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許筬)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48년(명종 3)∼1612년(광해군 4) = 65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판서(判書)이고, 증직(贈職)은 의정부 찬성(贊成)이다. 자(字)는 공언(功彦)이며, 호(號)는 악록(岳麓)·산전(山前)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금화사(禁火司) 별제(別提)를 지내고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허담(許聃)이며 조부는 군자감(軍資監)부봉사(副奉事)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허한(許澣)이다.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허엽(許曄)이고,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서평군(西平君)한숙창(韓叔昌)의 딸이다.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의 형이고, 허난설헌(許蘭雪軒)의 큰오빠이다. 미암(眉巖)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사마시(司馬試) 진사(進士)로 합격하였고, 15년이 지나 1583년(선조 16)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방목』) 처음에 예문관(藝文館)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의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1590(선조 23)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는데, 그때 그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일본통신사(通信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정사(正使)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김성일(金誠一)을 모시고 일본에 가서 관백(關伯)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고 돌아왔다. 토요토미는 조선 사신을 만나는 자리에서 도 예절을 갖추지 않고 어린 외아들[豊臣秀賴]를 업고 있었다. 이것은 토요토미가 조선 사신을 만홀하게 대접하여 침략 야욕을 숨기려던 계략이었다. 그러므로, 부사김성일은 선조에게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전혀 두려워할 위인(爲人)이 못된다고 보고하였다. 1591년(선조 24)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다가, 문례관(問禮官)이 되어서 중국 요동(遼東)의 탕참(湯站)에까지 다녀왔다. 또 관상감(觀象監)교수(敎授)를 겸임하였고,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평안도로 피난 가는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다. 평양에 이르러 강원도 순무어사(巡撫御史)에 임명되어, 강원도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나, 군사와 의병을 제대로 모으지 못하였다. 1593년(선조 26)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그 뒤에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명(明)나라 총독(摠督)고양겸(顧養謙)이 조선에 사신으로 오다가 요동(遼東)의 봉황성(鳳凰城)에 이르자, 접반 부사(接伴副使)에 임명되어, 접반사(接伴使)심희수(沈喜壽)와 함께 황급히 압록강 의주(義州)로 가서 사신을 맞이하여 안내하였다.(『선조실록』 참고.) 의주에서 돌아와서 이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참고.)

1597년(선조 30)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다가,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 1598년(선조 31)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599년(선조 32)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갔다가, 1601년(선조 34)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1602년(선조 35)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1603년(선조 36)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604년(선조 37)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예조 참판(參判)으로 옮겼고, 예조 판서(禮曹)로 승진하였다. 1605년(선조 38)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경연(經筵)지사(知事)가 되었다. 1606년(선조 39)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선조수정실록』 참고.)

