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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조조를 이어 위왕에 올라 서황을 우장군에 앉히고 녹향후(逯鄕侯)로 진봉하였다. 얼마 안 가 황제에 즉위하고 양후(楊侯)로 올려 봉했다. 정남장군(征南―) 하후상, 건무장군(建武―) 맹달과 함께 상용(上庸)으로 가 유봉을 축출했다. 221년(황초 2년) 조인과 힘을 합쳐 진소(陳邵)를 물리치고 양양을 되찾았다. 222년 조비가 남정을 개시하여 서황도 조진, 하후상, 장합과 더불어 남군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 앞뒤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황초 연간에 양평(陽平)을 진수하며 양평후로 이봉됐다. 226년 조비가 죽고 조예가 황위를 계승해 어수선한 틈을 타 양양으로 북진해온 제갈근을 무군대장군(撫軍―) 사마의 아래서 격퇴하고 식읍 200호를 하사받아 총 3,100호가 되었다. 227년(태화 원년)에 병사해 시호는 장후(壯侯)라 했다 |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조조를 이어 위왕에 올라 서황을 우장군에 앉히고 녹향후(逯鄕侯)로 진봉하였다. 얼마 안 가 황제에 즉위하고 양후(楊侯)로 올려 봉했다. 정남장군(征南―) 하후상, 건무장군(建武―) 맹달과 함께 상용(上庸)으로 가 유봉을 축출했다. 221년(황초 2년) 조인과 힘을 합쳐 진소(陳邵)를 물리치고 양양을 되찾았다. 222년 조비가 남정을 개시하여 서황도 조진, 하후상, 장합과 더불어 남군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 앞뒤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황초 연간에 양평(陽平)을 진수하며 양평후로 이봉됐다. 226년 조비가 죽고 조예가 황위를 계승해 어수선한 틈을 타 양양으로 북진해온 제갈근을 무군대장군(撫軍―) 사마의 아래서 격퇴하고 식읍 200호를 하사받아 총 3,100호가 되었다. 227년(태화 원년)에 병사해 시호는 장후(壯侯)라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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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약하며 언행을 조심히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명군을 만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자신은 다행히 조조를 받들게 됐으니 그저 공을 세우는 데 진력할 뿐 사사로운 영예가 무슨 필요’냐며 파벌을 넓히지 않았다. 공과 사도 구분하여 평소부터 경애한 관우의 머리에 나라의 일이라며 스스럼없이 상을 내걸기도 하였다. 군을 이끌 때는 항상 멀리까지 적정을 살펴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꼬라박지 않고 기다렸다 싸웠으며 승세를 타 추격을 하면 장병들에게 밥 먹을 틈도 주지 않았다. 군중에서 ‘식사 시간조차 없는 것은 다 서황 때문이다.’며 불평할 정도였는데 서황은 웃으며 “내가 너희들의 솥이라도 깨부쉈느냐.”고 받아치고는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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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우를 깨트렸을 때 조조는 “나의 30년 용병 인생과 역사 속의 용병술을 통틀어 봐도 멀리까지 달려가 바로 여러 겹의 포위망 속으로 냅다 뛰어들어 붕괴시킨 이는 없었다. 게다가 번성과 양양성이 겪은 포위는 거성(莒城)과 즉묵성(即墨城)이 악의에게 당한 것보다도 심했으니 장군의 공은 손무와 전양저를 뛰어넘는다.”고 치켜세웠다. 또 집결한 여러 군대를 둘러보면서 서황의 군영만이 정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고는 "서황은 주아부의 풍격이 있다고 할 만하다."며 감탄하였다. 진수는 조조 휘하의 훌륭한 장수로는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5명이 으뜸이라고 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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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대부(大斧;큰 도끼)를 자주 휘두른다. 헌제가 장안을 벗어나다가 곽사의 습격으로 위기에 빠진 순간 양봉이 나타나 곽사를 쫓아낸다. 이때 양봉의 부하로서 곽사의 부장 최용(崔勇)을 단 1합 만에 쓰러트리며 첫 등장한다. 헌제를 돕다가 배신한 이락도 1합에 고꾸라트린다. 