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尹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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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5년(연산군 1)∼? = ?]. 조선 중기 종종(中宗) 때의 문신.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자는 형중(亨仲)이고, 호는 귤정(橘亭)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거주지는 전라도 해남(海南)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윤효정(尹孝貞)이며, 어머니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정호장(鄭戶長)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을 지낸 윤경(尹耕)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윤사보(尹思普)이다. 아버지 윤효정은 연산군(燕山君) 때 사화(士禍)를 피하여 전라도 해남의 바닷가로 이사하여 은거하면서 스스로 ‘어초은(魚樵隱)'이라고 일컬었다. 광주목사(光州牧使)윤행(尹行)과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윤복(尹復)의 형이기도 하다. 25세 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고향 해남에 은거하였으며, 중종 시대 때 호남 지방의 3대 문장가의 하나로 꼽힌다.

중종 시대 활동

1513년(중종 8)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진사과(進士科) 양시(兩試)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9세로써 호남에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방목(榜目)』] 1516년(중종 11)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들어가서 사림파(士林派) 박세희(朴世熹)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중종실록』 12년 7월 28일) 당시 이조 판서(判書)안당(安瑭)이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를 대거 등용하였는데, 1517년(중종 12) 윤구도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가 되어, 왕과 의정부 대신과의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중종실록』 12년 12월 25일)

이무렵 좌의정김응기(金應箕)가 대간의 논박을 받아서 사임하였는데, 정승을 뽑을 때 중종이 윤구(尹衢)를 영의정정광필(鄭光弼)과 우의정신용개(申用漑) 등에게 보내어 그 후임자를 추천하게 하였다.(『중종실록』 13년 5월 7일) 정광필은 김전(金詮)·이계맹(李繼孟)·남곤(南袞)·안당 네 사람을 추천하였고, 신용개는 이계맹을 추천하였다. 윤구는 승정원에 돌아와서 승정원 승지(承旨)박세희(朴世熹)와 상의한 후, 정광필과 신용개가 안당을 추천하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중종실록』 14년 1월 8일) 안당은 개혁파로서 조광조 등 신진 사류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중종은 안당을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윤구가 정승 후보자를 마음대로 바꾸어서 보고한 사실이 밝혀졌으나, 조광조 일파가 안당을 강력히 지지하고, 정광필이 안당과 함께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으므로, 영의정정광필, 좌의정신용개, 우의정안당 체제가 좋다고 생각하였다. 신용개는 정광필과 막역한 친구였으므로, 윤구와 박세희의 허위 보고는 별 탈 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그는 조광조의 사림파에 속하였으므로, 이후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조광조와 우의정안당이 그를 적극 추천하여, 1518년(중종 13)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경연 검토관(檢討官)·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 13년 5월 17일) 그 뒤에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김식(金湜) 등이 죽음을 당하고, 조광조의 제자들도 모두 관직에서 추방당하자, 1520년(중종 15) 5월 윤구도 파직을 당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정승을 뽑을 때 거짓으로 보고한 죄로써 전라도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중종실록』 15년 5월 21일) 그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서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1533년(중종 28) 4월 중종은 윤구에게 직첩을 돌려주게 하였고, 1538년(중종 33) 중종이 윤구를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에 임명하였다.(『중종실록』 28년 4월 23일),(『중종실록』 33년 2월 21일) 중종이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 사림파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구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윤개(尹漑)와 서로 잘 알던 사이였으므로, 두 사람은 함께 전라도 일대의 고을들을 돌아다니면서 각 고을의 오래된 폐습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 즉위년) 명종이 즉위할 때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대윤(大尹)의 윤임(尹任)과 사림파를 많이 죽이고, 윤구를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명종실록』명종 즉위년 12월 20일 2번째기사] 고향 해남에서 아버지 윤효정을 받들고 두 아들 윤홍중(尹弘中)과 윤의중(尹毅中)을 열심히 가르쳐서, 두 아들을 모두 과거에 장원 급제시켰다. 그는 고향 해남에다 귤을 심고 귤밭 속에 정자를 지은 후에 스스로 호를 귤정(橘亭)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향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냈다.

그는 고향 해남의 집에서 돌아갔는데, 돌아간 연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명종 초기라고 추측된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그 후손들이 그의 시문을 모아서 『귤정유고(橘亭遺稿)』를 편찬 간행하였다.

