체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서단산 문화의 분포는 [[성읍국가]] 이상으로 보기에는 매우 작으며, 현재의 지린시 일대에만 나타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길림성 북부에는 백금보 문화로 불리는 반농반목적  청동기 문화가 있었다. 또한 남서부에는 철기를 개막한 이질적 문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대부분의 북중국 지역은 현재의 1개 성 단위가 4-5개의 이질적 문화권으로 쪼개진, 고대적 부족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다면 이런 부족 중 하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밖에 없다.]
 
건국 시기는 보통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 [[사기]] 화식열전 등에도 부여가 언급된다. 물론 이것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거나, 기원전 3세기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록과 유물 등의 존재는 부여 이전에도 원시적 공동체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서단산 문화의 분포는 [[성읍국가]] 이상으로 보기에는 매우 작으며, 현재의 지린시 일대에만 나타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길림성 북부에는 백금보 문화로 불리는 반농반목적  청동기 문화가 있었다. 또한 남서부에는 철기를 개막한 이질적 문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대부분의 북중국 지역은 현재의 1개 성 단위가 4-5개의 이질적 문화권으로 쪼개진, 고대적 부족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다면 이런 부족 중 하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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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 신화 ===
 
=== 건국 신화 ===
 
>북이(北夷) [[고리국|탁리국(橐離國)]] 임금([[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아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북이(北夷) [[고리국|탁리국(橐離國)]] 임금([[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아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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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형》''' [[http://kr.blog.yahoo.com/buja100kim/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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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古記)》에 이르길, [[전한]](前漢) [[선제(전한)|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 BC 59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해부루왕|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왕은 훗날 상제(上帝)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왕|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였다.
 
>----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북부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562&categoryId=49616&cid=49616|#]]
 
----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동명왕|동명제]]가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왕도를 세우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
 
>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그 돌을 들추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는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라고 말하였다.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왕|금와]](金蛙)'''라고 하였다. 아이가 자라자 태자로 삼았다.
 
>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의 왕위를 태자 '''[[대소왕|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서기 22년)에 이르러 고구려 왕 [[대무신왕|무휼]](無恤)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동부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563&cid=49616&categoryId=49616&expCategoryId=49616|#]]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설화가 굉장히 흡사하다.[* 이에 반해 백제의 건국 설화는 부여 및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비교했을때 매우 다르다. 특히 백제의 건국 설화는 [[난생설화]]가 아닌데, 부여,고구려 뿐만 아니라 신라 및 가야도 난생설화인걸 감안하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시대에 해당하는 한반도 국가들 중에서 건국 설화가 난생설화가 아닌 나라는 [[고조선]]과 [[백제]] 둘 뿐이다.] 동한대의 [[논형]]에 처음 부여 동명왕 신화가 언급된 것으로 볼 때, 동명왕 신화가 원형이며, 고구려가 어느 정도 국가를 정비한 단계에서 부여 시조 신화가 다르게 전래되어 [[동명성왕]] 신화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
== [[부여씨]](扶餘氏) ==
  
3세기 서적인 <[[위략]]>에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부여는 북만주 [[탁리국]](다른 책에는 고리, 색리 등으로 기록)에서 탈출한 동명이 [[예맥]]의 땅에 망명하여 건국했다고 한다. 대체로 부여가 건국된 시기를 [[기원전 3세기]]로 본다. [[위만조선]]이 건국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주몽]]의 출신지이며, 주몽의 고구려 건립 이래 대무신왕 5년(기원후 22년)까지 고구려와 대립하던 국가인 동부여가 등장한다. 삼국사기에서는 동부여에 대해서 대무신왕 5년 2월에 [[대소왕]]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수 가로 이주하여 [[해두국]]왕을 죽이고 [[갈사국]]을 세우는 등 내부혼란으로 쇠퇴하다가 같은 해 7월에 왕[* 대소왕으로 추정]의 종제(從弟;사촌동생)가 1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해와 왕으로 봉해지고 연나부에 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후한서와 삼국지 각각의 동이열전 부여조에서 부여가 [[후한]]이나 [[위(삼국시대)|위나라]]와 교류를 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동부여는 후한서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부여와는 별개의 세력으로 추정된다.
 
=== 전성기 ===
 
부여의 전성기는 1세기~3세기인데,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후한 및 위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부여왕 [[간위거왕|간위거]]가 위나라 군대에게 군량을 제공하기도 했을 정도. 하지만 중국세력과 항상 핑크빛 관계를 유지한 건 아니어서 후한 [[안제(후한)|안제]] 때인 111년에 기병과 보병 7~8천명을 이끌고 [[낙랑군]]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했던 적도 있었다.[* 이 기록은 하필이면 부여와 낙랑군의 거리가 멀고, 그 사이에 고구려가 있다는 점 때문에 낙랑군재요서설의 주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잘나갈 때는 옆나라 읍루를 복속시키기도 했다. 읍루가 황초(黃初, 220~226) 연간에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로부터 독립하긴 하지만.
 
