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화(尹志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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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0년(현종 1)∼1704년(숙종 30) = 45세.] 조선 후기 숙종 때 활동한 문신. 경종(景宗)의 세자 때 사부(師傅)였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냈다. 자는 혜보(惠甫)이고, 호는 남강(南岡)이다. 본관은 칠원(漆原)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戶曹)정랑(正郞)윤세적(尹世績), 일명 윤서적(尹敍績)이다. 어머니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강화부 경력(江華府經歷)박세기(朴世基)의 딸이자, 박세채(朴世采)의 조카딸이다.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윤우정(尹遇丁)의 손자이고, 관찰사윤가적(尹嘉績)의 조카이다. 현석(玄石)박세채의 문인(門人)이다.

숙종 시대 활동

어릴 때부터 외가의 가까운 친척인 박세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윤지화가 24세이던 1683년(숙종 9) 4월 서인이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분당되었다. 1684년(숙종 10) 4월 노론 최신(崔愼)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한 윤증(尹拯)을 공박하자, 박세채가 이에 반론을 펴면서 소론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그해 11월 박세채는 이조 판서가 되었다.

1688년(숙종 14) 10월 궁녀(宮女)장씨(張氏)가 왕자 이균(李畇)을 낳았는데, 이균은 훗날의 경종(景宗)이다. 그때 노론 민정중(閔鼎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왕자를 낳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균은 숙종의 제 1왕자였다. 1689년(숙종 15) 윤지화는 30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그해 숙종은 궁녀 장씨의 소생 왕자 이균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으나, 서인의 송시열 등은 아직 인현왕후가 젊기 때문에 후사(後嗣)를 기다리자고 주장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1689년(숙종 15) 1월 숙종은 궁녀 장씨를 소의(昭儀)에서 희빈(禧嬪)으로 승품시켰다. 그해 2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일으켜서 노론 송시열을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고, 남인 권대운(權大運)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3월 서인의 원조 이이(李珥) ·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하고, 노론 김수항(金壽恒)을 사사(賜死)하였다. 7월 서인이 지지하는 인현왕후민씨를 폐위하고, 8월 노론 송시열을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에 정읍(井邑)에서 사사하였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 때 강신(强臣) 송시열을 죽이고 왕권(王權)을 과시하였다.

1690년(숙종 16) 6월 숙종은 원자(元子) 이균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10월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남인이 왕비 장씨와 왕세자 이균을 적극 지지하였으므로, 그 뒤 5년 동안 남인의 비호 아래 왕비 장씨와 그 아들 세자 이균은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694년(숙종 20) 3월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잡아서, 약천(藥泉)남구만(南九萬)이 영의정이 되었다. 그해 4월 폐비(廢妃)민씨(閔氏)가 다시 왕비에 복위되고, 장씨는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 이균은 그대로 세자로 있었으나, 숙종의 명령으로 세자는 어머니 장희빈과 인연을 끊고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해 7월 율곡(栗谷)이이 · 우계(牛溪)성혼을 문묘에 다시 배향하였다. 그해 9월 최숙의(崔淑儀)가 숙종의 제 2왕자 이금(李昑)을 낳았는데, 그가 뒤에 영조가 된다. 1695년(숙종 21) 2월 좌의정박세채가 65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윤지화는 그의 배경을 잃었으나, 스승의 영향으로 소론의 이론가로서 크게 활동하게 되었다.

1699년(숙종 25) 윤지화는 정시(庭試)문과(文科)의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0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대교(待敎) · 봉교(奉敎)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1701년(숙종 27) 6월 명곡(明谷)최석정(崔錫鼎)이 영의정이 되었는데, 최석정은 남구만과 함께 소론의 영수였다. 그해 8월 인현왕후민씨가 돌아가자, 10월 숙종은 장희빈에게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과를 물어서 사약을 내려서, 장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당시 윤지화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죽음을 당하여 괴로워하는 왕세자를 위하여, 1702(숙종 28) 1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김치룡(金致龍) 등과 함께 상소하여, 장씨(張氏)의 장례를 치르기 전에 왕세자의 임곡(臨哭)을 허락하도록 청하였다. 숙종이 예조에서 조정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서문중(徐文重)과 영부사(領府事)윤지선(尹趾善)은 찬성하였으나, 좌의정이세백(李世白) 등은 반대하였다. 숙종은 영상(領相)의 의견에 따라서 왕세자의 임곡을 허락하였으므로, 왕세자 이균은 발인하기 전에 어머니 장희빈의 빈전에서 향을 피우고 통곡할 수 있었다..

