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보화스님(普和, 1933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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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보화(普和)스님[1]은 은사 스님과 상좌스님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잘 돌보고 수행 정진에 매진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3 충남 서산 출생
1955 예산 보덕사에서 혜선(慧善)스님을 은사로 출가, 사미니계 수지
1960 보덕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2004 수도사 주석
문중 육화(六和)문중
수행지침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인욕(忍辱)
생활신조 효사상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수진(修眞)·청진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귀부(貴富, 8)→용일(龍一, 9)→영우(靈雨, 10)→혜선(慧善, 11)→보화(普華, 12)수진(修眞, 13)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49

보화(普和)스님은 1933년 1월 20일 충남 서산시 인지면에서 아버지 유양흔과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서령이며, 이름은 유춘예이다. 스님은 노스님의 속가 할머니뻘 되시는 대모를 불가의 첫 스승으로 삼고 사촌 형님뻘 되는 분을 보고 발심하였으며, 1955년 보덕사에서 혜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1960년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효도가풍(孝道家風)

스님은 자타가 인정한 효상좌이다. 몸이 약하신 은사스님과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평생을 보냈으며, 은사스님의 사형사제 스님까지 시봉하였다. 보화스님 혼자서 여섯 분을 모시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늘 정성을 다하였다. 어려운 처지에도 불평하지 않고 어른들을 모시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스님의 효행에 대해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보화스님만 효행이 뛰어났던 것이 아니다. 노스님부터 시작해서 보화스님의 상좌들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 노스님인 영우스님을 비롯하여 은사스님인 혜선스님, 보화스님, 또 보화스님의 맏상좌 수진스님까지 효행이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었다. 보화스님은 이 모든 것이 영우스님부터 대물림 되어온 전통이라며 자신의 효행은 노스님이나 은사스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겸손해한다.

효행일화(孝行逸話)

스님이 입산했을 때는 6·25전쟁 직후였다. 전쟁 중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산중에 겨우 골방 하나를 얻어 절이라 이름 붙이고, 그곳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산전을 일궈서 고추밭을 만들어놓은 은사스님을 보고 보화스님은 마음이 매우 아팠다. 그래서 스님은 일꾼을 불러서 땅을 일궈 보리밭을 만들어 보리 두 가마니를 수확하기도 하였다. 그때는 석유 풍로도 없어서 손수 나무를 해서 불을 지펴야 했다. 너무나 어려웠던 시절이라 먹을 물도 제대로 없었고, 숯이 없어서 나무를 해다가 숯을 직접 만들고 장작을 때서 음식을 해 먹어야 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탁발을 하기도 했다. 어른들을 시봉하는데 끼니마다 매양 새로운 음식을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스님은 상좌들에게 사람을 구경해야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그래야만 제대로 중노릇을 할 수 있다며 탁발을 권했다.

스님은 아침마다 죽을 끓였는데, 콩죽, 보리쌀죽, 쌀죽, 팥죽, 완두콩죽, 깨죽 등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 끼니마다 다른 죽을 지어 올렸다. 노스님과 은사스님은 보화스님이 끓인 죽만 드셨다고 한다.

보화스님이 개심사 명월암에 머물 때의 일이다. 노스님인 영우스님이 병환 중이셨고, 보화스님이 맏시봉이었다. 하루는 노스님이 편찮으셔서 모시고 산을 내려왔다가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시 산에 올라가지 못하고 수도사로 가게 되었다. 이때 보화스님은 편찮으신 노스님을 업고 힘들게 먼 길을 걸어갔다. 윤사월 초엿새 날이었다. 보화스님은 정성스레 노스님을 시봉하였고, 노스님은 수도사에서 8월 초나흘에 입적하셨다.

은사스님은 병치레를 많이 하셨다. 해소가 있었고 철이 바뀔 때마다 위경련이 심하셨다. 한번 위경련이 나면 일주일 동안은 아무것도 잡수지 못하고 고생을 하셨으며, 그러다 탈진을 하면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셨다. 보화스님은 그런 스님을 위해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갈 때면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20분 만에 달려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토하기를 수십 번 하셨다. 은사 스님이 토한 것을 치우는 일은 보화스님의 맏상좌인 수진스님이 하였다. 수진스님은 보화스님의 말을 잘 들었고, 시키지 않아도 할 일을 알아서 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모든 면에서 성숙한 상좌였다.