선조 만년에 북인(北人)유영경(柳永慶)·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을 잡았다. 선조는 인목왕후(仁穆王后)가 낳은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이의(李㼁)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여, 영의정유영경에게 이 일을 맡겼으나 정인홍·이이첨 등이 세자 광해군을 옹립하려고 반대하였으므로, 실패하였다. 1608년(선조 41) 2월 선조가 죽을 때에 가장 신임하는 측근 신하 7명에게 어린 아들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유교(遺敎)를 남겼는데, 허성(許筬)을 비롯한 허욱(許頊)·한응인(韓應寅)·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서성(徐渻)·한준겸(韓浚謙) 등 7명의 중신(重臣)이었다. 선조가 운명하기 직전에 7명의 중신을 하나씩 따로 비밀히 불러서, 선조가 유교를 내렸는데,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 있는 법이므로 성인도 모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영창대군이 아직 나이가 어려서 미처 장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 바라건대, 제공(諸公)은 영창대군을 사랑하고 붙잡아 달라. 감히 이로써 부탁한다.” 하였다.(『상촌집(象村集)』 권26 참고.)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부탁 받은 7명의 중신을 ‘유교 7신(遺敎七臣)’, 또는 ‘고명 7신(顧命七臣)’이라고 한다.(『선조실록』 참고.)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2월 선조가 승하하자, 그 국장(國葬)을 준비하던 중에 수문장(守門將)정승서(鄭承緖)가 임해군의 집에서 각종 병기(兵器)를 보았다고 고발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대간(臺諫)에서 임해군이 국상(國喪)을 치르는 틈을 이용하여 변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고 탄핵하였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동복형이었으나, 광해군은 그의 친형 임해군과 그 일당을 잡아다가 혹독하게 심문하였다. 임해군은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다가 아사(餓死)하였다. 선조는 궁녀가 낳은 서자가 13명이 있었는데, 서출 1자 임해군과 서출 2자 광해군은 공빈김씨(恭嬪金氏)가 낳았다. 나중에 계비(繼妃) 인목왕후가 적자(嫡子) 영창대군을 낳았다. 처음에 선조가 서출 가운데 맏아들 임해군을 제치고 둘째아들 광해군을 세자(世子)로 삼은 것은 임해군이 성질이 난폭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임해군 옥사>를 국문한 위관(委官)과 그 옥사를 고변한 사람 등 48명을 공신으로 책봉하였는데, 허성·김이원(金履元)·유희분(柳希奮)·최유원(崔有源)·윤효전(尹孝全) 5인이 익사공신(翼社功臣) 1등으로 녹훈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2등, 3등으로 책훈되었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4 참고. <임해군 옥사>는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이 그와 가까운 사헌부 집의최유원과 사간원 헌납윤효전 등을 사주하여 일으킨 옥사였다. 이조 판서허성은 형식적으로 위관에 참여하였는데, 유희분 일당은 당시 조정에서 명망이 있던 허성을 공신 반열에 제일 앞으로 내세워서 반대파의 여론을 무마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610년(광해군 2) 허성이 돈녕부(敦寧府)지사(知事)로 있을 때, 광해군이 생모 공빈 김씨를 추숭(追崇)하려고 하자, 허성은 『예경(禮經)』을 근거로 삼아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대간에서 허성을 탄핵하였으므로, 허성은 관작(官爵)을 삭탈당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되었다. 그때 광해군이 하교하기를, “추숭하는 예를 이루려는 때에 김륵(金玏)이 갑자기 사리에 어긋나는 의논을 제기하였으니, 그 정상이 가증스럽다. 그의 패악스러운 의논은 허성의 상소에서 시작된 것인데, 서로 화답하듯이 상소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시키니, 그 죄가 크다. 김륵과 허성은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내쫓도록 하라.” 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참고.) 이리하여 허성은 파직되어, 서울 4대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 근교 선영(先塋)이 있는 광주(廣州)에서 은거하다가,1612년(광해군 4) 8월 6일 임시 거처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5세였다.(『동명집(東溟集)』 권8 「이조판서 허공성 묘갈명(吏曹判書許公筬墓碣銘)」 참고.)

허성은 문장가로서 많은 글을 남겼는데,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기록이『하곡 조천록(荷谷朝天錄)』이다.(『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 참고.) 문집으로 『악록집(岳麓集)』이 남아 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배시켰다가 죽였다. 이때 옥사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선조가 영창대군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한 ‘유교 7신’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모두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시켰다. 허성은 이미 죽었지만, 살아 있던 신흠 등은 서울에서 쫓겨나서 김포(金浦) 선영 아래에서 살면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획하였다.

통신사의 서장관 허성

허성이 살았던 시기에 일본에서는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다이묘[大名] 출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대소 영주(領主)들을 정복하여 일본을 거의 통일하였으나, 1582년(선조 15) 쿄오토[京都]의 혼노사[本能寺]에서 암살당하였다. 그의 몸종 출신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권력을 잡고 마침내 일본을 통일하고, 1585년(선조 18) 관백(關伯)이 되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가 계속되어, 사무라이[武士] 집단의 힘을 외부로 방출할 필요가 있었다. 토요토미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명나라를 치러가는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고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의 조야(朝野)는 크게 격분하였다. 그때 조선은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전혀 일본 정세를 모르고 있었다.