1702년(숙종 28) 윤지화는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겸임하였다. 뒤이어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궁가(宮家)에서 땅을 절수(折受)하는 폐단과 환곡(還穀)의 미납(未納)을 독촉하는 폐단을 상소하여 이러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보다 앞서 1701년(숙종 27) 숙종이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릴 때 호군(護軍)강세구(姜世龜)가 장희빈과 왕세자의 모자 관계를 고려하여 용서할 것을 간청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 그 뒤에 1702년(숙종 28) 소론인 강세구의 신병(身柄)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숙종의 일관성 없는 행동을 보고, 윤지화는 격분하여 이를 맹렬히 비판하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서 파직당하여, 1년 이상 집에서 칩거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28년 7월 7일)

1703년(숙종 29) 외직으로 나가서,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가 되었다. 윤지화는 국경의 방비를 책임진 변방의 도사로서 겨울철 추위 속에 눈보라를 무릅쓰고 압록강 연안의 진보(鎭堡)를 직접 점검하느라고 변방 수천 여 리를 밤낮으로 말로써 달리다가 마침내 풍토병에 걸려서 쓰러졌다. 병이 깊어져서 직임을 수행할 수가 없었으므로, 관직을 사임하고 서울집으로 돌아와서 병을 치료하다. 그러나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왕세자 이균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1704년(숙종 30) 10월 23일 운명하였는데, 향년이 45세였다.[『약천집(藥泉集)』 권21 「정언 윤군 묘갈명(正言尹君墓碣銘)」, 『명곡집(明谷集)』 권 26 「윤정언 묘지명(尹正言墓誌銘)」]

