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완숙(姜完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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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61년(영조 37)~1801년(순조 1) = 41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 신자이자,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골롬바. 거주지는 충청도 덕산과 서울이다. 남편은 홍지영(洪芝榮)이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성 회장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충청도 내포 지역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난 강완숙(姜完淑)은 장성한 후 충청도 덕산에 살던 홍지영(洪芝榮)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완숙은 천주교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는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敎)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또한 본인 홀로 천주교 신앙을 믿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 이웃사람들에게까지도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펼쳤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주다가 자신 또한 며칠간 체포되기도 하였다.[『사학징의』],[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이 일이 있은 후 그의 남편 홍지영은 자신에게까지 후환이 미칠까 두려워 헤어져 살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자신의 딸 홍순희, 그리고 전처의 아들인 홍필주(洪弼周)를 데리고 서울로 이주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강완숙은 여러 교우들과 만나면서 전교에 힘쓰는 한편 지황(池璜)·윤유일(尹有一) 등이 중국인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입국시키는 과정에서 경제적인 구실을 담당하였다. 1794년(정조 18) 12월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인 1795년(정조 19) 여름 입국이 발각되어 체포령이 떨어지자 강완숙의 집에 숨어 지내기도 하였다. 이 해에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최초의 여회장으로 임명되어 여자들에 대한 전교를 전담하는 동시에 교회 일을 맡아 보았다.

한편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집은 관헌이 함부로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의 관습 덕분에 강완숙의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나 피신처로 자주 이용이 되었다. 강완숙은 지식과 재치 있는 말재주를 겸비하여 주변의 많은 부녀자들을 입교시켰는데, 그 가운데에는 지체 높은 양반집 부녀자들도 많았다. 특히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던 은언군(恩彦君)의 부인인 상산군부인(常山郡夫人)과 그의 며느리 평산 신씨(平山申씨)신오(申◎王+奧)도 강완숙의 전교활동으로 입교하였다. 이들 외에도 많은 과부·머슴·하녀 등도 그를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사학징의』],[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그러던 중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발발하게 되었고, 강완숙은 그해 2월 24일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관원들은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강완숙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3개월 간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신앙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있는 동료들을 권면하였다. 결국 강완숙은 사형선고를 받아 그해 5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다.(『순조실록』 1년 5월 22일)

성품과 일화

강완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강완숙이 체포된 후 포도청에서 6차례의 혹독한 형벌을 받았음에도 아무런 자백을 받지 못하자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닌 신이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또한 사형선고가 내려진 후 그녀는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1, 2006.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