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신씨(廢妃愼氏)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72년(성종3) ~ 1537년(중종 32) = 66세]. 조선조 전기 연산군의 왕비. 연산군이 폐위되었으므로, 왕후의 칭호가 없고, 중종 때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되었다.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영의정신승선(愼承善)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세종(世宗)의 넷째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의 딸이다. 좌의정신수근(慎守勤)의 누이 동생이고, 중종의 잠저(潛邸) 때 부인 신씨(慎氏: 단경왕후)의 고모이다.

성종 말년 세자빈 신씨의 행복한 시절

1487년(성종 18) 3월 세자빈(世子嬪)을 간택할 때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모든 사대부(士大夫)의 집안 규수(閨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기로운 처녀를 뽑았는데, 성종이 승정원에 말하기를, “병조 판서신승선의 딸로 세자빈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성종실록9成宗實錄)』 성종 18년 3월 1일) 성종과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가 병조 판서신승선의 딸을 세자빈으로 최종 낙점(落點)한 이면에는, 신씨(慎氏)가 임영대군의 외손녀로서 이씨 왕가의 혈통이라는 것에 대한 고려뿐만 아니라, 신승선이 일찍이 세자 빈객(世子賓客)으로서 시강원(侍講院)에서 연산군을 7세부터 10세까지 2년 반 동안 가르쳤는데, 세자 연산군이 누구보다 신승선을 좋아하고 따랐던 까닭도 있다. 두 사람이 혼인할 때 신씨(慎氏)는 16세였고, 연산군은 12세였다. 나중에 두 사람이 몰락한 뒤에 만들어진 묘지명(墓誌銘)에서는 신씨(慎氏)가 연산군과 나이가 동갑이라고 기록하였으나,[「거창군부인 신씨 묘지명(居昌郡夫人愼氏墓誌銘)」] 신씨가 연산군보다 나이가 많은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생모가 없이 자란 연산군은 부인 신씨(慎氏)에게 어머니의 정을 느끼고 어려운 위기가 닥칠 때마다 부인의 치마꼬리를 잡고 자기의 방패막이가 되어달라고 간청한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1488년(성종 19) 2월 6일 연산군이 가례(嘉禮)를 치루고 세자빈 신씨를 맞이하였다. 그날 아침부터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며 비바람이 세차게 일었으므로, 모두 불길(不吉)하다고 생각하였다. 성종은 편지를 써서 세자빈의 아버지 좌참찬(左參贊)신승선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사돈 신승선을 안심시키기를, “세상의 풍속은 혼인날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대개 바람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하므로, 만물이 살아가는 것은 모두 바람과 비의 덕택이다.” 하였다. 혼례식이 끝나자, 점심때부터 날씨가 개어 청명하였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권6] 그러나 사람들은 신랑과 신부 두 사람의 앞날이 비바람을 맞아서 불행해질 전조(前兆)라고 수군거렸다.

혼례를 치루고 세자궁(世子宮)에 들어갔던 세자빈 신씨(慎氏)가 세자 연산군과 함께 친정집으로 돌아가서 친정아버지 신승선과 어머니 전주 이씨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성대한 의식을 치르게 되었다. 이것을 회문례(回門禮)라고 부른다. 그때 성종이 좌참찬신승선을 불러서 코뿔소로 만든 관대인 서대(犀帶) 한 벌을 내려주면서, “세자가 회문례를 행할 때, 경이 이것을 허리에 띠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성종은 신승선의 검소한 생활을 알고 서대를 하사하였던 것이다. 성종은 신승선보다 나이가 19세나 아래였으나, 성종은 어려서부터 임금이 되어서 나이 많은 대신들을 잘 어거하고 어루만졌다. 그러므로 성종 시대 훌륭한 인재를 많이 길러냈으나, 연산군이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켜서 그들을 남김없이 모두 없애버렸다.

1494년(성종 25) 2월 신승선은 종1품상 숭록대부(崇綠大夫)로 승품되고, 그해 11월 마침내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綠大夫)로 승품되어,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세자빈 신씨는 아버지가 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또 궁중에서도 시할머니 인수대비한씨(韓氏)와 시어머니 정현왕후(貞顯王后)윤씨(尹氏)를 정성껏 섬겨서 사랑을 받았다. 인수대비한씨는 성종의 어머니로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 제헌왕후)를 왕비에서 폐위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나 세자빈 신씨는 폐비(廢妃)윤씨(尹氏)처럼 투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매우 착하고 유순하였으므로 인수대비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정현왕후윤씨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쫓겨난 다음에 성종의 계비(繼妃)가 되어, 어린 연산군을 거두어 길렀고, 또 진성대군(晉城大君)을 낳았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정현왕후는 자순대비(慈順大妃)로서 반정군을 이끌던 박원종(朴元宗)에게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자기 아들 진성대군을 추대하라고 명령하여, 중종을 즉위시켰다.

