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보(洪錫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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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72년(현종13)∼1729년(영조5) = 58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양신(良臣), 호는 수은(睡隱)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태복시(太僕寺) 첨정(僉正)홍중기(洪重箕)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조 판서이민서(李敏敍)의 딸이다. 예조 판서홍만용(洪萬容)의 손자이고, 예조 판서홍현보(洪鉉輔)의 동생이다. 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 형제의 문인(門人)이다.

숙종시대 활동

1696년(숙종22)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699년(숙종25)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과옥(科獄)이 일어나 방(榜) 전체가 무효가 되었으므로, 몹시 실망하였다. 1706년(숙종32) 아버지의 명령으로 다시 과거(科擧)에 응시해서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 1710년(숙종36)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이것은 전일의 삭방(削榜) 때문인데, 그는 일생 동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번번이 사임하였다. 1713년(숙종39)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고, 1714년(숙종40)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수찬(修撰) ·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1715년(숙종41)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다가 전라우도감진어사(全羅右道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때 민전(民田)에 대한 양전(量田)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였다.

한편 당시에 부제학정호(鄭澔)가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을 쓰면서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하였다고 공격하여,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숙종이 노하여 정호와 권상하(權尙夏) 등을 견책(譴責)하여 귀양보내고 발문을 없애도록 하였다. 이때 홍석보는 동료들과 함께 윤증을 비난하고 정호를 변호하다가, 북평사(北評事)로 좌천되었다. 이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홍양현감(洪陽縣監)으로 나갔는데, 치적이 제일이어서, 1718년(숙종44)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라도에서 양전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호조에서 양전척(量田尺)으로, 세종 때의 ‘준수구척(遵守舊尺)’보다 길이가 약간 긴 인조 때의 ‘갑술신척(甲戌新尺)’을 사용하였다. 그는 신척(新尺) 사용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719년(숙종45)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판결사(判決事) · 형조 참의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그때 충청도 균전사(均田使)에 임명되었으나, 구척을 고집하면서 고사(固辭)하였다. 그러자 의정부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준수구척’을 사용하여 충청도에서 양전을 실시하게 하였다.

경종 시대 노론과 소론의 싸움

1720년(경종즉위)에 병조 참지로 임명되었다가 영의정김창집(金昌集)의 추천으로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그의 스승인 김창협의 큰형이 노론의 영수 김창집이었기 때문에, 그는 소론과 싸우는 데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경종이 33세로 즉위하였으나 후사가 없었으므로, 숙종의 제2왕자 연잉군(延礽君: 숙빈 최씨 소생)을 세제(世弟)로 삼으려고 하였다. 1721년(경종1) 노론(老論)의 4대신 김창집 · 이이명(李頤命) · 이건명(李健命) · 조태채(趙泰采) 등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주신의 딸)의 밀지(密旨)를 받아 내어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册封)하였다. 그때 그는 승지로서 부름을 받고 시민당(時敏堂)으로 들어가서 세제를 세우는 논의에 참여하였다. 그 뒤에 홍석보는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 『숙종실록(肅宗實錄)』을 편찬하는 당상관(堂上官)을 겸임하였다.

한편, 소론 김일경(金一鏡) · 박필몽(朴弼夢) 등 7인은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축환국(辛丑換局)>이다. 이때 노론 인사 60여 명이 유배되었고, 홍석보도 영암(靈巖)으로 귀양을 갔다. 1722년(경종2) 소론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이 영의정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좌의정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와 조카 이희지(李喜之) 등 노론의 명문가 자제들이 궁녀와 결탁하여 경종을 죽이려고 하였다고 무고하였다. 홍석보는 영암에 있으면서 이희지의 집안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되어,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723년(경종3) 그는 감옥에서 형신(刑訊)을 당하여 의식까지 잃었으나, 사촌 이진유(李眞儒)의 도움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거제(巨濟)로 유배되었다. 이때 노론의 4대신은 죽음을 당하였고, 노론 인사 170여 명이 죽거나 귀양을 갔는데, 당파 싸움 중에서 노론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옥사였다. 1724년(경종4) 8월 경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수라를 들지 못하다가, 세제(世弟)가 보낸 게장을 먹고 복통을 일으켜서 5일 만에 죽었다. 이런 까닭에 노론이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영조도 평생 그 부담을 지고 살았다.

영조 시대 활동

1725년(영조1) 은진(恩津)으로 양이(量移)되었다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곧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참의로 옮겨서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하였다. 그때 세자(世子: 사도세자)의 두창(痘瘡: 천연두)에 시약(侍藥)한 공로로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였다. 1726년(영조2)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대사헌을 거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경연 동지사와 좌부빈객(左副賓客) · 우부빈객(右副賓客) 등을 겸임하였다. 1727년(영조3) 승문원(承文院) · 종부시(宗簿寺) · 제용감(濟用監)제조(提調)를 역임하고,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728년(영조4) 심성연(沈成衍)이 영조 즉위년에 처형된 김일경의 잔당들이 반역을 도모한다며 고변하여 옥사가 일어났다. 홍석보는 역변(逆變)의 소식을 듣고 급히 입성(入城)하니, 영조가 장전(帳殿)에서 그를 인견하고 말하기를, “경은 선조의 외손으로서 나와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할 의리가 있다. 다시는 물러나지 말고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시사(時事)가 크게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그는 실망하여 사임하고 집의 대문을 닫고 칩거하면서 날마다 술을 마시고 언제나 비분강개하며 눈물을 흘렸다. 1729년(영조5) 8월 3일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8세였다.

