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원(喜圓)스님은 1951년 7월 4일 충북 충주시 봉방동에서 아버지 김승모와 어머니 경장호 사이의 2남 6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이름은 김정숙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맹장수술을 했더니 복막염에 걸리고, 복막염이 낫고 나니 또 다른 병이 줄줄이 생겼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탓에 혹독한 고통을 받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두루 실행해 보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었다.
스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북 음성 미타사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5일쯤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비구스님에게 불경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몸이 점차 좋아졌다. 기도 가피를 경험한 스님은 발심하여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출가하였다.
스님은 1967년 명안(明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68년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하였으며, 1974년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하였다.
백일기도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다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삭발염의를 했지만 병고는 떠날 줄 모르고 여전히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백일기도가 한 차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거듭하였다. 강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기도가 곧 스님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이룬다.’는 말씀을 수행지침으로 삼고, 아무리 몸이 아파 고통을 받더라도 평생 부처님 곁에서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
동학사 강원에 입학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한 희원스님은 잦은 병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강원 생활을 마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포기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병마에 시달리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던 시절 스님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
“저를 살려주면 부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 후 미타사를 떠나지 않고 은사스님을 늘 곁에서 그림자처럼 시봉하고 있는 희원스님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 있다.
은사이신 명안스님
스님의 은사이신 명안스님은 평생 동안 아픈 사람들을 거둬 보살피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희원스님 또한 은사스님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은사스님을 은사이기 이전에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희원스님은 1978년 도로 불사를 시작으로 1979년 미타사 법당 불사와 1980년 미타사 선원 불사를 하였다.
1981년부터 세등선원, 내원암 등에서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복지사업에 전력을 쏟고 있다. 납골 공원을 조성하는 데에는 법인이 아닌 사설로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법인으로 허가를 받으면 정부 보조가 있어 수월하지만, 사설로 허가받은 까닭은 자금 운용을 부처님 법에 맞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납골당 운영의 수익금으로 스님들의 복지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앞으로 이곳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대다수 스님들의 불확실한 노후에 대비하여 스님들을 위한 무료 양로원을 설립하고 선원을 운영하는 기반으로 쓰일 것이며, 또한 신도들을 위한 복지사업에도 일조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납골당 내에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을 조성·봉안하였다. 2012년에는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39개의 병실과 151개의 병상을 갖춘 밝은언덕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으며, 2016년에는 문중의 역대 대표적 비구니 선사인 만성스님, 현행스님, 명안스님을 기리어 부도탑을 조성하였고, 2020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의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되었다.
수계제자로 효섭(曉燮)·법농(法農)·원상(元常)·효찬(曉燦)·동화(東樺)·보선(菩禪)스님 등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에는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한 차례 중수하고, 고종 때 이원식 비구니가 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에는 유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원효대사의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유룡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중창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라에서 호국도량으로 크게 중수하여 주었으나 영조 18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찰을 1965년 비구니 명안선사가 운수행각 중 발견하고 대원을 세워 불사를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음성군 네이버 블로그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참고자료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05~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