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스님(大英, 1903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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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태주(田太柱) 스님을 은사로 | ||
===수행=== | ===수행=== |
2023년 5월 8일 (월) 09:34 판
대영(大英)스님 | |
---|---|
법명 | 대영(大英) |
법호 | 무위(無爲) |
속명 | 이계순(李桂順) |
출생 | 1903.07.16. |
출가 | 1921년 |
입적 | 1985.01.27. (세수83세, 법랍65세) |
사찰 | 수덕사 견성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대영(大英)스님은 후학들으로부터 근,현대기 인욕과 정진보살의 화현으로 추앙받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03 | 경기도 수원 출생 |
1921 | 속초 신흥사에서 태주(太柱)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22 |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22~1985 | 참선수행,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2회 존증아사리) |
1937 | 금강산 법기암, 묘향산, 오대산, 설악산, 태백산, 지리산 등 20여년간 안거 |
1940 | 한암스님으로부터 법호‘무위(無爲)’를 받음. 만공스님으로부터 주장자를 하사 받음 |
1985.1.27. | 견성암에서 입적(세수 83세, 법납 64세)(깨달음의 꽃과 한국비구니의 수행과 삶2에서는 입적 장소가 경남 양산 관음정사로 나온다.) |
문중 | 육화문중(六和) |
수행지침 | 증지내시이고조일게(贈之乃是以古祖一偈) 무상열반만물통(無上涅槃萬物通) 불리분별간중(不離分別世間中) 어분별처무분상(於分別處無分想) 장단청황선고풍(長短靑黃扇古風) |
수계제자 | 정원(正源)・쾌성(快性)・탄성(呑性)・정덕(正德) |
활동 및 공헌
출생
수원 한 산골에 자손이 없어 늘 근심스런 부부가 살았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나 큰 근심 없이 농사 절기에는 논에 나가고 틈이 나면 산에 가서 나무하는, 자연에 따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루는 이 농부가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목이 없는 돌부처님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나무지게를 내려놓고 주위에서 목을 찾아 바로 맞추어 놓고 그 앞에서 자손을 빌었다. 그 뒤 산기가 있어 1903년 계묘년 7월 16일 한 따님을 낳아 그 이름을 이계순이라 하고, 돌부처님께서 점지한 아이라고 귀히 여겼다.
특이한 것은 갓 태어난 아이의 머리가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에 부부는 아이가 돌부처의 현신이라고 믿고 정성껏 길렀다. 계순은 자라면서도 항상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출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나는 아이였지만 꼬마 계순이는 항상 산이 좋고 그립다고 습관처럼 되뇌었다. 그 후 나이 19세에 전태주(田太柱) 스님을 은사로 설악산 신흥사 말사로 출가하였다. 출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영스님은 은사 태주 스님을 따라 마곡사로 수행처를 옮겼다. 만공스님이 1916년 수덕사 견성암에 최초의 비구니선원을 세웠다. 이에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수덕사 견성암으로 찾아와 만공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구도의 열정이 가득했던 대영스님은 수행처를 마곡사에서 견성암으로 옮기고 만공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수행
35세에 금강산 신계사에서 수선안거를 한 이래 묘향,산 오대산, 설악산, 태백산, 지리산 등의 명산대찰에서 주장자에 의지하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도모하였다. 대영스님의 상좌스님은 여일하게 벽을 대하고 있는 모습이 적적한 산수 간에 청산처럼 청청하고 올연하였다고 전한다. 운수행각을 하시면서 수덕사 견성암과 서울 청룡사에서 각각 10년을 입승으로 있는 동안 후학을 돌봄에도 ‘근기에 따라 선(禪)하라, 기도하라, 참회하라.’이르는 수순자비를 베풀었다.
만공 노스님께 호를 받다.
이에 만공 노스님께서는 혜일관대천(慧日光大千)이라 하시면서 ‘혜일(慧日)’이라 호(號)하시고, 한암(漢岩) 노스님께서는 ‘불(佛)이란 깨달음이니 마음을 보고 마음인 줄 알고 깨달은 것이 불(佛)이며, 그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미(迷)한 것은 중생(衆生)이다, 모든 유위법은 몽환과 같음이요, 깨닫는 법(法)은 무위(無爲)에 있다.’하여, ‘무위(無爲)라 호(號)하시고 한 게송(偈頌)을 주셨다.
증지잉시이고조(贈之仍示以古祖) 일갈(一喝)
무상열반만물통(無上涅槃萬物通)
불리분별세간중(不離分別世間中)
어분별처무분상(於分別處無分想)
장단청황선고풍(長短靑黃扇古風)
무상열반은 만물에 통하나니
세간 중(中)을 여의지 아니 했더라.
저 분별하는 곳에 분별상이 없으면
길고 짧고 푸르고 누른 것이 옛 가풍을 떨치노라.
인욕보살행
스님은 입산한 뒤로는 불연세속을 곧 출가라 하시며 노모님 때문에 꼭 한번 고향에 들렸을 뿐이며 친척의 왕래를 금하고 일체 세속연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님의 세연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십년의 세월, 동안 연세 많으신 노스님 세분의 병 수발을 연이어 하였는데, 눈 내리고 비 오는 날 태산준령을 넘어 탁발하여 시봉하면서 한 번도 진심 내는 일이 없었고 상 없이 묵묵하셔서 대중이 인욕보살님이라 칭했다. 매사에 인욕과 하심으로 일관한 자세는 제1회 수계증사로 추대되었을 때 극구 사양하시 겸손한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 때 논 몇 마지기가 당신 앞으로 있었는데, 어느 여름 장마로 인해 떠내려갔다고 소작인이 와서 전했다. 이 말을 듣고는 “그러냐?”하며 다시는 찾을 생각을 하지 않으며 탈속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님은 물(物)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적
스님이 만년에 주석한 사찰은 경남 양산시 웅상읍의 조그마한 암자인 관음정사이다. 1985년 정월 이십칠일 저녁, 스님은 깨끗이 씻으시고 밤 9시까지 하실 말씀을 다한 뒤에 “나 오늘 일찍 잘란다.”하며 방에 들어간 것이 입적 직전의 모습이었다. 스님의 세수 83세, 법랍 65세였다. 상좌스님들이 그 유품을 정리하면서 범정(梵情)을 다한 자리에 의연한, 찬물같이 맑은 성품의 노스님을 다시 보았다 한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정원(正源)·쾌성(快性)·탄성(呑性)·정덕(正德)스님 등이 있다.
※ 운문회보 발취 불기 2530년 (1986년 4월 15일) 제 16호
수덕사 견성암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회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회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척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88~191.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63.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2』, 예문서원 2009년, pp.35~51.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225.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141~153.
- 법보신문, 106 대영 스님(1903-1985)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57
- 불교저널, (3) 대영스님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904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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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大英)스님 | 본항목 | 대영스님(大英, 1951~2014) | 大英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대영스님(大英,_1903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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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大英)스님 | 육화문중(六和) | ~의 일원이다 | |
대영(大英)스님 | 태주(太柱)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대영(大英)스님 | 속초 신흥사 | ~에서 출가하다 | |
대영(大英)스님 | 만공(滿空)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대영(大英)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고성(고산) 신계사 법기암(금강산), 묘향산, 오대산, 설악산, 태백산, 지리산 등 |
대영(大英)스님 | 구족계단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2회 존증아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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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주석