면식이 있던 만총의 설득에 응해 조조에게 귀순하되 양봉과 한섬을 살해하자는 제안은 섬겼던 사람에게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해 의사라 칭송받는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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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마 전투에서 안량에게 일대일로 대항하나 20합 이상을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친다. 한맹의 운송대를 엄습해 그 물자들을 소각한다. 여양 전투에서 원담의 부하 왕소(汪昭)를 벤다. 업 전투에서는 심배를 사로잡는다. 남피 전투에서도 팽안(彭安)과 일대일로 붙어 참한다. 적벽 대전에서의 참패로 인해 죽기 살기로 퇴각하는 조조를 장료, 장합, 허저 등과 함께 온갖 고생 끝에 지켜낸다. 동작대 완공 기념 파티에서 조휴, 문빙, 조홍, 장합, 하후연과 아울러 활 솜씨를 뽐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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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안을 거쳐 동관으로 진군해오는 마초를 막으러 조홍과 서황이 급파된다. 최소 10일만 사수하라는 명에 따라 관문을 닫아건 채 버티기에 들어가니 마초가 관 아래로 와 매일 조조 3대를 욕한다. 그때마다 못 참고 출격하려는 조홍을 가까스로 말린다. 9일째 되는 날 군량과 말꼴을 점검하느라 미처 신경을 못 쓰는 사이 조홍이 기어이 출전하고 만다. 뒤늦게 따라가지만 그대로 복병에 당해 동관을 잃는다. 이후 포판진을 건너 황하 서쪽을 점거하고 관중군을 협공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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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 전투에서는 부장 왕평의 조언을 듣지 않고 배수진의 각오로 한수를 건너 촉군을 공격했다가 패한다. 간신히 진영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은 왕평을 죽이려 한다. 왕평은 그랬으면 진영마저 잃었을 것이라며 패전의 책임은 서황에게 있다고 격하게 반발한 끝에 유비에게 투항한다. 그 뒤 번성을 구원하러 달려가 양동, 유인, 복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관평과 요화를 몰아내고 언성과 사총을 손에 넣는다. 직접 응전하러 나온 관우와의 대화는 연의에도 삽입되었다. 오른팔이 성치 않은 관우와 80여 합을 겨룬다. 결국 번성을 구하는 데 성공하고 조조로부터 사서와 비슷한 칭찬을 듣는다. 최후는 상용 전투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맹달이 쏜 화살에 이마를 맞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것으로 꾸며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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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계 == | ||
+ | * 아들 : 서개(徐蓋) | ||
+ | ** 손자 : 서패(徐覇) |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2024년 3월 2일 (토) 13:52 판
서황(徐晃)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공명(公明).사례 하동군 양현 사람. 위나라에서도 알아주는 맹장이며 실제 공적도 남다른 인물이다.
서황(徐晃, ? ~ 227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자는 공명(公明)이며 사례 하동군 양현(楊縣) 사람이다. 양봉 휘하에 있다가 조조에게 귀순한 후 맹활약하여 오자양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번성 전투에서 관우를 물리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조인을 구했다. 용병은 불필요한 소모는 피하면서도 일단 호기를 잡으면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하동군의 관리로서 이각의 부하 양봉을 섬기며 공적을 세워 기도위에 임명되었다. 195년(흥평 2년) 이각과 곽사의 내전으로 수도 장안이 혼돈에 휩싸였다. 서황은 양봉에게 헌제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자고 진언하였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끝에 헌제 일행은 황하를 건너 안읍(安邑, 지금의 산시성 샤현)에 당도했고 서황은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196년(건안 원년) 헌제는 마침내 낙양으로 돌아왔고 양봉은 하남윤 양현(梁縣, 지금의 허난성 루저우시)에 주둔했다. 서황은 양봉에게 조조와 손잡을 것을 제안하였다. 조조는 양봉을 지원하는 척하면서 헌제를 허 빼돌렸다. 양봉이 후회하며 조조와 격돌했으나 무참히 깨지고 원술에게로 달아났다. 서황은 조조에게 귀순했다.
