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당
개화당(開化黨)
1874년(고종11)경부터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 집단.
개화당이 형성된 계기는 1870년 전후로 김옥균 등이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서, 조선 후기 실학 사상과 오경석(吳慶錫)·박규수·유홍기(劉鴻基) 등의 개화사상과 중국에서 들어온 신서(新書)들을 공부하기 시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오경석은 1853년부터 중국에 파견되는 조선사신단 통역관으로 전후 13차례나 중국 북경에 다녀오면서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중국이 붕괴되어 가는 것을 보며, 조선의 위기를 절감하고 중국 선각자들이 서양 문물을 소개한 『해국도지 海國圖志』·『영환지략 瀛環志略』 등의 신서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조선 후기의 실학과 이러한 신서들을 연구하여 스스로 1853년∼1859년경에 개화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친우인 오경석으로부터 개화사상과 신서들을 접한 유홍기도 1860년대 초에 개화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는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1861년 1월 조선 정부가 중국에 파견한 위문사절단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중국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서양 열강의 침략 앞에 피폐해진 중국의 참상을 보고, 그 또한 위기의식을 절감하며, 신서들을 구입해서 돌아와 연구한 결과 개화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경석·유홍기는 장차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일대 혁신을 일으켜야 하는데, 자신들과 같이 중인 출신으로는 정치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혁신 주체 세력은 서울 북촌 양반신분층의 영민한 자제들이어야 하며, 이들 중에서 발탁하여 개화 사상을 교육시켜,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1869년 말 한성판윤 겸 형조판서 박규수와 오경석·유홍기 등은 사상적 동지로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김윤식(金允植)·김옥균·박영효·유길준(兪吉濬)·서광범 등 많은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 사상을 공부하게 하여 정치 집단으로서의 개화파 형성의 계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개화 사상을 교육받은 자 중, 김옥균은 22세 때인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어 관리로 나가게 되자 동지들을 모으는 데 진력하였다.
그 결과 개화당은 1874년경부터 김옥균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 사상을 공부한 청년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 등은 동지를 구하면 스승들에게 소개하여 계몽과 교육을 받게 하고 함께 공부하여 개화 사상을 발전시켜 가며 결속을 다져 나갔다. 그런데 개화당의 스승인 박규수가 1877년에, 다시 오경석이 1879년에 죽게 되자, 그 이후로는 유홍기로부터 개화당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받았다.
김옥균 등은 개화당을 형성, 발전시킴에 있어서 양반 출신들뿐만 아니라 중인·평민·승려·군인 등 신분을 초월한 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동지로 규합하였으며, 그들에게 개화 사상을 교육하고 해외에 유학시키기도 하였다.
예컨대, 개화당의 주요 인물로 참여한 유혁로(柳赫魯)는 무관 출신으로 오위장이었고, 변수(邊樹)는 중인 출신이었고, 이동인(李東仁)과 탁정식(卓挺植)은 승려 출신이었으며, 이인종(李寅鍾)은 판관, 이희정(李喜貞)은 군인, 이창규(李昌奎)는 보부상의 통령, 윤경순(尹景純)은 동대문 밖에서 매송업(賣松業)을 하던 상인이었다.
또한, 김옥균 등 개화당에 의해 일본 도야마(戶山) 육군 학교로 보내져 서양식 사관교육을 받은 14명의 사관생도 중에는 서재필(徐載弼)과 같이 양반 출신도 있었지만, 신복모(申福模)·이은돌(李殷乭)과 같은 평민 출신도 있었다. 그리고 서양 의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남흥철(南興喆)은 종로에서 금은상을 하던 상인 출신이었다.
물론, 김옥균 등은 양반 출신 청년들을 포섭하는 데 진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개화당은 당시 최고위 벌열출신(閥閱出身)인 이재긍(李載兢)·홍영식(洪英植)·민영익(閔泳翊) 등도 포섭하였는데, 이재긍은 대원군의 셋째형이요 영의정이었던 흥인군 최응(最應)의 아들이었으며, 홍영식은 영의정 순목(淳穆)의 아들이었고, 민영익은 민비의 친조카로 정계의 실력자이었다(민영익은 뒤에 가문의 이익에 집착하여 개화당을 떠나 민비수구파에 가담하였다).
