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현(崔昌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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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9년(영조 35)~1801년(순조 1) = 43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요한, 호는 관천(冠泉)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최용운(崔龍雲)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서울의 중인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입정동(笠井洞)에서 살았으며, 1784년(정조 8) 조선에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최창현(崔昌顯)은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였는데, 이때 그가 번역한 책들이 『성경광익』, 『성경직해』, 『성경직해광익』 등이다. 이 책들은 당시 한문을 모르던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1791년(정조 15)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지한 것이 문제가 된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발하면서 조상 제사 폐지를 수용할 수 없었던 일부 지도층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창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조선 천주교회는 성직자 없이 설립되었으므로, 그는 동료들과 논의하여 성직자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 이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794년(정조 19) 말 중국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을 하였고, 최창현은 신자들을 대표하는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를 받았으며, 미사 때 필요한 물품들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였다. 또한 동료 신자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복음을 전하는데도 열중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의 발발과 함께 최창현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다른 신자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그해 1월 9일 병 때문에 자신의 집에 돌아왔는데 밀고자 김여삼(金汝三)이 데려온 포도대장에게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게 된 최창현은 처음에는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여러 차례 혹독한 신문을 받는 과정 속에서 다시 천주교 신앙을 지켰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2월 25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순조 1년 2월 25일]

그는 자신이 천주교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한 후 사형선고를 받고 1801년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순조실록』 1년 2월 26일)

성품과 일화

최창현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최창현은 조용하고 슬기롭고 견식이 넓고 마음이 용감하고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는 간결하고 자상하게 진리를 설명하였다. 그의 말은 꾸밈이 없었으나 모든 이가 그의 말을 만족스럽게 들어 그들 영혼에 큰 이익을 받았다. 겸손과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은 그에게는 천성과 같았으며, 그의 처신에 별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교우들에게서 그보다 더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학징의(邪學懲義)』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1, 2007.
  • 방상근, 「최창현의 삶과 신앙」, 『교회사학』1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