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姜碩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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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0년(선조13)~1643년(인조21) = 64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복이(復而)이며, 호는 월당(月塘), 또는 삼당(三塘)이다. 본관은 금천(衿川)이고, 이조참의강찬(姜燦)의 아들이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장인이다.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인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광해군 시대 은둔 생활

1616년(광해군8) 나이 37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정자(正字)에 임명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의 정치가 문란해지고,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논의를 일으키자, 그는 한강을 건너가서 금천(衿川: 지금 시흥)에 있던 부모님 무덤의 묘막(墓幕)에 거처하며 세상과 단절하고 살았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는데, 1623년(인조1)부터 1626년(인조4)까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삼사(三司)의 관직으로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간(司諫), 집의(執義), 수찬(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적(典籍) 등을, 성균관(成均館)의 사유(師儒) 자리로는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성(司成) 등을, 이조의 전선(銓選) 자리로는 좌랑(佐郞), 정랑(正郞) 등을 맡았다. 또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서 사인(舍人)이 되었으며, 특수 관부의 책임자로는 종부시(宗簿寺), 예빈시(禮賓寺), 장악원(掌樂院), 제용감(濟用監) 등의 정(正)이 되었다. 그 밖에 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 문학(文學), 필선(弼善), 보덕(輔德)을 겸임하고, 문신선전관(文臣宣傳官), 외지제교(外知製敎) 등의 삼자함(三字銜)을 항상 띠었다.

1627년(인조5)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그해 9월 세자빈(世子嬪)의 간택령(揀擇令)이 내려져서 그의 둘째딸이 선발되었다. 그 딸이 바로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즉 강빈(姜嬪)이다. 1628년(인조6)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 우승지(右承旨)를 거쳐서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였다. 1631년(인조9) 이조참판으로 옮겼다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그때 관리들의 부정을 탄핵하여 조정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았다. 1636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1638년 형조판서로 옮겼다. 1640년(인조18)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하였는데, 1641년 위비(痿痺)가 심하여 걸을 수 없게 되자, 우의정에서 해임되고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로 임명되었다가 곧 중추부(中樞府)영사(領事)로 승진하였다.

호란과 가족의 수난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강석기는 강화(講和)에 강력히 반대하면서 강홍립(姜弘立)을 참형(斬刑)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매우 과격하여 양근군수(楊根郡守)로 좌천되었다가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丙子胡亂) 이 발생하자 세자빈(世子嬪)을 따라서 강화도로 피난갔는데, 그의 병이 위독해져 조정의 명령대로 세강화도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였다. 결국 강화도가 적의 손에 들어가자, 그는 세 번이나 자진(自盡)하려고 하였으나 빈궁(嬪宮)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淸)나라 태종(太宗: 홍타지)에게 패배하자, 1637년(인조15)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볼모로 심양(瀋陽)에 끌려갔다. 소현세자 부부는 1643년(인조21) 강석기가 병으로 죽기 직전에 돌아왔는데, 그는 죽을 때 붓을 가져오게 하여 유서(遺書)를 남기려다가 힘이 없어서 그대로 운명하였다. 아마도 딸에게 조정의 분위기를 알려주어 조심하라고 부탁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가 죽은 지 2년 뒤인 1645년(인조23)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였으며, 이듬해 1646년(인조24)에 강빈(姜嬪)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이 옥사로 인하여 소현세자빈 강씨와 강석기의 처가 처형당하였으며, 그 아들 둘도 장살(杖殺)당하여 그의 가문이 멸망되었다. 그 후 서인의 노론(老論)에서 강빈 옥사의 신원(伸寃)을 줄곧 주장하여, 숙종 때 복관(復官)되었다.

성품과 일화

강석기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이 전한다. 생김새를 보면, 장대하고 훤칠하여 한눈에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돈후(敦厚)한 자질에 학문이 밑받침하였으나, 자기 몸을 닦는 데 전념하여 조행이 청빈(淸貧)하였다. 겉으로는 화평(和平)한 듯하였으나, 안으로는 굳세고 방정(方正)하였다.

평상시 그의 책상에는 청탁하는 편지가 없었고, 그의 문전에는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임금 앞에서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하는 풍모를 보여주었고, 그가 인사(人事)를 담당할 때에는 조정에서 관리들이 조급하게 승진하려고 서로 다투는 풍조를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궁중(宮中)과 혼인하고 지위가 높아서 혐의스럽고 조심스러웠으나, 스스로 처신하기를 여유 있게 하였으므로, 그는 땅을 굽어보거나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한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아방리(鵝房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지금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이다.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1718년(숙종44)에 봉산(鳳山)의 문정서원(文井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월당집(月塘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포저집(浦渚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