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행(尹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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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자는 대용(大用)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전라도 해남(海南)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윤효정(尹孝貞)이며, 어머니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정호장(鄭戶長)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을 지낸 윤경(尹耕)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윤사보(尹思普)이다. 아버지 윤효정은 연산군(燕山君) 때 사화(士禍)를 피하여 전라도 해남의 바닷가로 이사하여 은거하면서 스스로 ‘어초은(魚樵隱)'이라고 일컬었다.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윤구(尹衢)의 동생이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윤복(尹復)의 형이기도 하다.

중종~선조 시대 활동

1531(중종 26)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7세였다.[『방목(榜目)』] 종종(中宗) 말년에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서 1553년(명종 8) 해주목사(海州牧使)가 되었다. 그해 7월 왜구의 배 한 척이 서해에 나타났으나, 제때에 나가 싸워서 포획하지 못하였다고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명종실록』 8년 7월 6일) 1558년(명종 13) 3월 명(明)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윤행(尹行)이 순회세자(順懷世子)를 책봉할 때 도감(都監) 낭청(郞廳)에 임명되어 수고하였다면서 벼슬 줄 것을 청하는 소첩(小帖)과 단자(單子)를 보냈다. 이와 관련하여 명종은 승정원(承政院)에 전지하기를, “세자를 책봉하였으니 황제의 은혜가 가볍지 않고 나라의 경사가 막대하니, 은전을 베풀지 않을 수 없다. 원접사(遠接使)권철(權轍), 도승지이탁(李鐸), 도감 낭청윤행(尹行)·이언경(李彦憬)·유종선(柳從善)·이중호(李仲虎) 등에게 각각 한 자급씩을 올려주라.” 하였으므로, 윤행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가자(加資)되었다.(『명종실록』 13년 3월 17일) 이때 윤행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

1560년(명종 15)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는데, 이듬해인 1561년(명종 16) 나주 읍네 사거리에서 대낮에 참혹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명종실록』 15년 7월 7일) 목사윤행과 판관(判官)최제운(崔霽雲)이 여러 달 동안 범인을 잡지 못하자 죽은 자의 친척들이 의금부에 고발하기 위하여 소송장을 내려하였다. 그러자 윤행이 포졸을 보내어 이를 막았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명종실록』 16년 7월 26일) 1563년(명종 18) 3월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왜구들이 해로(海路)를 통하여 중국에서 노략질한 명주 및 보패(寶貝)와 비단, 금은 등을 부산포(釜山浦)에 가지고 와서 조선의 장사치들과 쌀과 포목으로 바꾸어 갔다. 이에 동래부사윤행이 동래 첨사(東萊僉使)유충정(柳忠貞)을 독려하여 이를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명종실록』 18년 3월 15일),(『명종실록』 19년 10월 23일)

그리고 1571년(선조 4) 8월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임기를 끝마치고 고향 해남(海南)으로 돌아갔다.(『선조실록』 4년 8월 24일) 해남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와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동래부사 윤행의 왜구 밀무역 단속 문제

1563년(명종 18) 3월 윤행이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는데, 동래부사는 왜관(倭館)에서 일본의 대마도 상인들과 공무역을 행하여 막대한 상세(商稅)를 거두어들이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국가의 재원을 마련하는 중요한 직책이었으므로, 소윤(小尹) 일파의 윤원형(尹元衡)이 심복 윤행을 동래부사로 보내어 돈줄을 장악하려던 것이었다. 당시 동래에서 왜관의 공무역을 통해서 들어오던 은화는 국가 재원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해금(海禁) 정책을 취하여 일본과 교역하는 길을 봉쇄하였으므로, 일본의 상인들은 조선의 동래(東萊)에 와서 중국 물화를 사갔다. 조선의 경상(京: 서울 상인)과 송상(松: 개성 상인)은 명나라 북경(北京)에서 중국 비단을 산 후, 동래에서 일본 대마도(對馬島) 상인에게 일본 은화[天銀]을 받고 넘겼다. 이러한 중계 무역을 통하여 조선의 상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정부에서는 왜관에서 조선 상인과 일본 상인들의 교역을 주선하고, 양쪽 상인으로부터 물건 값의 2할을 상세로 거두었다.

조선 상인이 일본 상인과 거래한 물품은 주로 중국 비단과 조선 인삼이었으나, 그 밖에 일본의 동철(銅鐵)・단목(丹木)・호초(胡椒) 등과 조선의 면포・마포 등이 거래되었다. 사실 일본 상인들은 조선의 화약을 수입하려고 하였으나, 국가에서 군수 물품은 엄격히 교역을 금지하고 있었다. 또 왜구들이 중국의 해변가를 노략질하여 가져 온 값비싼 명주와 보패 등의 진품(珍品)도 동래에서 거래되고는 하였는데, 조선 정부에서는 왜구의 약탈물을 매매하는 것 또한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잠상(潛商 : 허가를 받지 못한 상인)들은 동래의 부산진(釜山鎭)에서 왜인들과 밀무역을 하였다. 비단과 인삼도 밀무역의 대상이 되었다. 역관들이 대마도 상인과 내통하여 밀무역을 행하자, 명종 때에는 밀무역이 공무역을 능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밀무역의 책임은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에게 있었으나, 왜관의 공무역과 잠상의 밀무역을 막는 총책임은 동래부사에게 있었다.