  
[[진서]]에 따르면 [[고구려]] [[동천왕]] 시기에도 부여는 8만여 호에 달하는 인구를 과시하며, 3만 호에 불과한 고구려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한 바 있다. 고대 국가의 국력은 인구와 비례한다. 이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당시 경제의 전부였기 때문이고, 무기 또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군사력이 인구수와 동일시되던 고대 사회로써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 실제 부여는 '''선제 이래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도성'''자랑하던 강국이었다.[*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위략에서는 '부여가 넉넉하고 풍성하여 선세 이래로부터 '''파괴를 겪은 적이 없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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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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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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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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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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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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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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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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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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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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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고구려는 건국 전기 약하던 시절 툭하면 도성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부여는 방어가 취약한 평야 지역에 도읍한 평지성이었고,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다. 게다가 부여는 최대 영토가 2,000리에 이르렀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동명성왕]] ~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부여 세력을 부여 남부의 일개 대가 세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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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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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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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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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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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부여씨]]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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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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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餘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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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위]](餘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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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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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 모용선비의 침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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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나가던 부여도 285년 [[선비족]] [[모용부]]에게 대대적으로 털리면서 쇠락기를 맞이했다. 서기 285년, [[모용외]]의 침공에 10,0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의려왕]]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한다. 이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두만강]] 일대의 북[[옥저]]로 도피하였는데, 그 중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서진의 보호를 받으며 돌아가 나라를 되찾았다[復]. 한편 모용선비족의 부여 침입은 향후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북옥저에 일부 무리가 남아 [[동부여]]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유민들이 백제로 흘러들어가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 [[랴오닝성]] 후루다오시(葫芦岛市) 젠창현(建昌县, 건창현) 라마동진(喇嘛洞镇, 나마동진)의 선비계 유적을 부여계 집단의 유적이라고 본 견해[[http://egloos.zum.com/lyuen/v/5577997|#]]도 있었는데, 이들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까지 내려왔다는 내용이 역사 스페셜에서 방영되었다.[* 이를 부여족 남하설이라 부르는데 이말대로면 금관가야는 삼국사기 건국년도인 42년이 아닌 285년이 성립년도로 잡히게 된다.]
 
  
285년 모용선비족의 침공으로 옥저 지역으로 도망한 부여 유민들이 동부여를 형성했다는 설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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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 전연의 침입과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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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모용외의 침공에 부여는 국가 중심지를 기존의 [[지린성]] 일대에서 서쪽의 농안 지역으로 옮기나, 346년 결국 [[전연]] [[모용황]]의 대공격에 [[현왕|부여왕 현]]을 포함해 무려 5만여 명이 끌려가면서 사실상 부여는 붕괴하게 된다. 이때 끌려간 인구가 5만 명이 아니라 5만 호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구당서]]를 [[신당서]]로 옮겨 적을 때 구()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던 것이 대표적인 예.
 
  
부여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410년]]에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동부여가 멸망하며 이것마저 맥이 끊겼다. 후기 부여의 중심지였던 농안 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북부여는 [[494년]]에 [[물길#s-2]]의 침입을 받고 완전히 멸망하여 494년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투항했다. 일부 세력은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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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 정치 ==
 
부여는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다.
 
  
정치는 '''귀족 정치'''로서 지배 계급에는 '''국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및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다. 관직의 명칭에 대해서는 [[만주원류고]]에 중국인들의 무지로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넣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지방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四出道)'''(사가도(四街道)라고도 함)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우가 등의 '''제가(諸加)'''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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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 계급인 민(民)을 '''하호(下戶)'''라고 칭하였는데, 그들은 지배 계급에 대하여 각종 노역과 물자 공급을 부담했기에 노비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전쟁시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식량 보급과 물자 운송을 담당했으며, 그때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갖추어 놓았던 무기를 갖고 호민(豪民)들을 모아 참전하였다. '''호민'''이란 하호 중 부유하면서 어느 정도 자체적인 세력이 있었던 자들로, [[영국]]의 [[요먼]]과 비슷한 계층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봉건제]]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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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부여의 국왕은 귀족 연맹체의 제사장 성격이 강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귀족]] 회의에서 폐출되거나 보통은 죽임을 당했다.''' 귀족 [[연립정부|연정]]체제에서 "왕"이라는 호칭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군주제]] 체제가 계속 유지됐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름이 "왕"이라서 오해를 살 뿐, 당대로서는 제사장 정도의 느낌. 제가들도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일조하였고, 왕 또한 제가들이 뽑았으므로 왕을 내쫓거나 죽일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시간이 흐르고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졌으나, 다른 주변국들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쟁시 왕은 귀족들과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귀족의 대표로서 군림하였을 뿐''', 귀족은 각자의 집단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이런 귀족 연정체제+선거군주제 체제의 나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응집력이 약하고 안정적이지 못하며, 나라가 쇠락하기 시작하면 갈기갈기 찢어지고 순식간에 망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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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런 정치 제도 때문에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였음에도 [[대소왕]]이 [[고구려]]의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잡혀 참수당하자 귀족 세력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는 결과적으로 부여의 힘을 분산시켜 후대에 부여가 다시는 [[고구려]]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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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 사회 ==
 
혼인을 할 때는 혼납금으로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소와 말을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간음을 엄격히 금지해서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는 경우에는 모두 죽였으며, 특히 부인이 [[질투]]하는 것을 나쁘게 여겨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했다. 만약 죽음을 당한 여인의 [[친정]]에서 [[]]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 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했는데, 이것은 혼인 때의 혼납금을 반환하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고구려]]와 같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인 [[형사취수]]가 있었다.[* 고구려의 사회법 중 대부분이 부여와 유사한 걸로 보아 고구려의 사회법도 부여에서 따온 걸로 추정.]
 