하남윤 권현(卷縣)과 원무현(原武縣)을 평정하고 비장군(裨將軍)을 받았다. 198년 여포 토벌에 참여해 따로 조서(趙庶), 이추(李鄒) 등을 항복시켰다. 199년 사환, 조인과 함께 하내군의 수고(휴고)를 쳐부수고 참하였다. 200년 서주에서 거병했던 유비를, 백마(白馬, 지금의 허난성 화현)에서 원소의 선봉장 안량을, 연진(延津)에서 문추를 칠 때도 활약하고 편장군이 되었다. 유벽, 유비 등이 여남군 은강현(㶏彊縣) 등 허도 근방을 교란하기에 조홍과 같이 가 축비(祝臂)를 무찔렀다. 순유가 한순(한맹)의 운송대를 습격하자며 적임자로 서황을 추천했다. 사환과 함께 가 그 물자들을 불사르고 도정후에 봉해졌다.
204년 조조가 업을 포위해두고 한단현(邯鄲縣)을 함락하였다. 역양현령(易陽―) 한범(韓範)은 일단 항복했다가 다시 무기를 들었다. 이를 서황이 맡았는데 편지를 단 화살을 날려 설득하였다. 한범은 무기를 내렸고 서황은 조조에게 “원담과 원상이 아직 망하지 않았고 많은 성들이 추세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 역양을 밀어버린다면 다른 성들은 죽음을 불사할 것이고, 항복을 허락한다면 우러러보지 않는 성이 없을 것입니다.”라 견해를 밝혔다. 조조가 옳다 하였다. 이어서 복병을 활용한 기습으로 모성(毛城)도 접수하였다. 205년 남피(南皮)에서 원담을 격멸하는 데 공을 세우고 평원국의 잔당들도 소탕하였다.
207년 백랑산(白狼山)에서 답돈을 정벌할 때도 따라가 횡야장군(橫野―)에 임명되었다. 208년 형주 정벌을 수행하여 중려(中廬), 임저(臨沮, 지금의 후베이성 위안안 현), 의성(宜城) 방면을 정리하였다. 만총과 한진(漢津)에서 관우를 물리치고 조인과 더불어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을 방어했으나 주유에게 패하였다.
211년 태원군 대릉현(大陵縣)을 근거지로 들고일어난 상요(商曜)를 하후연의 지휘 하에 진압하고 참하였다. 조조군의 한중을 향한 기동에 위협을 느낀 한수와 마초 등 관중의 세력들이 동관(潼關)으로 동진해왔다. 서황은 분음현(汾陰縣, 지금의 산시성 완룽현)에 머무르며 하동군을 진무(鎭撫)하였다. 7월(음력)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동관 앞에서 대기하자 관중군도 황하 서쪽을 비우고 남쪽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서황이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그 서쪽을 확보하겠다며 병사를 청하니 조조가 승낙하였다. 밤중에 주령과 아울러 보병, 기병 4,000명으로 황하를 넘어갔다. 해자와 울짱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는데 5,000명으로 강습해온 양흥을 격퇴하였다. 하후연과 같이 우부풍 유미(隃麋, 지금의 산시성 첸양현)·견현(汧縣, 지금의 산시성 룽현)의 저족을 평정하고 안정(安定)에서 조조와 합류하였다. 섣달 조조는 업으로 귀환하고 서황은 하후연 등과 장안에 남았다. 212년 부(鄜), 하양(夏陽)의 잔당들을 처치하고 양흥을 베었다.
