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보명스님(寶明, 1954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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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보명(寶明)스님은 지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보문동 미타사 주지를 역임하고 불교 꽃꽂이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54 경기 광주 출생 5세 때부터 절에서 성장
1959 보문동 미타사에서 지순(芝順)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1 망월사에서 일타(日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80 송광사에서 구산(九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4 삼선승가대학 대교과 졸업
1988 한국불교연화꽃꽂이회 창립
1990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과 수료, 한국불교비구니 꽃꽂이회 창립
1990~2004 한국불교연화꽃꽂이회 연합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꽃예술작가협회 연화꽃꽂이회 회장, BBS 문화 강좌 꽃꽂이 강사
1997 꽃예술 최고지도자 전문교육과정 (이화여자대학교), 삼선승가대학 불교전통 꽃꽂이 강사
2011~ 2021 현재보문동 미타사 주지
문중 보문동 미타사 탑골문중
수행지침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생활신조 일체유심조
저서 및 작품 『시방에 꽃비 내리리』(꽃꽂이 작품집)
상훈 아세아 예술상(1985) 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경륜(經論)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경삼(敬三)→유명(有明)지순(芝順)보명(寶明)→경륜(經輪)

활동 및 공헌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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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淸峯) 보명(寶明)스님은 1954년 6월 23일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에서 아버지 심우철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의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이며, 이름은 심화자이다.

분홍 연꽃을 받는 꿈을 꾸고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부터 불가와 인연이 많았다. 스님은 어린 시절 유난히 꽃을 좋아해서 항상 들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 부처님께 올리곤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새벽 도량석을 도는 스님의 염불 소리에 저절로 잠이 깨어 앉아 있던 때도 많았다. 어머니가 계시는데도 절이 좋아 5세 때부터 절에서 살게 된 스님은 보문동 미타사에 주석하고 계시던 대은 큰스님께 보명이라는 법명을 받고, 지순(芝順)스님을 은사로 진정한 수도자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1년 4 월 10일 망월사에서 일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수학과 수행

또래의 다른 스님들은 강원이나 학교를 다녔지만 스님은 형편상 상주 강원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삼선승가대학이었다. 묘순 학장스님과 지광 주지스님 밑에서 치문반부터 시작하였는데,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수업을 받았다.

통학 강원이라 빠질 일도 많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하루도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은사스님의 각별한 배려가 없었다면 그런 배움의 길은 어려웠을 것이다. 1980년 3월 24일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그 후 1984년 삼선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다.

꽃꽂이를 배우다

절에서 염불을 하고 기도하는 일이 잦아지자 꽃을 사오는 보살님들이 많아졌다. 원래 꽃을 좋아하던 보명스님은 그 꽃을 받아 부처님 전에 정성스럽게 꽂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부처님 전에 좀 더 아름다운 꽃공양을 올리려고 애썼지만 왠지 부처님보다는 꽃이 주인이 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스님은 정식으로 꽃꽂이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시 스님이 꽃꽂이를 배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은사스님께서도 속인스럽다고 반대하셨고, 혹시 스님이 환속이라도 할까봐 스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말리고 나섰다. 더군다나 당시 꽃꽂이는 부유층의 취미 생활이었고 불교에서는 관심조차 없던 분야였다. 보명스님은 하는 수 없이 아무도 모르게 꽃꽂이 학원을 찾아갔는데, 그곳의 강사와 학생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고, 꽃꽂이를 할 방도를 고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부처님의 육법공양(六法供養)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육법공양은 향·등·꽃·과일·차·쌀 등 여섯 가지 중요한 공양물을 말하는데, 이들 공양물은 각각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 향은 해탈향(解脫香)이라고 해서 해탈을 의미한다. 자신을 태워 주위를 맑게 하므로 희생을 뜻하기도 하고 화합과 공덕을 상징하기도 한다. 등은 반야등(般若燈)이라고 하며, 지혜와 희생 · 광명 · 찬탄을 상징한다. 꽃은 만행화(萬行花)로서 꽃을 피우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견딘다고 해서 수행을 뜻하며, 장엄·찬탄을 상징하기도 한다. 과일은 보리과(菩提果)로 깨달음을 상징한다. 차는 감로다(甘露茶)라고 해서 부처의 법문이 만족스럽고 청량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쌀은 선열미(禪悅米)로서 기쁨과 환희를 상징한다.

동진출가를 한 보명스님은 어릴 때부터 부처님 전에 무엇이든 올리는 것을 좋아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법공양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고사리 같은 어린 손으로 소나무의 마른 잎을 주워 향불을 사르고(해탈향),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 초롱꽃불을 밝히고(반야등), 아름다운 들꽃을 올리고(만행화), 과일 대신 솔방울을 올리고(보리과), 차 대신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을 올리고(감로수), 또 여러 가지 음식 (선열미)도 올렸다. 그 중에서도 꽃을 올릴 때가 가장 좋았다. 꽃을 따다가 부처님께 공양하면 후생에 예쁜 얼굴을 타고난다기에 열심히 꽃을 올렸던 것이다.

스님은 육법공양에 대해 자세히 공부를 한 뒤 큰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이 땅에 반드시 불교 꽃꽂이를 널리 알리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그 결심의 힘으로 학원에서 받는 따가운 시선과 모든 사람들의 걱정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꽃이 주가 되는 법당이 아니라 꽃공양으로 더욱 환희심을 내는 법당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꽃꽂이를 배우면서 본의 아니게 기독교의 예배를 지켜봐야 하는 난감한 경험도 하였지만, 그 모든 어려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라고 스님은 생각한다.

