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스님(性觀, 1940生, 비구니)
성관(性觀)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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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성관(性觀) |
법호 | 정현(頂現) |
속명 | 김길자(金吉子) |
출생 | 1940.02.17. |
출가 | 1957년 |
입적 | 2005년 |
사찰 | 봉정암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167-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성관(性觀)스님은 예산 보덕사에서 혜능(慧能)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구기동 봉정암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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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 충남 논산 출생 (만성스님의 조카) |
1957 | 보덕사에서 혜능(慧能)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7 | 예산 보덕사에서 보산(普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1 | 선암사 강원에서 성능스님으로부터 치문수료 |
1964 | 동학사 강원에서 사교수료 |
1970 | 구기동 봉정암 불사 |
1972 | 법주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봉정암 주지 |
1980~1990 | 요사채 불사 |
2004 | 봉정암 주지 |
2005 | 입적 |
문중 | 삼현(三賢)문중 |
생활신조 | 복(福)과 덕(德)과 지혜(智慧)를 갖추며 살자. |
상훈 | 경산 총무원장상 수상(1964)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지웅(智雄)・지범(志梵)・범석(梵石)・지송(志松)・지석(知錫)・지상(智象)・지승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法喜, 8)→혜능(慧能, 9)→성관(性觀, 10)→지웅(智雄, 11), 지범(志梵, 11), 범석(梵石, 11), 지송(志松, 11), 지석(知錫, 11), 지상(智象, 11) |
활동 및 공헌
출생
성관(性觀)스님은 1940년 2월 17일 충남 논산군 채운면에서 아버지 김진표와 어머니 양공순 사이의 3남 4녀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길자이다.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7남매를 키우며 항상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세상이 무상하고 괴롭다는 것과 사람은 언제까지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생각하면서 어머니 곁에서 떠나지 않고 평생 같이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모 만성스님은 성관스님이 어릴 때부터 속가 동생 집에 오래 머물다 가시곤 했다. 지금 생각 해보면 결제 때는 절에서 공부하고 해제 철에는 아이들 데리고 혼자 사는 동생댁을 보호하며 아버지 역할을 하느라고 집에 오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 달 가량 지내시는 동안 방 윗목 장판 한 장에 자리하고 밤낮으로 가부좌를 틀고 공부하면서 가끔 스님의 형제를 모아놓고 무상과 인과(因果), 인연법(因緣法)을 말씀해주셨다. 항상 착하게 살고 어머니께 효도하라고 하시며 하루에 관세음보살을 스물한 번씩 부르고 '옴마니 밧메 훔'을 하라고 간곡히 이르셨다. 오빠 언니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들었지만 스님은 어린 탓인지 졸리기만 하고 나가서 놀고만 싶었다.
속가 언니가 먼저 출가
그런 세월 속에서 스님의 나이 열 살 되던 해부터 만성스님은 매일 같이 '중노릇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며 6년이나 출가를 권하셨다. 그러나 스님은 출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 곁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만 같았다. 만성스님이 오시는 것까지 싫어졌다. 안 간다고 울고불고 하자 바로 위의 언니가 “네가 안 가면 내가 스님 따라 가겠다.”고 말하니 만성스님은 “그럼 네가 가자.” 하며 언니를 데리고 가셨다. 언니는 영리하여 공부를 잘했다고 들었다. 만성스님은 성관스님에게 “이년아, 언제 중이 되어도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때만 늦추고 있느냐!”고 말씀하셨으나 “사바세계 지옥고(地獄苦)도 네 업이니 할 수 없다.” 하며 결국 단념하셨다.
출가
성관스님이 열일곱 살 때 동학사에서 학인스님들을 가르치고 있던 언니스님이 다음과 같은 편지를 하였다. '세속에 살면서 한 가정에 얽매어 살지 말고 큰 스님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세상을 좁게 살지 말고 넓게 살거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고 살아야 하니 꼭 스님이 되길 바란다.’ 스님은 '한 가정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을 넓게 살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보라.'는 말에 갑자기 머리가 어수선해졌다. '내가 시집가서 살면 내 앞에 보이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정말 내가 어리석다. 왜 지금까지 집에 있었을까? 빨리 가서 스님이 되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깊은 산, 물 흐르는 자연 속에서 신선처럼 공부한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그 좋았던 어머니의 품도 다 잊은 채 빨리 가고 싶기만 했다. “어머니, 저 스님이 되겠어요.” 어머니는 불을 때다 부지깽이를 땅에 힘없이 떨어뜨리고 얼마 동안 침묵하더니 간곡히 말씀하셨다. “그래, 네가 갈 길이라면 가거라. 그러나 훌륭한 스님이 되어야 하느니라. 중노릇 하다가 잘못 되면 만성 스님께 누가 된다.”
