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사(斥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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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입장에서 성리학이 아닌 잘못된 학문인 사학(邪學)을 물리친다는 철학적 이념이자 물리치기 위한 정치적 운동.

개설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여기면서 그것과 다른 사상과 학문을 사학(邪學)으로 배척하는 유교의 자기 방어적 보수정치 이념이자 운동이다. 사상적으로는 불교에게, 정치적으로는 여진(女眞)의 금나라에 위협을 받던 시기인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에 의해서 다른 학문과 사상에 대한 배타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데 성공한 성리학의 척사이념은 이후 중국과 조선 등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을 지키는 과정 속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조선의 경우에는 천주교 신앙이 문제시되었던 정조·순조대에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서양세력과 일본에 대한 정치·사상적 반대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내용 및 변천

중국의 성인인 공자와 맹자의 학문·사상적 전통 속에서 형성된 유교는 외래 사상인 불교의 고도로 발달된 형이상학적 체계를 오래도록 극복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여진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송나라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위기에 봉착하자 전통적인 성리학은 보다 배타적인 양상을 띠었다. 불교와 외세에 대한 총체적인 반대와 부정의 모습인 척사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주희가 주도한 새로운 이 흐름은 한족(漢族)의 정체성과 문화적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문제의식과 직결되어 있었고 정치적으로 강한 배타성과 주체성을 견지하는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후의 역사에서도 유교나 한족의 존재 및 가치에 대한 강한 도전이 발생했을 때는 척사의 움직임이 재현되고는 했다.

조선왕조에서 척사론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비판 대상이 된 것은 정조대의 천주교라고 볼 수 있다. 18세기 연행(燕行)의 과정에서 접하게 된 천주교를 학문적 관심이 아닌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양반지배층이 생겨나면서 이것을 체제 수호의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척사론이 등장하게 되었다(『정조실록』 15년 10월 16일). 특히 이 시기의 척사론은 천주교도들과 가까웠던 근기 남인들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의미도 함께 내재되어 있었다(『정조실록』 15년 10월 25일).

보다 본격적인 척사론은 개항을 전후한 시기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입이 노골화되면서 등장하였다. 1866년 기정진(奇正鎭), 이항로(李恒老) 등이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그들과의 통상에 반대하면서 시작된 척사의 움직임은 강화도 조약 이후 그 대상이 일본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가장 격렬했던 척사의 움직임은 1881년의 이른바 ‘신사척사론’에서 드러났다.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책략』을 보급하며 국가의 개화정책을 강조하자 경상도 유생들은 이만손(李晩孫)을 소두(疏頭), 곧 대표 발의자로 하여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려 김홍집을 탄핵하면서 일본과의 통상을 절대 반대하고 천주교에 대한 강한 배격의 의지를 드러냈던 것이다. 심지어 이항로의 제자인 홍재학 같은 인물이 고종 친정 이후의 실정을 비판하다가 참형을 당하는 정도로까지 격화되었다. 이후로도 개화파 정부와 외세에 대한 반대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는데 1894~1895년 갑오·을미개혁을 계기로 군주의 결단에 호소하고 정부에 건의하는 상소운동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일부는 의병운동이라는 무력적 차원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참고문헌

  • 박성순, 『조선후기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 경인문화사, 2003.
  • 정재식, 『한국유교와 서구문명의 충돌』,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 홍순창, 『한말의 민족사상: 위정척사사상을 중심으로』, 탐구당, 1975.
  • 노대환,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노론 척사론의 전개」, 『조선시대사학보』46, 2008.
  • 박지훈, 「송대 화이론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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