그러므로 개화당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 참여한 구성원의 신분은 양반·중인·군인·평민·승려·상인 등 각계 각층의 출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옥균·박영교·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의 최고 지도부는 당시 최고위 양반 출신의 영민한 청년들이었다. 김옥균은 안동 김씨로 부사 병기(炳基)의 양자이며 선택받은 재사로서 정계가 촉망하는 신진 양반 관료였다.
박영교와 박영효는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로서, 특히 박영효는 영혜옹주(永惠翁主)를 취하여 철종의 부마가 되어 정1품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져 있었다. 서광범은 영의정 용보(龍輔)의 증손이며 참판 상익(相翊)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장래를 촉망받고 있었다.
개화당의 최고 지도부가 이와 같이 최고위 양반 출신으로 구성된 것은 일찍이 오경석·유홍기·박규수 등 개화사상의 선각자들이 나라를 구할 혁신세력을 서울 북촌(양반촌)의 영민한 양반 자제들 중에서 선발하여 개화 세력을 교육하고 급속히 육성 한데서 기인한 것으로, 개화당 형성의 특징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이상과 같이 1874년경부터 형성, 발전했으나, 1876년 강화도조약과 개항 때에는 아직 어린 청년들이어서 큰 정치적 활동을 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그 후 부산(1876)·원산(1880)·인천(1883) 등 3개의 항이 개항되어 외국과의 통상 교섭이 본격화되자, 조선왕조 정부는 세계의 정세를 잘 아는 신지식을 가진 개화 관료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당들은 정부 조직에 중견 관료로 진출하여 국왕과 다른 최고위 관료들을 움직여 가면서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 건설과 개혁을 위한 개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개화 정책 중 대표적인 것을 들면 ① 신식 행정관서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1880) ②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③ 영선사(領選使)주 01)의 파견(1881) ④ 신식육군(新式陸軍)의 창설(1881).
⑤ 기무처(機務處)의 설치(1882) ⑥ 감생청(減省廳)의 설치(1882) ⑦ 대외 균세정책의 실시(1882) ⑧ 해방책(海防策)의 수립(1882) ⑨ 보빙사(報聘使)의 파견(1883) ⑩ 해관(海關)의 설치(1883) ⑪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의 설립(1883).
⑫ 최초의 영어 학교인 동문학(同門學)의 설립(1883) ⑬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창간(1883) ⑭ 근대 우편 제도의 창설(1883) ⑮ 치도국(治道局)의 설치와 서울 시내의 도로 확장 정리 서울시내의 근대경찰제도의 창설(1883) 복식제도의 개혁(1883) 해외 유학생의 파견(1881∼1884) 농무목축(農務牧畜) 시험장의 설치(1884) 26개 근대상공업 기업체의 설립(1881∼1884) 등과 같은 것이었다.
개화당의 자주적 근대화 정책은 방해를 받지 않고 그대로 계속 추진될 수 있었으면 당시 낙후한 조선왕조를 개혁하여 세계 대세에 합치된 방향과 방법으로 근대국가 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전환점으로 하여 사태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비 정권이 붕괴되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민비수구파는 청국에 구원을 요청했으며 청국은 이 기회에 군대를 파견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 하기로 결정하였다.
청국은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고, 집권자이며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청국 군함에 초청하여 놓고는 청국으로 납치하여 보정부(保定府)에 유폐하였다.
그리고 청국은 민비정권을 다시 수립하였지만, 청군을 철수시키지 아니한 채, 무력을 배경으로 허구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속방화(朝鮮屬邦化)를 위한 적극간섭정책을 자행하는 등 조선의 자주 독립권을 크게 침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국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 운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온갖 방법으로 개화당을 탄압하고 개화 운동을 저지하였다.
그 결과 임오군란 이후의 개화당의 개화 정책은 청군의 탄압과 방해를 받아 가면서 추진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정세 변화와 관련하여 개화당 내부는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분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개화파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화된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청국의 조선속방화정책과 조선의 자주독립이라는 대립적인 정치적 입장에 의해 개화당이 분화되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청국의 조선속방화 적극간섭정책을 조선의 독립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간주하여 이를 격렬하게 규탄했으며, 비록 그들의 정적이지만 청국이 대원군을 납치해 간 것을 조선의 독립을 유린한 것이라며 격렬하게 규탄하였다.
