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스님(性坦, 1911生, 비구니)
성탄(性坦)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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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성탄(性坦) |
법호 | |
속명 | 한복남 |
출생 | 1911.04.13. |
출가 | 1915년 |
입적 | 2007.06.30. (세수 97세, 법랍 92세) |
사찰 | 백련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23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성탄(性坦)스님은 어산에 뛰어 났으며 어산학교원장을 지냈고 강화 백련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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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 경기도 강화 출생 |
1915 | 강화 청련사에서 정업스님을 은사로 가족출가 |
1917 | 강화 보문사에서 보련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19 | 서당에서 한문 수학 |
1920 | 어산 전수 |
1928 | 전등사에서 일륜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29 | 수덕사 견성암 등에서 안거 성만 |
1950 | 강화 백련사 주지 취임, 백련사 증축, 개축 |
1984 | 어산학원장 취임 |
2004 | 백련사에서 15년째 6경신일 철야정진 |
2007.6.30. | 백련사에서 입적 |
문중 | 백련사문중(白蓮寺) |
수행지침 |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
생활신조 | 모든 것이 수행이니 물 흐르는 대로 하라. |
수계제자 | 혜명(慧明)・진민(眞旻, 입적)・혜성(慧星)・혜일・혜주(慧珠)・혜중(慧重) |
활동 및 공헌
출가
성탄(性坦)스님은 1911년 4월 13일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에서 부친 한중오와 모친 황씨 사이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이름은 한복남이다. 스님이 5세 되던 해인 1915년, 절에서 언니를 데리러 왔는데 언니는 숨어버리고 스님이 대신 절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성탄스님은 1915년 국화리에 있는 청련사에사 정업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되었다.
온가족이 출가
그러나 나중에 언니 역시 출가하여 봉련스님이 되었고, 두 딸을 모두 출가시킨 후 스님의 어머님도 일곱 살 난 남동생을 데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셨다. 어머님은 출가하여 선각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수행하다 입적하였으며, 남동생 역시 법용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수행하던 중에 병을 얻어 일찍 입적했다. 이렇듯 스님의 집안은 깊은 불연에 닿아 있었다. 스님은 출가한 다음 해인 6살 때부터 법당에서 불공(당시는 정월 불공을 한 집씩 따로 해 주었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코흘리개 어린 나이에 잠이 무척이나 많았던 터라 불공하다가 졸았던 적도 많았다. 어느 때는 불공을 하다가 스님이 조는 바람에 신도 혼자서 절하기도 하였다. 1917년 보문사에서 사미니계를 수계한 스님은 2년 뒤인 9세 때부터 서당에 나가 독선생을 두고 경전공부를 위한 한문을 수학하였다.
어산을 전수 받음
1920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보월 선조스님(윤상오스님)으로부터 어산을 전수 받았는데 그 실력이 매우 뛰어나서 신도들과 스님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이후 수행 정진하는 생활을 계속하던 중 세수 18세 때인 1928년 강화 전등사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하고, 그 다음 해인 19세부터 수덕사 견성암 등 많은 선방을 찾아 참선수행을 하였다.
견성암에서 수행
수덕사 견성암은 원래 정혜사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목조건물이었는데, 만공스님께서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정진을 위한 도량으로 중창해 놓으신 것이었다. 그런데 남녀 차별이 심했던 비구스님들이 자신들이 머무는 수덕사보다 비구니 절이 더 높은 곳에 있는게 옳지 않다고 여겨 해체하였다. 후에 수덕사의 아래쪽에 석조 건물로 지어진 것이 지금의 견성암이다. 스님은 동일한 수행자로서 비구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내생에는 비구로 태어나야겠다며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백련사로 돌아오다.
수덕사에서 청수암으로 옮겨와 기도와 참선을 하며 지내던 중 청수암 봉법스님이 입적하셔서 정성껏 모신 후에 가람을 수호하며 살게 되었다.
어느 날 백련사 비구 스님이 청수암에 와서 말하였다. “백련사가 선방이지, 청수암에서 무슨 공부가 되냐?” 이에 스님이 되물었다. “백련사가 아무리 좋아도 그 선방을 나에게 주겠소?” “달라면 주지요.”
의외의 대답에 스님은 ‘이왕 선방을 시작하며 살 것이면 백련사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백련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때가 스님의 세수 40세 되던 해인 1950년으로 이때부터 스님은 백련사의 주지 소임을 맡아 살게 되었다.
당시의 백련사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낡은 사찰이었다. 그럭저럭 살림을 살면서 정진을 할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중에는 제 때에 끼니 잇기도 어려워 고구마에 밥 몇 알을 넣어 죽을 끓여 먹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다가, 그마저도 어려워지자 하는 수없이 거처를 보덕사로 옮겼다. 보덕사에 가서 1년여 생활하다가 다시 백련사로 돌아온 스님은 중·개축의 불사를 거듭하여 현재의 백련사의 도량을 갖추었다.
스님은 내가 속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내외를 구분함이 없이 청정도량 가꾸기에 열심히 매진하였다. 전쟁 이후 보덕사에 잠시 머물 동안에도 불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대외적인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정화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였으며, 많은 비구니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백련사의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기 위하여 스님은 손수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13년 간 손수 베틀에 앉아 짠 인조나 무명을 팔아서 생활에 보태었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실천한 것이다.
스님은 어산을 배웠기 때문에 목소리가 트여있고 중엄하며 매우 듣기에 좋아 한때는 운문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스님이 도량 내를 포행하다 보니 스피커에서 좋은 소리가 들려와 옆에 있던 스님에게 “누구의 목소리가 저렇게 좋대요?”하고 물었다. 그랬더니“바로 스님이 하신 거예요.”라고 했다고 할 하니, 자신도 못 알아들을 만큼 어산에 뛰어났던 것이다.