215년 장로 정벌에 종군하였다. 별도로 독(櫝), 구이(仇夷)의 저족들을 깨트리고 평구장군(平寇―)으로 옮겼다. 장순(張順)의 포위를 풀고 진복(陳福) 등 30여 둔을 격파하였다. 이번에도 하후연 밑에 남아서 한중을 수비하였다. 유비가 진식 등 10여 영을 보내 마명각도(馬鳴閣道)를 확보하려는 것을 분쇄하였다. 조조가 그 잔도는 한중의 험하고 중요한 목구멍과 같은 곳이라며 크게 칭찬하였다.
219년(건안 24년) 번성(樊城)의 조인을 뒷받침하여 남양군 완현(宛縣)에 주둔했다. 8월(음력) 억수로 불은 한수에 우금군은 수몰당하고 번성과 양양성은 관우에게 포위당했다. 서황에게 조인을 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다수가 신병이라 육탄전을 치르기 어려워 일단 양릉피(陽陵陂)에 진을 쳐놓고 조인에게 원병이 왔다는 사실만 알렸다. 장수들은 얼른 나아가지 않는다고 비난과 불평을 쏟았다. 조엄이 ‘열흘 내로 증원군이 올 것이니 그 후에 안팎에서 치고 나가야 한다. 만약 늦어져 처형된다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놓겠다’며 진정시켰다. 10월 과연 조조가 서상(徐商)·여건 등을 보내와 병마가 전부 집결하면 전진하라 하였다. 이내 은서(殷署)·주개(朱蓋) 등의 열두 영도 도착했고, 동소의 조언을 채택한 조조의 지시에 따라 손권이 강릉과 공안(公安)으로 진격한다는 것까지 조인과 관우에게 알렸다.
그러는 사이 거짓으로 해자를 파며 언성(偃城)의 뒤를 끊는 척하였다. 언성의 관우군이 진지를 불태우고 철수하였다. 양릉피와 언성을 연결하고 점차 전진하여 관우군의 포위망에 3장(丈) 거리까지 다다랐다. 관우군은 위두(圍頭)와 사총(四冢)에 진영이 있었다. 위두를 친다고 선전하고는 사총을 강타하였다. 사총의 급작스런 사태에 관우가 몸소 보병과 기병 5,000명을 데리고 달려왔다. 서황이 여지없이 박살 내고 그대로 포위망 깊숙이까지 짓쳐 들어가 모두 무너트렸다. 마피(摩陂)로 개선하자 조조가 7리 밖에서 맞이하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치하하였다.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조조를 이어 위왕에 올라 서황을 우장군에 앉히고 녹향후(逯鄕侯)로 진봉하였다. 얼마 안 가 황제에 즉위하고 양후(楊侯)로 올려 봉했다. 정남장군(征南―) 하후상, 건무장군(建武―) 맹달과 함께 상용(上庸)으로 가 유봉을 축출했다. 221년(황초 2년) 조인과 힘을 합쳐 진소(陳邵)를 물리치고 양양을 되찾았다. 222년 조비가 남정을 개시하여 서황도 조진, 하후상, 장합과 더불어 남군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 앞뒤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황초 연간에 양평(陽平)을 진수하며 양평후로 이봉됐다. 226년 조비가 죽고 조예가 황위를 계승해 어수선한 틈을 타 양양으로 북진해온 제갈근을 무군대장군(撫軍―) 사마의 아래서 격퇴하고 식읍 200호를 하사받아 총 3,100호가 되었다. 227년(태화 원년)에 병사해 시호는 장후(壯侯)라 했다
검약하며 언행을 조심히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명군을 만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자신은 다행히 조조를 받들게 됐으니 그저 공을 세우는 데 진력할 뿐 사사로운 영예가 무슨 필요’냐며 파벌을 넓히지 않았다. 공과 사도 구분하여 평소부터 경애한 관우의 머리에 나라의 일이라며 스스럼없이 상을 내걸기도 하였다. 군을 이끌 때는 항상 멀리까지 적정을 살펴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꼬라박지 않고 기다렸다 싸웠으며 승세를 타 추격을 하면 장병들에게 밥 먹을 틈도 주지 않았다. 군중에서 ‘식사 시간조차 없는 것은 다 서황 때문이다.’며 불평할 정도였는데 서황은 웃으며 “내가 너희들의 솥이라도 깨부쉈느냐.”고 받아치고는 했다.