성종도 세자빈 신씨가 난폭한 세자 연산군을 잘 다독거려서 감싸주는 것을 대견하게 여겨서, 신승선을 우의정으로 승진시켜 연산군을 계도(啓導)하고 보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성종 말년 6년 동안 세자빈 신씨는 시아버지 성종의 보살핌을 받고, 시어머니 정현왕후와 시할머니 인수대비의 사랑을 받으면서 궁중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다만 1494년(성종 25) 2월 첫아들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한 달이 지나서 그해 3월에 그 아들이 죽었다. 그때 신씨는 22세였고, 연산군은 18세였다. 1494년(성종 25) 12월 25일 성종이 오랫동안 앓던 종기가 악화되어 갑자기 승하하였는데, 향년이 겨우 39세였다.

연산군 시대 왕비 신씨의 괴로운 생활

1494년 12월 연산군이 왕위에 즉위하였는데, 그때 연산군은 19세였고, 왕비 신씨는 23세였다. 왕비 신씨는 지혜가 있어서 궁중의 내명부(內命婦)를 훌륭하게 통솔하고, 부덕(婦德)이 있어서 연산군이 총애하는 궁녀들을 항상 감싸주었다. 그러므로 연산군은 왕비의 착한 마음에 감동하여 왕비 신씨에게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였다. 아마도 왕비 신씨는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언행(言行)을 조심하였던 것 같다. 또 아버지 신승선이 왕비 신씨에게 거듭 당부하기를, “보고도 못본 체하고, 들어도 못들은 체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왕비 신씨는 연산군의 음란한 행동과 광폭한 행동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분노와 슬픔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은 친정 부모와 오빠 3형제였다. 그러므로 오빠 신수근과 신수영(愼守英)이 광해군 때 유희분(柳希奮)처럼 외척(外戚)이 발호(跋扈)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연산군의 총애(寵愛)를 가장 많이 받은 궁녀는 숙원(淑媛) 전전비(田田非)와 소용(昭容) 장녹수(張綠水)였다. 연산군은 두 후궁에게 빠져서 그녀들이 하는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고, 그녀들이 하려는 것을 해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장녹수는 가비(家婢) 출신으로 온갖 교태를 부리고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아 1남 1녀를 낳았는데, 그 권세와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숙원(田淑媛)과 장소용(張昭容)은 옥사(獄事)를 농간하고 벼슬을 팔고 남의 재물 · 노비 · 집을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자기들 뜻에 거슬리면 아무리 높은 종친이나 사대부 집안이더라도 연산군에게 고자질하여 반드시 보복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12년 9월 2일) 이때 숙원전(淑媛殿) · 소용전(昭容殿)의 종들이 사방에서 재물을 편취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강탈하였으나, 공사간에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이를 보고 격분한 왕비 신씨는 탄식하기를, “여러 궁인들이 나라의 정치를 이처럼 어지럽게 하다니…” 하고, 내수사(內需司)에 경계하고 단속하기를, “만일 본궁의 노자(奴子)들 가운데 횡포를 부리는 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내가 먼저 그를 곤장을 때려서 죽일 것이다.” 하니, 노자들은 감히 횡포를 부리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왕비 신씨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숙원 전전비와 소용 장녹수의 횡포를 다소나마 막을 수 있었다.[『연려실기술』 권6]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전전비 · 장녹수 · 기녀 백견(白犬) 등은 저자 네 거리에서 처형당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서,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인 김굉필(金宏弼) 등 사림파(士林派)가 숙청되었다. 훈구파(勳舊派) 유자광(柳子光) · 이극돈(李克墩) 등이 신진 사류(士類)를 타도하는 데에 우직한 연산군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金馹孫) · 권오복(權五福) · 권경유(權景裕)을 능지처참(陵遲處斬)하고, 이목(李穆) · 허반(許磐)을 참형(斬刑)에 처하고, 강겸(姜謙) · 표연말(表沿沫) · 홍한(洪瀚) · 정여창(鄭汝昌)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그때 연산군은 불과 23세의 나이로 정치적 판단력이 없었는데, 옥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는 것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연산군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주색잡기(酒色雜技)에만 마음을 쏟았다. 연산군은 ‘채홍준사(採紅駿使)’를 전국 8도에 보내어 미인(美人)과 준마(駿馬)를 가려 뽑아서 궁중의 궁녀와 내구마(內廐馬)로 만들었다. 양가(良家)의 딸은 물론 공천(公賤) · 사천(私賤)의 여자를 가리지 않고 미인을 뽑아서 그 숫자가 1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거처할 집을 짓고, 7원(院)과 3각(閣)을 설치하여, 운평(運平) · 계평(繼平) · 채홍(採紅) · 속홍(續紅) 등의 명칭을 붙였다. 또 ‘채청녀사(採靑女使)’를 보내어 노래와 춤을 잘하는 미녀(美女)들을 따로 뽑아서 흥청(興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는 세 과(科)가 있었는데, 왕과 사랑을 아직 나누지 못한 미녀는 ‘지과(地科)’라 하고, 사랑을 이미 나눈 미녀는 ‘천과(天科)’라 하며, 사랑을 나누었으나 아직 흡족하지 못한 미녀는 ‘반천과(半天科)라 하였다. 그중에서 왕과 사랑을 가장 많이 나눈 미녀들은 숙화(淑華) · 여원(麗媛) · 한아(閑娥)라고 불렀는데, 그 기세가 전숙원(田淑媛)이나 장소용(張昭容)과 맞먹는 자들도 많았다. 연산군은 그들 속에서 사랑에 빠져서 밤낮으로 지냈으며, 가끔 흥청 등을 거느리고 사냥하는 금표(禁標) 안에서 말을 달리면서 사냥을 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면서 가무(歌舞)를 즐기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12년 9월 2일) 또 사방의 준마(駿馬)와 매와 개[鷹犬]를 각각 1천 마리씩 궁중에 모아서 이를 관리하는 특별 관청과 관원을 두었다. 연산군은 사냥할 때마다 좋은 말을 골라서 타고 매를 어깨에 메고 사냥개를 앞세워서 유렵(遊獵)을 즐겼다. 연산군은 정치에서 멀어지면서부터 국가의 관청과 관리를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주색잡기를 시행하였는데, 연산군은 사람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였다.