경종의 세자 때 스승 윤지화

1699년(숙종 25) 윤지화는 40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 · 대교 · 봉교의 벼슬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세자시강원 설서를 겸임하여, 왕세자 이균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99년(숙종 25) 12월 왕세자가 눈병 때문에 오랫동안 서연(書筵)의 공부를 정지하자, 설서윤지화가 필선(弼善)이광저(李光著)와 함께 상소하기를, “세자의 위의(威儀)를 간략히 하여 수시로 소대(召對)하도록 하소서” 하고 간청하니, 숙종이 가납(嘉納)하였다.(『숙종실록』 숙종 25년 12월 1일) 이때 왕세자의 어머니 장씨는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는데, 숙종의 명령으로 왕세자는 어머니 장희빈과 모자의 인연을 끊고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화는 나이 12세의 왕세자가 아버지 숙종을 원망하지 않도록 왕세자가 서연에서 공부하지 않을 때에 숙종이 세자를 자주 불러서 대화를 나누어 부자의 정의를 돈독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1701년(숙종 27) 8월 인현왕후민씨가 35세의 나이로 돌아가자, 숙종은 장희빈을 사랑한 나머지 5년 동안 민비를 왕비에서 폐위한 것에 대하여 무척 자책하였다. 그때 제 2왕자 이금을 낳은 최숙빈(崔淑嬪)이 숙종에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이려고 온갖 저주를 다 하였다고 고자질하였다.(『숙종실록』 숙종 27년 9월 23일) 성질이 급한 숙종은 대노하여, 장희빈에게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과를 물어서 사약을 내리고, “후궁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는 법을 만들어, 앞으로 왕가(王家)에서 장희빈처럼 미천한 궁녀가 왕비가 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다음날 10월 8일 장희빈은 아들 이균을 마나보지 못한 채 사약을 마시고 자진(自盡)하였다.[『숙종실록』숙종 27년 10월 8일] 그때 왕세자 이균은 어머니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데다가, 아버지 숙종마저 간악한 장씨의 아들이라고 왕세자를 미워하였으므로, 어쩔 줄을 모르고 불안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장희빈이 사사(賜死)되었을 때 왕세자 이균은 나이가 15세였다. 왕세자 이균은 아버지 숙종의 불같은 성격을 무서워하여, 의정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소론인 영의정최석정(崔錫鼎)은 세자를 위로하기를,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低下)의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 하고, 숙종에게 장희빈을 구명(救命)하였다가 진천현으로 부처되었다. 그러나 노론 좌의정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의 부탁을 뿌리치고 외면하였다.(『숙종실록』 숙종 27년 10월 1일) 오히려 노론의 대신들은 장씨를 사사하는 것이 왕세자를 위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왕세자가 어머니 장씨의 장례에 참여하는 것조차 가로막았다. 이리하여 이듬해 정월 장희빈을 발인할 때까지 소론의 대신들은 숙종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여 선뜻 나서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1702(숙종 28) 1월 겸설서(兼說書)윤지화는 어머니의 죽음을 당하여 너무나 괴로워하는 왕세자를 위하여, 보덕김치룡 등과 함께 숙종에게 상소하였다. 상소에서 장씨의 장례를 발인하기 전에 왕세자의 임곡을 허락하도록 간청하기를, “왕가의 법도는 지극히 엄격하여 사은(私恩)을 고려하기가 어렵다고 하나, 유명(幽明)을 달리 하는 때를 당하여 자식이 끝내 한 번이라도 어머니의 상차(喪次)에 나아가서 조금이나마 정을 펴지 못한다면, 그것이 대대로 효행을 다하려는 성상의 인의(仁義)에서 보더라도 어찌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바가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일찍이 모자의 정을 끊도록 조처한 것은 공법(公法)이며, 세자가 차마 모자의 정을 끊지 못하는 것은 사정(私情)입니다. 대의(大義)가 사은(私恩)보다 앞선다는 것은 비록 바꿀 수 없는 법이지마는, 사정에 따라서 예절을 베푸는 것도 또한 권도(權道)의 방법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이 한 가지 예절은 범연하게 지나쳐서는 아니될 듯합니다.” 하니, 숙종이 노여움을 풀고 예조에서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예조에서 대신들과 의논하였는데, 소론인 영의정서문중은 말하기를, “유명을 달리하는 마당에 임결(臨訣)하는 절차가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번에 왕세자가 몸소 발인하기 전에 빈전에 나가서 모자의 은정을 펴게 하는 것은 공법(公法)에 크게 해로움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소론인 영부사윤지선은 말하기를, “왕세자와 장씨 사이는 비록 대의(大義)가 사은보다 앞서기는 하지만, 천륜(天倫)에 속하는 친어머니이므로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 정이 있습니다. 만약 발인하기 전에 끝내 임곡하는 절차가 없게 되면, 반드시 장래에 무궁한 한(恨)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장희빈이 사사될 때, 서문중과 윤지선은 숙종에게 장희빈을 구명하였다. 한편 노론인 좌의정이세백은 말하기를, “왕세자의 정리로 따진다면 의당 임곡하는 절차를 그만둘 수가 없을 듯하지만, 다만 이처럼 예절을 바꾸는 일은 경솔히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반대하였다.(『숙종실록』 숙종 28년 1월 27일) 영의정서문중과 영부사윤지선은 찬성하였으나, 좌의정이세백 등은 반대하였다. 소론의 두 재상이 숙종의 노여움과 노론 대신들의 반대를 두려워하여 먼저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겸설서 윤지화가 목숨을 걸고 숙종에게 직언(直言)하자, 숙종은 노여워하지 않고, “영상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왕세자 이균은 발인하기 전에 그 어머니 장희빈의 빈전에서 어머니의 관을 어루만지면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또 1701년(숙종 27) 10월 28일 전 대사간강세구가 『맹자(孟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거론하면서 왕세자와 장씨의 모자 관계를 고려하여 장희빈을 용서하도록 상소하면서, 중국 위(魏)나라 문제(文帝)와 명제(明帝) 부자의 어미사슴과 새끼 사슴에 대한 고사를 실례를 들었다.[『숙종실록』숙종 27년 10월 23일] 그때 숙종은 강세구가 상소에서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아들 문제(文帝)와 손자 명제(明帝)의 고사를 인용한 것에 대단히 분노하였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를 보면,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 명제가 태자로 있을 때 어느 날 아버지 문제를 따라 사냥을 갔는데, 마침 어미 사슴과 새끼 사슴이 들판에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먼저 문제가 어미 사슴을 쏘아 잡은 다음에 태자에게 새끼 사슴을 쏘라고 명하였으나, 명제는 이미 죽음을 당한 어머니를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폐하께서 이미 그 어미를 죽였으니, 저는 차마 그 새끼를 쏠 수가 없습니다.’고 하며 쏘지 않았다. 문제는 그때서야 태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세구의 상소에 대하여, 숙종은 “그는 상소에서 전혀 말을 골라서 쓰지 않았고, 말이 잘못된 곳도 많다.”라고 하며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소론인 강세구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귀양 갔다.

