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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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1만 명 내외의 영남 유생들이 연명해 올린 집단적인 소(疏).

개설

1만여 명에 달하는 영남의 유생(儒生)들이 함께 상소하는 형식인 만인소는 몇 차례 있었다. 그 중 잘 알려진 것은 두 차례이다.

① 최초의 영남만인소는 정조 후반기인 1792년에 올렸는데 그 내용은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모함의 사실 관계를 따져 의리를 밝히자는 내용이었다. 정조의 특별한 비답을 받았던 이 만인소는 당시 정국의 미묘한 문제를 직접 다룬 것으로서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영남 남인들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② 잘 알려진 두 번째 영남만인소는 개항 뒤 조정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이만손(李晩孫)을 대표 발의자[疏頭]로 해서 1881년에 올린 만인소이다. 이 상소는 『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부당함과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신을 강하게 천명하지 않는 국왕과 조정의 모습에 대한 불만을 그 주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

① 정조가 재위 12년이 되던 1788년에 남인인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으로 임명하면서 탕평의 규모를 확대하자 노론과 소론에서는 대단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채제공 계열을 정치적으로 심하게 공격하였다. 마침 1791년 천주교 신자로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며 위패를 불태운 진산사건이 발생하여 채제공 계열의 남인들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정조의 비호로 커다란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입지가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②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을 통해서 개항을 하게 된 조선은 이른바 개화 정책으로 이해되는 일련의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면서 이전 대원군 정권의 정국 운영 기조와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그 와중인 1880년 수신사(修信使)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홍집은 주일 청국 외교관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서 국내에 유포시켰는데 이 책의 내용이 보수적인 유생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발단

① 이런 속에서 정조는 사학(邪學)에 관련되었다는 채제공 계열의 약점을 상쇄하기 위해 영남만이 사학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남인들의 순정함을 부각시켰고 동시에 도산서원에서 영남인들만을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직후에 영남의 유생들 1만여 명이 이우(李㙖)를 대표 발의자로 해서 1792년 윤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서 사도세자에 대한 모함을 변석하고 의리를 밝히기를 청하는 만인소를 올렸다(『정조실록』 16년 윤4월 27일) (『정조실록』 16년 5월 7일).

②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서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며,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을 주장하면서 서학(西學)을 배우고 상공업을 장려할 것을 건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전통적인 유생들에게는 정학(正學), 즉 성리학을 버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상도 유생으로서 이황(李滉)의 후손인 이만손과 그의 견해에 동조하는 전 참판강진규(姜晉奎)·이만운(李晩運), 전 승지이만유(李晩由) 등 경상도 유생들 1만여 명이 공동으로 서명하여 1881년 2월 고종에게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경과

① 다소 갑작스런 영남 유생들의 임오의리, 즉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문제 제기는 진산사건으로 심화된 채제공 계열의 정치적인 고립을 정국 전환을 통해서 타개하려는 정조와 채제공의 정치적 의도가 내재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실제로 당시 채제공과 영남 남인들은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남인들은 자신들을 등용하고자 하는 정조의 조치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화답을 한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만인소의 대표 발의자인 이우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을 직접 만나서 특별한 비답을 내려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정조실록』 16년 5월 7일). 이 만인소를 통해서 채제공 계열의 학문적인 비순정성에 대한 논란은 사그라졌고 오히려 임오의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적 갈등이 대두하면서 자연스럽게 채제공 계열은 정치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② 영남의 유생들은 이 상소에서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적대국이 아닌데 먼 나라에 의지해 가까운 나라를 물리치는 방책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침략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고, 특히 러시아나 미국·일본은 모두 오랑캐여서 관계에 차이를 둘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학의 가르침을 더욱 선양하여 민심을 보루로 삼고 사악한 무리의 침투를 막아야 한다면서 위정척사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 상소로 말미암아 이만손과 강진규는 유배되었으나, 척사 운동은 날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같은 해 4월의 홍시중(洪時中)·황재현(黃載顯)의 상소를 비롯하여, 6월에는 경상도 유생 김진순(金鎭淳), 경기도 유생 유기영(柳冀永), 충청도 유생 한홍렬(韓洪烈) 등의 상소가 잇달았다. 이 중에서 이항로(李恒老)의 제자인 홍재학(洪在鶴)의 상소가 가장 과격하였는데, 그는 이유원(李裕元), 김홍집에 대한 규탄에서 그치지 않고 국왕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여 결국 참형을 당하였다. 요컨대 영남만인소는 전국적인 위정척사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오영섭,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1999.
  •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편, 『만 사람의 뜻은 천하의 뜻- 만인소』, 한국국학진흥원, 2007.
  • 김문식, 「18세기 후반 영남남인의 동향과 정조의 조치」『朝鮮의 政治와 社會』
  • 『(崔承熙敎授停年紀念論文集)』, 2002.
  • 허태용, 「정조대 후반 탕평정국와 진산사건의 성격」, 『민족문화』 3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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