1589년(선조 22) 일본의 토요토미는 중 현소(玄蘇)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어 통신사를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거절하자, 중 현소는 비굴한 자세로 간청하면서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일본 사신을 접대하던 예조 판서유성룡(柳成龍) 등이 건의하기를, “전라도에 살던 사화동(沙化同)이라는 자가 왜구의 유혹에 넘어가서, 왜구들에게 정해년(1587년) 녹도(鹿島)를 노략질하도록 시켰는데, 만약 일본이 이 사람을 잡아서 보낸다면, 화친을 요구하는 일본의 성의를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병조 판서황정욱(黃廷彧) 등이 강력히 반대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당시 유성룡과 황정욱은 조정에서 동인과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홍문관 수찬(修撰) 허성이 나서서 아뢰기를,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본래 일개 필부(匹夫)로서 시의(時宜)를 틈타서 권력을 잡았으나, 일본 영주들이 거의 복종하지는 않으므로, 우리나라의 세력을 업고 일본 영주들을 제압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반드시 다른 뜻은 없을 것입니다. 사신을 보내어 그 정세와 형편을 자세히 탐지하면 우리가 미리 예방하는 데에도 대단히 유익할 것이니, 사신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도 옳다고 극력 찬성하였다. 이리하여 선조가 다시 의논하게 하니, 유성룡과 허성은 당시 인망이 있어서 서인들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드디어 사화동 등을 쇄환(刷還)하는 조건으로 통신사를 보내기로 합의하였다.(『선조실록』 참고.) 허성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살아 있을 때 동인의 좌장(座長) 역할을 하였으므로, 허성도 동인에 속하였다. 그 뒤에 일본 사신 현소 등이 사화동과 우리나라 백성으로서 왜구에게 잡혀갔던 사람 30여 명을 데려왔으므로, 조정에서 곧 통신사를 구성하였는데, 정사는 서인의 황윤길이 맡고, 부사는 동인의 김성일이 맡았으며 허성은 실무 책임자인 서장관을 맡아서 종사관차천로(車天輅) 등과 함께 30여 명으로 조직하였다. 1590년(선조 23) 봄에 정사황윤길, 부사김성일, 서장관허성 등이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사신 일행은 비바람을 만나서 오랫동안 동래(東萊)에 머무르다가 그해 5월 비로소 바다를 건너가서, 관백토요토미를 만나보고, 1591년(선조 24) 봄에 돌아왔다.(『기재사초(寄齋史草)』 참고.) 이때부터 토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멸망할 때까지 전후 12회에 걸쳐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1591년(선조 24) 3월통신사황윤길·김성일·허성 등이 일본에서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자, 선조가 그 정세를 물으니, 정사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으나, 부사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을 동요되게 만드는데,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였다. 또 선조가 묻기를,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정사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서 용기와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하였습니다.” 하였으나,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새끼와 같았으니, 두려워할 인간이 못 됩니다.” 하였다. 이때 김성일이 말마다 황윤성과 다르게 말한 까닭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노약한 황윤길이 겁에 질려서 사신의 체모를 잃고 행동한 것에 대단히 분개하였기 때문이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30 참고.) 이처럼 두 사람이 임금 앞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서장관허성은 어떻게 대답하였는지 매우 궁금하다. 『선조실록』을 보면, 선조가 탄식하기를, “동시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다.’라고 하고, 허성은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김성일만이 유독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괴이하도다.”라고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사황윤길과 서장관허성의 말이 들어맞은 것이 증명된 셈이다. 황윤길은 왜란 전에 죽었고, 왜란 때 김성일은 경상도 우병사(右兵使)로 있었는데, 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을 활용하여, 관군과 연합하여 왜적을 막았다. 그는 통신사의 부사로서 임금에게 일본의 정세를 제대로 보고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직산(稷山)에 이르러 석방되어,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도로 경상 우도로 돌아갔다. 그때 우의정유성룡이 선조에게 그가 의병과 연합해서 왜적을 막아낸 공이 있다고 변호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낙동강 하류 동쪽 지역에서 특히 의병이 많이 일어난 것은 김성일이 경상 우도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초유하였기 때문이다. 김성일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경상우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593년(선조 26) 여름에 전염병에 걸려서 진양(晉陽)에서 죽으니, 사민(士民)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문조만록(聞詔漫錄)』 참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 좌랑허성은 피난 가는 선조를 호종하고 평양까지 따라갔는데, 허성은 자청하기를, “강원도로 군병을 모집하러 가겠습니다.” 하니, 선조가 허락하고, 그를 강원도 순무어사에 임명하여 보냈으나, 경상도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였다.(『기재사초』 참고.) 그때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전일에 이조 좌랑허성이 강원도의 소모관(召募官)으로 나간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으나, 조금도 한 일이 없고 우역(郵驛)의 비용만 허비하였으니, 파직시키소서.” 하였다.(『선조실록』 참고.) 그는 파직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돌보았다.

