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畵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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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서(圖畵署) 에 소속되어 그림 그리는 일을 하는 관원.

개설

도화서는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예조(禮曹)에 설치된 국가 기관이다. 이처럼 국가가 그림을 제작하기 위한 전문 관서를 설치하고 관원을 두는 것은 유교 문화권에만 발달한 제도였다. 화원은 도화서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리는 직업 화가를 지칭하는 용어이나 넓은 의미에서 직업 화가 전부를 포괄하기도 한다.

화원들은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그림 제작을 담당하였는데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공신(功臣)들의 초상화, 중국과 일본 사신의 요청에 따른 그림 제작, 각종 기록화와 반차도(班次圖), 행사 때 필요한 물품과 각종 의장물(儀仗物) 제작에 참여하는 등 매우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조선의 화원들은 사대부들과 함께 조선의 회화 발전을 이끈 중요한 축이었다.

유래

『주례(周禮)』의 “그림은 왼쪽에 두고 글씨는 오른쪽에 둔다.”는 좌도우서(左圖右書)의 개념이 배경이 되어 중국에서는 그림과 글씨를 관장하는 2명의 관리가 황제를 보좌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유교 사회로 계승되어 그림은 나라의 혼란을 다스리는 법도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한나라에는 황제 직속 기관인 황문(黃門)과 상방(尙房)에 그림을 관장하는 부서가 설치되었다. 이는 당나라의 한림별원(寒林別院), 송나라의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 등으로 이어져 그림을 관장하는 관서의 설치가 체계화되었는데 중국은 황제와 환관 중심의 내정(內廷) 기구의 성격이 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그림을 그리는 관서가 설치되었는데 신라의 채전(彩典), 통일신라시대의 전채서(典彩署), 고려의 도화원(圖畵院)이 그것이며 관서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화가들이 있었다.

『고려사』 등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초기에 깃발과 공예품의 문양을 그리던 사람을 ‘화업(畵業)’이라고 하였으며 중기에 와서는 화공(畵工)이라고 지칭하였다. 1394년(태조 3) 정도전(鄭道傳)이 올린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는 회화공(繪畵工)을 공조(工造)의 공인으로 기록하였다.

설립 및 변천

(1) 태조~현종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도화원 제도가 그대로 계승되었다. 태종이 육조의 체제를 개편하는 과정에 도화원은 예조 소속의 기구로 편입되었으나 운영은 고려의 전통을 따랐다. 도화서의 운영체계가 설립되면서 조선시대 화원 제도가 정착하게 된 시기는 성종대이다.

먼저 1470년(성종 1)을 전후해 도화원이 예조에 속한 종6품 기술직 관서인 도화서(圖畵署)로 축소 개편되었다(『성종실록』 8년 1월 9일).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도화서 관제가 법제화되어 조선시대 말기까지 가장 기본적인 규정으로 준행되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도화서의 운영을 전담한 예조의 관리는 제조(提調)별제(別提)였으며 도화서 최고 책임자인 제조는 예조 판서가 겸임하였다. 도화서를 예조에 편입시킨 것은 그동안 공조에 두었던 전통과는 다른 것으로 화원들의 활동을 유교적 통치에 필요한 의례에 관한 활동으로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당대 최고의 학자 관료였던 예조 판서가 화원들의 선발 시험을 치르고 관직을 천거하는 도화서 운영을 직접 관장하였다.

별제는 도화서 운영 실무를 담당하는 종6품의 경관직으로 2인이었다. 처음에는 최경(崔涇)과 같은 화원이 별제를 맡았으나 화원들 간의 파벌 형성 등의 폐단으로 인해 사대부들이 맡았다. 이 당시 화원의 정원은 20명이었는데 이들이 지낼 수 있는 관직은 잡직(雜織)으로 철저하게 제한되었고, 실직은 종6품직인 선화(善畫) 1원, 종7품직인 선회(善繪) 1원, 종8품직인 화사(畵史) 1원, 종9품직의 회사(繪史) 2원의 5자리뿐이었다. 실직을 받은 화원들은 녹봉을 받았으나 그렇지 못한 화원들은 도화 작업이 있을 때마다 작업한 일수에 따라 일당을 지급받았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하였다.

