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스님(守仁, 1899生, 비구니)
수인(守仁)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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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수인(守仁) |
법호 | 성월(性月) |
속명 | 유수인(兪守仁) |
출생 | 1899.09.03. |
출가 | 1908년 |
입적 | 1997.03.12. (세수99세, 법랍90세) |
사찰 | 운문사 청신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신원리 1789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수인스님은 운문사 초대 주지로서 운문사 강원을 만들어 현재의 운문사를 만드는데 초석을 다진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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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경북 월성 출생 |
1908 |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행민(幸敏)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12 | 긍파사리(肯坡舍利)[1]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16~1922 | 통도사 해담(海曇)스님을 강사로 수의과 졸업 |
1922 | 마하사(반야사) 선방의 만공스님 회상에서 하안거를 시작으로 20여 안거 |
1923 | 통도사에서 해담(海曇)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40 | 수영 금련사 옛터에 서운암 창건 |
1941 | 서운암 주지 |
1955~1966 | 운문사 비구니 초대, 2·3대 주지 역임 |
1956~1959 | 영주암 주지 |
1959 | 제2대 중앙종회의원 |
1967 | 경남 기장 보명사 대웅전 창건 및 주지 취임 |
1983 | 범어사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3년간) |
1997. 3. 12 | 운문사 청신암에서 입적 (세수 99세, 법랍 90세) |
문중 | 보운문중(普雲) |
수행지침 | 간탐어물(慳貪於物)은 시마권속(是魔眷屬)이요, 자비보시(慈悲布施)는 시법왕자(是法王子)니라. |
생활신조 | 참선, 주력(관세음보살) 간경, 잊지 말고 정진 |
수계제자 | 창법(昌法)⋅성우(性雨)⋅영옥(永玉)⋅혜엽(慧燁)⋅덕만(德挽) |
활동 및 공헌
출가
성월당(性月堂) 수인(守仁)스님은 1899년 9월 3일 경북 월성군 산내면 심천리에서 아버지 유석곤과 어머니 윤영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기계이며, 이름은 유수인이다. 남달리 총명한 유년시절을 보내던 중에 8세 때 아버지를 잃고 하루하루 슬픔에 잠겨 지내던 스님은 운문면 신원동 고모님 댁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청신암은 대중이 모여 사는 선방이었는데, 주지스님은 후학의 연(緣)을 위해 늘 기도하셨다. 기도 회향 날 신원리로 탁발을 갔다가 어린 수인스님을 만났다. 그것이 인연(因緣)이 되어 수인스님은 청신암으로 오게 되었다.
행민(幸敏)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한 때가 10세였는데, 철없을 시절이었음에도 별리(別離)의 슬픔과 새로운 출발의 벅참이 엇갈리어 눈물이 솟았다.
수행
스님은 18세에 통도사 강원에서 초발심자경문과 치문을 배우고 법화경과 화엄경까지 다 보았는데 특히 법화경을 일심전념으로 보았다. 그 공덕으로 후학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으며, 신도들을 제접할 때도 법화경을 전거로 들어 법문을 설하였다.
1922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후에 부산 금련산 마하사 선방인 반야암에서 만공 선사 밑에서 안거를 지냈고 그 후로 부산 범어사 대성암, 양산 내원사, 금강산 유점사와 보덕암, 신계사 법기암 등의 선방에서 20안거를 지냈다.
운문사 주지를 맡다
수인스님은 정화 이후 팔공산 동화사 비구니총림에서 운문사로 옮겨오면서 소임을 맡았는데, 대처승이 휩쓸고 간 운문사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1955년 스님은 운문사 주지직을 맡아 직접 후학의 도재 양성을 위해 강원 교육 체제를 신설하면서 각종 불사에 전념하였다.[2] 그러던 중 대처승의 모함과 소송 제기로 법정에 세 번이나 서게 되었다. 마지막 재판 때에는 승소한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합장한 채로 관음주력삼매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굴뚝 하나도 온전하지 못했던 운문사를 새로운 청정도량으로 가꾸어가는 데는 수년의 세월이 걸렸다.
한번은 오백나한전이 협소하여 고심하고 있는데, 마침 통도사 극락암 조실이신 경봉 큰스님께서 운문사 사리암 기도를 마치고 큰절에 들르셨다. 나한전을 참배한 뒤 큰스님이 나한님 한 분을 살며시 들자 그 밑에서 연기(내력)가 나왔다. 그래서 대웅전 석편(石便)으로 나한전을 신축하게 되었다. 대웅전에 모셔 놓았던 오백나한전의 주불이신 석가모니불을 옮겨 모시는데, 토불이라 옮기는 게 쉽지 않아 동민(洞民) 30여 명을 동원하였다.
당시만 해도 정화 직후라 비구니가 큰절을 맡았다고 하면 비구스님들이 와서 둘러보고 노골적으로 무시를 하며 애를 먹이던 때였다. 하루는 한 객승이 와서 마당 한 편이 움푹 파여 물이 고인 것을 보고 “저것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수인스님은 ”그것은 연당(蓮堂)이오.“하고 대답하였다. 객승이 이번에는 다 무너져가는 요사채 굴뚝을 보고 물었다.