연산군은 성질이 광폭(狂暴)하고 조급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달려서 동쪽에 있다가 서쪽에 있고, 서쪽에 있다가 동쪽에 있고 하였으므로, 비록 가까이 모시는 나인이라도 왕이 어디 가서 있는지 행방을 알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연산군은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효도한다고 하면서 날마다 대비전(大妃殿)에서 궁중 연회[內宴]를 베풀었는데, 때로는 한 밤중에 달려가서 연회를 베풀기도 하여 자순대비와 인수대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또 어머니와 할머니를 위로한다고 하면서 때로는 시종들과 함께 두 대비를 모시고 지세가 험한 명산(名山) 대천(大川)에 놀이를 나가기도 하였는데, 두 대비는 이를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포악한 성질을 두려워하여 두 대비도 감히 그 호의를 뿌리치지 못하였다. 언제나 내연(內宴)을 베풀 때에는 반드시 종친과 재상의 부인들은 물론 사대부 관료들의 아내들까지 불러들여 궁중 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궁중에서 연달아 연회를 베풀었으므로, 며칠씩 붙잡혀서 나오지 못하는 여자들이 있어서 연산군과 추문(醜聞)이 파다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12년 9월 2일) 『소문쇄록(謏聞瑣錄)』을 보면, “연산군의 황음(荒淫)하고 패륜(悖倫)한 짓이 날로 심해지자, 왕비 신씨가 바른 말로 간하다가 여러 번 연산군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능욕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착하고 유순한 왕비 신씨도 도저히 참지 못하여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온갖 수모를 당하였던 것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와 왕비 신씨의 만류

1482년(성종 13) 8월 폐비 윤씨가 사약을 마시고 비명에 죽은 뒤에 그 아들 연산군은 어머니가 폐비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강희맹(姜希孟)의 집에서 자라면서,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그녀의 아버지 윤호를 외할아버지로 알았다. 1495년(연산군 1) 3월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읽어보다가 승정원에 묻기를, “이른바 봉상시(奉常寺)판사(判事)윤기무(尹起畝)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혹시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윤호(尹壕)를 윤기무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냐.” 하니, 승지들이 대답하기를, “이 분은 실지로 폐비 윤씨의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하였다. 이때 연산군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廢位)되어 죽은 줄을 알고, 하루 종일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 3월 16일) 이를 보면, 연산군은 나이 20세가 되기까지 폐비 윤씨가 비명에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왕비 신씨는 아버지 신승선을 통하여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연산군에게 일절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연산군의 포악한 성격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그 사실을 모르는 척 하였던 것 같다.