사간원에서 동래부사윤행과 부산진첨사유충정(柳忠貞)을 탄핵하기를, “조종조에서 왜인을 접대하여 온 것이 지금까지 2백 년이 되었으나, 수령들이 결탁하여 매매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년에는 탐욕스런 풍조가 크게 떨쳐 일어나고 교활한 방법들이 마구 생겨나, 수령들이 이익이 있는 일이면 온갖 꾀를 내어 이익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왜구들이 해로를 통하여 중국을 노략질한 값비싼 명주・보패와 진기한 비단・ 금은 등을 부산포(釜山浦)에 모두 가져다가 쌀과 포목과 바꾸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령이나 장수들과 장사치들이 이것을 사려고 쌀이나 포목을 수레에 싣거나, 또는 몸에 지니고서 끊일 사이 없이 부산포로 몰려듭니다. 심지어 타도(他道)의 수령들까지도 배로 운반해 오거나 육지로 수송하여 와서 약탈한 물화를 교역합니다.

부산진첨사유충정은 한 진영(鎭營)의 주장(主將)으로서 금지해야 마땅한데도 오직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것만을 좋아하여 교역하는 것을 방치하고 있으니, 그의 관직을 파면하소서. 근래 조정에서 동래부사를 문관으로 선발하여 보낸 것은, 부산진과 동래가 함께 한 곳에 있으므로 그곳의 변장들로 하여금 동래부사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 감히 방자한 행동을 못하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지금 동래부사윤행은 본래부터 인망이 없어서 사람마다 모두 존경하지 않으니 그를 체직시키고, 다른 명망이 있는 문관 중에서 남들로부터 존중받는 사람을 골라 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다. 명종이 대답하기를, “이러한 폐단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고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유충정을 체직하는 것은 옳으나, 파직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나머지는 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명종실록』 19년 10월 23일)

성품과 일화

윤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윤행은 성품이 간사하고 음흉하며, 말을 잘하여 군자(君子)들을 모함하였다.(『명종실록』 8년 7월 6일) 윤행은 사림파(士林派)를 죽인 윤원형과 같은 소윤 일파이었으므로, 윤원형이 실각한 뒤에 사림파가 『명종실록』을 편찬하면서 그에게 악평을 한 것이다.

1553년(명종 8) 7월 윤행이 해주목사로 있을 때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하기를, “해주목사윤행은 주진(主鎭)의 장수로서, 왜구의 적선 한 척이 서해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잠시도 지체하지 말고 병졸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왜구와 싸웠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겁을 집어먹고 즉시 추격하지 않아서, 적선이 도망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아서 적에게 주장의 겁이 많고 나약함을 보였으니, 주장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너무 심하다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심지어 자신의 사선(私船)을 진영에 속해 있는 병선과 바꾸려고까지 한 사실이, 이미 <김준(金俊)의 옥사> 가운데 상소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를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명종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다시 아뢰니 윤허하였다. 이에 해주목사윤행은 왜구의 선박이 서해에 나타났는데도 즉시 추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사선을 나라의 병선과 바꾸려고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해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당시 사선을 가진 관리가 많았는데, 바다의 운송 수단이었던 배야 말로 좋은 투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560년(명종 15) 7월 윤행이 영의정윤원형의 추천을 받아서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윤행은 인물이 용렬하고 비루하여, 해주목사로 있을 때 윤원형을 잘 섬기고 그를 위해 바다에 제방을 쌓고 땅을 크게 개간해 주고, 해마다 종자를 공급하여 이웃 가까운 곳에 사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봄에 밭을 갈고 가을에 곡식을 거둬들이게 하였으므로, 서해의 백성들이 아직까지도 그를 원망하고 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당상관(堂上官) 관직인 목사(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윤행이 윤원형에게 막대한 땅을 개간하여 상납한 대가라고 아니라고 할 수 없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명종실록』 15년 7월 7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해남군 문소(聞簫)에 있다.

첫째 부인 강씨(姜氏)는 강흔수(姜欣壽)의 딸이고, 둘째 부인 이씨(李氏)는 이광윤(李光胤)의 딸이다. 자녀는 1남을 낳았는데, 아들은 윤화중(尹和中)이다. 윤화중의 아들인 윤광계(尹光啓)는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 정랑(正郞)을 지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