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신(權日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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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42년(영조 18)~1791년(정조 15) = 50세]. 조선 후기 남인(南人)계 학자이자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 한 사람. 자는 성오(省吾)이고, 호는 이암(移菴)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경기도 양근이고,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권암(權巖)이고, 어머니는 풍산 홍씨(豊山洪氏)이다. 할아버지는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지낸 권적(權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권흠(權欽)이다.

정조 시대 활동

조선 후기 남인계 학맥을 잇던 그의 집안은 1694년(숙종 20) 증조할아버지인 권흠이 양근으로 낙향한 후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는데, 남인 가문과의 통혼관계를 유지하며 꾸준하게 가학을 이어갔다. 권일신(權日身)은 성장한 후 형 권철신(權哲身)과 함께 이익(李瀷)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안정복(安鼎福)의 문인으로 들어가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는 자신의 형인 권철신을 비롯하여 이벽·이승훈(李承薰)·정약용(丁若鏞) 등과 교우하며 양명학과 서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784년(정조 8)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그는 이벽의 권유를 받아들여 천주교 서적을 본격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하였으며, 그해 9월 서울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李存昌), 전라도 전주의 유항검(柳恒儉)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1785년(정조 9)에는 명례방(明禮坊 : 현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이승훈·이벽 등과 함께 천주교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사령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권일신을 비롯한 양반 자제들을 모두 석방되고 집주인이던 중인 김범우만이 투옥되자, 권일신은 이윤하(李潤夏)·이총억(李寵億)·정섭(鄭涉) 등과 함께 형조에 들어가 압수한 성상(聖像)을 돌려주고 자신들도 김범우와 함께 처벌해달라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정조실록』 15년 11월 5일),(『정조실록』 15년 11월 8일),[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 이 사건으로 김범우는 유배에 처해지고 몇몇 주요한 지도급 신자들은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에 권일신은 조동섬(趙東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로 들어가 8일간 머물며 마음을 다잡고 천주교 신앙을 더욱 두텁게 하였다.

이후 조선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누그러지고 배교했던 이들도 다시 돌아오자, 권일신은 이승훈·이존창·유항검·최창현(崔昌顯) 등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더 널리 전파하고 견고한 교회 조직을 만들고자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다. 그는 스스로 신부가 되어 성사를 집전하며 2년 여간 이 제도를 유지하였는데, 유항검이 교회서적을 읽던 중 이것이 천주교회에서 금기시하는 독성죄(瀆聖罪)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즉시 활동을 중지하였다. 이후 중국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문의한 결과 이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다시 평신도로 돌아가 신앙을 전파하는데 더 힘썼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사학징의(邪學懲義)』]

그러던 가운데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의 제사를 거부하면서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발하게 되었다. 이때 공서파(攻西派)인 목만중(睦萬中)·목인규(睦仁圭) 등이 통문을 돌려 권일신을 천주교 교주(敎主)로 지목하였고, 홍낙안(洪樂安)이 이를 고발하면서 권일신은 그해 11월 3일 체포되었다.(『정조실록』 15년 11월 3일),(『정조실록』 15년 11월 5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정조 15년 11월 3일, 5일] 권일신은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혹독한 신문을 받으면서도 배교를 하지 않고 천주교 신앙을 지켰는데, 결국 그해 11월 8일 제주도 위리안치형에 처해지면서 한 달에 2번씩 제주목사(濟州牧使)에게 점고를 받을 때에 천주교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행적을 보이는 것 또한 선고 받았다.(『정조실록』 15년 11월 8일),(『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당시 권일신이 사형을 받지 않은 것은 남인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정조의 덕택이었는데, 정조는 그를 제주도로 유배 보내기 전 10일 간의 말미를 주어 어머니 풍산 홍씨를 만나게 하여 그를 회유시키고자 하였다. 실제 권일신은 이 때 80세의 노모를 만난 후 마음이 흔들려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칭하였고 그 결과 유배지가 제주도에서 예산(禮山)으로 변경되었다.(『정조실록』 15년 11월 16일),[『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15 「녹암권철신묘지명(鹿菴權哲身墓誌銘)」] 그러나 예산으로 가던 중 그동안의 형벌로 생긴 상처가 깊어져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한편 그는 족보에 사학 때문에 때려 죽였다는 의미의 ‘이사학장폐(以邪學杖斃)’가 기록된 것이 발견되어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성품과 일화

권일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1791년(정조 15) 체포된 그는 형조에 넘겨진 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하였고 관원들은 그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특별한 형벌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하여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에게 대한 제 의무를 하지 않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전한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학징의(邪學懲義)』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
  • 『평화신문』1276호, 2014년 8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