그 후 스님은 혼자 배우는 것에 머물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꽃꽂이를 접하는 기회를 주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88년 창립한 '한국불교연화꽃꽂이회’ 도 그런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스님은 자신이 겪은 수모와 어려움을 후배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후배 양성을 위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늘 욕심을 내었다.

많은 스님들이 천일기도를 하거나 선방에 다니며 수행하는 모습을 보며 수행자로서 마음의 갈등도 많았다. 그래서 한동안 꽃꽂이를 쉬고 기도 정진을 한 적도 있지만 꽃꽂이를 향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고, 결국 다시 꽃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러 스님들이 기도와 참선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듯이 스님 역시 한번 꽃꽂이에 빠지면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스님께서 보명스님을 부르더니 ‘꽃꽂이를 포교의 방법으로 삼고 수행하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부터 스님은 본격적으로 꽃꽂이를 시작하였고, 후배 양성을 위해 삼선승가대학에 나가 꽃꽂이 강의를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작품 전시회를 통해 다른 종교인들에게 불교 꽃꽂이를 선보였으며, 점차 많은 스님들로부터 큰 격려를 받게 되었다. 이후 스님은 불교방송국을 비롯하여 여러 대학과 사찰에 나가 불교 꽃꽂이강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불교비구니꽃꽂이회’를 창립

1990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과를 수료한 스님은 같은 해 '한국 불교비구니꽃꽂이회’ 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한 곳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1990년에서 1997년까지 이화여대에서 최고 꽃꽂이 지도자과정을 새롭게 밟았다. 또한 일본 등 여러 곳에서 개최되는 세미나도 게을리하지 않고 참석하며 늘 공부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지금은 전국에 연화꽃꽂이 지부가 생겨서 꽃꽂이를 통해 포교를 하겠다는 스님의 바람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법당 안의 꽃꽂이는 하루하루 거듭 발전하고 있으며, 단순한 꽃이 아닌 육법 공양의 하나인 공양으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불교 포교의 한 방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예전처럼 단순히 부처님 전에만 올리는 꽃꽂이가 아니라 이제는 응용 꽃꽂이로 발전하여 부케 등 여러 방면에서 불교 꽃꽂이를 응용하고 있으며 많은 대중의 호응을 받고 있다.

불교 꽃꽂이를 위한 마땅한 지침서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스님은 『시방에 꽃비 내리리』는 꽃꽂이 작품집을 출간하였다. 스님은 이 작품집이 불교꽃꽂이가 보다 널리 알려지는 데 공헌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님은 부처님께 수많은 꽃을 올리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시든 꽃을 정리할 때마다 그 안타까움은 더욱 깊어갔고, 꽃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직접 손으로 만드는 수조화였다. 수조화 공양은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아름다운 연꽃을 사시사철 부처님께 올리게 되어 만족스러웠다. 연꽃은 7, 8월이 되어야 비로소 피어나는데, 그 생명력이 짧아 한두 번밖에 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효성이 지극한 심청이도 연꽃 속에서 환생하여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지요. 그렇듯이 저는 부처님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 속히 정진하여 사바세계에서 벗어나 환생하여 대장부의 몸을 받아 무량수(無量壽)를 누리기를 기원하고 있어요.”

스님은 그동안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 아세아 예술상, 재단법인 국제문화협회 특별최고공로상, 서울지방경찰청장 감사패, 한국 불교꽃꽂이회 공로패 등이 그것이다.

보명스님은 한국 불교연화꽃꽂이 연합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 꽃예술작가협회 연화꽃꽂이회 회장, BBS 문화강좌 꽃꽂이 강사, 삼선승가대학 불교전통꽃꽂이 강사로 재직 중이다.

보명스님의 수계제자로는 경륜(經輪)스님이 있다.

보문동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950년(광종 1)혜거(慧居) 국사가 창건하였다. 1047년(문종 1) 오층석탑이 조성되었고, 1314년(충숙왕 1)혜감(慧鑑) 국사만항(萬沆)이 중수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가 중수하였다. 당시 정순왕후는 매일 이 지역에 있는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에 귀양한 단종을 그리워하였다. 1836년(헌종 2) 주지인 비구니 상심(常心)이 진허 인일(震虛 仁一)을 증명법사로 하여 중수하였으며, 1969년에는 주지인 비구니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을 증명법사로 하여 중수하였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관음전·단하각(丹霞閣)이 있으며, 유물로는 1047년에 조성된 오층석탑이 있다. 또한 대웅전 안에는 1863년(철종 14)에 제작된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삼성각 안에는 1874년(고종 11)에 조성된 칠성탱화를 비롯하여 1915년에 조성된 독성탱화와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보명(寶明)스님 본항목 보명스님(寶明, 1954~) 寶明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보명스님(寶明,_195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보명스님(寶明) 보문동미타사탑골문중 ~의 일원이다
보명스님(寶明) 지순스님(芝順) ~의 수계제자이다
보명스님(寶明) 보문동 미타사 ~에서 출가하다
보명스님(寶明) 일타스님(日陀)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보명스님(寶明) 구산스님(九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보명스님(寶明) 보문동 미타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지도

  • 보문동 미타사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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