수진스님은 보화스님을 도와 혜선 노스님을 시봉하였다. 수진스님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노스님이 토한 것은 물론 대소변까지 치우며 보화스님을 도와 시봉하였다.

나이 23세에 입산한 보화스님은 강원 문턱에도 가지 못하였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어른스님을 시봉하고 일만 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병든 은사스님을 매정하게 떼놓고 차마 공부하러 갈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반스님들은 '은사스님이 돌아가시면 아는 것도 없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강원에 가서 함께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스님은 그 일로 고민을 많이 했지만, 몸이 아파서 어찌할 줄 모르는 은사스님을 보면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보화스님은 평소 자신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라도 은사스님이 살아계시길 기원했는데, 스님의 기도 때문인지 효행 때문인지 은사스님은 스님이 33세 되던 해에 입적하셨다.

수도암을 수도사로 중창

은사스님이 입적하고 스님에게 물려주신 것은 수도암사를 지은 터였다. 1,000평 정도 되는 땅 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 터는 은사스님의 땅이 아니고 남에게 빌린 것이었다. 그 뒤 스님은 토지세를 물어가면서 절을 지켰다. 이때부터 한 푼 한 푼 모아서 땅을 샀고, 1989년에 현재의 사찰로 중창하고 이름을 수도암에서 수도사로 개칭하였다.

수도사는 관광객을 위하여 길을 확장하여 오가는 사람들이 쉼터처럼 들를 수 있게 해놓았다. 보화스님은 ‘올려 보지 말고 언제나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내려 보라.’고 하신 어른들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다.

자신이 힘든 삶을 살 때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출가승이 안 되었으면 저 사람들보다 더 어렵게 살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제 스님은 상좌들에게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형편을 맞추어서 살라.’고 당부를 한다. 힘든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인 스님이기에 그 말씀이 예사롭지 않다.

보화스님은 부처님 시봉 잘하고, 절집 생활 잘하다가 부처님 옆에서 삶을 마치는 것이 소원이었다. 또한 병든 자에 대한 시봉은 서로 짓고 받는 것이며, 불법에 발을 들여놨으니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고 수행 정진을 잘하다가 삶을 마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수진(修眞)·청진스님이 있다.


서산 수도사

[수도사전경]사진출처:넴이버블로그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ockjung&logNo=221468167147

부석면에 소재한 수도사(주지 수진 스님)는 연암산(4백41m)과 팔봉산(3백62m)에 이어 서산시에서 3번째로 높은 도비산(3백52m)의 입구에 자리한 사찰로 여느 사찰보다 꽃이 많아 보는 이의 마음에 고요함을 찾아주는 사찰로 유명하다.

신라 때 의상대사께서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 서쪽에 부석사를 창건하시고 동쪽엔 동암사 남쪽엔 남대사 북쪽에는 북대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부석사와 동암사(현재 동사) 외에 북대와 남대는 터만 남아있던 중 1900년대 보화스님의 은사인 유혜선 비구니 스님이 취평리 산92번지의 북대사 터에 부석사 요사채를 헐어 옮겨와 수도암이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었으며, 6·25 동란 때 피난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이 터가 너무 협소하여 보화스님께서 300여 미터 산 아래의 현 장소를 확장하고 1987년도에 수진스님이 사찰을 중건하여 수도사라 개칭하였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46~350.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19.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2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보화(普和)스님 본항목 보화스님(普和, 1933~) 普和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보화스님(普和,_1933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보화스님(普和) 육화문중(六和) ~의 일원이다
보화스님(普和) 혜선스님(慧善) ~의 수계제자이다
보화스님(普和) 예산 보덕사 ~에서 출가하다
보화스님(普和)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보화스님(普和) 서산 수도사 ~을(를) 중창하다

지도

  • 수도사(수도암)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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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한국비구니수행담록』은 '普和'로 되어 있으나, 하춘생 저서 『한국의 비구니 문중』은 '普華'로 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