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尹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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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7년(명종 12)∼1618년(광해군 10) = 62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병조 참의(參議)를 지냈다. 자는 정보(靜甫)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순천군수(順川郡守)를 지낸 윤세형(尹世亨)이고, 어머니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의정부(議政府)참찬(參贊)어계선(魚季瑄)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봉사(奉事)윤림(尹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첨정(僉正)을 지낸 윤지청(尹之淸)이다. 연산군(燕山君)의 외할아버지인 윤기견(尹起畎)의 5대손이기도 하다.

선조 시대 활동

1583년(선조 16)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한 뒤에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6품 이상으로 오르지는 못하였다. 당시 아무리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더라도 보거(保擧 : 보증 천거)하는 배경이 없으면 청현직(凊顯職)에 오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에는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들은 서인(西人)과 동인(東人), 남인(南人)북인(北人)으로 나누어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 시대에 사림파 인사들을 모조리 죽인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원인인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보거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 말년에 그의 친구가 이조에서 그를 밀어주면서 비로소 청요직(淸要職)에 오를 수가 있었다.

1601년(선조 34) 호조 좌랑(左郞)이 되었는데,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호조는 나라의 재용(財用)을 관장하는 곳인데, 좌랑윤의(尹顗)는 위인이 용렬하므로, 전곡(錢穀)을 출납하는 직임에 합당하지 못하니, 체차하소서.” 하니, 선조가 그를 체차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4년 4월 29일) 윤의는 서인에 속하였으므로, 반대파인 동인들이 그를 공격하여 파면시킨 것이다. 1602년(선조 35)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가 되었다가, 1603년(선조 36) 대간(臺諫)에 다시 들어가서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이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이 되었다.(『선조실록』 35년 9월 16일),(『선조실록』 36년 2월 11일) 1604년(선조 37) 종묘서(宗廟署)영(令)에 임명되었다가, 통례원(通禮院)찬의(贊儀)을 거쳐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이 되었다.(『선조실록』 37년 3월 12일),(『선조실록』 37년 3월 16일),(『선조실록』 37년 9월 6일) 선조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벼슬이 병조 참의(參議)에 이르렀다.[『월사집(月沙集)』 권47 「통정대부분병조참의윤공묘갈명(通政大夫分兵曹參議尹公墓碣銘)」 이하 「윤의묘갈명」으로 약칭]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大北)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을 잡고 서인을 탄압하였다. 이에 윤의는 부사과(副司果)서반(西班)의 한직에 머물렀다. 이때 윤의가 의정부 대신들을 비판하기를, “임금에게 아뢰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대신이 이를 대신 아뢰어서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할 일이고, 위태로운 화가 조석에 박두하면 대신들이 당연히 이를 진정시켜야 할 것인데, 어찌 분분하게 수의(收議)하여, 마치 길가에서 집을 짓는 듯합니까.” 하였다.[『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권3] 광해군 초기에 서인의 대신 이항복(李恒福)·이정구(李廷龜)·이원익(李元翼) 등이 대북 정권에 참여하였으나, 정인홍·이이첨 등에 의하여 의정부 대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광해군 중기에 정인홍과 이이첨 등의 대북파(大北派)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고 문무백관들을 동원하여 <정청운동(庭請運動)>을 전개하였다. 이때 서인들 가운데 강직파의 대신과 관리들은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하여 이에 참여하지 않다가 조정에서 쫓겨났으나, 서인의 온건파는 이에 참여하였다. 윤의는 정청(庭請)에 참여하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 정청 운동에 참여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우의정한효순(韓孝純)이 문무백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아가서 광해군에게 인목대비의 폐위를 계청(啓請)하였는데, 부사과윤의는 호군(護軍)정광성(鄭廣成)·이위경(李偉卿)·이여검(李汝儉) 등과 함께 정청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4일) 그러나 광해군 시대에 그는 별다른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서울집의 본가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2세였다.[「윤의묘갈명」]

성품과 일화

윤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성품이 순수하고 곧으며, 조용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집안에서 행동도 순수하고 자상하여 형이 일찍 죽자, 그 아들을 데려다가 자기 아들보다 더 소중하게 사랑하고 키웠으므로 향당(鄕黨)에서 그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하였다. 그는 혼자서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지내는 것을 옳다고 여기고 남과 교유(交遊)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자기의 뜻과 맞지 않으면, 아무리 벼슬이 영달하거나 재산에 큰 이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지키는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항상 한가한 부서에서 적적하게 지냈는데, 선조 말년에 친구가 이조의 인사행정을 맡아 그를 청현직으로 끌어올려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장령, 세자시강원 필선 등의 요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자기 분수대로 직무에 응했을 뿐이고, 자기 자신이 남들과 어울려서 출세하는 길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신토록 크게 명성이 드러나지는 못하였다.[「윤의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양주(楊州)불암산(佛巖山)에 있고,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윤의묘갈명」]

부인 진주 정씨(晋州鄭氏)는 현감(縣監)정인덕(鄭麟德)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윤우진(尹又進)이고, 딸은 감찰(監察)이정남(李井男)에게 출가하였다.[「윤의묘갈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백사집(白沙集)』
  • 『상촌집(象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구전집(苟全集)』
  • 『양와집(養窩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