어제까지 어머니 가슴에 손을 대고 자던 스님은 아침에 어머니가 주신 광목 두 필을 지고 친구 와 같이 언니스님이 있는 동학사로 갔다. 언니스님은 무척 반가워하였으며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동학사에는 백 명이 넘는 대중들이 법당에서 신중기도를 하고 있었다. 스님들이 너무 예쁘고 좋아서 그곳에서 스님이 되겠다고 했더니 이곳은 강원이니 큰스님이 계시는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1957년 음력 8월 10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말사 보덕사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음력 10월 14일에 혜능스님을 은사로 원보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출가하였다. 비구니계는 10년 후 1972년 음력 9월 5일 법주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수지하였다.
보덕사에는 법희 노스님을 비롯하여 30여 명의 대중이 있었다. 당시 주지 수옥스님, 원주 영명스님, 입승 혜연스님 등이 소임을 보셨다. 대중스님들은 선방에서 정진을 하였다. 언니 스님은 애착을 떼려는 듯 은사스님을 정해주고는 새벽같이 가버렸다.
법희 노스님 밑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
온 종일 보아도 노인들만 보이는 이곳이 더 좋은 곳이라고 했으나 스님은 기가 막히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은사 혜능스님이 스님을 데리고 당신의 은사이신 법희 노스님께 가더니 세 번 절을 시키고, 또한 당신도 절을 하고 꿇어앉으셨다. “스님, 저는 공부해야 하니 스님께서 이 아이를 데리고 계시며 가르쳐주십시오." "얘가 만성스님 조카냐? 능 수좌는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성관스님은 그날 밤부터 노스님 밑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노스님은 성관스님을 아랫목에 재우고 윗목 장판 한 장에 가부좌를 하고 밤새 공부를 하셨는데, 만성스님이 집에 와서 하시는 것과 똑같아서 낯설지가 않았다.
다음날부터 노스님과 둘이서 매일 같이 산에 가서 나무를 두 짐씩 했다. 노스님은 항상 말씀 없이 몸소 실천으로 보이셨다. 지게를 지고 몇 번이나 쓰러지는 성관스님을 보고는 웃으며 “그 나이 먹도록 지게도 안 져보았느냐?”고 하셨다. 그 말씀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웃다가 “저는 지게를 안 져보았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함께 웃던 노스님이 좀 쉬자며 자리에 앉더니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처음에는 무엇이든지 어렵지만 오래하면 어려운 것이 없다. 승려는 시주 밥을 먹고 놀면 지옥에 간다. 백장청규인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의 법문을 명심하고, 공부는 따로 편히 앉아서 하려고 하지 말고, 복(福)과 덕(德)과 지혜(智慧)를 같이 닦아야 한다.” 나무를 해가지고 절에 오면 노스님은 배고프지 않도록 누룽지나 떡을 손수 쪄서 새참으로 주셔서 언제나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법희 노스님의 가르침
노스님은 항상 “잘 먹고 잘 살려고 중이 된 것이 아니니 검소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며, 사람 몸 받는 것은 어려운 것이니 놀지 말고, 공부하며 남의 시시비비를 엿보지 말고, 묵묵히 공부하라.”고 하셨으며, 또한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항상 평등하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노스님은 누구의 잘못을 보아도 대중에 선포하는 일이 없으셨고, 누가 노스님께 남의 말을 전하면 오히려 그 사람을 꾸짖으셨다.
법희 노스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히 도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용맹정진 하던 큰방 선객들이 한 소식 얻었다며 노스님을 찾아와서 절을 하고 한마디 할 때면, 즉석에서 주장자로 등을 사정없이 치면서 바르게 이끄시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 그때 노스님의 용안을 보면 눈빛은 불이 나듯 번쩍거렸고, 엄숙한 위엄이 가득 서렸다. 그렇게 노스님은 조용히, 그러나 무섭게 선객들을 다스리며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셨다.