  
추수가 끝난 후 '''[[영고#s-2]]'''라 불리는 제천 행사를 벌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동맹#s-2]]''', [[동예]]의 '''무천'''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영고는 유목 민족의 수렵제 성격이 남아 있어 동맹이나 무천과 달리 10월이 아닌 '''12월에 거행되었다.'''--[[최태성|부영↗️고~~]]--
 
  
[[노비]] 제도가 존재하였다. [[순장]]은 대부분 노비로 채워졌다. 순장된 노비는 전쟁 포로 출신 뿐 아니라 형벌 노비와 부채 노비도 있었다. 때문에 변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노비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법에는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그리고 [[징벌적 손해배상|남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다.[* 이 12배 변상은 고구려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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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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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 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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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부여계제어&ridx=0&tot=1|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여계제어 항목]]
 
  
같은 [[예맥]] 계통인 [[고구려어]]와 비슷하였을 거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지만, 관련 자료가 워낙에 부족한 관계로 얼마나 유사성이 높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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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부여의 사람의 성 解氏('''해'''씨)[[순우리말]]이며, 사용한지 가장 오래된 말로 확인되는데, '[[태양]]'을 의미한다. 2015년 통계청 기준으로 9명이 확인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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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 경제 ==
 
만주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농사를 주 산업으로 한 농경 국가였으나, 동시에 목축과 기마술에도 능한 반농반목의 경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 덕분에 당시 북방의 패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중국]][[(동물)|]]을 수출하기도 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동물)|말]], 붉은 옥(적옥, 赤玉), 구슬 장식품(미주, 美珠), 담비나 [[돼지]], [[여우]], [[원숭이]] 등의 짐승 가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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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 역대 국왕 ==
 
[include(틀:역대 부여 국왕)]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부여/왕사)]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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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부여/인물)]
 
== 종교와 문화 ==
 
> 부여 사람들은 과격하고 크며,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몸가짐이나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할 줄 알고, 성품이 어질고 덕이 많아 도둑질하지 않는다. 여럿이 모일 때 공손히 서로 예의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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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위서 동이전> 중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부여조의 [[영고#s-1]]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의 백성이 동네마다 한데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식 직전에 "맞이굿(迎神祭)"을 벌였다고 한다. 때문에 제천 의식에 기초한 [[샤머니즘]]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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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제천 의식을 행했는데, 이때 소를 죽여 그 굽을 살펴서 길흉을 점쳤다. 만약 굽이 갈라져 있다면 이를 흉조로 여겼고, 그렇지 않다면 길조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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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또한 [[흰색]]을 숭상하여, 흰 옷을 즐겨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례 문화가 상당히 어마어마했는데, 죽은 사람의 장례는 무조건 5월에 치뤘다. 만일 다른 달에 죽으면 5월까지 보존했고, 심지어 당시에는 귀한 [[얼음]]까지 팍팍 써 가면서 최대한 시체의 부패를 늦추었다. 다른 설로는 무조건 5월에 장례를 치른 게 아니라,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3년상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이쪽이 더 현실적. 이런 장례 의식을 '''[[후장]]'''이라고 불렀다는 모양이다(...) 아니 얼마나 추운 동네였길래 그게 가능한 건지도...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와 함께 부여의 물질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면, 부여 문화의 출발은 청동기시대의 '''서단산 문화'''로서, 그로부터 [[철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대해맹-포자연 문화'''로 이어져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예 대해맹-포자연 문화를 부여로 인식하는 연구자들도 더러 있는 편이다. 서단산 문화의 니질계의 회도들이 확인되는 층위의 위로 대해맹-포자연 유적의 층위가 확인되고 있으며, 토기의 유형 또한 유사하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파일:서단산 문화와 유수 노하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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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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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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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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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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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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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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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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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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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서언왕)|황룡]](黃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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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黃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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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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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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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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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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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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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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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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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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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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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창]](鹄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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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창(鹄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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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개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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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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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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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泰山(태산)=[[서산]](徐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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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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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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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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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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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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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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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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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병]](月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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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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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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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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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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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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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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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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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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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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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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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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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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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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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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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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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가장 우측의 토기는 유수 노하심 유적의 출토품이고, 그 옆의 토기는 서단산 문화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확인된 토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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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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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이는 기원전 1세기 말부터 기원후 3세기 사이의 유적인 중국 길림성 유수시 노하심촌 유적, 즉 유수 노하심 유적에서 확인되는 독특한 형태의 동이류의 토기들과도 관련이 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파수부가 2개씩 부착되는 특징이 확인되며, 독특한 구연부의 형태를 갖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특징적인 요소들이 부여 문화의 기저 유형으로 인식되는 서단산 문화에서 확인되는 토기 유형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특히 서단산 문화가 확인되는 유적의 층위 바로 위로 포자연 유적, 대해맹 유적들이 확인되는데, 이 유적들에서 바로 저러한 쌍이부호들이 확인되므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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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부여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통상 '유수 노하심' 유적이라고 불리는 [[중국]] [[길림성]] 유수시 노하심촌의 노하심 유적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길림성 길림시의 동단산 유적, 서단산 유적, 모아산 유적 등이 있다. 조사가 되었지만 보고서가 정식으로 발간된 유적은 유수 노하심 유적밖에 없으며, 다른 유적들은 보고서가 간략한 형태로만 짧게 보고되었다. 모아산 유적 같은 경우에는 당대의 사회상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고분]] 자료 중심의 유적이지만,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발간되지 않아서 자세한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혹시나 싶어 첨언하자면 [[동북공정]] 때문은 아니고 원래 중국 고고학계 자체가 [[한족]]과 관련된 유적에 포커스가 자주 몰리는 편이고, 다소 매스컴의 인기를 끌 만한 금은보화들이 나오지 않으면, 보고서의 발간 작업 자체가 많이 느린 편이다[* 사실 다른 이유도 있는데, [[문화대혁명]] 당시에 벌어진 희대의 [[반달리즘]]때문에, 비슷한 일이 또 있을 걸 우려해서 [[중국]] [[고고학|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1960년대에 [[명나라]]의 [[만력제]]의 능을 발굴하는 와중에 [[홍위병]]들이 들이닥쳐서 고고학자들을 끌고가서 [[코렁탕|코로 탕수육을 먹이고]] 발굴된 유물과 유골들을 박살내버린 [[흑역사]]가 있어서, [[중국 공산당]]이 아직까지도 건재한 이상, 똑같은 짓을 하려는 또라이가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유적 발굴을 꺼리게 된 것이다. 때문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한족]]들이 세운 게 분명한 명나라 시대의 황릉들조차 하나도 발굴하지 못하고 입맛만 다시는 판국이라, 이민족, 그것도 [[한국인|타국 사람들]]이 세운 유적의 발굴에 의욕적일 리가 없다.]. [[대한민국|한국]]이나 [[일본]]이 고고학적 발굴조사의 보고서의 발간 시스템이 투명하고 공식적인 편이다[* [[후지무라 신이치|물론 일본에서는 거짓말하다가 걸린 사람도 있기도 하다]].]. 따라서 사실상 구체적인 부여의 물질 문화를 담고 있는 실물자료로는 유수 노하심의 보고서 외에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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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파일:유수 노하심 유적과 기타 선비 유적의 비교 검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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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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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부여의 유적과 유물에서 다소 뜻밖(?)인 점은 바로 [[선비족|선비 계통]]의 유적과 상관성이 많다는 점이다. 사실 동북지역의 1~3세기 토기 문화의 전개 과정은 앞선 청동기시대부터 [[한나라|한]] 문화의 성립 즈음까지 매우 복잡 다변하게 전개되므로, 저런 질 나쁜 도면 몇 장으로 토기 문화의 동질성 내지는 상관성을 역설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한 한계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금속 유물 및 장신구류[* 지면의 한계가 있지만 대부분의 장식 유물들이 흔히 선비족 유적의 표지적인 유물 세트와의 관련성이 돋보인다. 청동 단추라던지 조개 껍질(화폐(?)), 청동 방울 등.]의 조합상을 보면 저런 동물문 장식의 계열 자체가 [[스키타이]] 계열의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며, 귀걸이[이식(耳飾)]의 형태 또한 조형(祖形)을 따지고 보면 북방 계열, 즉 내몽골 쪽의 기원 전후한 빠른 시기의 유적에서 기원이 찾아지기도 하기 때문에 부여와 선비족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그리 놀랄 것도 아닌 것이 흔히 알려진 신라 금관들의 장식들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런 고구려는 선비족 계열의 국가들인 삼연(三燕)의 물질 문화와의 상호교류의 흔적이 두드러 진다. 그만큼 동북아시아 국가나 집단의 상호교류가 활발했었다. 물론 신라의 금관의 장식적인 요소 일부들이 관련이 있다는 점이며, 전반적인 금관 자체의 신라 특유의 아이덴티티는 엄연히 신라 독자적인 요소로 엄존하고 있음을 전제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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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
  