그 다음해 1702년(숙종 28) 6월 숙종은 장희빈을 조급하게 죽인 것을 후회하면서, 강세구가 귀양간 지 한 해를 넘겼으므로 그를 빨리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강세구의 석방을 반대하는 상소를 거듭 올리자, 숙종은 의정부 대신들과 비변사당상관(堂上官)의 의견을 들을 다음, 하는 수 없이 강세구를 석방하라는 명령을 취소하였다. 이때 사간원 정언으로 있던 윤지화는 강세구의 석방에 대한 숙종의 일관성 없는 태도를 맹렬히 비판하기를, “강세구를 용서한 것은 특지(特旨)에서 나왔으나, 이미 내린 명령을 얼마 되지 않아서 번복하였으니, 이는 전하의 뜻이 서지 않은 병폐에 불과합니다. 전하의 뜻이 한 번 서게 되면, 어찌 이러한 몇 가지 일을 몰래 의논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숙종의 의지가 확고하지 못한 점을 윤지화가 공격하자, 숙종은 비답하기를, “이 말은 사실상 나의 병폐를 지적하였다.”라고 하며 그를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노론인 홍문관 부제학(副提學)김진규(金鎭圭)가 소론인 윤지화를 탄핵하고 파직하기를 청하자, 숙종이 마침내 윤지화를 파직하였다.[『숙종실록』숙종 28년 7월 7일, 『약천집』 권21 「정언 윤군 묘갈명」]

소론이 집권한 경종 시대

노론은 왕세자 이균이 즉위하면, 연산군이 어머니 윤씨(尹氏: 제헌왕후)의 복수를 위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던 것처럼 큰 정변이 일어날까봐 몹시 두려워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 이후에 장희빈과 왕세자를 비호하던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한 가운데, 서인의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 왕세자 이균을 지지하고, 노론은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延礽君)이금을 지지했다. 노론은 주자학(朱子學)을 정치 이념으로 삼는 데에 비하여 소론은 주자학을 비판하고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陽明學)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윤지화는 박세채를 사사(師事)하면서, 외가 반남 박씨(潘南朴氏) 집안에서 소론의 이론가 박세당(朴世堂)과 박태보(朴泰輔) 부자와도 가깝게 지냈다. 또 이들을 통하여 당시 소론의 영수 남구만 · 최석정 등과도 교유하였다. 노론은 박세당의 이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지탄하였으나, 윤지화는 그 이론을 바탕으로 노론의 대신들을 탄핵하는 데에 앞장섰다.