한편, 김윤식·어윤중(魚允中) 등은 청국의 대원군 납치에 대해 방조적이었으며, 김홍집(金弘集) 등도 이를 강도있게 비판하지 않았다. 이는 자주독립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의 정도에 차이를 드러낸 것이었다.
둘째,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는 폭과 속도에 대하여 개화파 내부에 차이점이 노출되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제도의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주장하는 변법적 개화(變法的開化)를 주장했으며, 그것도 최단 기간에 급진적 수행을 추구하였다.
한편,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의 수용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사회제도의 개혁에는 매우 소극적이어서 아직도 동도서기론적(東道西器論的) 성격이 강했으며, 개화의 속도는 점진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셋째, 자주 근대화의 개화 정책을 단행하기 위한 권력 장악의 방법에 대하여 개화파 내부에 견해의 차이가 내재하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대경장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권력의 장악에 있어서는 ‘권도(權道)’의 사용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정변(政變)’의 방법을 기회 있을 때마다 중요시하였다. 한편,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아무리 대경장개혁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권도로서의 정변의 방법은 찬성하지 않는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개화파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화된 이후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만을 ‘개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개화당은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대항하여 ‘독립’을 매우 강조하였기 때문에 ‘개화당’을 당시에 ‘개화독립당’이라 불렸으며, 이에 반하여 청국에 의존하여 집권한 민비수구파를 ‘사대수구당’이라고 불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1883년 봄부터 정변을 모색하다가, 1884년 5월에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전운이 감돌아 청국이 서울에 주둔한 3000명의 청군 중에서 1500명을 철수하여 안남전선으로 이동시키고, 그 후 1884년 8월 청불전쟁이 발발하여 청군이 연전연패하자 이때가 정변을 일으킬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1884년 9월 단독으로 정변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종래 개화당에 대하여 적대적 태도를 보이던 주조선 일본공사가 1884년 10월 30일 귀임한 이후부터 태도를 급전환하여 개화당에 접근하며 호의와 원조의 뜻을 보이자, 개화당은 일본 공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들 병력 800명에 일본공사관 일본군 150명을 이용하여, 1884년 양력 12월 4일 마침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수구파를 처단하고 신 정부를 수립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혁신정강을 공포함과 동시에 대개혁정치를 시작하려 했으나, 1884년 12월 6일 청군이 불법적으로 궁궐을 침범하여 무력으로 개화당을 무너뜨려 개화당의 갑신정변과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었다.
홍영식·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청군에게 피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다시 집권한 민비수구파는 남은 개화당을 철저히 색출, 처벌함으로써 개화당의 대부분은 일단 몰락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徐遠 생원(生員)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구(徐久)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대(徐岱 장사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엄(徐崦 학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해(徐嶰 학자)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형수(徐景需 전첨)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빈(徐景霦 현감)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주(徐景霌 달성위 선조부마)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정리(徐貞履 부사)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정리(徐正履 좌랑)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진리(徐晉履 직장)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嶸 서흥파(瑞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 문하시중 종1품 이천백)
생애
갑신정변(甲申政變) 이전
1859년 11월 8일 평안감사 사택[* 당시 평안감사 사택은 평안도의 중심지였던 평양에 있었다.]에서 이조참판을 지냈던 서상익과 생원 박제완의 딸 반남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광범의 증조부는 정조 때의 문관이자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이다.[* 정약용의 앞날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인물이다.]
소년기에 안동 김씨 김병지[* 세도가였던 김조순의 손자이자 김조순의 차남 김원근의 아들.]의 딸과 결혼했으나 부인이 요절하면서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첫 부인이 안동 김씨였던지는 몰라도 일찍부터 김옥균과 가까이 지냈으며 외가 친척인 박규수의 집을 함께 출입하게 되면서 동시에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 개화론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1882년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개화당을 조직했다.
