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숭(崔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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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2년(선조 5) ~ 1626년(인조 4) = 55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봉상시(奉常寺) 판관(判官)이다. 자는 중망(中望)이다. 본관은 수원(水原),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행 부호군(行副護軍)최수만(崔壽萬)이고, 조부는 행 부호군을 지내고 한성부우윤(贈漢城府右尹)에 추증된 최걸(崔傑)이다. 아버지는 행부사직(行副司直) 최언국(崔彦國)이고, 어머니 한씨(韓氏)는 한팽수(韓彭壽)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1601년(선조 34)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방목』) 처음에 교서관(校書館) 권지 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곧바로 부정자에 임명되어, 봉상시 참봉(參奉)을 겸임하였다.(「최숭 묘지명」 참고.) 당시 나라의 제도에 봉상시의 관원 가운데 7품⋅8품⋅9품의 참하관(參下官)은 승문원(承文院)과 성균관(成均館)에서 서로 채용하였는데, 최숭도 각각 정해진 품계에 따라서 승문원과 성균관의 참하관으로 전임하였다. 최숭이 봉상시 참봉이 되었을 때 정성으로 일을 하니, 도제조(都提調)윤승훈(尹承勳)이 그를 추천하여 부봉사(副奉事)로 승진되었다.(「최숭 묘지명」 참고.)

차례에 따라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에서 성균관 박사(博士)로 옮겼다가, 1604년(선조 37)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에 봉상시 주부(主簿)로 옮겼다가,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횡성현감(橫城縣監)이 되었다. 감사가 치적을 고과(考課)할 때 다른 고을의 수령은 모두 조정의 고관들이 잘 봐달라고 관찰사에게 부탁하였으나, 최숭은 뒤에서 지원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과에서 하등을 맞았다. 그리하여 여주교생(驪州校生)의 교수(敎授)로 좌천되었다.(「최숭 묘지명」 참고.)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 2) 다시 봉상시 주부가 되어, 송도(松都)의 분사(分司)에서 근무하다가, 또 성균관 전적으로 전직되어, 양현고(養賢庫) 주부를 겸임하였다. 봉상시 판관으로 승진하여 서적교인(書籍校印) 도감(都監)을 겸임하였다가, 교서관 교리(校理)로 전직되었고, 얼마 안 되어 봉상시 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다.(「최숭 묘지명」 참고.) 1617년(광해군 9) 11월 의정부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하는 문제를 논의할 적에 부사과(副司果)최숭은, “미관말직에 있는 자가 어찌 감히 의논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廟堂)에서 타당하게 잘 처리하는 데에 달렸습니다.” 하고(『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참고)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당시 북인(北人)들이 묘당에서 백관들을 모아놓고 폐비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였는데, 서인(西人)들은 폐비를 반대하였다. 서인 강경파는 아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서인 온건파는 회의에 참석하여 묘당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마침내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북인들은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켜버렸다. 1621년(광해군 13)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었다.(「최숭 묘지명」 참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그도 상복을 벗고 다시 봉상시의 주부와 판관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감기가 들었다가 조금 회복되었으나, 결국 당뇨병으로 인해 다시 병석에 누웠다. 그는 40세 이후로 피부가 차츰 쭈글쭈글해지고 치아가 빠지고 머리털이 희어졌는데, 나이 5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병세가 더욱 나빠져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 상복을 벗자 평상시처럼 회복되었으나, 식사와 음주가 날로 줄어들었으므로 친구들이 걱정하였다. 1626년(인조 4) 10월 12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5세였다.(이상 「최숭 묘지명」 참고.)

성품과 일화

최숭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신장이 크고 비대하여, 다른 사람보다 많이 마시고 많이 먹었다. 성품이 중후하고 소탈하여 털끝만큼도 자랑하거나 꾸미는 태도가 없었다. 항상 일을 당하면,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감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고, 사람을 상대하여 물음에 대답할 적에는 주밀하고 세심하여 이해를 분석하는 바가 어느 것이나 척척 들어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기(知己)를 만나지 않으면 같이 더불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를 아는 사람이 적었고, 잘 안다고 하는 사람도 그를 ‘좋은 장자(長者)’라고 지목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렇지만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남과 사이가 나쁜 적이 없었으므로 나쁜 소리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최숭 묘지명」 참고.)

1601년(선조 34) 나이 30세 때에 최숭이 과거에 급제하고, 부정자에 있을 때 선조가 서교(西郊)에서 백관들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였는데, 문무(文武) 백관과 종친들은 누구나 귀천(貴賤)과 상하(上下)를 막론하고 모두 들어가서 활을 쏘도록 허락하였다. 키도 크고 힘도 센 거구의 최숭이 들어가니, 나무로 만든 사람을 과녁(貫革) 대신 세워 놓았는데, 최숭이 두 발의 화살을 가지고 한번은 가슴을 맞추고 한번은 얼굴을 맞히어, 무관들을 제치고 장원하여, 선조로부터 말을 하사받은 영광을 누렸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

1604년(선조 37) 최숭은 외직으로 나가서 횡성현감이 되었다. 강원도 횡성은 산간의 고을이므로 호수(戶數)가 매우 적었다. 토호(土豪)가 아전들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또 강원도관찰사가 60리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감영(監營)에서 필요한 물건과 사람을 수시로 차출하여 갔다. 그러나 최숭은 토호의 횡포를 억제하고, 감영의 토색질을 막고 백성들을 진심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나쁜 폐단을 제거하여 지친 백성들을 소생시켰다. 백성들이 환호하여 칭송하는 소문이 퍼져나갔으므로,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도 사람들에게 최숭이 고을을 잘 다스린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강원도관찰사가 수령들의 치적을 고과할 때 다른 고을의 수령은 모두 조정의 고관들이 잘 봐달라고 관찰사에게 부탁하였으나, 최숭은 뒤에서 지원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과에서 하등을 맞았다. 그때 고과를 맡은 사람[考人]이 농담하기를, “후일 고과할 때 영월군수(寧越郡守)가 반드시 하등을 맞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다. 왜냐하면, 영월군수도 최숭처럼 뒤에서 지원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최숭 묘지명」 참고.)

1605년(선조 38) 5월 이조에서 최숭을 함경도홍원군수(洪原郡守)로 의망(擬望)하였다. 이에 선조가 전교하기를, “홍원 군수를 최숭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자못 그 고을에 맞는 사람을 고르려는 뜻이 없는 처사이니, 뒤로는 의당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선조실록』 참고.) 곧바로 여주교생의 교수로 좌천되었다.(「최숭 묘지명」 참고.)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쌀알을 세어서 밥을 지을 정도였으나, 해마다 두어 번씩 마을의 친척들을 불러서 부모에게 성찬을 차리고 축수의 잔을 올렸다. 이때 부자(父子)가 같이 노래를 주고받으면서 즐거워하였다. 최숭은 한 명의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아들 하나를 낳고 일찍 죽었다. 최숭이 그 아들을 데려다가, 자신의 자식처럼 어루만지고 기르니, 보는 사람들이 조카인지 아들인지 분간하지 못하였다.(「최숭 묘지명」 참고.)

묘소와 후손

분서(汾西)박미(朴瀰)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정씨(鄭氏)는 산학 교수(算學敎授)정인서(鄭麟瑞)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최영철(崔英哲)인데, 누차 과거 시험을 보아 이름이 났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