1704년(숙종 30) 소론 이론가 윤지화가 죽은 뒤에도 1720년(숙종 46) 숙종이 죽을 때까지 16년 동안 소론과 노론은 병약한 왕세자의 교체를 둘러싸고 당쟁을 벌였는데, 숙종은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1717년(숙종 43) 숙종이 노론의 영수 좌의정이이명(李頤命)을 불러서 독대(獨對)를 행하고, 뒤이어 숙종은 왕세자에게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숙종은 노론에게 왕세자 이균의 대리 청정을 지지해 줄 것을 부탁하고, 숙종의 5남 2녀 중에서 살아 있는 제 2왕자 연잉군이금과 제 5왕자 연령군(延齡君)이훤(李昍)의 장래 안전도 아울러 부탁하였다. 그때 와병 중이던 소론의 영수 윤지완(尹趾完)은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하여 두 사람의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하기를,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된 일인데, 전하가 어찌 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도 어찌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 하였다.(『숙종실록』 숙종 43년 7월 28일) 그러나 숙종은 노론의 주장대로 왕세자를 이균에서 연잉군이금으로 교체하지 않았다.

왕세자 이균은 대리 청정하는 동안에 노론 대신 김창집(金昌集) · 민진후(閔鎭厚)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전(量田) 사업을 추진하여 1720년 이를 완성하였다. 경기와 충청도의 대지주이던 노론은 양전 사업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소농 출신의 소론은 이를 강행하여 양전 사업이 완성되었다. 1720년(숙종 46) 6월 숙종이 나이 60세로 승하하고, 왕세자 이균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그가 경종(景宗)이다. 1721년(경종 1) 노론 대신 김창집 등이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잉군이금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였다. 이때 소론인 승지(承旨)김일경(金一鏡)은 김창집 등 노론의 4대신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김창집 · 이건명(李健命) · 이이명 ·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의 4대신은 이 사건으로 귀양갔다가 1722년(경종 2)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사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신임사화(辛壬士禍)>이다. 소론 조태구(趙泰耈)가 영의정이 되어 경종 시대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소론과 노론의 당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경종은 평생 자식을 두지 못했는데, 야사에서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을 때 숙종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왕세자 이균의 하초(下焦)를 잡아 당겨서 성불구로 만들어 후사가 없다고 하나, 이것은 노론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악랄한 농간이다. 경종의 계비(繼妃) 선의왕후(選懿王后)어씨(魚氏)는 연잉군이금의 약삭빠른 행위를 매우 싫어하여, 소현세자(昭顯世子)나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 중의 한 사람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노론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병약한 경종이 정신 이상의 증후를 보이고 식욕이 떨어져 몸이 몹시 쇠약해졌는데, 왕세제 연잉군이금이 올린 게장과 생감을 달게 먹고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1724년(경종 4) 8월 25일 경종은 37세의 나이로 창경궁(昌慶宮)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하였다.

이때 왕세제 연잉군이금이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한의학에서 이 두 가지 음식은 상극이라고 하여 함께 먹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과연 게장과 생감을 먹으면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나라의 어의(御醫)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잉군이금이 게장과 생감을 마음대로 올릴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자연사를 독살설로 몰고 간 것은 소론과 노론 간의 권력 투쟁이 날로 치열해졌던 결과였다. 이리하여 왕세제 연잉군이금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영조가 즉위한 것은 노론이 소론에 승리한 산물이다.

영조 초기 소론은 경종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겠다고 <김일경(金一鏡)의 반란>, <이인좌(李麟佐)의 반란> 등을 일으켰으나, 영조의 치밀한 대책과 발 빠른 진압으로 모두 실패하였다. 이것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몰락한 소론이 집권한 노론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영조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철저히 은폐하여, 역사의 기록에서 모두 삭제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오랫동안 왕위에 있으면서도, 초기에는 친형 경종을 독살하였다고, 또 후기에는 친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 속에 넣어서 굶겨죽였다고 비난을 받았다.