양전사업과 양전척 문제

1715년(숙종41) 그가 전라우도감진어사가 되었을 때, 기민을 구제하는 근본 대책으로 민전에 대한 양전 사업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였다. 1718년(숙종44)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자, 정부에 건의하여 양전 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때 호조에서는 양전척(量田尺)으로 세종 때의 ‘준수구척(遵守舊尺)’보다 조금 긴 인조 때의 ‘갑술신척(甲戌新尺)’을 사용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결국 파직당하였다. 그리고 1719년(숙종45) 충청도균전사(忠淸道均田使)에 임명되자, 홍석보는 호조에서 ‘갑술신척’을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한사코 균전사를 사직하였다. 그러자 영의정김창집이 세자에게 숙종의 허락을 받아내게 하였고, 마침내 그의 주장대로 ‘준수구척’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세종 때 도량형을 정비하면서 구리로써 주척(周尺)영조척(營造尺) 등을 제작하여 각도에 내려 보내 이를 준수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준수구척’이다. 후대에 전란을 거치면서 ‘준수구척’이 유실되자 인조 갑술년(1634년)에 포백척(布帛尺)에 준하여 구척보다 약 1치[寸] 정도 길게 새 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갑술신척’이다. 긴 자를 사용하면, 전결(田結)이 줄어들고 짧은 자를 사용하면 전결이 늘어나므로, 조정에서 조세를 거두는 데에는 ‘준수구척’이 유리하고, 백성들이 조세를 내는 데에는 ‘갑술신척’이 유리하였다.

양전 사업은 20년마다 한 번씩 시행하도록 규정되었으나, 각 도에서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효종 때 세종의 ‘준수구척’을 복원하여 반포하고,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양전 사업을 구척(舊尺)으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 뒤에 양전 사업은 별 불만 없이 구척으로 시행되었으나, 삼남 지방의 농민들은 구척의 사용을 반대하여 ‘갑술신척’을 썼다. 노론의 정통파였던 홍석보는 세종의 유업(遺業)을 이어받기 위하여 전라도와 충청도의 양전 사업에 구척을 준용하도록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숙종 후기에 균전사김재로(金在魯) 등은 삼남 지방의 전지를 타량(打量)하면서, 백성들의 원망을 걱정하여 양전 사업에 다시 ‘갑술신척’을 사용하였다.

성품과 일화

홍석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정직하고 굳세었다. 평소에 벼슬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겼고,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쉽게 여겼다. 나라에 일이 있으면, 스스로 분발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다. 비록 일에 실패하여 극도의 곤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마음의 변함이 없었다. 남의 불의(不義)를 보거나 혹은 친구의 과실(過失)을 보면 면전에서 배척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만큼 신의를 지켰다. 남의 물건을 받는 것도 엄격하여 비록 채찍 같은 하찮은 물건이라도 조금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은 받지 않았다. 좋은 집에서 귀하게 자랐지만 항상 검소하였다. 예법을 좋아하여 정해진 법도가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도 감히 이것을 어기지 못하였다. 그는 평소 유술(儒術)을 사랑해서 일찍부터 김창협과 김창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항상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고,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자랐는데, 민첩하고 영리하여 일찍부터 문장을 잘 짓자, 외조부 이조 판서이민서(李敏敍)가 크게 기특하게 여겨서 말하기를, “참으로 재상 자리를 미리 맞추어 놓은 우리 외손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나이 18세 때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출궁(出宮)당하자, 눈물을 흘리고 비분강개하였다. 상소(上疏)하여 숙종에게 간쟁(諫爭)하려고 하다가 아버지와 형이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인현왕후가 왕후로 다시 복위한 뒤에 비로소 학교(學校)에 나갔다.

그는 일을 민첩하게 처리하고 행정 수완이 남보다 뛰어났다. 1715년(숙종41) 전라우도감진어사로 나가서 진휼(賑恤) 행정을 감독할 때, 구획(區劃)을 정해 놓고 기민을 일일이 불러와서 죽을 먹였으므로 한 사람도 굶어죽은 사람이 없었다. 한 겨울철에 눈보라와 비바람을 무릅쓰고 경상도감영(監營)으로 가서, 영남 지방 곡식 4만 석을 빌려 마차에 싣고 돌아왔다. 그 곡식으로 전라도 여러 고을과 제주도까지 굶어죽는 사람들을 먹여 무려 1백만 명의 목숨을 구원하였다. 그때 호남 지방 백성들이 모두 “우리 부모 같은 분이 오셨다.”라고 말하였다. 뒤에 그의 상사(喪事)를 당하자,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달려와서 부의(賻儀)를 하고 곡(哭)을 하였다.

한편 그가 전라도감진어사로 나갔을 때, 그와 전라도관찰사유봉휘(柳鳳輝)와 당파가 달랐기 때문에, “주객(主客)이 서로 화협하지 못해서 반드시 기민을 진휼하는 데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라고 염려하는 조정 대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라도에 가서 일을 할 때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관찰사와 상의하고 그 안 좋은 감정을 일절 드러내지 않으니, 관찰사유봉휘도 그 아량에 감복하였다고 전해진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묘소는 경기도 풍덕(豐德) 조강리(祖江里) 선영에 있는데, 그의 친구 어유봉(魚有鳳)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부인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승지(承旨)조의징(趙儀徵)의 딸로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 홍상한(洪象漢)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풍산세고(豊山世稿)』
  • 『산림경제(山林經濟)』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노주집(老洲集)』
  • 『농암집(農巖集)』
  • 『도곡집(陶谷集)』
  • 『면암집(勉菴集)』
  • 『명곡집(明谷集)』
  • 『몽와집(夢窩集)』
  • 『삼연집(三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