연산군은 생모 윤씨가 폐비된 사실을 모르고, 진성대군의 어머니 자순대비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3월 임사홍(任士洪)이 자신의 아들이자 성종의 부마인 임숭재(任崇載)를 통하여 연산군을 알현하고, “폐비는 엄숙의(嚴淑儀) · 정숙의(鄭淑儀) 두 사람이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에게 참소하여 사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고, 윤씨가 폐출(廢黜)당하여 사사(賜死)된 경위를 자세하게 아뢰었다. 몹시 흥분한 연산군은 엄숙의와 정숙의를 잡아와서 대궐의 안뜰에서 심문하고 직접 때려 죽였다. 또 두 숙의(淑儀)가 낳은 아들 안양군(安陽君)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이봉(李㦀)을 잡아서 섬으로 귀양 보냈다가 결국 죽였는데, 안양군은 구수영(具壽永)의 사위였다. 그때 연산군은 손에 긴 칼을 뽑아들고 자순대비의 침전으로 달려가서 밖에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빨리 뜰 아래로 나오시오.” 하자, 시녀들이 모두 놀라서 달아났고, 인수대비는 겁을 먹고 나오지 않았다. 마침 왕비 신씨(慎氏)가 연산군을 뒤쫓아 와서 연산군의 앞을 가로막고 칼을 뺐으면서 힘껏 만류하여 자순대비를 구원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12년 9월 2일) 연산군이 조금 진정되자, 인수대비가 병석에서 연산군을 불러서 꾸짖었다. 연산군이 대비전에 들어오자, 대비가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은 모두 부왕(父王)의 후궁들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니, 연산군이 할머니를 노려보다가, 자기 머리로써 대비의 몸을 들이 받았다. 이에 인수대비는 놀라서, “이 흉악한 놈이.” 하며 그 자리에 기절하여 쓰러져서 며칠 만에 절명하고 말았다.[『소문쇄록』]

1504년(연산군 10) 봄에 임금은 그 어머니가 비명에 죽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당시 논의에 참여하고 성종의 명령을 받들고 윤씨의 폐출과 사사를 수행한 신하들을 모두 대역죄로 추죄(追罪)하여 그 가까운 친족까지 연좌시켰다. 연산군은 윤필상(尹弼商) · 한치형(韓致亨) · 한명회(韓明澮) · 정창손(鄭昌孫) · 어세겸(魚世謙) · 심회(沈澮) · 이파(李坡) · 김승경(金升卿) · 이세좌(李世佐) · 권주(權柱) · 이극균(李克均) · 성준(成俊)을 ‘12간신(奸臣)’이라고 지목하여 어머니 윤씨를 폐출한 사건에 연좌시켜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당시 윤필상 · 이극균 · 이세좌 · 권주 · 성준의 5명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본인이 죽음을 당하였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므로 부관참시를 당하였는데, 그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내거나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또 그 자제들을 모두 죽이고 부인은 종으로 삼았으며, 그들이 살던 집을 헐어서 연못을 만들고 비(碑)를 세워 그 죄명을 기록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禍)를 당한 사람들이 1백여 명이 넘었는데, 지위가 높은 훈구파 대신들과 절의를 지키는 사림파 관료들 가운데 당대에 인재라고 할 만한 인물들은 죽음을 면한 자가 드물었다. 이때 죽음을 면한 성희안(成希顔)과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의 거사를 계획하고, 유순정(柳順汀) · 유자광 등을 동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6월 연산군은 왕비 신씨에게 왕후의 옥책(玉冊)을 내리도록 명하기를, “이제 중궁(中宮)의 어진 덕이 옛날보다 더욱 나아졌는데, 내가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부터 착한 덕이 진실로 가상하였다. 대저 사람이란 처음에는 잘하나 끝까지 잘하는 경우가 드문데, 한 나라의 국모(國母)로서 있은 지 지금 10여 년이 되었으나, 마음을 얌전하게 가져서 시종(始終) 한결같으니, 그 아름다움을 포양(褒揚)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아비 신승선에게 추은(推恩)하여, 밝게 포상하고 후세에 보여, 사대부 집안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본받게 하라.” 하였다. 김감(金勘)과 임사홍 등이 옥책문(玉冊文)을 지어서 왕비 신씨에게 왕후의 옥책을 바치고, 백관(百官)들이 전문(箋文)을 지어서 올리고 하례(賀禮)를 드렸다. 그해 8월 왕비의 아버지 신승선에게도 포장(褒奬)하는 은전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그해 9월 예조 참판안윤량(安允良)을 보내어 왕비의 아버지 신승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예절이나 제물이 마치 임금이 종묘(宗廟)에 제사지내는 것과 흡사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6월 7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8월 27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9월 7일)