[[파일:유수노하심 귀걸이 사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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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그래도 위와 같은 귀걸이는 조형이 내몽골의 흉노, 선비 계열의 유적에 있다 할 뿐이지 그래도 분포 지역의 패턴을 살펴보면 오롯이 '''부여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양식을 갖춘 편이다. 위의 사진과 같은 형태 외에도 새끼손톱 모양의 귀걸이도 있는데, 이 역시 부여계로 볼 수 있는 유물이다. 특히 이 손톱 형태의 귀걸이는 요령성 환인현의 [[고구려 왕릉#s-2|망강루 고분군]], 길림성 통화시 만발발자 유적에서도 확인되는데, 두 고분군은 모두 초기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돋보이는 고분군이기도 하다. 또 [[김포]] 운양동 유적에서도 같은 형태의 귀걸이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위의 사진에서 우측의 귀걸이의 형태는 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요령성 북표현 라마동 고분군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유적은 삼연, 즉 선비족의 고분 유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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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불과차]](徐不過此) ==
  
여하간 위의 이유로 인해서 부여와 [[선비족|선비]]나 [[흉노]]와의 고고유물의 조합 및 자체적인 판별에 대한 논의가 많다. 동경의 경우 선비족은 파훼하여 부장하는 점이 특징이지만, 유수 노하심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동경이 많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서차구 고분군에서는 파훼된 동경이 확인되고 있으며, 선비 계통의 삼족기도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또 부여계의 이식도 확인되고 있어 교류의 흔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떠한 유물이 어떠한 형태인가를 두고 완연한 부여계의 물질 문화인가를 정의하는 것은 아직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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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파일:/image/076/2014/10/29/2014103001003746800236371_99_2014102918380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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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6&aid=0002615780|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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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2014년 10월 29일, [[국립중앙박물관]]이 공개한 [[일본 제국|일제]]가 수집한 유물 중 부여 금동 가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2677155|#]] 이 공개된 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일제강점기 [[유리 건판]] 목록과 문서 열람 서비스에서도 사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중국 길림성에서 채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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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파일:유수노하심 부여 가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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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
  
위의 [[일제강점기]]에 채집한 가면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가면이 중국 길림성 길림시의 동단산 유적에서 채집된 바 있다.[* 참고로 채집이라 함은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되거나 유물 신고에 의해서 입수된 것을 뜻한다.] 위의 유물은 길림성박물관의 부여관에서 전시 중에 있다. 이러한 가면을 부장하는 특징 또한 선비족의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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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파일:동단산 유적 전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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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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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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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도 동단산 유적의 바로 밑에는 동단산 평지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 바로 뒤로는 모아산 유적이 넓게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초기 부여의 도성지로 추정케 하는 근거가 되는 유적들이기도 하다. 이 동단산의 바로 앞에 흐르는 [[송화강]]은 길림시를 동서로 구분하는데, 동단산 유적에서 10여 km 정도 서쪽에는 바로 서단산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 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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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파일:attachment/부여/buyo.jpg|width=100%]]||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 [[중국]] [[지린 성]] 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부여의 철 찰갑과 철검.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id=169&pid=1&cid=637&offset=&gb=&mgb=&wgb=&sgb=&mlb=&loc=&sec=&find=&afind=&sort=&array=&gubun=&rm=y|#]] 지금은 [[동북공정]]의 영향인지 사라졌다. ||
 
||[[파일:attachment/부여/bus.png|width=100%]]||
 
|| 부여 철검의 다른 사진. ||
 
  
||[[파일:부여 유수 노하심 유적 출토 갑옷.png|width=100%]]||
+
== [[고려도경]](高麗圖經) ==
|| [[https://blog.naver.com/dndudwp99/221270349585| 이미지 출처 ]] ||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
북방 지역의 평원에서 기른 말로 인해 기마술이 발달했고, 중기 이후 철기를 사용했다.
 