법희 노스님은 매우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에 한눈에 노스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어느 선객이 와서 도인스님을 찾을 때면 “도인스님은 산 너머 수덕사에 계신다.”며 돌려보내곤 하셨다. 법희 노스님은 냉정할 때는 비수와 같고, 부드럽고 자비로울 때는 어린 아이와 같으셨다.
한 때는 동네 사람들이 보덕사에 불이 났다고 세 번이나 올라왔는데 그것은 불이 아니고 노스님이 방에서 방광을 하신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해괴한 일도 다 있다며 허탈한 마음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성관스님은 노스님과 함께 나무를 하고 쉴 때면 대화를 많이 나눴다. 당시 스님은 노스님께 “사철 중 어느 철이 제일 좋으세요?” 하고 여쭌 적이 있었다. “어느 철 좋지 않은 철이 없지만 나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좋다. 부처님께서도 봄이 좋아 봄에 오시지 않으셨느냐?"
노스님이 다시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도 갈 때는 봄에 갈 거다.” 성관스님은 좋아하는 노스님이 가신다는 말씀에 몹시 놀랐다. "스님은 왜 가신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사람은 언젠가는 가는 것이다.” 한참 무상 법문을 하던 스님은 “나는 3월 열흘 쯤 가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일찍부터 예견을 하셨는데 성관스님은 노스님과 헤어진다는 것이 싫어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훗날 도인의 말씀은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것임을 많이 느꼈다.
만성스님의 입적
어느 해인가는 법희 노스님 곁에 있다가 불현듯 만성스님 생각이 나서 대성암을 찾아갔다. 만성스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니 반가워하시며 “하룻밤 같이 자고 가!” 하고 말씀하셨다. “네.” 하고 대답은 했지만 객으로 갔기에 객실에서 묵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인사를 드렸더니 만성스님은 “놀지 말고 공부 잘해라.” 하고 많은 법문을 해주셨다. 그리고 “너와 나는 이것이 끝이니 다음 생에나 만나자.” 하고 웃으셨다. 그때도 어린 성관스님은 그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는데 그 말씀이 바로 도인스님의 예언이셨다. 만성스님은 이틀 후에 입적하셨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성관스님은 이렇게 법희 노스님을 모시고 4년간 시봉하며 보덕사에서 안거를 나며 살았다.
선암사 강원으로 가다.
그리고 스님은 1961년 4월 10일 전남 승주군 쌍암면 선암사 강원으로 갔다. 당시 사찰의 반은 비구니 강원, 나머지 반은 대처승 강원이었다.
주지 자호스님, 총무 법열스님, 재무 무주스님, 조실 겸 대강백이신 성능스님, 강사 명성스님이 계시던 그때 대중 학인들은 대처스님들과 싸우면서 거의 1년을 지냈다. 주지 자호스님은 마음이 너그럽고 대장부 같아서 대중들은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너무나 대범하신 모습으로 대처승들에게도 항상 점잖은 대항을 하셨다. 소임 스님들도 모두 훌륭하셨다. 학인들은 며칠에 한 번씩 대처승들과 큰 싸움을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다 보니 공부는 자연 소홀해졌다. 그렇지만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는 데는 큰스님, 어른스님이 따로 없었다.
스님은 그 속에서 현재 시흥 심원사 주지로 지내는 정오스님과 둘이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를 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되자 7일 동안 자지 않고 밤을 새워 공부를 했다. 그러자 머리가 점점 혼미해져 정신이 없고 글을 외우지도 못하였다. 이를 본 명성스님이 '공부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시며 선암사 북대암으로 가서 잠을 자라고 하였다. 삼 일간 먹지도 않고 죽은 듯이 자고 나니 정신이 들어 큰절로 와서 감사와 죄송한 마음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오랜 싸움 끝에 대처승과의 재판에서 지고 말았다. 60명의 대중은 허탈한 마음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주지 자호스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대중 학인들에게 미안하다 하며 그동안 애썼다고 위로한 뒤 각기 본사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선암사는 대처승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학사 강원으로 가다
1962년 4월 10일 다시 동학사 강원으로 발을 옮겼다. 동학사에는 당시 조실이자 대 강백이신 김경봉 스님을 비롯하여 묘엄스님, 혜성스님, 적조스님 등이 강사로 계셨으며, 주지에 효성스님, 총무 지관스님, 그리고 지현스님, 복민스님, 부산에 계시는 성현스님 등이 계셨다.
