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찬(賢讚)스님은 1934년 11월 15일 충남 홍성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강이며, 이름은 채정애이다.
어린 시절 스님은 수력발전소에 근무하셨던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이사를 자주 다녔다. 홍성 제일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스님의 나이 18세쯤 되었을 무렵 할머니는 보덕사에서 100일 기도를 시작하면서 스님을 데리고 다녔다. 이때 스님은 보덕사에서 있던 자신과 같은 또래의 스님들을 보며 선녀와 같다는 생각을 했고, 이에 입산을 결심하였다.
출가동기
이듬해에 보덕사로 출가를 단행하였지만 부모님이 데리러 와서 하는 수 없이 다시 속가로 내려갔다. 그러나 절 생활을 경험한 뒤라 그곳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고 속가에서의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스님은 20세 되던 해 동짓달에 몰래 집을 나와 견성암으로 출가하였다. 1953년의 일이었다.
견성암의 상노스님은 개심사에서 원주 소임을 보고 있던 수업스님의 문하에 상좌가 없음을 걱정하시다가 현찬스님에게 수업스님의 상좌가 될 것을 권하였다.
교육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1년 정도 상노스님을 시봉하고 이듬해 은사스님이신 수업스님이 계신 개심사에서 서장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25세에 이르러 은사스님과 함께 다시 견성암으로 오게 되었다. 그 뒤 스님은 수덕사에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그림입니다. 견성암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p276
용맹정진
스님은 견성암에 온 뒤 원주와 별좌 등의 소임을 살면서 상노스님과 은사스님을 극진히 시봉하였고, 공부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당시 큰방에서 어른스님들과 함께 앉아 참선 정진을 하였는데, 곁에서 직접 어른스님들이 열심히 정진하시는 모습을 보고나자 더욱더 신심이 났다. 그리고 반드시 대오각성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다졌다.
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을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근원을 꿰뚫어 볼지니
모든 것이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
하루는 그런 어른스님들의 모습을 본받고자 젊은 스님들이 의기투합하여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하기로 약속을 했다. 방선 후에는 어른스님들이 큰방에서 함께 주무시므로 갓방에 모여 미닫이문을 닫아놓고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혼침과 도둑
그렇게 피나는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도량석을 시작으로 예불과 낮 시간의 울력 등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저녁 용맹정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따뜻한 방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스님들은 그만 모두 혼침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님들이 모두 깊이 잠든 사이에 실상실에 도둑이 들어 고스란히 털리고 말았다. 노스님들께선 “저것들이 밤새워 정진한다고 하더니 도둑이 든 것도 모르고 자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지켰다.”며 걱정을 하고 야단을 치셨다.
마침 도둑이 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오신 벽초 노스님께서는 “너희들이 정진을 참 잘했구나. 도둑이 오는 줄도 모르고 정진을 했으니 곧 앞산에 광명 놓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40안거 성만 수행
당시에는 노스님의 걱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정진을 잘 하려면 도둑놈도 몰라볼 정도로 해야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젊은 현찬스님의 천진한 마음과 구도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스님은 대성암, 불영사, 봉현선원, 견성암 등에서 무려 40안거를 성만하였다.
상노스님 노스님 은사스님을 58년 시봉, 인욕 정진하며 용서하는 삶
현찬스님은 상노스님을 비롯하여 노스님과 은사스님에 이르기까지 장장 58년 동안 시봉을 하며 살았다. 광목 빨래에 숯물을 들여서 사흘 밤낮을 두들겨 정성껏 매만지고 손질을 하여 갖다 드리면 어른스님들은 풀이 좀 세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가차 없이 물에 다시 집어 넣어버리곤 했다.
그래도 화를 내거나 거역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다시 처음부터 손질하여 갖다 드렸을 정도로 매사에 순종적이었다. 효심이 대단했던 그 시절을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뿐이라고 한다.
후배들에게 '항상 인욕하며,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남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 것'을 당부하다.
견성암에서 재무, 입승, 도감 소임 역임
현찬스님은 출가한 다음해에 은사스님을 따라 개심사에 일 년 동안 있었던 것과 안거철을 빼고는 출가 이후 오늘날까지 견성암에서 지내고 있으며, 1977년 재무 소임과 1981년 입승 소임, 1993년에는 도감을 역임하였다.
뛰어난 바느질 솜씨
현찬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 누비옷이나 다른 옷들도 모두 손수 만들어 입었으며, 지금도 꼼꼼한 바느질 솜씨로 사미니스님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주곤 한다.
입적
현찬스님은 2009년 11월까지 견성암 선원장으로 후학들을 지도했으며 2009년 12월 29일 새벽 5시 견성암에서 원적. 세수 77세, 법랍 55년
수계제자인 운여(雲如)·우진·탄민(呑珉)·청운(靑雲)·진영·지견스님 등이 스님의 가풍을 잇고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15e071e7.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00pixel, 세로 572pixel
사진출처 : 네이버 불로그 “현찬스님 다비식”
참고자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274~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