 
부여는 중국과 특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선비족]]의 연계가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부여 입장에서도 [[고구려]]와 주변 기마 민족들이 부여에 적대적이었기에 양국의 이해 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물론 몇 차례 중국과 부여의 충돌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매우 적었던 데다 충돌 시에도 부여의 군사력은 중국에 결코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평가하기를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에게 패해 본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위 [[한사군]]과는 2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111년]]에는 7,000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낙랑군]]을 공격하였고, [[167년]]에는 부여 왕이 직접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위의 사례는 정말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어서 왜 대립했는지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 직후에서 멀지 않은 120년과 174년에 부여에서 오히려 중국에 복속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단순한 약탈은 아니고 무언가 정치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국과 대립하는 관계 일변도는 아니었다. [[후한서]]에서는 111년의 침공을 (부여의 침공으로서) '처음'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큰 대립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부여에 대해서는 굉장히 우호적으로 서술하여 '식량이 모자라 주변을 털고 다닌다'고 기술한 고구려와는 차이가 있으며,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부여에서 식량을 얻어가는 등 중국을 지원한 사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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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군산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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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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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선비족]]과의 충돌도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중반, [[단석괴]]가 선비족을 통합하고 부여, 오손, 정령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며, 부여를 끝장낸 285년, 346년의 [[모용선비]] 침공이 대표적이다. 서진의 [[사마염]]이 부여인 노예 매매를 금지시키고, 부여로 되돌려보낸 일화도 고려하면 기록이 안된 모용선비족의 약탈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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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그 외에도 동한 초기에 [[읍루]]를 복속시켰으나 3세기 초 읍루가 부여의 지배권을 이탈하면서 읍루와도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다만 읍루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다시 복속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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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부여 왕이 사망할 때 부여가 동한측으로부터 '옥갑(玉甲)'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일부 [[환빠]]들이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금루옥의(황금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한나라로부터 조공받은 것이며, 부여는 따라서 황제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일단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부여가 중국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부여가 현도군에서 옥갑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지, 조공 등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당연히 황제국이 타국에 속할 리는 없는 노릇이므로 일단 관계 설정 자체가 거짓이다. [[http://nestofpnix.egloos.com/v/3834609|링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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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한편 금루옥의 관련해서 규정이 있는 것은 <후한서> 예의지 하권이다. 여기서 인용한 <한구의>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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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① 漢舊儀曰:「帝崩,唅以珠,纏以緹繒十二重。以玉為襦,如鎧狀,連縫之,以黃金為縷。 ② 諸侯王、列侯、始封貴人、公主薨,皆令贈印璽、玉柙銀縷;大貴人、長公主銅縷。(<후한서> 권 96 예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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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동한의 황제가 입는 수의로 규정된 것은 금루옥의가 맞지만(각주의 ①), 그 뒤에 등장하는 규정에 따르면 제후 왕 등은 은루옥의(은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대귀인과 장공주 등은 동루(옥의)(구리 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각주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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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그러니까 '''실을 금으로 짜는 것이 황제의 규정일 뿐 실만 다르면 옥의는 제후 왕을 포함한 황제 이하의 여러 인물들이 입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물건이었던 것'''이다(그리고 그렇다면 부여 왕은 형식상 제후 왕의 격식에 따라 수의로 은루옥의를 입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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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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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따라서 환빠들이 부여가 황제국이라고 주장했던 옥갑 관련 사료는 오히려 부여가 동한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서 동한의 예법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고, 동한에 제도상 복속해 있었음을 드러내는 사료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부여가 [[한나라]]에 속했다는 말이 [[중국]]의 속국이나 지방 정권이라는 뜻이라는 게 아니다.  이는 부여가 중국과 동맹을 맺고, 교역을 하기 위해 명목상 칭신을 하는, 당대의 외교적 관례를 잘 알았다는 의미다. 자세한 건 [[조공]] 문서 참조.]. 물론 이런 것과 관계 없는 순수한 연구자라면 부여가 한나라의 국제 질서에 속하여 동한에 대해 제도적으로도 충분히 지위를 보장받았다고만 알고 넘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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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렬전]](崇烈殿) ==
==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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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보통 한국사에 등장하는 모든 국가들은 대부분 한반도에 영토가 있어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부여는 (동부여를 제외하면) 한반도에 영토를 가진적이 없었던데다가 [[고조선]]과 [[진국]]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러 전란으로 사서가 유실된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남아있는 기록들도 부실하여 한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 교육에만 충실했다면 원삼국 시대에 이런 국가가 있었다는 정도의 비중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대표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가 정신적으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였다. [[고구려]]는 시조 추모성왕의 시호를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에게서 따왔고, 건국 신화 또한 동명왕 신화를 차용했을 정도였으며, 특히 [[백제]] 같은 경우는 왕실의 성이 부여씨였고, 국호를 아예 [[남부여]]로 바꾼 적도 있을 만큼 중요시하였다. 이로 인해 현재 남한에도 [[부여군]]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한반도 사람들은 부여에서 내려온 북방계로(남부는 남방계와의 혼혈) 부여인의 유골이 현대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깝다고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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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조왕묘]](溫祚王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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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다만 고구려와 백제가 둘 다 부여의 후예라는 계승의식과 별개로 이들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삼국통일전쟁]] 막판의 여제동맹 구도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멸망 이전 몇십년 정도에 한정된 관계였고, 왕조 존속기간 수백년을 통틀어 보면 이들이 신라와 사이가 안 좋았던 기간보다 여제가 서로 원수지간이던 기간이 훨씬 길었다. 현대 [[남북한관계]]도 그렇듯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실제 외교에서도 친밀함을 담보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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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인들과 부여인들이 백의(白衣)를 즐겨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후계 한국사 국가들도 백의를 즐겨입는 성향이 있어서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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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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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의 전통놀이 문화인 [[윷놀이]]의 기원론 중 하나가 부여기원론이며 윷놀이 용어는 부여어라는 게 중론이다. 중국 북송 때의 백과사전 [[태평어람]]에서도 부여 관련 얘기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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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충제]](三忠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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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부여는 5세기 말에 사라지지만 그 유산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남는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발해]] 왕 [[무왕(발해)|대무예]]가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일본]]에 선언한 것이 그 흔적. 훗날 [[고려]]에서도 [[만월대 내 별궁]] 중 한 건물을 부여궁(夫餘宮)이라 명명하여 부여를 한국사를 이루는 고대국가 중 하나로 인식하고, 계승의식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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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한국사뿐만 아니라 부여가 자리잡은 지역이었던 만주사에서도 중요한 나라로, 7세기에 속말[[말갈]]수령 돌지계가 [[수나라]]로부터 부여후에 봉해졌고, [[여진]][[금나라]]도 건국할 때 부여를 언급했다.[* 다만 말갈과 여진 등 숙신계 민족들은 부여를 비롯한 예맥계 민족들과 이질성이 존재했다. 애초부터 부여인들은 읍루와 말이 통하지 않고 착취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부여라는 나라는 [[한반도]]에서도, 만주에서도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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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부여는 이후 [[고구려]]를 잇는다고 선언한 [[고려]]왕조의 [[문종(고려)|문종 인효대왕]]의 왕자 [[왕수#s-2]]의 봉국명으로 사용됐다. 이는 중국 왕조가 전왕조들의 국호를 제후에게 봉한 사례를 따른 것이다. 왕수의 작위는 [[후작]]에서 진작된 부여공(扶餘公). 또한 중국 [[송나라]]의 [[고려도경]]엔 고려가 [[제후]]에게 준 [[만월대 내 별궁|부여궁]](扶餘宮)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부여궁은 부여국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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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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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고구려]], [[백제]]와 함께 [[두막루]]도 부여에서 계승되는 후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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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 부여에서 유래한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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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 한국 ===
 