복상(卜相) 때 승정원 주서 윤구의 정승 후부자를 교체한 사건

1518년(중종 13) 4월 좌의정김응기가 대간으로부터 논박을 받아서 사임하자, 그 후임 재상을 뽑는 복상(卜相)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는 사림파 조광조가 중종의 신임을 얻어서 득세할 때로, 훈구파(勳舊派)의 김전・남곤・홍경주 등의 대신들은 조광조・김구(金絿)・김식 등 신진 사류의 성장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영의정정광필과 이조 판서안당은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실제로 이조 판서안당은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에 사림파가 조정에서 대간의 언관(言官) 자리를 차지하며, 끊임없이 훈구파의 비리를 공격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조광조는 도학(道學) 정치를 표방하여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는 등 과감한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원종(朴元宗) 일파가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을 잘못 책훈하였다며 위훈(僞勳) 삭제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반정 공신 중에서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훈이 삭제되면서, 다수 공신들의 원망을 샀다. 이러한 시기에 후임 정승을 둘러싸고 훈구파와 사림파가 팽팽하게 대립하였던 것이다.

중종은 반정 공신들의 눈치를 보면서 왕위를 지키기에 급급하였으므로,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끌어들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반정 공신의 장벽에 번번이 부닥쳤다. 복상 문제는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중종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의정부의 정승들에게 그 의견을 물어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 결정하였다. 중종이 승정원 주서윤구를 시켜서 왕명을 받들고 영의정정광필과 우의정신용개의 집에 가서 후임 정승이 될 만한 사람을 추천받아 오도록 하였다. 종7품의 승정원 주서 자리는 정3품의 승정원 승지에 소속되어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는 데에 보조 역할을 하였는데, 대개 왕명을 받들어 의정부 대신들에게 전달하고, 대신들의 의견을 다시 왕에게 보고하는 심부름의 역할을 도맡아 하였다.

그때 영의정정광필이 김전·이계맹·남곤·안당 네 사람을 정승 후보자로 추천하였는데, 그 직책의 서열에 따라서 추천한 것뿐이었다. 우의정신용개는 안당을 제외한 김전·이계맹·남곤을 추천하면서 특히 이계맹을 적임자로 추천하였는데, 그가 훈구파의 온건파였기 때문이었다. 윤구가 정광필과 신용개로부터 정승의 후보자를 추천 받아서 승정원으로 돌아오자, 승지 박세희가 그를 기다렸다가 맞이하여 묻기를, “오늘 복상된 사람은 누구인가. 반드시 안당 어른이겠지.” 하였다. 이에 윤구가 사실대로 박세희에게 밝히자, 승지박세희는 놀라서 바른대로 왕에게 보고하지 말도록 설득하였다. 김전과 남곤은 훈구파의 과격파였고, 이계맹은 온건파였으나, 안당은 개혁파에 속하여 사림파가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이에 윤구는 중종에게 복명(復命)하기를, “영의정정광필은, ‘마음가짐과 일처리 하는 것은 오직 안당이 첫째입니다.’고 하였고, 우의정신용개는, ‘만약 직책의 차례로써 보면, 김전·이계맹이지만, 안당이 마땅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중종이 마침내 안당을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1519년(중종 14) 11월 15일 훈구파의 남곤・홍경주(洪景舟)・심정(沈貞) 등이 중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밤중에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조광조 일당을 모조리 잡아서 죽이거나 유배시키는 기묘사화가 발생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일파의 강경한 개혁 정치를 그대로 따라가면, 반드시 훈구파의 큰 반발에 부닥칠 것이고, 또 왕권도 위협을 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중종은 홍경주에게 밀지를 내려서 한밤중에 궁중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고, 영의정정광필과 좌의정안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광조・김구・김식 등을 모두 귀양 보냈다가 죽였다.

기묘사화가 성공한 뒤에 남곤・홍경주・심정 등의 훈구파는 사림파의 죄를 3등급으로 나누어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고, 나머지 사람은 파직시켰다. 처음에 윤구는 좌의정안당·의정부 참찬김안국(金安國)·관찰사김정국(金正國) 등과 함께 파직 대상 26명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앞서 복상할 때 정승 후보를 이계맹에서 안당으로 바꾸어 거짓으로 복명하였다고 하여, 그 죄를 다시 논의하여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하였다. 그 뒤에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 20여 년 동안 은거하였다.

