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주서(假注書)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왕명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편성되어 주서(注書)가 맡은 일을 수행한 정7품 임시 관직.

[[파일:P00000001.PNG|300px유형="사진"/>

개설

주서가 사고로 결근하게 되면 임시로 1명을 임명하여, 주서가 수행한 기능과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주로 비변사와 국옥(鞫獄)에 관계된 사무를 전담하였다. 그런데 주서는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으나 가주서(假注書)는 겸할 수 없었으므로, 가주서가 기록한 것은 주서에게 주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가주서의 임무가 주서와 달랐으나, 조선후기에는 가주서가 주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파일:P00000002.PNG|300px유형="사진"/>

담당 직무

가주서는 승정원의 정7품 관직인 주서가 유고할 경우 임시로 차출, 임명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주서의 주요 임무였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기록, 정리하는 일을 대신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주서와 함께 조보(朝報)의 발행에도 참여하였고, 이 밖에도 추국 등의 기록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파일:P00000004.PNG|300px유형="사진"/>

가주서는 춘추관의 관직을 겸임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기록하는 것은 주서와 다르지 않았으며(『중종실록』 4년 3월 13일), 1515년(중종 10)에는 가주서에게 겸춘추직을 허용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1520년(중종 15)에는 가주서는 주서의 일을 대신 수행하였지만, 춘추관의 관직을 겸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직무를 수행하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니 이를 허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중종실록』 15년 7월 19일). 그리고 그 결과 선조대에는 가주서가 사초(史草)의 작성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중기 이후에는 가주서의 임무가 주서의 임무와 거의 동일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광해군 때는 가주서가 주서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광해군일기』 6년 7월 27일), 현종 때는 『승정원일기』를 편수하지 않을 경우 주서와 가주서 모두 6품 승진과 외직 임명을 허락하지 않았다(『현종실록』 15년 1월 4일). 이로 미루어, 조선후기에는 가주서의 임무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파일:P00000003.PNG|300px유형="사진"/>

변천

‘가주서’라는 명칭은 1480년(성종 11)에 가주서이두(李杜)가 계를 올렸다는 기사(『성종실록』 11년 5월 28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가주서를 운영하였음을 보여준다.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을 때는 가주서를 임명하여 사건의 전후 사실을 기록하도록 하였고, 1545년(인종 1)에는 주서 2명이 병으로 출사(出仕)하지 않자 가주서를 임명하였다.

이후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 관련 사실을 기록하기 위하여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를 두었다. 사변가주서는 이후 『속대전』에서 정식 직제로 규정되었는데, 가주서 가운데 일부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정식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변가주서의 임무는 전관군무·칙사·국안(鞫案) 등의 문서를 전담하여 기록하는 것이었고, 주서에 결원이 있을 경우 그 임무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선조 연간에는 가주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입시(入侍)하였는데, 이는 가주서가 구체적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가주서는 이외에도 상가주서(上假注書)·남항가주서(南行假注書)·수가가주서(隨駕假注書) 등 다양한 명칭이 나타났다.

한편 1596년(선조 29) 11월에는 왕이 별전(別殿)에서 인견(引見)할 때, 우승지기자헌(奇自獻)과 주서조즙(趙濈), 사변가주서최동식(崔東式) 및 검열 등이 입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title="영돈녕 이산해·영의정 유성룡 등과 군량·무기·수성책 등에 대해 의논하다 『선조실록』 29년 11월 26일). 주서와 사변가주서가 동시에 입시하였으므로, 선조 이후에는 주서와 사변가주서가 각각 설치되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서 2명만으로는 대소사를 모두 기록하기 어려워지자 사변가주서를 별도로 둔 것이다.

1624년(인조 2)에는 승정원에서, 1592년의 전례에 따라 가주서 1명을 선발하여 주서를 역임한 사람의 집에 보관된 초기축(草記軸)이나 초책(草冊)을 수정하도록 할 것을 건의했다는 기사(『인조실록』 2년 4월 11일)나, 1638년(인조 16) 6월 13일분과 같은 해 7월 23일부터 9월 17일까지의 시정(時政)을 기록한 ‘인조무인년사초’에서도 가주서의 실례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은대조례(銀臺條例)』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시대사초』, 국사편찬위원회, 1995.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연구』, 국학자료원, 1998.
  • 강성득, 「17~18세기 승정원 주서직의 인사실태」, 『한국 역사상 관료제 운영시스템에 관한 연구』, 국민대출판부, 2010.
  • 변태섭, 「고려의 중추원」, 『진단학보』 41, 1984.
  • 신석호, 「승정원일기」, 『한국의 명저』, 현암사, 1982.
  • 전해종, 「승정원고」, 『진단학보』 25·26·27, 196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