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안(洪樂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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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2년(영조 28)~1812년(순조 12) = 61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과 병조 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홍희운(洪羲運)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노암(魯庵)이다. 아버지는 수원진관병마절제도위(水原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낸 홍복호(洪復浩)이며, 어머니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박상진(朴象眞)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홍량보(洪亮輔)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를 지낸 홍중우(洪重禹)이다. 남인(南人)이면서 서학(西學) 즉 천주교에 대한 척사(斥邪) 활동에 앞장 선 대표적인 공서파(攻西派)이다.

정조~순조 시대의 활동

1783년(정조 7) 증광시에 급제하였고, 1790년(정조 14) 증광시 병과에 사학(邪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답안을 작성하여 급제한 후 가주서(假注書)로 조정에 진출하였다.[『방목(榜目)』],[『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경사편 3 「서학(西學) 」] 그런 가운데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지하고 이종사촌인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발생하였다. 이를 알게 된 홍낙안은 진산군수(珍山郡守)신사원(申史原)에게 편지를 보내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않은 것을 힐책하였으며, 이어 좌의정채제공(蔡濟恭)에게도 편지를 보내 진산사건을 조정에서 다룰 것을 요구하였다.(『정조실록』 15년 10월 23일) 이 편지로 인해 조정은 진산사건 및 서학으로 관심이 집중되었다.(『정조실록』 15년 10월 25일),(『정조실록』 15년 10월 30일) 이런 가운데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가주서에서 물러나 있던 홍낙안은 권일신(權日身)이승훈(李承薰)을 천주교 두목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다수의 천주교도들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의 첫 번째 천주교 박해인 <신해박해(辛亥迫害)>이다.(『정조실록』 15년 11월 3일),[『일성록(日省錄)』정조 15년 11월 8일]

한편 정조와 채제공은 이 사건을 남인 친서파(親西派)에 대한 공격으로 파악하면서 더 이상의 남인 인사들이 연루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 결과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이승훈은 삭탈관직 후 석방되었고, 권일신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정조실록』 15년 11월 8일),(『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아울러 이승훈과 정약용(丁若鏞) 등의 남인 인사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천주교와 관련성을 주장하던 이기경(李基慶)도 상 중에 상소를 올리고 상소에 올린 용어들이 패악스럽다는 이유로 함경도 경원부로 유배를 갔다.(『정조실록』 15년 11월 13일)

정조는 홍낙안 또한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이기경과 함께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의심하였는데, 홍낙안이 진산사건을 폭로한 편지가 홍인호(洪仁浩)와 정창순(鄭昌順)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정조실록』 15년 11월 14일),(『정조실록』 16년 2월 17일),(『정조실록』 16년 2월 30일) 이에 홍낙안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편지를 보내는 것이 옳은지 유무를 확인하려고 홍낙안이 홍인호와 정창순을 접촉하였을 뿐이라는 정조의 판단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정조실록』 16년 2월 30일) 그럼에도 홍낙안은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다가 1795년(정조 19) 먼 지방의 찰방(察訪)으로 임명하라는 정조의 명에 따라 다시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고, 1798년(정조 22)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정조실록』 19년 8월 10일),(『정조실록』 22년 12월 24일)

이어 1800년(순조 즉위년)에 영춘현감(永春縣監)을 거쳐, 1801년(순조 1)에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과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홍문관 응교(應敎) 등을 역임하였다.(『순조실록』 즉위년 12월 20일),(『순조실록』 1년 4월 5일),(『순조실록』 1년 7월 27일),(『순조실록』 1년 9월 18일) 한편 이 해 1월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처벌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0월에 서양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한 후 천주교를 공인 받게 해달라는 요청을 적은 『백서(帛書)』를 작성한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었다.(『순조실록』 1년 10월 3일) 그러자 당시 사헌부 집의(執義)이던 홍낙안은 이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미 천주교와 연루되어 유배를 떠난 정약용과 정약전(丁若銓) 등을 다시 국문할 것을 주장하였다.(『순조실록』 1년 10월 13일) 이어 천주교 배척에 공로를 인정받은 홍낙안은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어 천주교도들의 추국에 참여하였다.(『순조실록』 1년 10월 15일) 그런 가운데 풍산 홍씨(豊山洪氏) 일가는 홍낙민(洪樂敏)과 홍낙임(洪樂任) 등이 천주교 신자로 체포되자, 항렬자를 ‘낙(樂)’에서 ‘희(羲)’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홍낙안도 홍희운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홍낙안은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으며, 1806년(순조 6)에는 척사를 한다는 이유로 이기경과 도당을 만들었으나 허울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순조실록』 2년 1월 17일),(『순조실록』 3년 1월 10일),(『순조실록』 6년 7월 12일) 그러다가 1812년(순조 12)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818년(순조 18) 신유박해 당시 채제공의 관작 추탈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과 관련하여 경상도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순조실록』 18년 9월 20일),[『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15 「묘지명(墓誌銘)」]

성품과 일화

척사 활동에 앞장섰음에도 홍낙안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정조는 진산사건 이후 “홍낙안의 일은 참으로 하나의 변괴이다”라면서, “그가 품고 있는 계략은 단지 쥐는 잡으려 하면서 그릇을 깰까봐 주저한다는 것만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 대저 홍낙안이 참으로 사학(邪學)을 공박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상소하여 알리는 것도 옳고 대신에게 글을 두번 세번 보내어 기어코 임금에게 전달하여 알리도록 하는 것도 옳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장서(長書)를 쓰고 한편으로는 전파시켜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전하여 마치 역마를 타고 명령을 전달하듯이 하여 연석(筵席)에까지 알려지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용심(用心)이 오로지 좌의정에 있었음은 불을 보듯 훤하다”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의 행적과 노선에 대하여 위에서 또한 어찌 들어 아는 것이 없겠는가. 홍낙안을 한번 처리하는 것은 내 뜻을 이미 정하였으나 아직까지 다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우선 기다리는 것이다. 홍낙안과 같은 자가 끝내 형벌을 받지 않는다면 어찌 위복(威福)의 권한이 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한동안 홍낙안을 벼슬에 임명하지 않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6년 2월 17일) 천주교 관련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연루되었던 정약용 역시 “악인(惡人) 홍낙안 등이 공모하여 이를 기화로 선류(善類)를 다 제거하려 하였다”며 비난하였다.[『다산시문집』 권16 「묘지명」]

후손

부인 이씨(李氏)로부터 1남 홍원모(洪元謨)를 두었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방목(榜目)』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세유표(經世遺表)』
  • 『금대시문초(錦帶詩文鈔)』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눌암기략(訥菴記略)』
  • 『벽위편(闢衛編)』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홍재전서(弘齋全書)』
  •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김가람, 「이기경의 척사론과 척사활동」,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