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득기(權得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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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0년(선조3)∼1622년(광해군14) = 53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유학자. 자는 중지(重之)이고, 호는 만회(晩悔)이다. 본관은 안동인데, 서울에 거주하였다. 예조 판서권극례(權克禮)의 아들인데, 숙부 권극관(權克寬)의 양자가 되었다. 종실(宗室) 귀성군(龜城君)이첨(李瞻)의 사위이고, 영의정(領議政)심지원(沈之源)의 장인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20세이던 1589년(선조22) 진사시에 합격하여 재랑(齋郞), 감역(監役), 금부랑(禁府郞)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과에 합격하지 못하다가 1610년(광해군2) 다시 재랑으로 임명된 41세 때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 좌랑이 되었다. 그때 마침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하자, 그는 조정에 나가서 벼슬할 뜻이 없어 졌다. 그리하여 1618년(광해군10)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폐인(廢人)이 되어 서민처럼 생활하였다. 선영(先塋)의 곁을 떠나지 못하여 서울 교외에 살면서도 도성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1622년(광해군14) 호서(湖西) 지방의 해안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사는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성리학의 연구

유학의 경전을 연구하는 데에 몰두하여 학문의 체계화를 이룩하여, 기호학파의 이론을 구축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글을 읽을 때 반드시 곰곰이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다가, 의문점이 생기면 기록해 두었다. 의문을 기록한 책을 『참의(僭疑)』라 이름 붙이고 소중히 보관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보면, 학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와 벼슬할 유혹이 적어지고 본심(本心)이 밝아지며, 고서(古書)를 많이 읽으면, 의리(義理)가 강해지고 사욕(私欲)이 사라져서 비로소 학문을 할 수 있고, 자신을 성찰(省察)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만년에 『주자대전』을 열람하다가 마음에 와 닿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머리를 끄덕이며, “내가 『참의』를 저술한 것도 잘못된 것이다.”고 하고, 그 초고를 없애버렸다. 저서로는 『만회집(晩悔集)』 · 『연송잡기(然松雜記)』 등이 있다.

무덤과 추모

묘소는 광주(廣州)의 남쪽 낙생리(樂生里)에 있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공조 참판에 추증되고, 대전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만회집(晩悔集)』
  • 『포저집(浦渚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송자대전(宋子大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