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유(金大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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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9년(성종 10)∼1552년(명종 7) = 74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의 은일(隱逸). 호조 좌랑(左郞)과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자는 천우(天佑)이고,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거주지는 청도(淸道) 미곡(米谷)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김준손(金駿孫)이고, 어머니 제주 고씨(濟州高氏)는 사도시(司䆃寺)정(正)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김맹(金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다. 김일손(金馹孫)과 이조 좌랑(左郞)김기손(金驥孫)의 맏조카이기도 하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정여창(鄭汝昌)의 문인이고, 조식(曺植)과 절친한 사이였다. 사관(史官)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사초(史草)에 실었다가 연산군(燕山君) 때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아버지 김준손과 함께 전라도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 석방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직되면서, 고향 청도 운문산(雲門山) 아래 우연(愚淵)에 은거하였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79년(성종 10) 경상도 청도 미곡에서 태어나, 동생 김대장(金大壯)과 함께 자랐다. 1482년(성종 13) 4세 때 아버지 김준손 3형제가 함께 알성(謁聖) 문과에 응시하여, 아버지 김준손은 2등 방안(榜眼)으로 급제하고, 중간 삼촌 김기손(金驥孫)은 1등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17세의 막내 삼촌 김일손은 낙방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9] 그러나 4년 뒤인 1486년(성종 17) 막내 삼촌 김일손이 그해 식년(式年) 문과(文科)에서 제 2등 방안으로 급제하면서, 아버지 3형제가 모두 과거에 1, 2등을 차지하며 그 명성을 크게 떨쳤다. 아버지 김준손은 성종 말기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이조 좌랑(佐郞)·이조 정랑(正郞)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였다.(『성종실록』 20년 6월 27일),(『성종실록』 22년 7월 11일) 이에 김대유 형제도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

1493년(성종 24) 15세 때 아버지 김준손이 청도의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경상도함양군수(咸陽郡守)로 부임하였으므로, 부모를 따라서 고향 청도 미곡으로 돌아갔다.(『성종실록』 24년 3월 1일) 그때 막내삼촌 김일손의 소개로 정여창을 찾아가서 수학하였는데, 김일손과 정여창은 모두 김종직의 제자였다.[『남명집(南冥集)』 권2 「선무랑호조좌랑김공묘갈(宣務郞戶曹佐郞金公墓碣)」 이하 「김대유묘갈」로 약칭]

한편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막내삼촌 김일손은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고, 김대유와 아버지 김준손은 전라도 순창(淳昌)으로 유배되었다. 막내삼촌 김일손이 춘추관(春秋館) 사관으로 있을 때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기록하였다가 이극돈의 원한을 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 때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실록청(實錄廳)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이 사초를 열람하다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발견하였다. 이에 이극돈은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이를 고발하였고, 그 결과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고, 김일손과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등은 모두 능지처참당하였다. 그리고 정여창은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귀양 가서 병으로 죽었으며, 김굉필(金宏弼)은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귀양 가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죽음을 당하였다. 그때 김대유의 나이가 20세 때였는데, 이것이 첫 시련이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더욱 심해지면서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중종이 새 임금으로 즉위하였고, 그 직후 김대유와 아버지 김준손은 순창에 유배된 지 8년 만에 풀려났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1507년(중종 2) 8월 <이과(李顆)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당시 홍문관 직제학이던 김대유의 아버지 김준손도 연루되어 심문을 받고 파직되었다. 김대유는 아버지 김준손을 모시고 고향 청도 대곡(大谷)으로 돌아왔는데, 이듬해 1508년(중종 3) 아버지 김준손은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김대유의 두 번째 시련이었다.

김대유는 청도 금곡(金谷)의 운문산(雲門山) 아래에 서실(書室)을 짓고, 남쪽으로 김해(金海)의 조식(曹植)과, 북쪽으로 안동(安東)의 이황(李滉)과 학문을 교류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정에서도 박원종이 죽은 후 조광조 등의 사림파(士林派)를 등용하여 개혁 정치를 단행하면서, 1518년(중종 13) 김대유는 유일로 천거되어 전생서(典牲署)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 청도로 돌아왔다. 이듬해 조광조(趙光祖)가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사장(詞章)을 폐지하고 천거에 의하여 인재를 뽑자, 1519년(중종 14) 김대유도 천거되어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이 되어 춘추관 사관을 겸임하였고,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대간(臺諫)으로 활동하다가 경상도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나갔다.[「김대유묘갈」],(『중종실록』 14년 6월 9일)

그러나 1519년(중종 14)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 등이 죽음을 당하고 김식(金湜) 등이 유배되어 사림파가 쫓겨나자, 훈구파(勳舊波) 홍경주(洪景舟)·심정(沈貞)·남곤(南袞) 등이 현량과를 파방하였다. 이에 김대유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 청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금곡의 운문산 아래 우연(愚淵)에서 은거하며, 스스로의 호를 삼족당이라고 일컬었다. 이것이 김대유의 세 번째 시련이었다. 1545년(인종 1) 인종(仁宗) 때 대윤(大尹)윤임(尹任)이 사림파를 등용하고, 현량과를 복과(復科)하면서 김대유는 다시 성균관 전적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는 바람에 대구에서 고향 청도 운문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우연에서 박응천(朴應千)과 벗하며 학문을 연구하다가, 1552년(명종 7) 노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4세였다.

저서로는 삼촌 김일손의 문집인 『탁영집(濯纓集)』을 간행할 때 김일손의 생애를 요약 정리한 『탁영연보(濯纓年譜)』가 있다.