* 부여와 백제의 왕성(王姓) 부여씨 - [[백제]]에서는 부여 계승 의식에 의거하여 부여를 왕성으로 삼았다. 한국의 [[국성]] 중 유일한 [[복성]]이다. 중국에서는 편의대로 여()씨로 줄여서 기록했다. 실제로 夫 자는 [[한문]]에서 그냥 별 의미 없는 발어사(發語辭)로 쓰는 경우가 많다. 고대 중국인들이 백제 왕족을 언급하는 문장에 적혀 있는 夫餘나 夫余를 복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발어사로 夫를 쓴 다음에 한 글자 성씨로 餘나 余를 기재했다고 오독했거나 혹은 백제 왕실이 중국 왕조와 무역할 때 중국식으로 한글자 성씨인 餘씨로 줄여서 소개한 것이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부여의 '여'(餘 또는 余)와 성씨 서()는 余를 구성 요소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의외로 [[선비족]]에 의해 [[요서]]로 이주된 이후의 부여 왕족들도 성씨가 부여씨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부여씨를 쓰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후예는 현재 [[서(성씨)|서씨]]와 [[여(성씨)#s-3|여씨]]로 전해진다고 한다.  
 
  
*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 [[성왕(백제)|성왕]]이 세운, 백제의 도읍 [[사비성]]이 있었다. 한 때 강성했던 부여의 이름이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백제 [[성왕]] 대에는 잠시 [[백제]] 국호가 남부여로 변경되기도 했다. 다만 전통적으로 역사서에서 국호에 들어간 성씨, 방위 표시나 전·후 같은 수식어는 후대에 동명의 왕조들을 구분하기 위해 첨가하는 것이었지, 실제로는 이런 수식어를 뺀 게 실제 국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실제로는 성왕이 국호를 그냥 '부여'라고 고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부여가 됐든 부여가 됐든 이 국호가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불명확하다. 성왕의 국호 변경 이후 시기를 기록한 역사 기록(중국측 기록 포함)에는 그냥 백제로 표기된다. 또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나 [[미륵사지]] 사리봉안기 등 성왕 이후의 백제 유물에서도 백제라는 국호만이 표기될 뿐더러 훗날 [[후삼국시대]] [[견훤]]이 이 나라를 계승해 세운 나라의 국호가 백제([[후백제]])였지, 부여나 남부여는 아니었다. 따라서 성왕이 선포한 (남)부여라는 새 국호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것이다. 학계에서는 정통성 강화를 위한 일시적 국호 변경 퍼포먼스에 불과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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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 중국 ===
 
* [[중국]] [[지린 성]] [[쑹위안]](松原) 시 [[푸위]](부여, 扶餘/扶余(정체 扶餘, 간체 扶余) 시 - [[중국]]에도 부여가 현존한다. 본래 부여의 옛 땅이라 [[중화민국]] 정부가 1915년에 푸위현(縣/县)을 설치했다. 그 후 2013년 1월 23일 중국 국무원에 의해 푸위 시로 바뀌었다. 쑹위안 시 안에 푸위 시가 있는 형태이다. 오타 아니다. [[중국/행정구역|중국의 행정구역]] 체계상으로는 두 도시의 등급이 다르다.
 
