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묘
묘지에는 근래에 세운 백제계백장군지묘(百濟階伯將軍之墓)’라고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논산군(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의 나지막한 언덕에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망한 나라의 장수인 계백의 무덤이 장군이 전몰됐을 때부터 화려하게 꾸며지고 모셔지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백제의 결사대가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수락산 기슭에 오래 전부터 계백 장군 묘라고도 하고 백제의총이라고도 하며 또는 의로운 무덤을 흔히 일컫듯 말무덤이라고도 하는 큰 무덤이 있었으니 1965년에 백제문화되찾기 운동의 하나로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인정하여 근래에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하고 정비한 것이다. 또한 근방인 충곡리에는 충곡서원을 세워 계백 장군을 모시고 있다.
계백(階白, ?~ 660)은 백제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백제가 그 최후를 맞은 때가 바로 계백 장군이 최후를 맞은 때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계백은 신라와 당군의 노도와 같은 말발굽 아래에 온몸을 던져 백제를 지켜 내려 했고, 그 때문에 백제 멸망의 처절한 역사를 이야기할 때에는 누구나 계백 장군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육로로는 탄현(대전 근처)을 넘지 말게 하고, 해로로는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서 적병을 막으라”고 한, 옥에 갇힌 장군 성충의 예언과 귀양 가서도 충언을 올린 흥수의 진언을 듣지 않고 간신들의 모함에 시기를 놓친 의자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백제군은 나당 연합군의 진격을 막아야 할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이미 놓쳐 버렸다. 그때 달솔의 벼슬에 있던 계백 장군은 성안을 다니며 목숨을 나라의 운명과 같이할 결사대 5천 명을 뽑았다. 최후의 저지선인 황산벌(지금의 연산)로 나아가기 전에 이미 나라의 운명을 예감하고, 적병이 몰아닥쳤을 때에 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게 하느니 자신의 손으로 처자를 베고 그 시신마저 적병의 손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집에 불을 놓고 전장으로 나아갔다.
황산벌 너른 들에서 정면으로 신라 5만 군사를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는 병사들을 3군으로 나누어 장군 자신은 중군으로서 산직리 산성에 머물고 좌군은 황령산성을, 우군은 모촌리 산성을 지키게 하여 신라군이 산마루 좁은 관문을 타넘을 때에 일시에 협공함으로써 기세를 누르려는 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공방이 붙기를 네 차례, 백제군은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적은 수로써 신라군에 대적하여도 오히려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계백이 사로잡은 신라의 어린 화랑 관창을 그 기개를 높이 사 돌려 보냈다가 되돌아와 다시 잡았을 때에는 목을 잘라 말에 매달아 돌려 보냈으니, 그것이 무참히 짓밟혀 꺾여 있던 신라군의 전투욕을 불살라 마침내 백제군이 산산이 섬멸되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계백과 5천의 결사대는 황산벌에서 밀리고 밀려 마침내 부여를 지키는 최후의 저지선인 외성리 산성이 있는 수락산에서 남김없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백제에 관한 기록조차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짤막하게 나와 있는 것이 거의 전부이니 일개 무장인 계백에 관한 것은 백제 멸망 때와 관련된 것말고는 달리 남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출신이나 성장 내력에 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성씨에 관해서도 본성이 왕족 부여씨라는 설도 있고, 백제 귀족으로서 8대 성의 하나인 해(解)씨 음이 잘못 전해져 계(階)씨가 되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오랜 세월이 끊긴 다음에 추정하는 것이기는 하나 구전되어 내려오는 바에 따라 묏자리가 지정되었을 뿐더러, 부여군 충화면 천등산 일대에서는 계백 장군의 출생지이며 계백과 성충, 흥수의 수련지로 추정되는 건물터 세 군데가 발견되기도 하여 계백에 대한 재조명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계백은 백제인으로서 자부심을 지녀 온 이 땅 사람들에게는 무너져 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선 자리에서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 애쓴 백제인의 모습으로 길이 가슴에 남을 것이다. 그가 대적했던 신라의 김유신 묘처럼 드넓은 묘역도 없고 화려한 능묘조각도 없지만 인적 드물고 조촐한 계백 장군의 묘는 삶에 대해서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한번쯤 단출하게 찾아가 삼가 옷깃을 여미고 거닐어 볼 만한 곳이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논산사거리에서 대전 방향으로 1번 국도를 따라 7.35㎞ 가면 길 왼쪽에 황산벌 휴게소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부적 농협이 있다. 부적 농협 옆으로 난 2번 군도로를 따라 2.7㎞ 들어가면 충곡2리가 나온다. 충곡2리 새마을회관 앞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300m 정도 가서 다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580m 정도 가면 계백 장군 묘 앞에 닿게 된다.
묘 입구에는 대형버스도 주차할 수 있는 공터가 있다. 논산에서 충곡2리를 지나는 버스가 하루 6회 있다.
목차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논산 충장사(忠壯祠)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는 사당이다.
황산벌 유적 전승지 내에 위치한 논산 충장사는 계백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2005년 완공되어 매년 4월에 사당제인 계백 장군 제향을 지내오고 있다.
연산 충곡서원
충곡서원(忠谷書院)은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산 13번지에 있다. 이 서원은 1680년(숙종 6년)에 유림들에 의해 창건하여 백제장군 계백(階伯)을 위시해서 사육신(死六臣)을 봉안하기 위한 서원이었으나 점차 추배되어 현재는 18위가 배향되어 있다.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일제시기인 1935년 서원 본래의 자리에 건물을 다시 짓고 운영되었으나 사우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멸실되고 주초석만이 잔존해 오는 것을 1977년 지방비를 들여 당초 규모대로 복원하고 주변을 보수 정화하였다.
부여 의열사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575년(선조 8)에 부여 현감 홍가신(洪可臣:1541∼1615)이 건립하였다. 백제 때 충신 성충(成忠)· 흥수(興首)·계백(階伯), 고려 말기의 충신 이존오(李存吾:1341∼1371)의 충의가 후세에 전하여지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지었다고 한다.
계백장군 동상
1966년 7월 31일 계백장군 동상이 충남 부여군청 앞에 세워졌다. 국내 최초의 기마동상으로 삼지창을 들고 전장으로 향하는 장군의 모습을 표현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계백무예축제
축제는 백제의혼 계백장군을 추모하는 행사로, 전국클럽태권도회를 비롯해 전통무예 연무대회가 개최된다. 궁남지 오천결사대 출정상에서 백제오천결사대의 넋을 달래는 이 행사에는 백제전통무예원 korea 싸울아비무사단의 추모공연과 태권도시범단 축하공연이 포함되어 있다. 충남 부여와 공주는 백제문화제뿐만 아니라, 대백제전 등 역사문화도시로 크게 부각되고 있고, 무예행사는 충주의 세계무술축제와 세계무예마스터십, 전국무전 등으로 부각되지 못해 왔다. 하지만 이 대회는 백제의 고도 부여의 역사문화 탐방과 함께 매년 정례적으로 개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