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계(朴知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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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3(선조 6)~1635(인조 13) = 63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인조 때에 활동한 학자. 행직(行職)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判書)이다. 자는 인지(仁之)이고, 호는 잠야(潛冶)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인데, 아버지는 수안군수(遂安君守)박응림(朴應立)이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저술한 박세무(朴世茂)가 할아버지이다.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사헌부 감찰(監察)이숙(李琡)의 딸이다,

선조 · 광해군 시대 활동

1582년(선조 15) 그의 나이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논어(論語)』를 탐독한 뒤, 더욱더 큰 뜻을 분발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므로 장차 대유(大儒)가 될 이상을 갖추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제천(堤川)으로 피난하였는데,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면서 여가를 이용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읽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괴산(槐山)으로 옮겨 가 살면서 어머니의 병환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어머니의 상복(喪服)을 입었을 때에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1606년(선조 39)에 이조 판서허성(許筬)이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09년(광해군 1)에 홍문관(弘文館)의 최현(崔晛)이 추천하여 익위사 좌세마(翊衛司左洗馬)에 임명되고 서연관(書筵官)을 겸하게 되었는데, 사은숙배(謝恩肅拜)한 다음 사직하였다. 이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광해군2) 조정에서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에게 왕비(王妃: 공성왕후恭聖王后)의 호(號)를 올리자는 의논이 있었다. 그러자 박지계는 호서(湖西)의 신창(新昌)으로 거처를 옮기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또 만회(晩悔)권득기(權得己)와 포저(浦渚)조익(趙翼)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강론하였다. 이에 원근의 사람들이 그를 사표로 우러러보며 사모하였다고 한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인조의 부름으로 올라와서 이 해 4월에 사헌부 지평(持平)을 제수받았다. 이때 사묘(私廟)의 칭호 문제 곧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추숭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게 되자 그는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배향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여론이 그의 주장을 해괴하게 여기니, 그는 끝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해 5월 말경에 조정에서 성균관(成均館) 사업(司業)의 벼슬을 새로 설치하고 그를 사업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상소를 올려 사면해 주기를 청하면서 지난번의 견해를 고집할 뿐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1월에 영월군수(寧越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11월에 청풍군수(淸風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한편, 박지계는 당시의 과거제도의 폐단을 논하여 주자(朱子)가 건의한 덕행과(德行科)나 조광조(趙光祖)가 건의한 현량과(賢良科)나 이이(李珥)가 건의한 선사법(選士法) 등이 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좋은 제도라고 진언하였다.

1632년(인조 10) 7월 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사업의 임무를 살피도록 하였다. 1633년(인조 11) 1월에도 집의로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직하니, 왕이 허락하고 성균관 사업에 제수하였다가 이 해 5월에 특명으로 집의에 제수하였다. 1634년(인조 12) 윤8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한때 조정의 중신들과 예론에 관한 의견이 대립하기도 하였다. 김장생(金長生)과 같이 양민치병(養民治兵)의 계책을 상소하였다. 또한 율곡(栗谷)이이와 우계(牛溪)성혼(成渾)의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수창(首唱)하기도 하였다.

1635년(인조 13) 7월 13일에 아산(牙山) 임시 처소에서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방숙(李方叔: 李義吉)·조극선(趙克善)·금극형(金克亨)·권시(權諰)·원두추(元斗樞)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저서로는 『사서근사록의의(四書近思錄疑義)』, 『주역건곤괘설(周易乾坤卦說)』, 『잠야집(潛冶集)』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지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태어나자 숙성하여 풍채가 빼어났다. 당시 참판(參判)신담(申湛)이 사람을 알아보는 식감(識鑑)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한번 그를 보자마자 정대한 군자(君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7, 8세에 이르러 아버지가 안고 말하기를, “네가 글을 읽는다면 아마도 너보다 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 위에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공자(孔子)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하니, 어려서부터 이미 그의 뜻이 고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선친(先親)이 항상 독서하도록 한 것은 평생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날마다 과정을 정하여 독서하되, 배운 양의 다과를 적어서 부지런히 하였는지 게으르게 하였는지 살펴보았는가 하면 비록 스승이 일이 있어 겨를이 없을 때에도 반드시 외울 것을 요청한 다음에 배우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나태해질까 염려되어서이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그는 겨우 동자의 나이에 엄연(儼然)히 대유(大儒)의 기상을 갖추었으므로 본보기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고 또한 머리를 숙이고 수업을 요청한 사람도 있었다.

그 학문은 효제(孝悌)에 근본을 두고 실천에 힘쓰며, 한결같이 사서(四書)를 위주로 하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독실히 믿어 마치 천지의 신명처럼 여기었다. 그는 조선조(朝鮮朝) 선비 중에 율곡과 우계를 매우 추앙하며 말하기를, “동방에서 두 현인보다 출처(出處)를 정대하게 한 사람은 없다.”고 하는 등 사모하고 본받으면서 두 분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묘소와 추증

1742년(영조 18) 12월에 조정에서 문목(文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박필주(朴弼周)가 지은 시장(諡狀)이 전한다. 묘소는 충청도 청주(淸州) 남면(南面) 등등리(登登里)에 있다. 영조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남 아산(牙山)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이유간(李惟侃)의 딸인데, 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유근(朴由近)이고, 2자는 박유연(朴由淵)이며, 3자는 목사(牧使)박유동(朴由東)이다. 1녀는 경종(慶琮)의 처가 되었고, 2녀는 민광용(閔光火庸)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이지진(李之鎭)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계전서(沙溪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국조보감(國朝寶鑑)』
  • 『명재유고(明齋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