성품과 일화

김대유는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재능과 인품이 뛰어나고 식견과 도량이 명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연려실기술』 권8] 조식은 묘갈명(墓碣銘)에서, “어려운 『시경(詩經)』「대아(大雅)」편을 가지고 경사(經史)를 토로하는 큰 선비였고, 훤칠한 큰 키를 가지고 활을 쏘고 말을 몰이하는 호걸이었다”고 하였다.[「김대유묘갈」]

조식은 벗을 사귀는 데는 반드시 그 사람됨이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달관(達官)·요인(要人)이라고 할지라도 사귀지 않았는데, 김대유는 조식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므로 조식은 그의 비명(碑銘)까지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밖에도 두 사람은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이희안(李希顔)·이황과 교우하였고, 서로 글을 주고받으면서 성리학을 토론하였다.

청도의 운문산 아래 아름다운 연못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데, 김대유는 그 위에 있는 우연에 살았고, 박응천이그 아래 눌연(訥淵)에 살았다. 서실의 거리가 불과 몇 리도 안 될 만큼 가까웠으므로, 두 사람이 밤낮으로 서로 만나 강물과 바위의 빼어난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였다.[『갈암집(葛庵集)』 속집 권3] 그러므로 이항복(李恒福)이 부러워하기를, “나도 청도군에 있는 김대유의 삼족당에서 살아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다’ 하였다.[『백사집(白沙集)』 별집 권4]

김대유가 일찍이 말하기를, “나이 70이 지났으니, 수명이 이미 족(足)하고, 몇 차례의 시련 끝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천과에 급제하여 대간의 관직을 역임하고, 고을원님도 지냈으니, 벼슬도 족하다. 아침저녁 식사 때 술과 고기반찬이 끊이질 않으니, 먹는 것도 부족하다고 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서실의 이름을 삼족당이라 하고, 스스로 자기의 호로 삼았다.[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추록] 박응천이 묻기를, “삼족당의 수명과 벼슬, 그리고 음식에 만족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겸사(謙辭)가 아닙니까. 높은 식견과 넓은 도량으로 천명(天命)을 즐길 줄 알면서, 어찌 수명⋅벼슬⋅음식에 마음을 쓰십니까” 하니, 김대유가 물끄러미 우연을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지혜도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이고, 어리석음도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모두 갖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지혜를 버리고 어리석음을 가질 것이다. 시대에 어리석으면 영욕(榮辱)이 내 몸에 미치지 아니할 것이니, 몸을 보전하는 데에 족하다. 정사에 어리석으면 헐뜯음과 칭찬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마음을 수양하는 데에 족하다. 욕심에 어리석으면, 힘쓰는 것이 분수에 넘치지 않을 것이니, 분수에 족하다. 나의 삼족은 모두 어리석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리석은 자의 연못[愚淵] 가에다 세 가지가 족하다는 서실[三足堂]을 짓고 살고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소요당일고(逍遙堂逸稿)』]

청도는 사창(社倉)이 없어서, 환자곡식을 출납할 때 이웃 고을까지 곡식을 운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김대유가 생원 박응천과 의논하여 그 폐단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게 진정하여, 비로소 청도 고을에도 사창을 설치하니, 백성들이 그 혜택을 크게 받았다. 백성들은 그 공을 보답하고자 청도의 사창 한 모퉁이에 사당(祠堂)을 짓고 봄⋅가을에 김대유와 박응천 두 사람에게 제향(祭享)하였다.[『기묘록보유』 추록]

기묘사화 때 김식은 선산(善山)으로 유배되었다가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절도(絶島)로 이배(移配)된다는 소문을 듣고, 선산에서 도망쳐 제자와 지인(知人)들의 도움을 받아 도피생활을 하였다. 그때 김식은 청도 금곡의 운문산 아래 김대유의 집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김식은 거지같은 차림으로 대문 밖에서 절을 하였으나, 김대유는 집으로 들이지 않고 하인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자네는 어찌하여 이같이 구차하게 남한테까지 누를 끼치려고 하는가” 하고 돌려보냈다. 김식은 지리산을 가려고 거창(居昌)수도산(修道山)에 이르렀으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었다. 결국 김식은 고제원(高梯院) 산기슭에서 바위 위에 한 구절의 시를 쓰고,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이를 두고 조식은 “김대유의 처사는 의롭기는 의로우나, 어찌 인정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라고 비평하였다.[『연려실기술』 권8]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청도의 북쪽 금곡(金谷)에 있고, 조식이 지은 묘갈(墓碣)이 남아있다.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과 선암사(仙巖祠)에 배향되었다.[『향산집(響山集)』 권1]

부인 벽진 이씨(碧珍李氏)는 현감이량(李樑)의 딸인데,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부인은 남편보다 4년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남편 김대유의 무덤 왼쪽에 부장(祔葬)되었다. 측실로부터 두 아들 김성(金成)과 김생(金生)을 두었다. 서출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일을 맡아 다스리다가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모두 오래 살지 못하였다. 김성은 첨사(僉使)이세전(李世銓)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김진(金津)을 낳았고, 김생은 좌찬성이장곤(李長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김일양(金一陽)을 낳았는데, 그 후손들이 번창하였다.[「김대유묘갈」]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갈암집(葛庵集)』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남명집(南冥集)』
  • 『백사집(白沙集)』
  • 『소요당일고(逍遙堂逸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탁영집(濯纓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향산집(響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