그 뒤에 연산군의 음란한 행실과 잔혹한 행위를 비방하는 언문 벽보가 거리에 나붙였다. 연산군은 격분하여, “이것은 죄를 받은 자들의 친족들이 한 짓이다.” 하고, <갑자사화> 때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유배되었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장을 치고 참혹하게 고문하였다. 또 연산군은 온 나라에 방문을 붙여서 언문(諺文)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중종반정과 연산군 왕비 신씨의 몰락

연산군은 스스로 자신의 소행이 부도(不道)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산군은 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도, 인도(人道)를 혼란시켜 자기의 행위와 같게 만들려고 꾀하여, 사대부의 부모 상례 기간인 친상(親喪) 기간을 단축하고, 성균관을 기생놀이터로 만들고,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 형제들을 협박하여 그 첩을 서로 간통하게 하는 등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당시 연산군은 유교 사회를 완전히 뒤집어엎으려고 하였던 것 같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고 서울과 지방에서 모두 연산군을 원망하였다. 오직 임사홍과 구수영 등 간신배들이 연산군의 신임을 믿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하였으나, 당시 정승과 대신들은 못본 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연산군의 폭정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쿠테타를 일으키려고 모색하였다.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박원종이 전 이조 참판성희안과 손을 잡고 반정을 계획하였다. 그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에 유배된 이과(李顆)가 전라도 병사(兵使) · 수사(水使)와 손을 잡고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온다는 소문이 퍼졌다. 박원종은 거사를 앞당겨, 미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1506년(연산군 12) 9월 2일 <중종반정>을 일으켰는데, 반정의 기치를 올리자마자, 민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아서 마침내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연려실기술』 권6]

<중종반정>은 성희안이 계획을 세우고, 박원종이 이조 판서유순정을 포섭하여, 세 사람이 대장(大將)이 되었다. 9월 1일 밤에 군사를 훈련원(訓練院)에 집결시켜서, 한밤중에 창덕궁(昌德宮)을 포위하자, 궁중을 지키던 군사와 입직(入直)하던 관리들이 궁궐을 방어할 생각을 하지 않고 모두 성을 빠져나와 반정군에 합류하였다. 또 반정의 소식을 들은 서울의 군관민(軍官民)이 한밤중에 반정군의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박원종은 신윤무(辛允武)를 보내어 자객 이심(李*) 등을 거느리고 신수근 · 임사홍 · 신수영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먼저 철퇴로써 척살(擲殺)하도록 하였다. 왕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 3형제는 박원종의 포섭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또 박원종이 승지를 창덕궁 안으로 들여보내 옥새를 달라고 요구하자, 연산군은 겁에 질려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옥새를 내주었다. 그날 아침에 박원종 등은 경복궁(景福宮) 대비전으로 가서 자순대비의 명령을 받들어 그 아들 진성대군을 추대하니, 그가 바로 중종이다.

박원종 · 성희안 · 유순정 세 대장과 대신들이 모여서 연산군과 그 왕비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연산군은 죽이지 않고 강화도(江華島) 교동(喬洞)에 안치(安置)하고, 왕비 신씨는 성종의 후궁들이 기거하는 정청궁(貞淸宮)으로 내보내고, 세자와 왕자들은 각각 다른 곳으로 귀양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우의정김수동(金壽童)을 창덕궁으로 들여보내 연산군에게 평복 차림으로 강화도로 옮겨가도록 알리고,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연산군을 호위하게 하였다. 그때 왕비 신씨가 남편 연산군과 같이 가겠다고 울면서 하소연하였으나, 박원종 등은 왕비 신씨가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 대신에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이 시종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그날 새벽녁에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허리띠도 매지 않은 채 내전(內殿) 문으로 나와서 땅에 엎드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구려.” 하고,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선인문(宣仁門) · 돈의문(敦義門)을 거쳐 대궐을 빠져나갔으나, 연산군이 갓을 쓰고 머리를 숙여 사람들이 임금 행차인지 알지 못하였다. 연희궁(衍禧宮)에 하룻밤을 유숙하고, 김포(金浦)와 통진(通津)을 거쳐 강화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배를 타고 교동에 당도하였다. 왕비 신씨는 왕비에서 폐위되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되었는데, 날이 새기 전에 대궐의 내전에서 나와서 정청궁으로 옮겨갔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이들과 헤어질 때 너무나 경황이 없었던 신씨는 큰 비단 신발을 잘못 찾아 신어서 신발이 벗겨져서 걸어갈 수가 없었다. 나인이 비단 수건을 찢어서 신발을 동여매어 주어, 신씨는 겨우 걸을 수가 있었다. 유모가 세자와 대군을 모시고 우선 청파촌(靑坡村)의 무당 집으로 나가 있었는데, 해가 저물도록 아무 것도 먹지 못했으므로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여 무당이 밥을 지어서 대접하였는데, 6세의 창녕대군(昌寧大君)이인(李仁)이 “어찌 새끼 꿩을 밥상에 올리지 않느냐.” 하니, 유모가 울면서, “내일은 이런 밥이라도 얻어먹으면 다행일 겁니다.” 하였다. 이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연려실기술』 권6]