”저것은 무엇이오?“
”저것은 첨성대요.“
수인스님의 재치 있는 말씀에 객승은 더 이상 흠을 잡지 못한 채 오히려 감탄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당시 운문사 사답 전부가 상환된 적이 있었다. 소작인들이 이미 상환료를 지불한 상태여서 상황은 매우 나빴다. 그때 수인 스님은 마을에 내려가서 가가호호 방문을 하였다. 그리고 사리 밝고 자비로운 말씀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여 토지를 다시 운문사로 돌려주겠다는 도장을 받았고, 결국 사답 백여 마지기를 빠짐없이 되찾아 놓았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유수인 주지스님이 아니라면 논을 절대로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 특명인데 왜 내놓았겠느냐. 멀리 외지에서 온 낯선 스님네라면 턱도 없었을 것이다. 절대 도장을 찍지 않았을 것이다.’ 등등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인근에는 ‘유수인 스님 화내는 것을 볼래, 동문 안 노스님 웃는 것을 볼래? 김 안 나고 뜨거운 사람이 바로 수인스님이다.’ 라는 말이 돌기도 하였다.
스님의 청정계행
출가 이후 평생 참선과 간경(看經), 주력(呪力)정진을 놓지 않았던 스님의 거침없는 말씀은 오늘날 출가수행자들에게 날카로운 경책으로 다가온다. 수행자로서 스님의 청정계행은 모든 비구니 납자들의 규범이 되어 지금도 후학들에게 그 법향을 전하고 있으니, 비구니 종풍의 근간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수인스님은 조석예불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예불 후에는 반드시 두 시간씩 기도정근을 하며 웬만한 의식들은 직접 집전하였다. 또한 기억력이 어찌나 좋은지 제경서문(諸經序文)들을 다 외울 정도였다. 시공을 초월한 확고부동한 신심과 원력에 근거한 법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입적
평소 아랫사람들에게 ‘간탐어물(慳貪於物)은 시마귀속(是魔眷屬)이요 자비보시(慈悲布施)는 시법왕자(是法王子)니라.’는 교훈으로 경책하던 수인스님은 1997년 3월 12일 운문사 청신암에서 세수 99세, 법랍 90세로 사바의 연을 접었다.
수계제자로 창법(昌法)⋅성우(性雨)⋅영옥(永玉)⋅혜엽(慧燁)⋅덕만(德挽), 손상좌 명희·신원·순행·상영·혜광·상진·지안·묘전·일원·현덕·종성·수환·현원·현성·도명스님이 있다.
운문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12~115.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08.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2』, 예문서원, 2009년, pp 145~166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48~250.
- 하춘생. 『깨달음의 꽃2(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2001, pp. 75~88
- 매일신문, [운문에서 화악까지](20)운문사와 오갑사 http://mnews.imaeil.com/page/view/2010051407310776712
- 불교와 사회(잡지), 사실과 재현의 관점에서 수인스님 다시보기 https://www.e-jbs.org/archive/view_article?pid=jbs-12-2-134
- 성월당 수인스님_발자취(1) 자신에게는 서릿발, 타인에게는 봄 바람 https://www.youtube.com/watch?v=m2sj2ZJkV3A
- 성월당 수인스님_발자취 (2) / 학식과 덕으로 포교와 종단 발전에 기여 https://www.youtube.com/watch?v=IEpUvoVBxOA
- 성월당 수인스님_발자취 (3) / 스님의 세수 97세에도 화엄경을 독송하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CDSNlrDFfT8
- 성월당 수인스님_발자취 (4) / 세납 99세, 법랍 90세로 범어사 연화대에서 지수화풍 사대로 돌아가시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9SgHEaO84
- 성월당 수인스님_발자취 (5) / 비구니로서 한국불교역사 천6백년사에 길이 빛나는 대작불사 남기시다. https://www.youtube.com/watch?v=SSFMdIvf39U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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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守仁)스님 | 본항목 | 수인스님(守仁, 1899~1997) | 守仁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인스님(守仁,_189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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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守仁)스님 | 보운문중(普雲) | ~의 일원이다 | |
수인(守仁)스님 | 행민(幸敏)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수인(守仁)스님 | 청도 운문사 청신암 | ~에서 출가하다 | |
수인(守仁)스님 | 긍파사리(肯坡舍利)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수인(守仁)스님 | 해담(海曇)스님 | ~(으)로부터 수계하다 | 비구니계 |
수인(守仁)스님 | 양산 통도사 서운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감원(주지) |
수인(守仁)스님 | 청도 운문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수인(守仁)스님 | 부산 영주암(망미동)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감원(주지) |
수인(守仁)스님 | 기장 보명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수인(守仁)스님 | 부산 서운암(망미동) | ~을(를) 창건하다 | |
수인(守仁)스님 | 기장 보명사 | ~을(를) 중창하다 | |
수인(守仁)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부산 마하사(반야사, 연산동) 등 |
수인(守仁)스님 | 구족계단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3년간) |
❁ 한국 비구니 인명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로 가기
지도
- 운문사 청신암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주석
- ↑ 운문사부도군(雲門寺浮屠群)에 대선사긍파당대연사리부도비(大禪師肯坡堂大淵舍利浮屠碑(1915))가 있음(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 한국비구니수행담록은 수인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를 맡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운문사 홈페이지 (http://unmunsa.or.kr/?c=79/86/95/159 )에는 금광(금룡)스님이 초대, 수인스님은 2대와 3대 주지를 맡은 것으로 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