1533년(중종 28) 4월 중종은 윤구에게 직첩을 돌려주게 하고, 1538년(중종 33)에는 전라도도사로 임명하였다. 젊은 시절에 기묘사화를 일으켜서 사림파의 인재를 억울하게 희생시킨 것을 후회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전라도관찰사윤개는 전라도도사윤구와 평소 알고 지내던 동갑내기였으므로, 윤개는 위엄을 부리지 않고, 도리어 겸손해 하며 관복을 벗고 편복(便服)차림으로 윤구가 있는 남청방(南廳房)으로 찾아가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민정을 살펴보기 위하여 전라도 여러 고을을 순찰하다가 담양에 이르자, 담양부사(潭陽府使)이현(李俔)이 이들에게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때 이야기가 지난 일로 돌아가자 윤구가 말하기를, “이계맹은 행실을 단속하지 않아서 당시 논의가 아주 나빴는데, 어찌 복상하는 대상이 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그는 신용개와 술벗이 되어서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나에게 허물을 돌리고 죄를 주어서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성상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다만 나에게만 죄를 주었을 뿐이다.” 하였다.[『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권]

전라도도사를 지낸 뒤에 윤구는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윤구가 돌아간 시기가 명종 초기라고 추측된다. 아들 윤홍중·윤의중이 아울러 문과에 장원하였는데, 윤의중은 벼슬이 영달하였다.[『기묘록보유』 상권]

성품과 일화

윤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귤정윤구가 일찍이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위해 발상(發喪)한다.’는 논문(論文)을 지었는데, 그 글이 온 세상에 퍼졌다. 그 뒤에 참판(參判)나세찬(羅世纘)이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 명나라 『향시록(鄕試錄)』을 보니, 윤구가 지은 논문이 그 중에 실려 있었다. 고시관(考試官)이 비평하기를, ‘어느 곳이라도 재주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는가마는, 양광(兩廣 : 중국의 광동성과 광서성) 지방이 아니면, 서북 지방의 과거 시험장에서 나온 글일 것이다.’ 하였다. 이 논문이 어떤 경로를 따라서 중국에 들어갔는지를 모르겠다.[『패관소록(稗官小錄)』]

조선중종 시대 호남 지방에서 문장으로 뛰어난 세 사람을 가리켜 ‘호남 문장 3걸(三傑) 두구춘(斗衢春)’이라고 불렀는데, 동복(同福)의 최산두(崔山斗), 해남의 윤구·유성춘(柳成春) 세 사람이다. 최산두는 김종직과 김굉필(金宏弼)에게 사숙하였는데, 기묘사화 때 전라도 동복으로 유배되었다.

선조 때 동인(東人)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인 이발(李潑)이 그 증조부 이달선(李達善)의 묘비(墓碑)를 세울 때 윤구가 그 신도비명을 지었고, 영의정이산해(李山海)가 그 글씨를 썼다. 또 후면은 이이(李珥)가 지문(識文)을 짓고 친필로 글씨를 써주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 이로써 보면 윤구는 비록 전라도 해남의 바닷가에 있었지만, 이발・이산해・이이와 같은 당대의 거물들과 교유하였다. 또 이발처럼 동인・서인(西人) 양쪽을 드나들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교유하던 사람의 비문을 해남의 윤구에게 부탁한 것을 보면, 윤구의 문명이 호남 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에 널리 알려진 사실을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해남 문소(聞簫)에 있다. 전라도 남해(南海)의 향사(鄕祠)에 봉안되었다.

부인 임씨(林氏)는 임휴(林畦)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낳았다. 장남 윤홍중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 정랑(正郞)을 지냈고, 차남 윤의중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 판서, 의정부 참찬 등을 지냈다. 맏손자 윤유기(尹惟幾)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냈고, 증손자 윤선도(尹善道)는 문과에 급제하여 남인(南人)의 거두로서 예조 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귤정유고(橘亭遺稿)』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매천집(梅泉集)』
  • 『패관소록(稗官小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