거창군부인 신씨와 조카 폐비 신씨의 비극

1506년 9월 2일 오시(午時)에 진성대군은 면류관 · 곤룡표 차림으로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그 부인 신씨를 왕비에 책봉하였다. 중종의 왕비 신씨는 연산군의 왕비 신씨의 조카였는데, 조카는 새로 왕후가 되고, 고모는 왕후에서 폐출되는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국조보감(國朝寶鑑)』] 9월 4일 박원종 · 성희안 · 유순정과 유자광 등이 의논하기를, “이미 그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그 딸이 왕비의 지위에 있을 수 없다.” 하고, 새 왕비 신씨를 내치지 않으려는 중종을 구슬리고 을러대어, 결국 왕비 신씨를 폐출시켜서 하성위(河城尉)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쫓아냈다. 정현조는 정인지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이다. 그 대신 공신 박원종과 홍경주(洪景舟) 등은 자기 딸을 후궁(後宮)으로 바쳤는데, 조선의 문종과 성종은 그 왕후가 후궁 출신이었으므로 박원종 · 홍경주 등은 후궁도 왕자를 낳으면 왕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종은 박원종의 양녀인 박경빈(朴敬嬪)과 홍경주의 딸인 홍희빈(洪禧嬪)을 물리치고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간택하여 왕비로 책봉하니, 그녀가 바로 인종(仁宗)을 낳은 장경왕후(章敬王后)윤씨(尹氏)다. 한편 장경왕후의 어머니 박씨는 박원종의 누이이다.

9월 5일 연산군의 아들 세자와 3왕자를 귀양 보냈는데, 세자에서 폐위된 이황(李*)을 강원도 정선(旌善)으로, 창녕대군이인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양평군(陽平君)이성(李誠)을 충청도 제천(堤川)으로, 이돈수(李敦壽)를 황해도 우봉(牛峯)으로 각각 유배하였다. 그 중에서 세자 이황과 창녕대군이인은 왕비 신씨가 낳은 아들이다. 양평군이성은 연산군 후궁 이숙의(李淑儀)가 낳았고, 이돈수는 장소용이 낳았다. 그 귀양 생활을 보면, 모두 관가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담을 높이 쌓고 항상 대문을 잠그고, 군사들이 파수를 보면서, 관비(官婢)가 음식을 마련하여, 관인(官人)의 감독 아래 입을 옷과 먹는 음식을 작은 문을 통하여 출납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1년 9월 5일)

9월 24일 영의정유순(柳洵) · 좌의정김수동 · 우의정박원종과 유자광 · 구수영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세자에서 폐위된 이황과 창녕 대군이성과 양평군이인과 이돈수 등을 오래 살려두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빨리 처형해야 합니다. 또 연산군의 폐비 신씨가 지금 정청궁에 있는데 선왕의 후궁과 함께 거처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 폐비 신씨는 아버지 신승선의 집을 수리해서 옮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중종이 이를 허락하여, 연산군의 네 아들은 모두 10세 이하의 어린아인데도 불구하고 사사(賜死)되었고, 폐비 신씨는 본가 친정으로 돌아와서 대궐과 인연을 끊고 살게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1년 9월 24일) 구수영은 폐비 신씨의 딸 휘순공주(徽順公主: 이억수)의 시아버지다. 본가로 돌아온 폐비 신씨는 두 아들의 죽음을 듣고 울부짖으면서 통곡하였다. 혈연주의 전통사회에서는 대역(大逆) 죄인은 그 아들을 모두 죽이되 그 딸은 살려두었다. 그러므로 폐비 신씨의 외동딸 휘순공주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중종반정> 직후 구수영은 아들 구문경(具文璟)으로 하여금 며느리 휘순공주와 강제로 이혼하게 하여, 휘순공주마저 친정으로 쫓겨와서 두 모녀가 절망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게 되었다. 돈녕부 판사구수영은 세종의 여덟째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위로서 연산군 때 전국의 미녀를 구하여 연산군에게 바치고, 장녹수가 낳은 딸 이영수(李靈壽)를 맡아서 키우는 등 연산군의 신임을 얻어서 마침내 그 넷째 아들 구문경이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종반정> 때 반정파의 세 대장이 임사홍과 함께 구수영도 잡아서 죽이기로 지목한 인물인데, 그 5촌 조카 구현휘(具賢暉)가 반정의 계획에 참여했다가 이 사실을 알고 구수영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거사하는 당일 구수영이 훈련원에 나아가서 세 대장에게 살려주기를 애걸하니, 박원종 등이 그를 용서해 주었다.[『음애일기(陰崖日記)』, 『연려실기술』 권6] 이리하여 구수영은 반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마침내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그가 자기 아들 구문경으로 하여금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강제로 이혼하게 하여, 반정 이후에 아들 구문경의 목숨을 구원하였던 것이다. 조선 시대 모반(謀叛) 대역(大逆)을 저지른 죄인의 딸과 혼인한 사람들은 대개 그 아내와 이혼하여 그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대간(臺諫)에서 구수영의 간교한 행위를 탄핵하자, 1507년(중종 2) 중종의 명령으로 구문경과 휘순공주는 다시 결합하였다.

