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權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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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6년(중종31)∼1606년(선조39) = 71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언침(彦忱)이고, 호는 쌍천(雙泉)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인데, 영의정권철(權轍)의 아들이며,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형이다.

선조 시대 활동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1577년(선조10) 음보(蔭補)로 나이 42세에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이 되었다. 1578년(선조11) 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3년 뒤 탈상하고 귀후서(歸厚署)별제(別提)에 임명되었다. 1582년(선조15)에는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3년 뒤 탈상하고 조지서(造紙署)별제(別提)에 임명되었다.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로 선발되었다가 군자감(軍資監)주부(主簿)로 전직되었다.

왜란 시기 활동

<임진왜란(壬辰倭亂)> 시기에 도원수권율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의 정예 군사와 싸울 때 왜적이 책문(柵門)을 뽑고 쳐들어왔다. 권순이 한 부대(部隊)를 이끌고 그들과 맞섰는데, 그가 왜적의 화살에 맞고도 동요하지 않은 채 힘을 다해 싸우니, 왜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선조가 그 소식을 듣고서, “권율에게 이런 형이 있었던가?” 하고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켜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임명하였다가, 몇 달 뒤에 오위장(五衛將)으로 삼았다. 1594년(선조27)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비)가 해주(海州)로 피난 갈 때 분승지(分承旨)로 차출되어 왕비를 수행하였고, 이듬해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오위장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시기에 명(明)나라 유격(遊擊)심유경(沈惟敬)의 접반사(接伴使)로서 세 차례 해서(海西) 지방을 왕래하였고, 또 중군(中軍)팽우덕(彭友德)과 총병(摠兵)이영(李寧)을 따라서 두 차례 영남(嶺南) 지방에 갔다. 도산(島山)의 전투(戰鬪)에서 명나라 군중(軍中)에 있다가 총병이영이 전사(戰死)하자, 상여(喪輿)를 호송하여 의주(義州)까지 돌아오니, 선조가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에 임명하였다. 조정에서 접반사의 공로를 포상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키고, 1600년(선조33)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하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직하게 하였다. 1606년(선조39) 3월 2일에 향년 71세로 강화(江華)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 압곡(鴨谷)에 있으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공로로써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봉되고,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강집(淸江集)』
  • 『간이집(簡易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상촌고(象村稿)』
  • 『학사집(鶴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