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극인(宋克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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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3년(선조6)∼1635년(인조13) = 63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신백(愼伯), 호는 정곡(靜谷)이다. 본관은 여산(廬山)이고, 서울 남산골 출신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監察)송초(宋礎)이고,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풍저창(豊儲倉) 수(守)윤확(尹確)의 딸이다. 호군(護軍)송세인(宋世仁)의 손자이고, 승지송시철(宋時喆)의 아버지이며, 송인명(宋寅明)의 고조부이다.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2년(선조35)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 · 대교(待敎) · 봉교(奉敎)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1607년(선조40) 형조 정랑이 되었다가,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당진현감(唐津縣監)으로 나갔다. 1611년(광해군3) 실록 낭청(郎廳)을 겸임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병조 · 예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전임되었다. 1612년(광해군4) 사헌부의 지평(持平) ·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고, 1613년(광해군5) 세자시강원의 문학(文學) ·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다. 또 장악원(掌樂院)정(正)을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 · 장령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대간(臺諫)에서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을 탄핵하였으나 그는 이 논의에 따르지 않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좌천되었다. 1614년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어, ‘7서(庶) 일당(一黨)’이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김제남(金悌南)을 무고한 이른바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추국하여 처리한 공로로 아마(兒馬) 1필을 하사 받았다. 그런데, 조경(趙絅)이 지은 그의 묘갈명(墓碣銘)에서는 정조(鄭造) 등이 제기한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는 차자(箚子)를 오리(梧里)이원익(李元翼)이 올렸다가 대간의 탄핵을 당하여 파직될 때, 그가 사간원(司諫院)에 있으면서 이의를 제기하니 대간의 동료들이 그를 공격하여 내쫓았다고 한다.

1616년(광해군8) 군기시(軍器寺) · 사재감(司宰監)의 정이 되었다가, 1617년(광해군9) 북관(北關) 구황어사(救荒御史)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가 늙었다고 하여 면직되었다. 1618년(광해군10)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끝마치고, 1620년(광해군12) 성균관 사예(司藝)와 통례원 통례(通禮)를 거쳐, 비변사(備邊司)의 추천으로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 1622년(광해군14) 명(明)나라 장수 유유은(劉濡恩)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가, 병조 참의가 되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1)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되었다가 1626년(인조4) 중화부사(中和府使)에 임명되었는데,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후금(後金)이 평안도로 쳐들어오자 겁을 먹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먼저 말을 타고 임지를 떠나버렸다. 비변사에서 이것을 보고하니, 인조가 그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1628년(인조6) 공조 참의에 임명되어, 진하 동지 성절사(進賀冬至聖節使) 겸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중국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청음김상헌에게 중국 가는 길을 물으니, 김상헌이 「조천지장도(朝天指掌圖)」를 빌려주면서 옛날 사신 갔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작별하는 시의 끝 구절에서, “함께 새 지도를 펼쳐놓고 옛날 유람 갔던 얘기를 하였네[展與新圖說舊遊].”라고 읊었다 한다. 중국에서 돌아와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영광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 1628년(인조6)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뱃길로 중국 명나라에 가다가,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의 습격을 받아 은과 인삼을 빼앗기고 되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동지사 겸 성절사가 되어 중국에 가서, 명나라의 조서(詔書)칙서(勅書)를 받들고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명나라 예부의 담당 관리 말만 듣고 2백 년 동안 조칙을 반포하던 의례를 없애버렸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었다. 1630년(인조8)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나갔다가, 1634년(인조12) 문안승지(問安承旨)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황주(黃州)에서 접대하였다.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가, 다음해 부평부사(富平府使)로 나갔는데, 부임한 지 두어 달이 못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5년(인조13) 7월 24일 병으로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3세였다. 나중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성품과 일화

송극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외모가 풍만하고 귀가 컸으며, 도량이 너그러워 남에게 난폭하고 거만스럽게 대하는 일이 없었다. 남에게 비열(卑劣)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순수하고 성실한 태도가 겉으로 드러나, 사람들이 그를 한번 보면, 그가 중후하고 ‘아주 덕이 많은 사람’인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효도와 공경을 다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청렴 근검하다는 소문이 났다. 사람을 다루거나 사물을 접할 때에는 남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아니하였고, 또 남과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권세와 이익에는 겁을 먹은 사람처럼 물러서서 이를 피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영평현(永平縣) 조양리(助良里) 금주산(金柱山) 왼쪽 산기슭에 있는데, 셋째 부인과 합장하였다. 그의 후배 용주(龍洲)조경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있다. 셋째 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사재감 첨정(僉正)김흡(金洽)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송시철(宋時喆)은 사헌부 장령(掌令)과 승지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응천일록(凝川日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주집(龍洲集)』
  • 『청음집(淸陰集)』
  • 『동사록(東槎錄)』
  • 『속잡록(續雜錄)』
  • 『용담집(龍潭集)』
  • 『우복집(愚伏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양파유고(陽坡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