강화도 교동에 안치(安置)된 연산군은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몸이 쇠약해졌다. 안치소(安置所)를 보면, 시방으로 둘러친 가시울타리가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가 없었으며, 다만 작은 문 하나가 있어서 그곳을 통하여 옷과 음식을 출납하였다. 그해 11월 연산군이 전염병에 걸려서 매우 고통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중종이 의관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나, 의관이 도착하기 전에 연산군은 운명하였다. 연산군은 1506년 11월 6일 전염병에 걸려서 강화도 교동에서 31세의 나이로 돌아갔다. 그를 모셨던 시녀들의 말에 의하면, “연산군은 죽음에 임하여 다른 말은 없었는데, 다만 ‘왕비 신씨가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폐비 신씨는 연산군이 유배될 때 시동생 중종에게 하소연하여 자기가 따라가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눈물을 흘렸다. 중종은 전교를 내리기를, “후한 예로 장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하여, 경기도 감사가 교동에 묘소를 만들고 그 주변에 수목을 심고 벌채를 금지하였다.[『패관잡기(稗官雜記)』, 『연려실기술』 권6]

중종의 폐비 신씨가 폐출되어 정현조의 집에 살다가 본가 친정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조정에 탄원하여 본가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는 연산군의 왕비 신씨가 이미 본가 친정에 살고 있었으므로, 고모에게 의지하여 같이 살고 싶어 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정승 신승선 · 신수근의 옛집에서 폐출된 두 왕비가 한 집안에서 같이 모여서 살게 되었다. 1510년(중종 5) 3월 휘순공주가 중종의 어가(御駕) 앞에서 정문(呈文)하여, 연산군의 네 아들이 귀양 간 곳에서 죽은 뒤에 버려진 아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도록 해달라고 간청하니, 중종이 허락하여, 그 시신을 거두어 한곳에 장례를 치렀다.[『충재집(冲齋集)』 권5] 이를 보면, 연산군의 네 아를은 처형당한 이후에 그 시신을 그대로 방치한 것을 이때에 누나가 사람을 보내어 거두어 한 곳에 장사를 지냈던 것 같다.