성품과 일화

허성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충후(忠厚)하고 모습이 방정하며 행동이 예의 발랐다. 학문은 육경(六經)의 원리에 정통하였다. 일을 할 때에는 자신이 옳다고 판단되면 비록 천만 사람이 반대하더라도 움직이지 않았다.(「묘갈명」 참고.) 그는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였으나, 문장에도 뛰어나서 배다른 동생 허봉(許篈)·허균(許筠)과 함께 모두 문사(文士)로 조정의 벼슬에 올라서 당시의 문장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들을 ‘허씨묘지(許氏卯地)’라고 불렀는데, 묘(卯)는 정동쪽의 방위이므로 문운(文運)이 아침 햇살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일어난다는 뜻이다. 남동생 허봉·허균과 여동생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시(詩)로 유명하였으나, 허성은 문장으로 유명하였는데, 그 문집을 보면, 그가 ‘실용(實用) 후생(厚生)’의 학문에도 뛰어나서,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문집 『악록집(岳麓集)』에 「소나무를 옮겨 심는 글」을 보면, “소나무를 옮겨 심을 때 원래 서 있던 자리의 흙을 많이 파다가 먼저 그 흙으로 뿌리를 두껍게 묻은 다음에 다른 흙으로써 구덩이를 메운다. 처음 뿌리를 묻는 원래 흙에는 다른 흙이 섞여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하며, 다지지 말아야 한다. 흙을 다지다가는 뿌리를 상하게 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흙으로 구덩이를 메울 때는 되도록 흙을 많이 퍼 넣지 말고, 얇게 편 다음에 꽁꽁 다지고 다시 흙을 퍼 넣어 펴고 다지는 식으로 메워 올라간다. 나무 등걸의 묻혀 있던 자리까지만 흙을 채우고, 그 이상으로 흙이 올라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소나무의 드러난 뿌리는 묻지 않도록 한다. 드러난 뿌리를 묻으면 죽는다. 다 심은 다음에는 네 귀퉁이에 큰 버팀목을 세우고 꽁꽁 묶어 큰 바람이 불어도 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 그런 다음 마르지 않게 새벽과 저녁에 물을 주면 비록 아름드리 소나무라도 절대 말라 죽지 않는다.”라고 하여(『악록집』·『산림경제(山林經濟)』 권2 참고.) 지금 원예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참고할 만한 원예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문집에 음식을 소개한 글을 보면, “석이떡[石茸餅]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중이 구맥(瞿麥)을 곱게 찧어서 체로 여러 번 내린 뒤에 꿀물에 버무리고 석이버섯을 섞어서 구리로 만든 시루에 찌니, 그 맛이 매우 좋았다. 비록 맛좋은 경고(瓊糕)·시병(柹餠 곶감떡)이라도 이보다 못할 것이다.” 하였다.(『악록집』·「산림경제」 권2 참고.)

『광해군일기』를 보면, “허성은 허엽의 아들이다. 그의 배다른 동생인 허봉·허균과 함께 모두 이름이 났었는데, 허성은 자칭 성리학에 정통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질이 고집스럽고 앞뒤가 막혔으며, 당론(黨論)을 고집하여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공격하였는데, 늙을수록 더욱 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할 때 임해군을 고발하여 원훈(元勳)이 되어서 광해군의 은총을 받다가 얼마 뒤에 죽었다. <인조반정> 뒤에 서인에 의하여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하였다. 이것은 반대파 서인의 사관의 기록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토당리(土堂里)의 선영(先塋)에 있고, 동명(東溟)김세렴(金世濂)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동명집(東溟集)』 권8 「이조판서 허공성 묘갈명(吏曹判書許公筬墓碣銘)」)

첫째 부인은 좌의정이헌국(李憲國)의 딸인데 일찍 죽어서 자녀가 없고, 둘째 부인은 병사(兵使)남언순(南彦純)의 딸이다. 아들은 넷인데, 맏아들 허실(許實)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정언(正言)을 지냈고, 다음 허의(許宜)는 일찍 죽었으며, 다음 허보(許), 다음 허정(許寊)은 모두 선비이다. 딸은 넷인데, 맏딸은 생원 심유(沈愉)에게, 다음은 서윤(庶尹)윤홍영(尹洪榮)에게, 다음은 급제(及第) 박홍도(朴弘道)에게, 다음은 선조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아들인 의창군(義昌君)이광(李珖)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 아들 허밀(許密)은 사과(司果)를 지냈다.(「묘갈명」 참고.)

『선조실록』을 보면, “허성은 이름 있는 재상 허엽의 자식으로서 청반(淸班)에 올랐으나, 가정 안에 부끄러운 일이 많이 있었다.” 하였다. 선조 때 기록인데, 가정 안의 부끄러운 일은 아버지 허엽의 정실과 후실 사이의 갈등 관계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허성과 허봉·허균·허난설헌은 배다른 형제 자매였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하곡조천록(荷谷朝天錄)』
  • 『갑진만록(甲辰漫錄)』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곡집(谿谷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명집(東溟集)』
  • 『악록집(岳麓集)』
  • 『문조만록(聞詔漫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계집(桐溪集)』
  • 『동사록(東槎錄)』
  • 『동사일기(東槎日記)』
  • 『문견별록(聞見別錄)』
  • 『문소만록(聞韶漫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상록(槎上錄)』
  • 『상촌집(象村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호사설(星湖僿說)』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전후사행비고(前後使行備考)』
  • 『정무록(丁戊錄)』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사록(海槎錄)』
  • 『미암집(眉巖集)』
  • 『약포집(藥圃集)』
  • 『오리집(梧里集)』
  • 『태천집(苔泉集)』
  • 『한음문고(漢陰文稿)』
  • 『우복집(愚伏集)』
  • 『은봉전서(隱峯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