성품과 일화

윤지화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厚德)하며, 식견(識見)이 높고 사려(思慮)가 깊었다. 어려서부터 현석박세채에게 글을 배웠는데, 박세채는 그의 재주를 아껴서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뿐만 아니라, 공자(孔子)의 선진 유학(先秦儒學)과 장자(莊子)의 노장(老莊) 사상 등을 가르쳤다. 존와(存窩)최석정(崔錫鼎)이 쓴 윤지화의 묘지문(墓誌文)을 보면, “역산(曆算)의 정교한 수치까지도 능히 정통하게 구명(究明)하였다.”라고 하였다.[『명곡집(明谷集)』 권 26 「윤정언 묘지명(尹正言墓誌銘)」] 여기서의 ‘역산’이 원(元)나라 곽수경(郭守敬)이 소개한 아랍의 수시력(授時曆)을 연구한 것인지, 또는 당시 서양 선교사 아담 샬 등이 소개한 서양의 태양력(太陽曆)을 연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스승 박세채 등은 윤지화의 다양한 학문적 세계를 높이 평가하였다.

윤지화는 집 안에 있을 때에도 올바른 일을 행하려고 항상 노력하였으므로, 부모와 형제들이 일을 처리할 때 모두 그에게 의존하였다. 부모의 마음을 항상 기쁘게 해 드리려고, 윤지화는 집안에 일이 있으면 대소사(大小事)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형제 사이에 우의(友誼)가 깊어서, 형제들은 집안의 모든 일을 결정할 때 반드시 윤지화의 의견을 듣고서 처리하였다. 윤지화는 고아(孤兒)가 된 조카들을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기르고 교육하여 훌륭한 인물을 만들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친구들과 사귈 때에도 많은 친구들을 넓게 교제하고 그 중에서 어진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친구의 정의를 다하였다. 평상시에 포부(抱負)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모두 그의 원대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윤지화가 평안도에서 병을 얻어서 돌아오자, 친구들이 날마다 찾아와서 문병을 하였으며, 그가 너무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모두들 친형제처럼 울부짖으면서 슬픔을 다하였다.[『약천집』 권21 「정언 윤군 묘갈명」]

1703년(숙종 29) 9월 윤지화가 평안도도사에 임명되었을 때, 실록에서 사관(史官)이 그를 평하기를, “윤지화는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여 보잘 것이 없었다. 스스로 시의(時議)에 용납 받지 못할 줄을 알고, 마음속으로 매우 원망을 품고 우울해 하였다.” 하였다.(『숙종실록』 숙종 29년 9월 4일) 이를 보면, 윤지화가 시의에 용납되지 못하여 평안도 도사로 좌천된 것을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우울해 하다가 병에 걸린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숙종실록』이 노론이 집권한 영조 시대에 편찬된 것이므로, 노론의 사관(史官)이 소론 이론가 윤지화를 헐뜯은 기록은 전혀 믿을 수 없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가오리(加五里) 삼산동(三山洞)에 있는데,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묘갈명(墓碣銘)과 명곡(明谷)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그들의 문집에 남아 있다.[『약천집(藥泉集)』 권21 「정언 윤군 묘갈명(正言尹君墓碣銘)」, 『명곡집(明谷集)』 권26 「윤정언 묘지명(尹正言墓誌銘)」] 소론의 두 영수가 그의 묘갈명과 묘지명을 쓴 것에서, 윤지화가 비록 장수하여 영달(榮達)하지 못하였으나, 세자 때 경종을 보좌하여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던 윤지화의 뜻을 소론이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남구만의 묘갈명에서 윤지화가 세자 경종을 위하여 숙종에게 올린 장문의 상소문을 그대로 옮겨 실은 것은 그의 충성을 후세에 전하려고 하였던 뜻이 숨어 있다.

첫째 부인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군수이봉조(李奉朝)의 딸인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아들 윤경종(尹敬宗)은 20세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다가 건강을 해쳐서 상중에 죽었다. 둘째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사인(士人)권상(權想)의 딸인데, 딸 1명을 두었다. 그 딸은 이태제(李泰躋)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명곡집(明谷集)』
  • 『약천집(藥泉集)』
  • 『후재집(厚齋集)』
  • 『지촌집(芝村集)』
  • 『소재집(疎齋集)』
  • 『죽천집(竹泉集)』
  • 『병산집(屛山集)』
  • 『한포재집(寒圃齋集)』
  • 『뇌연집(雷淵集)』
  • 『역옹유고(櫟翁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