=== 기타 ===
 
* 김진 작가의 만화 바람의 나라를 바탕으로 한 [[바람의 나라(드라마)]]에서는 [[고구려]]와 적대하는 나라로 등장하며, 국력 역시 고구려보다 우위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후반부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수도까자 함락당하는 [[안습]]한 모습이 나온다. 시청률은 나쁘지 않았으나 바람의 나라 드라마 자체가 종영 후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역사왜곡]]스러운 부분들[*  갑옷고증도 문제지만 고대 전쟁에서 퇴출되었던 [[전투 마차]]를 굴리는 모습이나 부여를 멸망시킨(?) 대무신왕이 최강국이었던 후한을 공격하겠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이 크게 조명되지는 못했다.  
 
  
* [[삼국전투기]]에서는 부여라는 나라 자체가 [[다스베이더]]로 패러디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좋아한 걸로는 루크는 고구려로 패러디해야 하겠지만, 정작 고구려와 부여 사이는 좋지 않았다.] 위엄 쩌는 전성기와는 달리 시기 자체가 몰락기라 위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고구려를 설명할 때 곁다리로 살짝 언급되는 정도다.
+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 참고 자료 ==
 
=== 연구 자료 ===
 
* 강만길 외, 《한국사 2 -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한길사, 1995년
 
* 백산자료원 편집부, 《고조선 부여사 연구》, 백산자료원, 1995년
 
* 송호정, 《한국사.4 - 초기국가 고조선 부여 삼한》, 국사편찬위원회, 1998년
 
* 서병국, 《동이족과 부여의 역사》, 혜안, 2001년
 
* 박경철 외, 《고조선 단군 부여》, 동북아역사재단, 2004년
 
* 김기섭 외,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역사재단, 2008년
 
* 송호정,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년
 
===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의 논란 ===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여가 다양한 한국사 시험의 고난도 문제에서 교과서적 내용과 학술적 내용의 일부 충돌로 인해 논란이  있다.
 
  
* 사례 1. 1책 12법은 (부여/고구려)의 풍습?
+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 형벌은 엄격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하면 12배를 배상하게 하였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도둑질과 관련된 내용은 소위 '1책 12법'이라고 하여, 부여를 설명해 놓고 보기로 자주 제시된다. 그런데 정상적인 출제 기관이라면 반대로 '1책 12법'을 설명해 놓고 부여와 고구려 중에 고르라는 유형의 문제는 나올 수가 없다. 둘 다 1책 12법이 있었다는 사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고구려를 제시해 놓고 '1책 12법'을 고르라는 문제도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법률에 대한 기록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서> 고구려전에서는 도둑질에 대해 10여 배, <수서>·<북사>·<신당서>에는 10배, <구당서>에는 12배를 내도록 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사료가 잘못된 것인지 시간적 변천이 있었던 것인지 역사학적으로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학술적인 문제고 점수를 가려야 하는 문제에서 고구려에 1책 12법이 있었는가에 대해 단순히 O, X 퀴즈를 내면 맞다고 볼 수도 없고 틀리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사료는 모두 6세기 이후 고구려의 상황을 다룬 사료이므로, 3세기의 상황(<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출처로 하는 기술)을 놓고 위에서 말한 '나올 수 없는' 유형의 문제를 내면 일단 부여-1책 12법을 찍어놓고 출제 기관에 항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 사례 2. 우제점법은 (부여/고구려)의 풍습?
+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2017년 12월 16일에 치뤄진 9급 공무원 지방직 추가채용 시험에서 '우제점법이 부여와 고구려의 공통 풍습이다 아니다'를 가지고 복수정답 논란이 생겼다. 일부 교재에서는 공통 풍습이라고 씌여있었고, 심지어 몇몇 한국사 강사들이 사료까지 제시해가면서 고구려에도 있는 풍습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출제자 측에서 묵살(...)하였다. 다만 이는 조금 애매한 면도 있는데, 우제점법이 제시된 것이 정사25서가 아닌 한원이라는 점,[* 이런저런 사료 다 들고 오면 우제점법은 전세계에서 엄청나게 많은 지역에서 있었던 풍습이다.] 교과서적 내용과 실제적 내용이 충돌하는 부분은 고대사에서 수백 곳은 된다는 점 등이 있다. 애초에 [[고조선]]으로 보자면 미송리식 토기니 [[고인돌]]이니 하는 내용은 모두 30년 전에 폐기된 학설이다.
 
  
* 사례 3. 부여 vs 동부여
+
==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
2017년에 시행된 역사교사 임용고시에서는 광개토왕비문의 특정한 내용을 발췌해서 제시한 후에, 괄호 안에 들어가야 할 나라를 적으라는 문제가 나왔다. '부여'라고 적은 사람이 많았지만 정답으로 처리된 것은 동부여였다. 이유는 비문을 그대로 가져왔으며 비문에 동부여라 적혀있기 때문이었다. 부여는 오답 처리되어서 오답률이 극악무도하게 높았다고 한다.
+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include(틀:원삼국시대 한반도 세력)]
+
== 같이 보기 ==
== 같이보기 ==
+
* [[이천 서씨]]  
* [[성읍국가]]
+
* [[대구 서씨]]
* [[원삼국시대]]
+
* [[달성 서씨]]
[각주]
+
* [[부여 서씨]]
[[분류:부여]][[분류:예맥]]
+
* [[연산 서씨]]
 +
* [[남양 서씨]]
 +
* [[당성 서씨]]
 +
* [[봉성 서씨]]
 +
* [[절강 서씨]]
 +
* [[중국 서씨]]
 +
* [[일본 서씨]]
 +
* [[몽고서씨]]
 +
* [[러시아서씨]]
 +
* [[튀르키예서씨]]
 +
* [[멕시코서씨]]
 +
* [[불가리아서씨]]
 +
* [[중앙아시아서씨]]
 +
* [[카자흐스탄서씨]]
 +
* [[우즈베키스탄서씨]]

2024년 3월 18일 (월) 09:56 기준 최신판

개요

부여(扶餘)는 중국 동북 지방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왕조 국가이다.