도화서 화원들은 어진, 기로상(耆老像), 공신 초상화 등의 초상화, 행실도(行實圖), 무일도(無逸圖), 빈풍도(豳風圖) 등의 감계화(鑑戒畵), 행사 기록화, 지도(地圖), 의궤(儀軌) 내의 도면과 삽화, 단청, 병풍, 세화(歲畵), 도자기 문양 그림 등 다양한 분야에 참여하였다. 또한 사신들의 사행길을 수행하며 방문지의 지도와 관아도 등을 그렸으며 조선초기에는 왕실의 원찰(願刹)에 필요한 불사(佛事)와 불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화원의 채용과 승진을 위해 ‘재주를 취한다’는 의미의 취재(取才)를 실시하였는데 조선시대 도화서의 화원 취재법은 이전 제도와는 차이가 많았다. 시험 과목은 대나무, 산수, 인물, 영모, 화초 5과목으로 화원들이 2과목을 선택하여 그림을 잘 그리면 ‘통(通)’, 못 그리면 ‘약(略)’을 받았다. 그러나 과목에 점수별 차등을 두어 대나무 1등, 산수 2등, 인물과 영묘 3등, 화초를 4등으로 구분하고 등급이 높을수록 가산점을 주었다. 성종대 양성지(梁誠之)는 대나무도 화초의 한 종류임으로 별도의 과목으로 구분하지 말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고사(故事)나 문학을 통해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를 가장 높은 화목으로 여겨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도화서는 유교를 바탕으로 한 사대부 중심으로 법제화된 것을 알 수 있다.

화원들은 법제상 종6품 이상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한품서용(限品敍用)의 제한으로 30세 정도가 되면 도화서를 떠나야만 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계속 근무하는 화원인 잉사화원(仍仕畵員) 제도를 만들어 6품 1원, 7품 1원, 8품 1원의 서반 체아직(遞兒職) 3자리를 배정하였다.

화원은 어릴 때부터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선발해 오랜 기간 동안 수양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생도(生徒) 제도를 운영하였다. 15세 이하의 어린 소년 15명을 선발하였으며 도화서를 떠나기 전까지 군역을 면제해주고 의복을 지급해주는 등의 장려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제도는 화원이 가업(家業)으로 세습되는 계기가 되었다.

16세기 중기에 들어와서 화원의 세습화가 심화되기 시작하면서 화원의 신분이 기술직 중인으로 고착화되었다. 17세기에는 양란(兩亂)으로 인해 어진을 그리는 전통이 사라지고, 인조 이후 새해를 축하하고 재앙을 막기 위해 그렸던 세화(歲畵)를 진상하는 제도도 폐지되면서 사행에 참여하는 화원 수도 줄었다. 이로써 도화서 화원들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2) 숙종~순종

숙종은 200년 만에 태조의 어진을 다시 모사하여 봉안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어진 제작을 부활하면서 도화서와 화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숙종 이후의 왕들은 10년마다 정기적으로 어진을 그리고 왕실 행사를 거행한 후 기록화를 남기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데 도화서 화원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숙종은 화원을 크게 증원하면서 화원을 후원하는 정책을 마련하여 어진을 그린 화원에게는 대우를 극진하게 해주었으며 일반 화원들의 보수도 개선해주었다. 특히 어진을 제작한 최고의 화원들에게는 주부(主簿), 별제, 현감(縣監), 찰방(察訪) 등의 종6품 정직을 제수하거나 품계도 당상관인 통정대부(通訓大夫) 이상으로 올려주는 획기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변상벽(卞相璧), 김유성(金有聲), 김후신(金厚臣) 같은 화원들은 정3품 통정대부의 당상 품계를 받았는데 조선전기 최고의 화원인 안견(安堅)이 정4품의 서반직(西班職)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반 화원들에 대한 처우도 개선되었다. 숙종과 영조는 화사군관(畵師軍官)이나 화사비장(畵師裨將)이라는 새로운 직제를 만들어 병영(兵營)수영(水營)이 있는 곳에 화원을 파견하였다. 1740년(영조 16) 영조는 경기도를 제외한 7도의 감영에 비장 자리를 만들어 화원을 파견하였다.

화원의 숫자도 증원되어 1744년(영조 20)에 발간된 『속대전(續大典)』에는 생도 15명이 증원되었으며 1785년(정조 9)에 발간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화원이 30명으로 명시되어 10명이 증원되었다. 화원의 관직에 대한 조항은 잡직에서 경관직(京官職)으로 바뀌어 법제화되었다.

정조는 1783년(정조 7)에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제도를 만들었다. 이는 왕실과 관련된 서사 및 도화 활동을 우선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도화서에서 임시로 화원을 차출하여 대기시키는 제도로, 이때 차출된 화원은 당대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정조는 규장각을 왕정의 핵심 기구로 만든 후 어제등서(御製謄書)와 어서(御書) 편찬을 목적으로 10명의 화원을 선발하였다. 정조는 최고의 화원들로 구성된 자비대령화원제도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 제도는 1783년부터 1881년(고종 18)까지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원인 김홍도(金弘道), 이인문(李寅文), 김득신(金得臣) 등이 모두 자비대령화원 출신이었다.

화원이란 용어는 기록상으로 1908년까지 나타나다가 1910년을 전후해 근대적 개념인 화가라는 명칭이 보편화되면서 사라졌다.

참고문헌

  • 강관식,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 상·하, 돌베개, 2001.
  • 강관식,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 제도」, 『화원』, Leeum, 2011.
  • 홍준표, 「화원의 형성과 직무 및 역할」, 『화원』, Lee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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