또 연산군이 죽은 뒤 6년이 지나서 거창군부인신씨가 임금에게 상언(上言)하여 중종의 허락을 얻어서, 1512년(중종 7) 12월 강화도 교동섬에 있던 연산군의 유해를, 자기가 살고 있는 집과 가까운 경기도 양주(楊州)로 이장하였다. 그때 함께 살고 있는 조카 중종의 폐비 신씨는 매일 경복궁 건너편 인왕산(仁王山)에 올라가서 너럭바위 위에 자기 치마를 펴서 걸쳐놓고 남편 중종이 쳐다보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사람들이 그 바위를 ‘치마바위[裳巖]’라고 불렀다. 조카 폐비 신씨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거창군부인신씨는 자기가 살고 있는 가까운 곳에 남편과 아이들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항상 찾아가서 산소를 직접 돌보았다. 휘순공주는 구문경과 강제 이혼하였다가, 2년 만에 재결합하여 부부가 같이 살았으나, 아들 구엄(具渰)을 낳다가, 젊은 나이로 죽었다. 어머니 신씨는 자기보다 먼저 죽은 딸을 시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남편 연산군의 묘소 아래에 묻었다. 나중에 사위 구문경도 젊어서 죽어 이곳에 나란히 묻혔다. 한 동산에 가족의 무덤을 만드는 것은 죽은 다음에 부모와 아들 · 딸이 한 곳에 모여서 영원히 산다고 믿는 샤머니즘에서 나온 것이다. 연산군의 폐비 신씨는 어린 외손자를 키우면서 조카 중종의 폐비 신씨와 함께 20여 년을 함께 살다가, 1537년(중종 32) 6월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66세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있는데, 쌍분(雙墳)이다. 사적 362호이다. 그 바로 아래 태종(太宗)의 후궁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趙氏)의 무덤이 있고, 또 그 아래 사위 구문경과 딸 휘순공주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연산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1506년 11월 전염병에 걸려서 강화도 교동에서 돌아갔는데, 그 뒤 6년이 지나서 거창군부인신씨가 간절히 상언(上言)하여 중종의 허락을 얻어서, 1512년(중종 7) 12월 강화도에서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해등면(海等面) 원당리(元堂里)로 이장하였다. 이곳은 원래 세종이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땅이다. 태종(太宗)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가 자녀가 없었으므로, 세종이 넷째아들 임영대군에게 궁주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454년(단종 2) 의정궁주가 돌아가자, 임영대군이 궁주를 이곳에 안장(安葬)하였다. 연산군의 왕비 신씨가 바로 임영대군의 외손녀였으므로, 연산군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겼다.

1512년(중종 7) 12월 연산군의 묘소를 이장할 때 중종은 쌀과 콩 100섬, 면포 150필, 정포 100필, 황랍(黃蠟) 28근 등을 하사하여 장례에 쓰도록 하였고, 1513년(중종 8) 2월 중종은 묘소를 수축한 다음에 양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묘소는 대군(大君)의 무덤으로 만들었으므로, 왕의 무덤보다 규모가 작다. 곡장(曲墻) 3면(面)과 상석(床石) 2개, 장명등(長明燈) 2개, 문인석(文人石) 2쌍이 있고, 무인석(武人石)과 병풍석(屛風石) 등은 없다. 대리석의 비명(碑銘)이 각각 있는데, 서쪽 연산군의 비명의 앞면에는 ‘연산군의 무덤[燕山君之墓]’이라고 새기고, 뒷면에는 “1513년(중종 8) 2월 20일에 장례지내다.”라고 기록하고, 동쪽 거창군부인신씨의 비명의 앞면에는 ‘거창 신씨의 무덤[居昌慎氏之墓]’이라고 새기고, 뒷면에는 “1537년(중종 32) 6월 26일에 장례지내다.”라고 기록하였다. 연산군과 왕비 신씨의 무덤 앞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서울시 보호수 제1호다. 수령이 830년이나 된다고 하므로, 연산군과 신씨의 묘소를 조성하기 전부터 그 자리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

연산군과 왕비 신씨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세자 이황(李*)은 세자에서 폐위되어 강원도 정선에 유배되었다가, 10세에 사사되었다. 차남 창녕대군(昌寧大君)이인(李仁)은 황해도 수안에 유배되었다가, 6세에 사사되었다. 외동딸 휘순공주(徽順公主)이억수(李億壽)는 구수영의 아들 능양위(綾陽尉)구문경(具文璟)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연산군과 왕비 신씨의 제사는 외손자 구엄(具渰)이 받들다가, 다시 그 외손자 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에게 그 제사를 전해주어, 이안눌의 후손들이 연산군과 신씨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연려실기술』 권6] 구엄의 딸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필(李泌)과 혼인하였는데, 이안눌이 그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집안에서 능성 구씨(綾城具氏)를 대신하여 연산군과 거창군부인신씨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국조보감(國朝寶鑑)』
  • 『거창 신씨 족보(居昌愼氏族譜)』
  • 『신보가전(愼譜家傳)』
  • 『능성 구씨 가승(綾城具氏家乘)』
  • 『국조기사(國朝記事)』
  • 『기묘속록(己卯續錄)』
  • 『기재잡기(寄齋雜記)』
  • 『동각잡기(東閣雜記)』
  • 『부계기문(涪溪記聞)』
  • 『소문쇄록(謏聞瑣錄)』
  • 『어촌집(漁村集)』
  • 『용재총화(慵齋叢話)』
  • 『음애일기(陰崖日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장빈호찬(長貧胡撰)』
  •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 『지소록(識小錄)』
  • 『충재집(冲齋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악부(海東樂府)』
  • 『해동야언(海東野言)』
  •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
  • 『회재집(晦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