부여의 존속기간은 고조선 후기와 삼국시대 중반에 걸친다. 대한민국 역사 교육에서는 단군고조선에서 모든 한국사가 시작되는 일원적 개념처렴 설명하고 있어 착각하기 쉬우나, 부여는 평양성에 도읍지를 둔 후기 고조선과 동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공존한 고대 우리 민족의 국가였으며 고구려, 백제 등 우리나라 주요 국가들이 부여를 계승하면서 한민족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남부여 등 다양한 부여 국가가 존재하며 고조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치는 않으나 삼국유사의 내용[* 삼국유사 왕력(王歷)편 “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을 보면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의 아버지[* 보통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로 알려져 있으나 단군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를 단군으로 표현하는 등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부여의 어원인 녹산을 떠올리게 하는 사슴상이다. 부여가 사슴이란 견해는 여러 갈래로 존재한다. <자치통감>은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부여왕 계보

국호

夫餘, 扶餘, 夫余, 扶余, Buyeo. 정장상팡(郑张尚芳), 또는 백스터(Baxter)와 사가르(Sagart)의 중국어 상고음 재구에 의하면 夫餘, 扶餘는 고대 중국인들이 /*pa.la/ '빠라' 또는 /*ba.la/ '바라'로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여의 국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푸후(puhu)'와 어원상 관련이 있다는 설
* 평야를 의미하는 한국어 '벌'의 고어형에서 왔다는 설
* '불'이 어원일 거라는 설. 여기에 왕족의 성씨해씨인 것과 연관지어 태양 숭배나 불 숭배와 관련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다만 解의 상고음은 kre~ke임에 주의.

참고로 '벌'을 고어 표기에서 훈차로 火로 표기한 사례가 많이 발견되므로, 만주어 유래설을 제외한 이름들은 공통적으로 '벌'에 가까운 글자를 음차했다는 의견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이 모두 명확한 사료가 없어, 그저 추측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한자로 쓸 때 부여의 '부'를 夫로 쓰는 경우와 扶로 쓰는 경우, '여'를 余로 쓰는 경우와 餘로 쓰는 경우가 모두 있다. 삼국지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는 대개 부여(夫餘)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서에는 대부분 부여(扶餘)로 기술하고 있다. [[1]]에서 夫餘와 扶餘를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애초에 餘는 余에서 파생된 글자이기에 전통적으로 餘의 약자로 余를 쓰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현행 표준 한자인 신자체중국간화자(간체자)는 餘를 폐지하고 余로 통합하였다. 단, 余 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많기 때문에 중국 간화자의 경우 의미가 혼동될 우려가 있을 경우 '남다'라는 의미를 명시하고자 할 때, 또는 본래 번체자(정체자) 표기에서 余가 아닌 餘였다는 걸 확실히 하고자 할 때, 부수 飠(食)을 饣으로 치환한 馀로 쓰는 걸 허용한다. 그래서 비록 중국어 간체에서 부여를 夫余나 扶余로 적는 게 일반적이지만 夫馀나 扶馀로 적기도 한다.

역사

부여 자체의 일원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역사 기록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등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 존재한다.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해서는 정확한 실체 규명이 힘들고 수많은 학설이 난립하고 있다. 동부여에 대해서는 북부여 왕인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가 변경되었다는 것과, 고구려410년에 침공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왕이 천도한 동부여와 고구려가 점령한 동부여를 같은 나라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도 완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 혹은 내부의 대가 세력과 같은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또 남부여는 백제에서 성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 부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 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이다. 여기저기에서 '부여'를 자처한 것으로 보아, 아래에서도 서술하겠지만 현대의 희미한 인상과는 달리 당대엔 의외로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호였던 듯하다. 혹은 단일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마한, 진한, 변한과 같이 일종의 원시국가들을 가리키는 집합체의 개념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대개 일반적으로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이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이다. 이들은 이후 국력이 점차 쇠퇴하고, 선비가 발흥하면서 동쪽의 연길 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 지방으로 이동하여 쇠퇴한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서쪽으로는 흉노 - 오환 - 선비와 접했고, 동남쪽으로는 옥저, 숙신 - 읍루 - 물길#s-2과 접했으며 서남쪽으로는 고조선 - 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되고 있다.

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의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그 지배층들은 전연후연에서 벼슬을 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 5세기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의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 말갈,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해 있었던 듯하다.

건국 시기와 전신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 서주 ~ 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 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과 북방의 백금보 문화[* 반농반목적 문화로 현재의 길림성 북부 쑹위엔 시 일대였다. 과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동명왕 신화의 '탁리국'과 연관시킨 적도 있다.] 등의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으며,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 같은 청동기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 및 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 및 동검, 가는 무늬 거울 등이 발견된다. 이와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 및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 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세기 ~ 3세기로 보고 있다.

건국 시기는 보통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 사기 화식열전 등에도 부여가 언급된다. 물론 이것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거나, 기원전 3세기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록과 유물 등의 존재는 부여 이전에도 원시적 공동체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서단산 문화의 분포는 성읍국가 이상으로 보기에는 매우 작으며, 현재의 지린시 일대에만 나타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길림성 북부에는 백금보 문화로 불리는 반농반목적 청동기 문화가 있었다. 또한 남서부에는 철기를 개막한 이질적 문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대부분의 북중국 지역은 현재의 1개 성 단위가 4-5개의 이질적 문화권으로 쪼개진, 고대적 부족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다면 이런 부족 중 하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밖에 없다.]

건국 신화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아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부여씨(扶餘氏)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원(餘元)

여위(餘尉)

여현

여울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

황룡(黃龍)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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