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黃嗣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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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75(영조 51)~1801(순조 1) = 27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 신자. 자는 덕소(德紹)이고, 호는 비원(斐園)이며, 세례명은 알렉시오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지낸 황석범(黃錫範)이며, 어머니 평창 이씨(平昌李氏)이윤혜(李允惠)는 진사(進士)이동운(李東運)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황재정(黃在正)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공조 판서(判書)를 지낸 황준(黃晙)이다. <신유박해(辛酉迫害)> 당시 북경 주교(主敎)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작성했다.

영조~순조 시대 활동

황사영(黃嗣永)은 1775년(영조 51) 서울 아현에서 태어났고, 시복(時福)이라고 불렸다. 아버지 황석범은 1771년(영조 47)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역임했으나 1775년에 29세로 요절하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황사영은 어머니와 증조할아버지 황준의 슬하에서 성장하였고, 16세가 되던 1790년(정조 14) 8월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방목(榜目)』] 당시 황사영이 문필(文筆)에 뛰어난 것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눌암기략(訥菴記略)』],[『일성록』정조 14년 9월 12일]

황사영은 정약용(丁若鏞)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큰 딸 정명련(丁命連)과 결혼하였고, 1791년(정조 15)에 그의 처고모부인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교리서를 얻어 본 후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이후 황사영은 과거를 포기한 채, 정약종(丁若鍾)·홍낙민(洪樂敏) 등과 밤낮으로 교리를 연구했으며, 그해 10월 <신해박해(辛亥迫害)> 발생했을 때에는 배교한 많은 친척·친구들과는 달리, 천주교를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으로 확신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1794년(정조 18) 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황사영은 최인길(崔仁吉)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聖事)를 받은 뒤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최창현(崔昌顯), 정약종, 강완숙(姜完淑), 최필제(崔必悌) 등 지도급 신자들과 교류하는 한편, 이국승(李國昇), 홍재영(洪榟榮), 손경욱(孫敬郁), 제관득(諸寬得) 등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뿐만 아니라 교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신심 서적을 필사하는 일을 하였으며,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명도회는 교리 연구와 전교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는데, 황사영은 자신의 집을 그 하부 조직인 6회(六會)의 한 장소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자주 모셔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황사영은 신자들에게 ‘성학고명’(聖學高明)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정조가 사망하면서 순조(純祖)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노론 벽파(辟派)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섭정(攝政)이 되어 정사를 보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시파(時派) 사람들을 몰아내는 한편, 1801년(순조 1) 1월 10일에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령을 내려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했다.(『순조실록』 1년 1월 10일) 황사영은 2월 10일에 자신에 대한 체포령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여러 교우집을 전전하다가 이씨(李氏)로 성을 바꾸고 상복으로 변장한 다음, 김한빈(金漢彬)과 함께 제천 배론에 있는 김귀동(金貴同)의 집으로 내려갔다. 제천에 도착한 황사영은 김한빈과 김귀동이 판 토굴에서 생활하며 김세귀(金世貴)·김세봉(金世奉) 형제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그해 3월에는 김한빈을 서울로 보내 박해의 진행 과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일상을 ‘일록’(日錄)에 기록하였다.

4월 초 배론으로 돌아온 김한빈은 지도층 신자들의 죽음과 주문모 신부의 자수 소식을 알렸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황사영은 어떻게 하면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가운데, 유명한 『백서(帛書)』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황사영은 8월 26일 배론을 찾아온 황심(黃沁)에게『백서』의 초고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황심과 의논하여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백서』를 전달하기로 결정하고, 9월 말 이전에 황심이 다시 와서『백서』를 가져가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황사영은 황심이 전한 새로운 소식들을 보충한 뒤 9월 22일『백서』를 완성하였다.

『백서』는 옥천희(玉千禧)에게 전해져 10월에 있을 동지사행(冬至使行) 때 북경에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옥천희는 그해 6월 북경에서 돌아오다 의주에서 체포된 상태였고, 9월 15일에는 황심마저 체포되었다. 그리고 황심은 황사영으로 인해 옥사가 더욱 커져서 많은 교우들이 희생될 것을 염려하여 황사영의 은거지를 자백하였다. 그 결과 황사영은 9월 29일에 김한빈과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었고『백서』도 발각되었다. 황사영은 의금부로 압송된 후 10월 9일부터 여러 차례 신문을 받았다. 신문 중에 그는 천주교를 정도(正道)라고 생각했고, 또 천주교는 나라와 백성에 무해하기 때문에 나라 안에서 널리 행하려 했다고 진술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가 쓴『백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추궁되었다.

황사영이 작성한『백서』에는 신유박해의 진행 상황과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 그리고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을 위한 방안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를 위한 방안 중에는 서양의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 정부를 위협함으로써 천주교의 공인을 꾀하려던 내용도 있었다. 즉 수백 척의 배에 군사 5~6만 명과 대포 등 병기를 싣고 와서 조선 정부와 선교 문제를 교섭하라는 것이었다.(『순조실록』 1년 10월 5일) 이러한 내용은 당시 조정으로부터 흉언(兇言)으로 지탄받았고, 그 결과 황사영은 1801년(순조 1) 11월 5일에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의 판결을 받아 27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되었다.(『순조실록』 1년 11월 5일)

한편 『백서』의 내용은 오늘날에도 반민족적인 행위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박해로 동료 신자들이 죽어가던 상황이라는 점, 황사영이 제시한 방안이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는 점, 외세를 불러들이려 했던 방안에 대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점, 그러한 방안을 제시한 의도가 백성과 나라를 이롭게 하려는 선의(善意)에서 나왔다는 점들도 황사영을 평가하는데 고려될 필요가 있다.

묘소와 후손

황사영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거두어져 선산이 있던 가마골(경기도 남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매장되었다.

황사영은 부인 정명련과의 사이에서 1남 황경헌(黃景憲)을 두었다. 황사영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가산은 적몰되었고, 숙부 황석필(黃錫弼)은 함경도 경흥으로 정배(定配)되었다. 그리고 황사영의 죄에 연좌되어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부의 비(婢), 부인 정명련은 제주 대정현의 비(婢), 두 살짜리 아들 황경헌은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奴)가 되었다.[『일성록』순조 1년 11월 7일]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사학징의(邪學懲義)』
  • 『눌암기략(訥菴記略)』
  • 『황사영 백서(帛書)』
  •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상, 분도출판사,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