1880년(고종 1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해 규장각 대교·검교, 홍문관 부수찬·홍문관 부응교, 세자 시강원 사서·세자 시강원 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南學敎授), 부응교 등을 지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하여 일본 도쿄로 건너갔는데 김옥균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였고 7월에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으며 8월에 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1882년 9월에는 임오군란 뒤 일본 정부에 대한 배상금 청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영효가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자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였다. 이때 박영효의 권고로 수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 잔류해 별도의 시찰단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김옥균과 함께 남아 일본을 돌아보고 1883년 3월에 귀국하였다.
1883년 규장각대교(待敎)에 임명되고 경연 시독관을 겸하였다. 보빙사(報聘使)가 최초로 미국에 파견될 때 보빙 전권 대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함께 미국에 갔고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와도 면담하였다. 이후 미국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였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후 1884년 1년여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당연하게도 서양의 선진 문물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여러 차례의 외유를 통해 개화와 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884년 7월에 승정원 동부승지와 내무참의(內務參議), 8월에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병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박영효(반남 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 이건 근거없는 풍문으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약 60년 전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박미(朴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D.C.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갑오개혁
1894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법무대신으로 참여하였다. 2차 갑오개혁과 1895년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특히 재판 제도 및 형벌의 개혁, 근대적 법학 교육 실시 등을 제안하였다.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김홍집과 함께 단발령을 도입하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재판 당시에 재판장을 맡기도 했다. 허나 이 재판에서 그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사실상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를 처형하라는 판결을 내린 건 선구자적인 면모가 드러난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는 참으로 불합리적이다.
다만 이에 대한 쉴드를 굳이 쳐주자면, 조선은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 국가이지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저항권이란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국민에게 인정되는 권리인데, 당연히 조선 시대에는 그런 개념 따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전제 군주제 자체가 이미 민주적 기본 질서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도 후세에 붙여진 것 뿐이고, 당시에는 그냥 수많은 반란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당시 법 체계 하에서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는 것. 5.18 민주화운동은 반란이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는데, 5.18 민주화 운동의 경우에는 당시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에 저항권 행사 요건이 갖춰졌으므로 반란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받는 것이다. 애초에 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19세기의 동학 농민 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만 역사를 실증학적이 아닌 해석학적으로 보자면,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 역시 현재엔 통용될 수 있는 말이긴 하다.
도미와 최후
1895년 제4차 김홍집 내각(1895년 10월)에서는 학부 대신에 기용되었다가, 친러, 친일 양쪽의 이해 관계에 의해 12월 11일에는 주미 특명 전권 공사로 일종의 좌천이 되었다. 이때 미국의 로노크 대학은 김규식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으므로, 그는 특별히 로노크 대학의 졸업식 행사에 참석했고, 대학에서도 주미국 조선 공사인 그에게 명예 법학 석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관파천(1896년 2월)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정권이 들어서자 곧 현지에서 해임되었다.
해임된 후, 당시에는 천역으로 알려진 폐병이 악화되어 회복되지 못했고, 조선으로 귀국하지도 못했다. 1896년 6월 20일엔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명되지만 돌아오지 않고 다시 미국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시민권이 있으니 망명이라기보단 걍 눌러앉았다고 봐도 될듯.
그러다 얼마 안된 1897년 7월 17일 또는 8월 미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고, 유골은 1898년 봄 본국으로 송환되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 비정동(碑井洞) 산31(현 서울 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89-10) 야산에 유교 식으로 다시 장사 지냈다. 현재는 해당위치에 서울 강남개발을 통해 음식점이 들어서있으며, 묘는 몇번의 이장끝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198 야산에 안장되었다.
여담
비교적 일찍 요절해서 그런지 역사책에선 갑신정변 부분에서만 잠깐 언급되는 인물이다. 허나 알고 보면 현대에도 꽤나 영향력을 끼친 사람인데, 일단 조선에서 최초로 (1881년부터)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이 사람이다. 그리고 국내 최초의 성경 번역자이기도 했다.
상술했듯 1892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또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당시 유럽과 북미, 인도 등지에서 유행하던 신흥 종교인 신지학 협회에 귀의하기도 했다.
명성황후(드라마)에서는 박용진이 분했다. 갑신정변 당시 청군이 처들어오자 직접 칼을 들고 무쌍을 찍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개화당(開化黨)
1874년(고종11)경부터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 집단.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