동학사 학인시절 때는 절 살림이 어려워 늘 배가 고팠다. 아침 일찍 흰죽 한 그릇을 먹고 사시까지 공부를 하자면 허기가 지곤 했다.
하루는 채공 [1]소임을 사는 반 스님이 빈 바구니를 들고 채마밭에 가는 것을 보고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짓궂은 스님이 ‘떡’이라고 하는 바람에 좋아서 환성을 지르다가 떡이 아닌 것을 알고 다 같이 슬피 울기도 했다. 배가 고플 때면 풀 쑤려고 가져간 밀가루로 수제비를 해먹고 더 심할 때는 김치를 몰래 가져다 먹곤 했다.
한번은 반 스님들이 스님은 둔해서 소리 내서 들킨다.'고 따라오지도 못하게 하기에 '이번에는 잘 가져오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혼자서 밤 12시에 살금살금 후원으로 김치를 가지러 갔다. 동학사에는 사람 키보다 더 큰 항아리에 섞박지 김치를 담아놓고 사다리를 타고 김치를 꺼내 먹었다. 김치가 많은 줄 알았더니 바닥에 있어 김치를 꺼내려다 거꾸로 박혀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결국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때 총무이신 지관스님이 나와 보고 놀라며 사람을 불러 꺼내주셨다. 스님은 죄송해서 말도 하지 못했다. 총무스님은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어찌 네가 이런 짓을 다하느냐?”고 기가 막힌 듯 웃으며 도리어 반 스님들을 꾸짖으셨다.
그 후 반 스님들은 은밀하게 하는 일에는 성관스님을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때 스님은 어른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경봉 조실스님께서는 대중들이 굶지 않도록 항상 여의주수 진언을 하셨다. 80세 되신 경봉 강사스님은 강의를 하면서도 항상 '선(禪)'을 주장하셨으며, 승려는 참선(參禪)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러한 가르침을 그대로 받은 묘엄 강사스님도 조실스님 열반 후에 계속 선을 중요시하며 강의를 하셨다.
묘엄스님은 언제 보아도 스님 냄새가 물신 풍겼다. 성관스님은 묘엄스님의 묵묵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속이 빈틈없는 엄숙함을 배우려고 언제나 노력했다.
항시 중노릇함에 행(行)을 가르쳤고, 승려는 아는 것이 너무 많아도 못쓴다며 경(經)을 배우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노정기(路程記)라고 하셨다. 그리고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하며, 배를 타고 목적지에 갔으면 배는 버려야 한다며 누누이 선을 권하셨다. 법희 노스님이 하신 말씀과 너무 동일한 가르침이었다.
1964년 손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계실 때 동학사 학인 90명 가운데 품행이 단정하다고 인정되어 성관스님이 상을 타게 되었는데, 당시 총무원장 스님이 직접 오셔서 상을 주는 영광을 맞기도 했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은사스님은 매우 좋아하셨다. 그리고 1966년 은사스님을 모시고 살며 사교를 졸업하였다.
서울 봉정암 불사를 시작
항상 편찮으신 은사스님을 모시고 보타사에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들고 궁색하여 한번은 서울로 모실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펄쩍 뛰며 “승려가 잘 먹고 잘 살려고 서울로 가느냐!”고 몇 차례 꾸중을 하셨지만, 병원 치료 때문에 뜻을 어기게 되었다. '더 이상은 중노릇을 못 하겠다.” 고 꾀를 부렸던 것이다.
1970년 음력 2월 칼바람을 맞으며 절터를 찾아서 이곳저곳을 헤매다 종로구 구기동, 지금의 세검정에 오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첩첩산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너무나 험하고 심난하여 수덕사 혜암 노스님과 천안 광덕사 지산스님 두 분을 모시고 터를 보여 드렸더니 '너무 좋은 절터다.’ 하시며 “공부하면 도인이 날 것이고, 기도하면 성취하며, 부자로 살 생각 말고 정진하여 훌륭한 불도량으로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봉정암' 이라는 절 이름까지 미리 지어주셨다.
은사스님의 논 다섯 마지기를 파니 그때 돈으로 60만원을 받았는데 절터의 땅값도 60만원이었다. 그때부터 신도의 반연도 없는 곳에 땅을 사서 어렵게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관스님은 여의치 못한 형편에 신도 하나 없이 시골 절을 뜯어다 서울로 옮겨 법당겸 요사채 한 채를 짓고 부처님을 모셨다. 부엌도 없이 법당 추녀 끝에 부엌을 임시로 만들어서 이리저리 옮기며 2년 정도 살았다.
