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령(方有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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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0년(세조6)~1529년(중종24) = 70세]. 조선 전기 성종~중종 때 활동한 문신. 본관은 온양(溫陽)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상주(尙州) 군위(軍威)이다. 자는 태화(太和), 호는 무기당(無期堂)이다. 아버지는 증 병조 참판방중지(方仲止)이고, 어머니 남평문씨(南平文氏)는 봉례랑(奉禮郞)문승도(文承道)의 딸이다. 지지당(止止堂)김맹성(金孟性) ·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86년(성종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89년(성종20)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성종 말년에 홍문관 · 예문관 등 3관(館)의 참하관(參下官)을 지냈고, 연산군 초기에 사헌부 · 사간원의 대관(臺官)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503년(연산군9)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막동이의 사건>을 심문하다가,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이때 좌의정이극균(李克均)과 예조 판서이세좌(李世佐) 등이 변호하였으나 연산군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다음해의 <갑자사화(甲子士禍)>를 피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504년(연산군10)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켜서 생모 윤비(尹妃)를 폐할 때 관련된 대신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이극균 · 이세좌 숙질(叔姪)을 비롯하여 여러 대신들과 대관(臺官)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듬해 그는 기용되어,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나갔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문관으로서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1512년(중종7) 우의정성희안(成希顔)이 함경남도는 오랑캐가 침입하는 길목이므로 선비가 맡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하니 중종이 교체시켜서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발탁하였다. 1514년(중종9)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가, 이듬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김종직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가 조광조에 동조하는 세력이라고 홍문관의 지탄을 받았다. 1516년(중종11)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517년(중종12)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이때 조광조 일파의 신진(新進) 대간(臺諫)들에게 배척을 당하자, 그는 화를 내고 고향 상주로 돌아가서 직사(職事)를 오래 비워두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1518년(중종13)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성절사(聖節使)로서 질정관(質正官)최세진(崔世珍) · 서장관(書狀官)한충로(韓忠盧) 등과 함께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병조 참판이었던 방유령은 조광조 등이 서로 붕당(朋黨)을 맺었다고 중종에게 아뢰었다. 방유령과 조광조는 모두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서 조정에서 유학자로 존경을 받았는데, 점차 사이가 벌어져서 서로를 배척하게 되었다. 1520년(중종15) 병조 판서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신진 사류(士類)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탄핵을 받아서 판서가 되지 못하고 전후로 병조 참판만 5년을 지냈다. 1523년(중종18)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찬성(贊成)이원(李沅)이 고향으로 성묘를 왔을 때 병으로 문안하지 못한 일로 인하여 이듬해 성균관 동지사(同知事)로 좌천되었다. 1525년(중종20) 병으로 말미암아 성균관 동지사(同知事)로서 사학(四學)의 유생(儒生)들과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이 일로 경연에서 비난을 받자, 그는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529년(중종24) 2월 24일 지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70세였다.

성품과 일화

방유령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호탕하고 가식이 없었으며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지조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며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친구와 서로 존경하면서 신의를 지켰다. 그가 일을 할 때에는 어느 누구도 그 뜻을 꺾을 수 없을 만큼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바둑을 잘 두어서 아무도 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바둑을 둘 때에는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바둑에만 열중하였다.

1516년(중종11) 의정부와 성균관이 함께 의논하여, 성균관의 사유(師儒)에 합당한 인물로 방유령 등을 선임하였다. 당시 그는 성균관 유생들의 사표(師表)로서 선임될 만큼 조정 안팎에서 유학자로 존경을 받았는데, 이는 조광조와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방유령이 1517년(중종12) 좌승지로 있다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조광조 일파의 신진 대간들이 탄핵하였다. 그보다 앞서 김응기(金應箕)가 우의정이 되자, 사헌부에서 우의정김응기를 탄핵하려고 하였으므로 좌승지방유령이 대사헌최숙생(崔淑生)에게 “김응기를 탄핵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최숙생이 중지시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신진 대간들의 탄핵을 당하였다. 이때 방유령이 그 후임이 되자 조광조 일파 신진 대간들이 두 사람을 함께 탄핵하였다. 그는 화가 나서 고향 상주로 돌아가서 몸이 아프다고 핑계하고 직사를 오래도록 비워두고 출사하지 않았다. 중종이 못마땅하게 여겨 체직시키려 하니, 영의정정광필이 아뢰기를, “근일에 재상으로서 방유령처럼 3, 4인이 모두 고향으로 물러갔는데, 그들은 노병(老病)을 앓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재를 내버려서는 안 되니 모두 부르도록 하소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송환되어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522년(중종17) 주세붕(周世鵬)이 처음 급제하여 고향의 후배로서 서울 장의동(藏義洞)에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주세붕이 35년 대선배에게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금언(金言)을 청하자, 그가 말하기를, “자기 마음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스스로 선악(善惡)을 알게 될 것이다. 선은 힘써 행하고 허물은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며, 악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1529년(중종24) 그의 병이 위독할 때 주세붕이 문병을 갔는데, 그가 주세붕을 보고 하는 말이, “내 평생에 별로 부끄러울 일이 없었으나, 유독 한 가지 매우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하므로, 주세붕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더듬거리기를, “백이(伯夷)가 여기 있고, 강태공(姜太公)이 여기 있는데,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주세붕이 문병하고 3일 뒤에 그가 죽었는데, 주세붕은 비문에서, “이것은 대개 일찍이 연산군을 섬긴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이런 말씀을 한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주세붕은 방유령의 비문에서 연산군 시대 관력(官歷)을 모두 빼버렸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합천(陜川) 우산(于山)의 선영에 있는데, 고향 후배 신재(愼齋)주세붕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무릉잡고(武陵雜稿)』 원집 권8) 첫째 부인은 은진송씨(恩津宋氏)이고, 둘째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자녀는 3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봉사(奉事)정담(鄭霮)의 처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무릉잡고(武陵雜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허암유집(虛庵遺集)』
  • 『묵재집(默齋集)』
  • 『충재집(冲齋集)』
  • 『음애집(陰崖集)』
  • 『충암집(冲庵集)』
  • 『소재집(穌齋集)』
  • 『옥계집(玉溪集)』
  • 『옥동집(玉洞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명미당집(明美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