관우를 깨트렸을 때 조조는 “나의 30년 용병 인생과 역사 속의 용병술을 통틀어 봐도 멀리까지 달려가 바로 여러 겹의 포위망 속으로 냅다 뛰어들어 붕괴시킨 이는 없었다. 게다가 번성과 양양성이 겪은 포위는 거성(莒城)과 즉묵성(即墨城)이 악의에게 당한 것보다도 심했으니 장군의 공은 손무와 전양저를 뛰어넘는다.”고 치켜세웠다. 또 집결한 여러 군대를 둘러보면서 서황의 군영만이 정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고는 "서황은 주아부의 풍격이 있다고 할 만하다."며 감탄하였다. 진수는 조조 휘하의 훌륭한 장수로는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5명이 으뜸이라고 평하였다.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대부(大斧;큰 도끼)를 자주 휘두른다. 헌제가 장안을 벗어나다가 곽사의 습격으로 위기에 빠진 순간 양봉이 나타나 곽사를 쫓아낸다. 이때 양봉의 부하로서 곽사의 부장 최용(崔勇)을 단 1합 만에 쓰러트리며 첫 등장한다. 헌제를 돕다가 배신한 이락도 1합에 고꾸라트린다. 면식이 있던 만총의 설득에 응해 조조에게 귀순하되 양봉과 한섬을 살해하자는 제안은 섬겼던 사람에게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해 의사라 칭송받는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백마 전투에서 안량에게 일대일로 대항하나 20합 이상을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친다. 한맹의 운송대를 엄습해 그 물자들을 소각한다. 여양 전투에서 원담의 부하 왕소(汪昭)를 벤다. 업 전투에서는 심배를 사로잡는다. 남피 전투에서도 팽안(彭安)과 일대일로 붙어 참한다. 적벽 대전에서의 참패로 인해 죽기 살기로 퇴각하는 조조를 장료, 장합, 허저 등과 함께 온갖 고생 끝에 지켜낸다. 동작대 완공 기념 파티에서 조휴, 문빙, 조홍, 장합, 하후연과 아울러 활 솜씨를 뽐낸다.
장안을 거쳐 동관으로 진군해오는 마초를 막으러 조홍과 서황이 급파된다. 최소 10일만 사수하라는 명에 따라 관문을 닫아건 채 버티기에 들어가니 마초가 관 아래로 와 매일 조조 3대를 욕한다. 그때마다 못 참고 출격하려는 조홍을 가까스로 말린다. 9일째 되는 날 군량과 말꼴을 점검하느라 미처 신경을 못 쓰는 사이 조홍이 기어이 출전하고 만다. 뒤늦게 따라가지만 그대로 복병에 당해 동관을 잃는다. 이후 포판진을 건너 황하 서쪽을 점거하고 관중군을 협공한다.
한중 전투에서는 부장 왕평의 조언을 듣지 않고 배수진의 각오로 한수를 건너 촉군을 공격했다가 패한다. 간신히 진영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은 왕평을 죽이려 한다. 왕평은 그랬으면 진영마저 잃었을 것이라며 패전의 책임은 서황에게 있다고 격하게 반발한 끝에 유비에게 투항한다. 그 뒤 번성을 구원하러 달려가 양동, 유인, 복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관평과 요화를 몰아내고 언성과 사총을 손에 넣는다. 직접 응전하러 나온 관우와의 대화는 연의에도 삽입되었다. 오른팔이 성치 않은 관우와 80여 합을 겨룬다. 결국 번성을 구하는 데 성공하고 조조로부터 사서와 비슷한 칭찬을 듣는다. 최후는 상용 전투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맹달이 쏜 화살에 이마를 맞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것으로 꾸며졌다.
목차
가계
- 아들 : 서개(徐蓋)
- 손자 : 서패(徐覇)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