불사를 하는 동안 했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스님은 모든 것이 부처님 의 일이라 생각하고 부처님께 맡겼다. 한번은 어렵사리 요사 채를 짓는 도중 설상가상으로 장마에 축대가 무너져 마당 끝에 있던 부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당장 밥 떠먹을 수저 조차도 없는 지경에 이른 적도 있었다. 도량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은사스님은 성관스님에게 주지를 임명하고 수덕사 견성암과 인천 용화사로 운수납자의 길을 떠나셨다.
은사 혜능스님의 입적
1975년 초봄부터 은사스님은 병이 악화되기 시작하셨다. 그해 음력 11월 21일, 동짓날이라서 매우 바쁜 와중에 은사스님이 성관스님을 부르시더니 “내가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수덕사로 가자.”고 하셨다. 스님께서는 평소 수덕사 견성암에서 입적하겠다는 말씀을 해오셨다.
현재 승가사 주지이신 상륜스님께서 차를 주선해 허둥지둥 눈보라 속에 길을 떠났다. 혹시라도 차에서 입적하실까봐 애를 태웠는데 스님은 끝까지 참아주셨다. 성관스님은 그 가슴 아린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밤 아홉시에 견성암에 도착하여 견성암 대중스님들과 수덕사 방장이신 원담 큰스님이 은사스님의 손을 잡고 “잘 오셨어요. 편한 마음으로 화두 챙기고 가세요.” 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뜨고 대중들을 이리저리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사바의 인연을 다하셨다.
계속되는 가람수호
스님만을 의지하고 지내던 때라 은사스님이 계시지 않는 빈자리는 너무도 크고 힘겨웠다. 그리고 은사스님이 고맙고 그리웠다. 그 후 스님은 은사스님이 인연 지어 준 상좌 하나와 사제들을 데리고 여의치 못한 가람 수호에 한 해 한 해 불사를 하며 살았다.
지형이 험악하고 장소가 좁아서 마당 확보와 올라오는 계단을 만드는 게 문제였다. 금생에 부처님 도량 하나 만드는 것을 원력으로 삼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욕심도 탐심도 애착도 모두 다 끊어지기를 기도하며 불사에 전념하였다. 지난 세월 속에 두 명의 도반이 고락을 같이 해 왔는데 한 명은 시흥 심원사 주지 정오스님이고, 한 명은 속리산 수정암에 있는 일륜스님이다. 한 분은 행자 때, 또 한 분은 학인 때 인연을 맺어서 오늘날까지 서로 좋은 도반으로서 함께 탁마하고 있다.
봉정암은 은사스님에서부터 성관스님에 이르기까지 어렵게 이루어놓은 부처님 도량이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이 도량은 큰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혜암 큰스님의 말씀을 잊지 말고 좋은 도량에서 많은 대중이 모여 화합하며 신심을 키우고, 탐(食)·진(眞)·치(癡) 삼독(三毒)을 다 버리고, 일 시도 헛되이 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어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회향할 수 있도록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 (下化衆生)의 법도량(法道場)으로 가꿔라.” 하고 당부한다.
부처님과 법희 노스님, 그리고 은사스님이신 혜능스님께 부끄럽지 않은 불도량으로 거듭나기를 발원하던 스님은 봉정암에서 2005년 입적했다.
수계제자로는 지웅(智雄)・지범(志梵)・범석(梵石)・지송(志松)・지석(知錫)・지상(智象)・지승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509~52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60.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89, 391, 396.
- 법보신문, 세계일보, 도심속 산사]①서울 구기동 봉정암 https://www.segye.com/newsView/20070801001892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hilyounglee&logNo=220547358958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venuslv&logNo=1001130444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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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性觀)스님 | 본항목 | 성관스님(性觀, 1940~) | 性觀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관스님(性觀,_1940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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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스님(性觀) | 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 |
성관스님(性觀) | 혜능스님(慧能) | ~의 수계제자이다 | |
성관스님(性觀) | 예산 보덕사 | ~에서 출가하다 | |
성관스님(性觀) | 보산스님(普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성관스님(性觀) | 석암스님(昔巖)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성관스님(性觀) | 서울 봉정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성관스님(性觀) | 서울 봉정암 | ~을(를) 창건하다 |
지도
- 봉정암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1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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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반찬을 만드는 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