1984년 세수 74세 되던 해에는 조계종 총무원 지원으로 어산 학원을 운영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나, 지금은 어산을 배우려는 사람이 극히 드문 실정이기 때문에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스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한때 자료로 남기고자 후학들이 스님께 간청도 드려 보았지만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가는 것이 도리라면서 녹음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시간이 지난 후에는 녹음을 하기엔 목소리가 많이 변하였으며 이제는 노쇠하여 어산을 이을 기력이 없는 형편이다.
어산을 함께 배우던 도반스님들은 모두 재가(在家)로 나갔고, 유일한 제자로는 수덕사 선수암에 있는 세창스님이 있다. 스님은 여가 시간에 붓글씨를 쓰는데, 주로 반야심경의 구절구절을 적으며 마음에 기리고 있다. 스님은 좋은 종이는 아끼두고 음료상자나 버려지는 종이에 쓸 만큼 절약정신이 강하다.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무견불청송허세(無見不聽送虛世) 거처래기하처(去處來處其何處)”
일생동안 본 것 없고 들은 것 없이 허송세월을 보냈으니 가는 곳과 오는 곳이 그 어드메더냐
이처럼 좋은 말씀도 모아둔 종이 조각에 적어 후학들에게 보여주곤 한다. 스님의 절약 정신은 가지고 있는 손수건을 보면 더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손수건이 헤지면 바늘로 꿰매 써서 손수건의 본바탕은 거의 없고 꿰맨 실만 서로 엉키어 있을 정도인데도 그 손수건을 보배인 듯 손에 쥐고 있다.
백련사 은행나무
백련사 대웅전 뜰 앞에는 스님과 오랜 세월 동고동락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1951년 스님 나이 41세에 그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그땐 나뭇가지가 모두 3개였다. 신기하게도 가운데 가지를 잘라버리자 두 가지가 합해져서 한 나무인 것처럼 자라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좋은 나무에서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
그 이유인 즉 백련사에는 옛날에 도인이던 추송스님이 살고 계셨는데, 당시 전등사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무척이나 잘 열리니 나라에서 해마다 은행이 부족하면 다른 곳에서 구해서라도 반드시 열섬을 채워 올리라고 하명을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전등사의 스님 한 분이 추송스님을 찾아와 나라에 진상할 은행을 지키느라 공부는 물론이요, 절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즉시 추송스님이 은행나무 아래 앉아서 진언을 몇 독하셨다. 그 이듬 해부터 백련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져 건간한 나무임에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학들의 원만한 수행을 바란 노스님의 자비로움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하다.
또한 신기하게도 은행이 안 열리는 나무에서는 꽃을 보기가 힘든데, 해마다 5월이면 백련사 뜨락에 서있는 은행나무 가지마다 꽃이 만발한다고 하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입적
2007년 6월30일 백련사에서 입적하였다.
수계제자로는 혜명(慧明)·진민(眞旻, 입적)·혜성(慧星)·혜일(입적)·혜주(慧珠)·혜중(慧重)스님 등이 있다.
강화 백련사
고구려 장수왕 4년 병진년(416) 고려산을 답사하던 천축조사가 이 산 상봉 오련지(다섯개의 연못)에 오색 연꽃이 산란히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오색연꽃을 채취하여 공중에 날려 그 연꽃들이 떨어진 곳마다 가람을 세웠는데 바로 이곳이 그 중 백련이 낙하한 곳이다.
조선 순조 6년 병인년(1806) 8월에 서산대사 제6세손 천봉후인 의해당 처활대사의 사리비와 부도탑이 건립 되었고, 조선 고종 광무9년(1905) 을미년 봄에 인암 화상이 차후 빅보월로 본 가람을 중건케 하고 1967년 정미년 봄에 비구니 한성탄이 극락전과 삼성각을 중수 하였다.
1983년 비구니 한성탄이 도로 불사와 1986년에 범종을 조성하였으며, 철불 아미타불 좌상이 보물994호로 1989년에 지정되었다. 2006년~2007년에 걸쳐 개축되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이 본 가람에 한 때 봉인되었다 한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58~164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9.
- MBC 다큐, 대자유인한국인 비구니(대구 부인사의 성타스님, 부산 옥련선원의 현진스님, 백련사 성탄스님, 흥륜사 혜해스님) http://www.imbc.com/broad/tv/culture/spdocu/bodo/bodoinfo/1413270_4808.html
- MBC 뉴스, 1600년 불교사에 탁월한 수행.업적을 소리없이 일궈온 비구니 https://imnews.imbc.com/replay/2004/nwdesk/article/1953884_30775.html
- 조선일보, 생활속의 '한국적 불교' 되짚어 본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5/23/2004052370218.html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dukinbong/140041535448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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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性坦)스님 | 본항목 | 성탄스님(性坦, 1911~2007) | 性坦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탄스님(性坦,_1911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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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性坦)스님 | 백련사문중(白蓮寺) | ~의 일원이다 | |
성탄(性坦)스님 | 정업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성탄(性坦)스님 | 강화 청련사 | ~에서 출가하다 | |
성탄(性坦)스님 | 보련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성탄(性坦)스님 | 일륜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성탄(性坦)스님 | 강화 백련사 | ~을(를) 중창하다 | |
성탄(性坦)스님 | 강화 백련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성탄(性坦)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 등 |
지도
- 백련사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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